소설리스트

57화 (57/101)

동국정책연구서(東國政策硏究書)

1792년 6월 15일 창덕궁(昌德宮) 선정전(宣政殿).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에는 지금 모든 신료들이 들어 있었다.

정월에 내린 정조의 특명으로 의금부(義禁府) 판사(判事) 김이소(金履素)를 제조(提調)로 하여 진행한, 조선의 녹봉에 관한 문제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날이다.

편전에는 좌의정 체재공과 우의정 박종악을 영중추부사 김종수를 비롯한 대소 신료들이 보고를 듣기 위해 조회에 참석해 있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대전 내관의 목소리가 들리자 신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자 정조가 들어왔고 정조가 좌정을 하자 신하들이 군신의 예를 표하였다.

군신의 예를 받은 정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 정월 과인이 의판(義判)에게 명하여 조선의 아전들 문제와 조정 신료들의 녹봉 문제를 연구하라는 과제를 준 적이 있소. 오늘 그 결과를 발표한다고 하니 의판이 말해보시오. 그래 어떤 결론에 도달하였소?”

그러자 지목을 당한 김이소가 한 권의 책자를 정조에게 바쳤다. 재목은 ‘동국정책연구서(東國政策硏究書)’로 되어 있었다.

정조가 책장을 넘기자 김이소가 자신의 앞에 있는 또 한 권의 책자를 보며 말을 했다.

“지난 정월 전하의 하교를 받아 신과 각 부서에서 선정된 수십 명의 신하들이 그동안 연구한 것을 모아서 만든 연구서이옵니다.”

김이소가 올린 연구서의 내용은 일전에 북한산성에서 최성용과 논의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였다.

관리들에게 지급하는 녹봉도 급여로 바꾸자는 의견과 품계별 급여도 하후상박의 원칙에 입각하여 너무나 잘 만들어져 있었다.

흡사 이들이 북한산성의 회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연구서였다.

다만 이들도 자신처럼 녹봉을 급여로 지급하는 문제에 있어 화폐유통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이 사안을 화폐 주조에 필요한 구리의 수급을 해결하고 난 후 시행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아전들의 임명에 대해서도 그 자질 문제를 확인할 수 있는 장치로 잡과(雜科)와 같은 별시를 치르자고 덧붙였다.

여기에 더하여 앞으로 화폐로 모든 급여가 나가면 그 화폐의 보관 문제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지금 여의도에 있는 가온은행을 조선 전역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조정의 많은 신하들이 여의도의 가온은행에서 돈을 맡기면 이자를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구서에는 그동안 조선에서 발행된 무수한 화폐가 유통이 되지 않은 이유는 한성과 각지의 부호들이 화폐를 유통의 수단이 아닌 재산의 저장 수단으로 생각하여 화폐가 유통되지 않고 퇴장(退藏)되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맺었다.

별무사에서 보증을 하는 가온은행에 세부적인 문제들을 준비하여 은행을 활성화하자는 것이 연구서의 결론이었다.

은행의 활성화는 정조와 장준하도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김이소를 비롯한 관리들이 정조의 한 번의 질책으로 부단한 연구를 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의도 별무사에 가온은행이 설립되었고 이 은행이 초기의 우려와는 달리 별무사의 보증으로 조선에 있는 상단들은 물론 많은 이용객들이 편리하게 이용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정조도 받았다.

조정의 신료들도 별무사의 일을 정조 앞에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촉각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이번에 300만 냥에 달하는 세금을 매년 납부하겠다고 하여 조선의 400년 된 아전 문제를 단 한 번에 해결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되자 조정의 모든 정파들이 별무사의 존재에 대하여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서에는 은행이 활성화되어 정착한다면 그동안 수차에 걸쳐 실패한 지폐의 발행도 가능하다는 결론도 들어 있었다.

정조는 김이소가 제출한 연구서의 내용을 알고는 대단히 만족해 했다.

거의 대부분의 내용들이 이번 북한산성에서 나왔던 내용이었고 여기에 더하여 은행을 활성화하자는 의견까지 제출된 것이다. 이 연구서가 자신의 책상에까지 올라왔다는 것은 조정의 각 정파들이 내부적인 의견 조율을 마쳤다는 뜻이었다.

정조가 말을 하였다.

“경의 보고를 들으니 과연 조선 관리들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소. 이번에 아전과 녹봉에 관한 문제는 정파가 필요 없이 누구나 똑같이 느끼는 문제라서 그런지 이렇게 훌륭한 연구 보고서를 만들어내었소. 용암(庸庵) 정말 수고하였소.”

그러자 김이소가 읍을 하며 말했다.

“전하, 과분한 칭찬에 소신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거두어 주시오소서.”

“아니오. 이 정도의 결론이라면 많은 시간을 들여 열과 성을 다하였을 것이오.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한 결과요. 정말 고생하였소.”

정조의 칭찬에 김이소는 거듭 감사를 표했다.

정조가 다시 말을 했다.

“상선은 은화를 가져와 대소 신료들에게 보여주라.”

정조의 명이 있자 상선 김시묵이 최성용이 정조에게 준 은화를 가져왔다.

“이번의 연구서에도 나온 바와 같이 조선은 구리가 부족하여 일본에서 대부분을 수입하여 쓰고 있소. 그래서 주화를 만들려고 해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오. 그래서 과인이 이번에 천은으로 주화를 주조하였소.”

은화를 본 대소 신료들은 정조만큼 주화의 정교함에 감탄에 감탄을 하였다.

그리고 각 문양이 새겨진 사연을 들을 때마다 감탄과 탄성을 내뱉었다.

정조는 다시 상선에게 도표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상선은 도표를 신료들이 보기 좋게 펼쳐놓았다.

그곳에는 조금 전 연구서에 나온 것과 거의 대동소이한 급여표가 있었다.

정조는 도표를 보면서 김이소를 칭찬하였고 신료들은 정조의 주도면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미 왕은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아전들의 자질 시험 문제였다.

정조는 아전들을 앞으로는 지방 공무원이라 부르라고 하였고 편의상 공무원이라 통칭하도록 하였다.

공무원이라는 말이 처음 정식으로 쓰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방 공무원의 직급도 종9품에서 정6품까지의 품계를 두고 이번에 처음으로 뽑는 공무원은 나이를 떠나 전원 종9품의 품계를 주라고 했다.

이 품계에 따라 지방 관서의 장 중 종6품인 현감(縣監)과 찰방(察訪)에도 지방 공무원이 임명되도록 기회를 주었다.

단 이들이 승진될 때에는 교육을 받도록 하였고 공무원 교육은 중앙에서 담당하도록 했다.

현감과 찰방으로 임명되는 지방 공무원은 6개월 이상의 교육을 받도록 했다. 지방 관서의 장에게는 공무원들의 근무 행태와 자질을 판단하여 품계를 올려주거나 파직할 수 있는 인사권을 주었다.

단 그들에게 형벌을 주는 경우 강화된 의금부 관원들에게 이첩을 하도록 했다.

지방 공무원의 시험 과목도 4과목을 정하여 실시하기로 하고 전체 정원도 9,000명을 정원으로 출발한다고 도표에 나와 있었다.

편전에 있는 신료들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정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공무원의 등용 시험은 ‘임용고시’로 부르고 금년에는 10월, 11월, 12월 3차례에 걸쳐 실시하기로 했다. 그 교재는 전국 지방 관서와 장터에 게시하는 7월 1일자 관보에 게재하고 동시에 각 관아에 보급하여 필요한 사람들이 필사를 하라고 하였다.

이미 정조는 그들의 연구한 내용의 결론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전들과 녹봉 문제는 연구서의 내용과 거의 다를 바 없어 그대로 진행되었다.

정음(한글)에 관한 문제도 별 어려움 없이 통과되었다. 신하들은 은근히 한글을 언문이라 하여 경시했기에 공무원들이 한글을 공부하거나 경전 시험을 보지 않는 것이 양반들인 자신들을 우월하게 대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감과 찰방을 지방 공무원 출신으로 임명하는 문제가 약간의 논의가 있었다. 조정 대신들의 생각에는 그들을 진급시키는 사람은 중앙에서 내려가는 자신들이었고 자신들이 진급을 안 시키면 되는 문제였기에 별문제를 삼지 않았다.

오히려 지방 공무원의 인사권을 지방관에게 준다는 정조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고로 권력을 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무원교육원 설립 문제는 오히려 조정 신하들의 대대적인 찬성을 받았다.

교육원이 설립되면 자리가 늘어날 것이었고 지방 공무원들을 자신들의 당파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이윽고 은화 주조 문제와 은행 개설 문제가 남았다.

“과인은 이번 보고서에서 놀란 것은 은행의 문제요. 은행은 이번 1월 과인이 별무사의 진언으로 여의도에 설치한 것인데 그 은행이 상당히 빨리 자리를 잡은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조정의 신료들이 이를 알고 은행을 전국에 확대하자고하는 발상을 했다는 데 놀랄 뿐이오. 과인은 앞으로 별무사에게 지시를 하여 조선 팔도의 중요한 곳마다 은행을 설치하겠소.”

정조가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각 관아에서 상평전을 주조하는 것을 법으로 엄금하오. 이제는 모든 돈의 주조는 반드시 왕명으로만 시행될 것이니 이를 반드시 엄수하기 바라오.”

“명심하여 거행하겠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고개를 숙여 대답을 하였다.

정조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이 은화는 내년 1월 관리들의 급여가 지급될 때부터 사용될 것이오.”

“명심하겠사옵니다.”

편전의 대신들이 고개를 숙여 답을 하자 정조가 다음 안건을 말했다.

“다음은 장용외영이오. 이미 지난 화성 행차에서 과인이 밝힌 장용외영의 병력 확충은 매년 한해에 1,000명의 군관들을 선발하시오. 그 선발을 위해 금년에는 9월에 별시를 시행하시오.”

정조가 친위군인 장용외영의 확충에 관한 하교를 하고 있었으나 별다른 반발이 없었다.

정조가 다시 말을 했다.

“이들에게도 급여를 지방 공무원들과 동일하게 지급하시오. 하지만 그 지급은 내년 1월 지방 공무원들과 조정의 신하들과 함께 지급하시오.”

그러자 처음으로 채제공이 정조에게 물었다.

“전하, 장용외영의 군관들에게 지급하려는 급여는 도표에 보면 10만 냥 정도로 예상되는데 이들의 급여와 운용 경비는 어떻게 조달을 하면 좋겠사옵니까. 훈련도감과 같이 삼수미(三收米,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삼수병을 위해 거둬들인 세미稅米)와 같은 조세를 만들려면 백성들의 세금 부담이 과중될까 우려됩니다.”

그러자 정조가 부드러운 얼굴로 말을 했다.

“번암의 염려 과인도 공감을 하오. 하지만 걱정 마시오. 이번에 신설되는 장용외영에 들어가는 모든 군비와 경비는 과인의 내탕금에서 지급할 것이오.”

그러자 편전의 대신들이 술렁거렸다.

채제공이 다시 정조에게 물었다.

“전하, 정식으로 설립되는 병영의 모든 군비와 경비를 전하의 내탕금으로 지급하는 것은 문제가 있사옵니다. 자칫 장용외영이 왕실의 사병으로 비칠 우려가 있사옵니다.”

그러자 몇 명의 대신들도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 대신들의 의견에 정조는 단 한마디 말로 입을 다물게 했다.

“지금 조정은 내년부터 시행될 지방 공무원과 관리들의 급여 문제로 혹시나 하는 우려를 갖고 있을 것이오. 과인이 장용외영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내탕금으로 지급하는 것은 이러한 지방 공무원들의 문제가 안정되고 정착되는 몇 년간이오. 내탕금으로 병영의 비용을 계속 충당하는 것은 과인 또한 상당한 부담이 있소. 그러니 경들은 하루 빨리 과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지방 공무원 제도가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시오.”

정조의 말에 대신들이 모두 고개를 숙여 답했다.

“명심하여 봉행하겠사옵니다.”

대신들의 인사를 받은 정조가 다시 말을 했다.

“장용외영의 주둔지는 화성에 두시오. 화성에서는 지난 5월부터 외영 군영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10월 이전에 장용외영 군영을 준공하도록 노력해 주시오.”

장용외영 군영 건설을 관리하는 채제공이 답했다.

“예, 전하.”

정조는 이 공사도 전액 내탕금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이전부터 친위군을 만들려고 노력해 온 정조는 비로소 이때에 이르러 본격적인 친위 군대를 갖게 되었다. 그것도 자신의 힘으로 친위군을 만들었으며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선의 모든 것은 명목상 임금의 것이었고 더구나 백성들의 세금이 아닌 왕실 내탕금으로 친위군을 만든다는데 어떤 명분으로 반대를 한단 말인가.

신하들은 시파와 벽파는 물론 남인들까지도 장용외영의 친위군화에 많은 의구심을 가졌지만 더 이상 반박할 명분을 찾지 못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신하들은 후일 내탕금이 부족하여 국고에 손을 벌리면 그때 장용외영을 손을 보기로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신문이었다.

정조는 별무사를 통하여 신문의 보급을 지시했다.

신문은 지금의 관보를 확대한 조정의 소식과, 한성과 그 주변 백성들의 일상을 취재하여 만들어 보급하기로 하고, 발행은 처음에는 별무사에서 하기로 했다.

보급은 매달 일정 금액을 받고 집집마다 배달을 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선조 10년 8월에 조선 최초의 자발적으로 생겨난 신문은 어리석은 임금인 선조가 국가 기밀이 누설된다고 하여 폐간하고 발행자를 처벌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200년이 지나서 정조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조회가 끝나고 신료들이 돌아가자 승정원에서는 오늘의 조회를 근거로 각처로 왕명을 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신하들이 편전을 나가고도 한참을 생각을 하고 있던 정조에게 상선이 말을 올렸다.

“전하, 별무사(別貿社) 전수(典需) 서이수(徐理修)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서이수가 편전에 들어 정조에게 절을 하고 자리에 앉으며 말을 했다.

“별무사 전수 서이수, 전하께 문후(問候) 여쭈옵니다.”

서이수의 인사에 정조가 화답을 했다.

“과인은 편안하다. 경도 그동안 무탈하였는가?”

“전하의 성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오늘 과인을 찾은 이유가 있는가?”

“예, 오늘 호조에 300만 냥의 세금을 은화 75만 냥으로 납부하였사옵니다.”

서이수의 말에 정조가 반색을 했다.

“그런가? 세금은 연말에 납부해도 되는데 일찍 납부하였구나.”

“위국공께서 의구심을 갖는 신하들을 무마시키고 전하의 정국 장악력에 도움을 드려 개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라고 지시하셔서 이리 일찍 납부했사옵니다.”

“그런가. 과연 위국공이로다. 과인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이런 노고를 보이다니 과연 충신이로다. 내 이러한 배려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왕과 서이수의 말을 적어나가던 사관이 위국공(衛國公)이라는 말에 붓을 멈추고 잠시 정조를 쳐다봤지만 정조는 그의 눈길을 무시했다.

잠시 정조와 말을 나눈 서이수는 곧바로 일어나 돌아갔다.

정조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혼령 덕분에 가온의 장준하를 만나고 나서 그의 도움으로 조선은 눈에 띄게 변화를 하기 시작하였다.

올초부터는 그렇게 힘들게 이끌었던 조정을 장악하여, 국정 운영의 주도권이 신하들에게서 자신에게 옮겨졌다는 것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정조는 내탕금을 이용하여 흉년이 들면 내탕금으로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장할 때는 화산에 살고 있던 수백 가구의 백성들에게 집값을 시세의 네 배를 쳐주고 이주 비용까지 주었다.

그러느라 많은 내탕금을 사용하여 점차 내탕금이 바닥을 보였다.

그러한 때 정조는 가온의 장준하와 협의하여 별무사가 설립되었다. 그 별무사의 활약으로 많은 세금이 들어왔다.

정조는 장준하에게서 작년에도 많은 양의 금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자신에게 매년 백만 냥의 돈을 기밀비로 사용하라고 받았다.

그들에게서 받는 자금은 부족한 내탕고를 채웠다.

정조는 증조할아버지인 숙종과 같이 조정을 장악하고 왕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내탕금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정조는 별무사가 이렇게 많은 세금을 납부하고 자신에게 힘이 될 줄 처음에는 전혀 몰랐다.

정조는 사실 가온의 군사력을 더 믿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군사력보다 그들에게서 나오는 자금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더 큰 힘이 되었다.

이번에 별무사가 호조에 납부한 300만 냥도 신하들의 눈으로 보면 정조의 내탕금이나 다름없었다.

신하들의 눈에는 별무사가 곧 정조였기 때문이다.

호조에도 별무사의 조선 내부 상거래에 따른 많은 금액의 세금이 납부되었고, 그와 더불어 활발해지고 투명해진 상거래로 조선의 상단들이 내는 세금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이전에는 이러한 세금들이 거의 다 고관들의 뒷배를 채워줄 돈이었다.

왕실에서도 앞으로는 방납이나 진상이 아닌 공정한 입찰과 현지 구매를 통하여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로 했다. 그러자 상단들은 더욱이 관리들과 유착할 필요가 없었다.

최성용은 별무사의 서이수에게 상단들의 거래 내역을 투명하게 유도하라고 지시하였다. 별무사는 권한을 적절히 활용하여 상단들이 그동안 정경 유착에 의한 비정상적인 거래 환경에서 벗어나 건전한 자본을 육성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자신들을 관리 감독하는 별무사가 공정하게 모든 일을 진행하자 상단들도 이제는 이전보다 관리들을 겁을 내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투명한 거래로 세원이 노출되고 이로 인해 이전보다 많은 세금을 납부하게 되었다. 별무사도 성실하게 납세하는 상단에게 왕실 입찰에 배려를 해주기로 하였다.

정조는 이러한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장용외영과 같은 친위 세력을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국정을 장악해 나갔다. 그렇게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개혁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시작했다.

별무사의 300만 냥의 세금이 호조에 납부되었다는 말이 순식간에 온 조정을 넘어 한성에 퍼졌다.

1792년 6월 17일 여의도 별무사 상관.

별무사에는 정조 임금의 교지가 당도해 있었다.

서이수는 주변에 있던 상단들을 소집하여 긴급 회동에 들어갔다.

마침 상단에는 송상대방 전창진과 양일현 상단의 양일현이 머물고 있었다.

양일현은 영등포의 공장 일로 여의도에 아예 상주했다. 전창진은 별무사의 자금 결제 문제로 여의도에 와 있었다.

회동에서 서이수는 조정에서 내려온 교지를 읽어주면서 설명하였다.

교지의 내용은 왕실 입찰 등에 관한 사항이었다.

상단들은 환호하였다.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은 연간 수십만 냥에 달하는 엄청난 수량이었고 이것을 입찰이나 현지 구매로 공정하게 구입을 한다는 소식은 이들의 입을 귀에 걸리게 했다.

이렇게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별무사에 이제는 조선의 상단들도 적극적으로 협조를 했다.

특히나 세금을 성실히 납부한 일부 상단에게 입찰에서 혜택이 주어지자 성실한 납세에 더 적극적이 되었다.

처음 회동하였을 때 별무사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조선 상단들의 시선이 이제는 완전히 변했다.

별무사가 설립된 이래 악어와 악어새 같았던 조정의 권신들과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되자 그들에게 들어가던 돈을 사업에 재투자하기 시작하였다.

상단간의 자유경쟁이 시작되자 물가가 안정되었으며 시장이 확대되자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오늘 별무사를 통해 수십만 냥의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단들은 앞으로 있을 왕실과의 거래에 수판을 놓기 바빴다.

그리고 앞으로 세금이 쌀이 아닌 돈으로 납부를 해야 한다고 하자 각자의 이해득실을 따져보기에 정신이 없었다.

별무사는 이미 알던 일이기는 하였지만 조정에서 은행 설립과 신문사 설립을 정식으로 발표를 하자, 더 분주하게 움직였다.

최성용은 신문사 본사로 여의도의 별무사 상관 옆 토지에 3층과 부속 건물을 짓기로 하였다. 업무가 늘어나는 가온은행도 별관을 신축하기로 했다.

20개의 지점은 팔도의 관찰사가 있는 대도시와 네 곳의 유수부, 각 지역의 주요한 거점을 위주로 개설되었다. 처음에는 지점당 인원은 지점장과 네 명의 직원으로 구성했다.

아직까지는 정상적인 금융 업무보다는 입출금 업무를 시작으로 백성들의 은행 이용을 권장하는 수준에서 업무를 개시할 계획이다.

여의도의 새로운 건물 공사에는 여의도 제방 공사에서 거중기를 사용하면서 인원에 여유가 생겨서 남는 인원들을 대거 활용했다.

전국에 20개소에도 은행 지점이 지어졌다.

특히 은행 이용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한성은 네 개 지점을 두기로 했다.

전국적으로 지어지는 가온은행 지점은 지금까지 조선에 없던 형태의 건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건물은 여의도의 본점 건물과 같은 방식으로 지어졌으며 지방의 지점 공사는 여의도에서 건물을 시공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공사 책임자로 선정하여 건물을 지었다.

벽돌을 이용해 기존의 조선에 없던 독특한 외양의 시공법으로 창문을 유리로 시공을 하여 외관이 화려해졌다. 은행 건물은 준공 후에도 그 지역의 명물이 되었다.

여의도와 제주도 그리고 청진의 공사에 참여한 인원들은 점차 숙련공으로 발전하였다.

이 인원들이 장차 조선의 건설과 토목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중간 관리자가 될 것이다. 가온도 이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고 관리를 하고 있었다.

가온의 현장에서는 예외 없이 교육이 실시되었다.

제주에서처럼 군사 훈련은 하지 않았지만 위생 교육과 한글과 산수 교육은 반드시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노동자들이 일도 힘든데 공부까지 시킨다고 불평불만이 대단했다. 그러나 교육을 받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여를 했다.

공사가 벌써 1년 이상 계속되자 이들은 90퍼센트 이상이 한글을 깨치고 일반적인 산수는 손쉽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별무사는 이들을 위해 전래동화와 사군이충(事君以忠)과 관계된 화랑의 이야기, 국가에 충성한 선조들의 일화를 중점적인 소재로 한 한글로 만든 이야기책을 발간을 했다. 이들에게 수업의 동기를 유발해 준 것이다.

별무사의 이야기책은 상당한 인기가 있어서 이 책을 읽기 위해 노동자들이 교육받을 때 그들의 아이들도 많은 수가 수업에 참여를 하였다.

별무사는 아이들의 수업 참관을 모른 척해주었으며 별무사의 이야기책은 입소문이 나서 4대문 안의 양반가에서도 필사해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주도에서는 은행원들과 신문사에서 근무할 기자 등의 선발하고 교육시키는 데 정성을 다했다.

1년이 넘는 주민 교육자들 중 최초로 조선에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서이수가 겸직해 왔던 은행장으로는 시간 여행 당시 넘어온 은행원 중 가장 선임인 최영수 지점장이 자원하여 맡기로 하였다. 그의 업무를 보좌하기 위해서 국정원 요원 두 명이 측근에서 보좌하기로 했다.

조선의 각 지점으로 파견 나가는 선발대 인원 80명과 본점 인원 20명 등 100명의 인원은, 6개월 기한으로 가온대학과 고등학교에서 상업을 전공한 교수들이 상업부기를 가르치고 최영수 은행장 등 은행 직원들이 은행 업무 교육을 시켰다.

최성용은 가온은행의 지점 설립을 위하여 그동안 제주도에서 교육받은 인원 중 특히 산수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 중에서 지원을 받아 선발했다.

제주에서 교육받은 사람들 중 선발을 해보니 그 선발 인원들의 상당수가 중인 출신이었고, 최성용은 이들이 후일 금융감독원의 업무를 볼 것에 대비하여 송상 고유의 복식부기인 사개치부법(四介置簿法)도 가르치게 했다.

지점장들은 국정원 차장 정철학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가온 출신 국정원의 요원이 맡기로 하여 전국에 있는 요원들의 재비치가 이루어졌다.

최성용의 생각에도 지금의 조선인들보다는 가온 출신들이 은행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더 앞서 있다는 판단도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전자계산기를 이용할 수 없는 관계로 전원이 수판(數板)과 부기(簿記)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장준하는 이어서 신문 발행을 준비시켰다.

이 신문에만큼은 국정원의 개입을 금지하였다. 신문의 발행을 위해 장준하는 조선의 실학자 중에서 사장단을 구성할 계획이었다.

많은 실학자들 중 관계에 진출하지 않고 역사의식이 강한 사람들을 찾다가 두 사람을 찾아내었다.

그들은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의 저자이자 소론 출신의 양명학파이자 실학자인 이긍익(李肯翊, 1736~1806)과, 해동역사(海東歷史)의 저자이자 남인 출신의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었다.

장준하는 여러 가지를 검토한 끝에 그래도 역사의식이 있는 이 두 사람을 신문사의 사장과 주필로 삼기로 했다. 서이수를 통해 서울에 있던 이들 두 사람을 북한산성으로 불렀다.

최성용은 북한산성으로 날아갔으며 이들을 서이수와 함께 행궁에서 만났다.

두 사람과 서이수는 북한산성에 오기 전에 이미 여의도에서 일차 대면을 했기 때문에 서이수가 두 사람을 인솔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별무사의 대외무역을 담당하는 최성용이라고 합니다.”

“이긍익입니다.”

“한치윤입니다.”

이긍익과 한치윤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최성용을 바라보았다.

이들 두 사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최성용은 자신들보다 목 하나는 더 큰 엄청난 거구로 외모에서 우선 주눅이 들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최성용이 말했다.

“지난 15일 주상 전하께서 앞으로 새롭게 만들 신문에 대한 하교가 있으셨습니다. 두 분은 서전수를 통해 들으셨을 겁니다.”

그러자 연장자인 이긍익이 말했다.

“예, 서전수로부터 상세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저희 별무사는 그 신문 발행에 관한 모든 사항을 주상 전하로부터 위임받았습니다. 그래서 새로 만드는 신문의 대표인 사장과 주필로 두 분을 추대하려고 합니다.”

이긍익과 한치윤도 별무사의 일과 이번에 새로이 신문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서이수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정의 일이었지 자신들과는 별개의 일로만 알았다.

그런데 별무사의 대외무역사장이라는 사람이 자신들을 보고 사장과 주필을 맡아달라고 했다.

이긍익은 최성용의 말에 자신의 속에 있는 말을 했다.

“저희들은 조정의 출사는 포기하고 우리 자신들의 학문 증진과 저술에만 힘을 쓰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저희들이 새로운 신문의 사장과 주필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한치윤도 말을 했다.

“저도 단 한 번도 조정에 출사를 한 적이 없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최성용은 두 사람이 신문사라는 것에 대해서는 잘 이해를 못했지만 자신의 제안에 솔깃해 있다는 것을 그들의 말로 느낄 수 있었다.

“두 분께서는 저의 제안에 반대는 없으시군요.”

이긍익이 말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신문사라는 것이 필력을 나타내는 자리라는 것에 마음이 갑니다.”

한치윤 또한 이긍익의 말에 동조를 하며 말했다.

“솔직히 저는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서인 출신도 아니고 다른 당파와도 별 교류가 없어 출사를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정쟁이 필요 없이 글로써 말을 하는 자리라면 솔직히 탐이 납니다.”

“그렇다면 저희들 일에 동참을 해주십시오. 우리는 두 분들의 역사의식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최성용은 신문이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두 사람은 최성용의 설명에 더 혹해서 그의 제안에 이의 없이 동의를 했다.

최성용이 두 사람에게 사의를 표명하며 말했다.

“두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두 분 중 연장자 순으로 사장과 주필을 선임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 나이가 어린 한치윤이 말을 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연려실(燃藜室, 이긍익의 호) 선생님께서 사장이 되시는 것이 아주 당연합니다.”

“고맙네, 옥유당(玉?堂, 한치윤의 호).”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사장에는 당연히 연려실 선생님께서 취임을 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최성용과 서이수는 자연스럽게 마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치윤은 자신보다 30여 년 연상인 이긍익을 적극 추천하여, 사장은 이긍익이, 주필은 한치윤이 맡게 되었다.

최성용은 제주에서 교육받은 인원 중에 기자들 20명과 관리직 인원으로 10명 그리고 신문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인원 20명을 선발했다.

장준하는 처음 신문 발행만큼은 국정원을 배제하려고 했다. 만일을 대비하자는 정철학 국정원 제1차장의 강력한 권고에 신문사 내부 사찰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국정원 요원을 기자 1명과 관리 1명으로 위장하여 신문사에 배치했다.

신문의 발행 주기는 지방에 관보가 나가는 5일에 한 번씩 발행하기로 하고 내년 1월부터 창간하기로 했다.

처음 장준하는 일간으로 신문을 발행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인쇄 시설의 미비 등 여러 가지 문제로 5일마다 한 번씩 발행하기로 했다. 점차 발행 일자를 앞당기기로 한 것이다.

시간 여행 이전에 대학 시절 학보사 출신들과 당시 국군의 날 행사 취재를 위해 화순에 들어와 있었던 제주일보 서귀포시 주재기자 출신의 강진구 등 네 명이 취재 실무와 신문사 업무를 교육했다.

신문 발행은 주변 기술이 미비하여 활자 조판 방식의 인쇄를 하기로 하고 정조에게 부탁하여 조정에서 보관하고 있던 활자를 구해 와서 이들을 교육했다. 신문 발행에 필요한 활자는 새로이 주조하기로 했다.

가온은행과 신문사의 업무 교육으로 제주 주민 훈련소에는 때 아닌 교육 열풍이 불었다.

1792년 6월 25일 수원(水原) 화성(華城) 장용외영 주둔지.

정조의 명으로 신설될 장용외영의 주둔할 곳으로 화성이 결정되자, 화성에서는 장용영의 군영을 짓기 위한 공사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미 지난 5월 능행 때 장용외영 신설을 명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채제공의 관리하에 병영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정조의 내탕금으로 진행되는 공사가 시작된 지 1달이 넘은 지금은 기초공사가 완료되어 있었다.

정조의 특별 지시로 선공감(繕工監)에서 주둔지 토목공사를 맡았다. 장용외영의 주둔지는 화성 행궁을 수비하기에 좋도록 화성 행궁 바로 옆에다 터를 잡았다.

선공감이 군영의 토목을 마치고 철수를 하자 여의도에서 숙달된 목수들과 인부들이 달려들어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정조는 이 공사에 인부들에게 후한 일당을 지급하였고 그로 인해 목수들을 비롯한 노동자들이 넘쳐나 일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군영의 담장은 외부의 적을 막을 정도로 튼튼하게 쌓았고 중간 중간 사람의 눈높이에 총구를 만들어 방어가 편리하게 되어 있었다.

9월 준공을 목표로 짓고 있는 군영은 현대의 부대 주둔지 개념을 도입하여 병영 건설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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