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화(銀貨)
1792년 5월 20일 조선 수원 능행길 옆 내수사전(內需司田).
조선의 각처에 있는 내수사전에는 지금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시간 여행을 통해 넘어온 벼를 논에 심고 있었다.
모판에 있는 벼를 떠서 던지는 농부가 선창을 하자 논에 모를 심는 농부들의 합창을 했다. 그 소리가 온 들판에 메아리쳤다.
정조 임금은 수원 능행에 나서는 길 주변에 있는 내수사전의 모내기 소식을 듣고 행차를 돌려 모내기를 하는 내수사전 들판에 와 있었다.
“허허, 농부들의 농요가 참으로 듣기 좋소.”
“그러하옵니다, 전하. 금년에는 다행히 적당히 비가 내려 농부들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전하의 홍복이시옵니다.”
정조의 말에 좌의정(左議政) 채제공(蔡濟恭)이 화답을 했다.
그러자 동행한 신료들이 입을 모아 정조의 선정을 치하했다.
정조의 말대로 온 들에 있는 농부들이 합창을 하자 구성진 농요의 노랫가락이 울려 퍼졌다. 들판에서는 벌써 모내기의 풍요로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농부들의 모내기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정조는 상선에게 명하여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리라고 하였다.
3,797결의 내수사전 중 3,000결의 논에 새로운 품종의 벼를 심고 있었다.
정조는 지금 모를 내는 벼가 장준하가 말한 신품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얼마나 수확될지 궁금했다.
정조는 금년 들어 처음으로 화성 행차를 하는 길이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가는 행차. 3년 전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장한 후 1년에 한 번은 꼭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의 현륭원(顯隆園)으로 능행을 했다.
정조의 화성 행차를 신하들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 참배를 이유로 하는 행차로 이해되었고, 정조의 효심의 발로라고만 생각하였다.
하지만 정조의 능 행차에는 복선이 깔려 있었다.
정조의 본심은 화성 경영(華城經營)에 있었다. 수원에 도착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참배 후 행궁(行宮)으로 행차를 하였다.
수원에는 정조 임금의 능행을 위해 행궁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조는 행궁의 대전(大殿)에서 대소 신료들에게 장용외영(壯勇外營)의 설치와 화성 축조(華城築造)를 위한 준비를 명령했다.
정조 6년(1782년) 장용위를 신설하였고, 정조 12년(1788년) 장용영으로 개칭하여 ‘장용영 시대’가 열렸다.
정조는 몇 년 전부터 장용영의 확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을 기해 정조는 한성의 내영과 화성의 외영을 만들기에 이르렀고, 수원의 명칭도 화성으로 변경을 하고 유수부(留守府, 정2품)로 격상했다.
역사보다 1년 빠르게 격상된 화성과 신설되는 장용외영은 5,000명의 정원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외영 설치의 명분은 현륭원의 호위와 행궁의 수호에 두었다.
정조의 속셈을 알지 못하는 신료들은 단지 효심의 발로로만 생각하여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이는 정조의 의향이 담긴 정책으로 정조에게 있어서 화성은 이성계의 함흥이었고, 한고조(漢高祖)의 패현(沛縣)이었다.
한성의 수비에 가장 핵심인 남한산성을 관리하던 광주부도 유수부로 격상하여 정2품의 경관 관아로 격상시켰다.
정조는 남으로는 화성과 남한산성, 북으로는 북한산성을 자신의 친위군으로 장악할 계획이었다.
정조가 생각하는 화성이 어떠한지는 분명했다.
화성은 몇 년 전부터 축성의 당위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화성의 축성은 정조의 화성 경영의 신호탄이었다.
이번 장용외영의 조기 설치는 위국공 장준하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장준하는 장용외영의 장졸들을 전부 가온군으로 채울 생각이었다.
북한산성은 장용영에서 장악한 상태였으므로 화성의 장용외영만 장악한다면 한성의 장악은 시간문제였다.
이미 장용내영의 군관 500명의 훈련이 5월 말로 끝이 난다. 다음 달부터는 제이스 소총의 사격을 비롯한 주특기 교육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정조는 얼마 전부터 장악한 정국을 이용하여 별다른 반대 없이 장용외영 친위군을 신설했다.
장용외영은 별무사의 도움으로 군수물자를 지원받아 정조 16년(1793년) 9월에 별시를 거쳐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출범하기로 했다.
정조는 7월 1일을 기해 조선의 전 관아 앞과 5일장이 열리는 곳에 조보(관보)를 한문과 정음을 혼용한 인쇄로 관보 게시판을 만들어 게시하게 했다.
백성들 중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병사들 중 한 명이 하루에 3회 큰 목소리로 알려주기로 하였고, 관보는 5일마다 게시하기로 했다.
이러한 것은 백성들에게 조정에서 벌어진 일을 알려주고자 하는 조치였고, 양반들의 정보 독점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 조치도 장준하와 정조와의 협의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정조조차 처음에는 조보의 일반 백성에 대한 공개에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장준하는 조정 안에 있는 관리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고, 정보를 독점하지 못한다면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힘이 약화될 것이라고 설득하여 승낙을 받아냈다.
정조의 이러한 조치는 관료들, 특히 노론 벽파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미 벽파 자신들의 잘못으로 국정 주도권을 정조에게 넘겨준 지금으로서는 막아내기 힘이 들었다.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정조는 조보 게시를 강행했다.
벽파의 영수 김종수를 비롯한 벽파들은 어떠한 전기가 있어 주도권을 다시 회복할 때까지 당분간은 잠시 숨을 죽이기로 했다. 남인들과 시파들은 정조의 관보 시책이 탐탁치는 않았지만 관망세로 일관했다.
능행을 마치고 창덕궁으로 돌아온 정조에게 처음 보는 식물이 진상되어 있었다.
그것은 감자였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감자가 본격적으로 식탁에 올랐다. 감자의 보급으로 보릿고개를 넘기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특히 경작지가 적은 강원도와 함경도의 주민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감자는 농사를 지은 농민에게 일정 지분을 배당하고, 종자에 필요한 씨감자를 제외하고는 구휼을 위해 강원도와 함경도로 전부 분배되었다.
1792년 6월 5일 13시 북한산성(北漢山城) 행궁.
북한산성은 조정에서 이미 용호영의 군영으로 알려져 있어서, 조정의 신료들에게 정조의 북한산성 방문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정조는 모처럼 장준하 일행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장준하와 최성용은 지난밤에 올라와 있었다.
“전하, 오랜만에 용안을 뵙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렇소. 경의 염려 덕에 무탈하오. 경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소?”
“신 또한 전하의 염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번 관보 문제를 잘 풀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니오. 경도 알고 있다시피 지금 과인이 하고자 하는 일이 조정의 문제로 계속 지체되고 있었소. 이번에 경의 말을 듣고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개혁을 완성하는 데 더 좋을 것 같아서 과인이 결정한 일이오. 충분히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일이니 앞으로의 경과를 지켜봅시다.”
정조의 말에 장준하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예. 오늘 전하를 뵙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이번에 결정될 녹봉 문제와 아전들의 문제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일과, 장용외영의 무관 임용 방법과 관보를 한성에서 확대하는 방법 등을 상의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정조도 적극적으로 말을 하고 나섰다.
“먼저 아전의 문제부터 말을 해봅시다. 그들을 어떻게 처결하면 좋은지.”
“자세한 문제는 최성용 대령의 설명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최 대령, 전하께 말씀드리게.”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최성용이 일어나 준비해 온 차트를 펼쳤다.
정조는 지난번에도 최성용이 만든 차트를 보면서 상당히 편리하다고 느꼈는데, 오늘 다시 최성용이 그것을 준비해 온 것이다.
“전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이렇게 전하께 보고를 드리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최성용의 간단하고 단순명료한 말에 정조는 ‘과연 군인이다’라고 생각을 했다.
최성용이 다시 말을 하였다.
“이번에 아전들의 녹봉 문제와 이들의 대우와 조정 관리들의 녹봉 문제입니다. 먼저 녹봉입니다. 이전까지 녹봉은 그동안 쌀과 콩 등 곡식으로 지급이 되어 녹봉이라는 말을 사용을 하였는데, 앞으로는 조정에서 발행한 저화나 화폐로 지급하면서 말도 급여라는 말로 바꾸었으면 합니다.”
정조가 그 말에 우려를 표명했다.
“지금 조정에서는 신료들에게 지급할 상평전이 준비가 되지 않았소. 그렇게 되면 저화로 지급을 해야 하는데, 이는 잘못하면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소. 그러니 만일 급여 제도를 시행한다 하여도 준비 기간이 있어야 할 것이오.”
장준하가 정조의 경제관념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에 속으로 감탄을 하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과연 전하십니다. 지금이 문제는 두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조선은 아직 화폐경제가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료들이나 일반 백성들이 화폐는 동전이나 은 등 그 가치가 바로 나타나는 것만을 인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준비했습니다. 이것을 한번 보십시오.”
최성용이 정조에게 보여준 것은 현대의 기술로 주조된 아주 정교한 은화였다.
정조는 정교하고 아름답게 주조된 주화를 보며 감탄을 거듭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은화일세. 어떻게 만들었기에 이렇게 정교하단 말인가.”
“전하, 그 기술은 주조법(鑄造法)입니다. 이 기술은 아직까지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우리 고유의 기술입니다. 은화는 정확히 천은 1냥의 무게입니다.”
정조는 감탄을 거듭하면서 은화를 바라보았다. 은화는 순도 100퍼센트의 1냥짜리 천은(天銀)이었다. 은화의 전면 정중앙에는 1냥(壹兩)이라는 글이 중앙의 이화 문양을 나뭇잎으로 감싸는 형상이었고, 뒷면에는 왕실 문양인 용의 문양이 아주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테두리 위에는 ‘가온은행’이라는 글씨와 ‘1냥’이라는 글이 한글과 영문으로 각각 양각되어 있었다.
“전하, 이 앞면의 꽃은 왕실의 성씨에서 나온 이화이고, 이화를 감싸고 있는 것은 무궁화 잎으로 전하의 16년 치세를 의미하는 16장의 나뭇잎을 새겼습니다. 뒷면은 왕실의 문양인 용문입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정음과 타국과의 교역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양이의 문자도 동시에 새겨놓았습니다.”
“그런 의미가 있었는가? 참으로 과인의 생각과 일치하도다. 참으로 잘 만들었도다. 그런데 연호를 새겨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죄송하오나 청국 연호는 일부러 새겨 넣지 않았습니다.”
잠시의 침묵이 대전에 흘렀다. 정조인들 은화에 청국 연호를 새기지 않은 뜻을 왜 짐작하지 못하겠는가.
정조의 마음속에도 청국을 뛰어넘고 싶은 생각이 왜 없을까. 주자학을 신봉하는 정조의 마음속에는 사대모화의 대상은 여진(女眞)의 청이 아니라 명이었다.
정조는 명의 뒤를 이은 것은 청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소중화(小中華)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정조가 말이 없자 연호를 새겨 넣지 않은 것을 인정한 것으로 판단한 최성용이 다시 말을 이었다.
“별무사에서 앞으로 조정에 납부하는 세금을 기존의 은이 아니라 이 주조된 은화로 납부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녹봉을 분기별이 아닌 매월 지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일리가 있는 말이오. 철마다 주는 것보다 매월 지급하여 주면 그것을 받아 생활을 하는 데 편하겠구려.”
“그렇습니다. 매월 일정한 급여를 받아야 관리들이 그 돈을 갖고 규모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리들의 급여는 하후상박(下厚上薄)을 원칙으로 하여 이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최성용이 넘긴 차트에는 품계별 급여 기준표가 상세히 은(銀)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정조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되겠구려. 과인이 돌아갈 때 이것을 챙겨주시게. 과인이 조정에서 건의한 것과 비교하여 법을 제정하겠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정의 세수 확충을 위해 지금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는 지방 관아의 내실을 이번 기회에 다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운영을 감시하는 제도의 확충도 필요합니다.”
정조가 장준하의 말에 동의를 했다.
“알겠소. 사헌부의 기능을 확대하여 지방 관아의 상설 감찰 기능을 보강하겠소.”
“그리고 아전들의 명칭을 지방 공무원이라고 호칭을 하였으면 합니다. 고려조 때부터 내려오던 아전이라는 말은 이제는 그 호칭이 부패를 의미하는 말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그대로 재임용하지 마시고 일정한 기준의 시험을 보고 선발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정조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하고는 의문 나는 점을 질문했다.
“시험이라 하면 선출 과목을 무엇으로 하는 것이 좋겠소?”
“지방 공무원은 과거 시험과는 달리 경전을 시험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도리는 알아야 하니 동몽선습과 명심보감 정도를 하나의 과목으로 하여 시험을 치르고, 나머지는 지난번 저희들이 드린 정음 독해와 산수, 그리고 행정 실무 문제를 시험 과목으로 실무 능력을 검증하는 시험이면 좋겠습니다.”
정조에게는 이미 한글로 만들어진 책이 전해져 있었다. 정조도 이 시대의 정음보다 한글이 쓰기가 간편하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정조가 말했다.
“동몽선습과 명심보감은 지방 공무원들의 윤리 의식 함양에 목적이 있으니 그 과목을 ‘윤리’라고 하고, ‘정음 독해’와 ‘산수’, ‘행정 실무’, 이렇게 네 과목으로 결정하는 것으로 하면 되겠는가?”
최성용이 정조의 말에 동의를 했다.
“좋은 의견이옵니다, 전하.”
장준하가 다시 말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근무 의욕 고취를 위해 직급을 종9품에서 종6품의 품계를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사권을 지방의 각 지방관에게 주어 지방 공무원들의 부패를 방지하고, 그들의 관리 감독을 편하게 하였으면 합니다.”
“품계를 주는 것은 관계가 없는데 종6품은 현감과 찰방의 지방관의 품계일세. 그렇다면 지방 공무원들도 승진하여 지방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전하, 전하께서 심려하시는 그들의 자질 문제는 품계가 오를 때마다 계속 교육을 시키는 것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지방관으로 승진되는 지방 공무원이 있다면 적어도 6개월간은 지방관이 가져야 할 여러 과목들을 재교육해서 임용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공무원 교육원 만들기를 건의 드립니다.”
그 말에 정조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한가. 그런 정도의 계속된 교육이면 자질 문제는 차츰 없어지겠군. 하지만 조선의 외관 중 반 정도가 되는 138명이 현감이오. 그들의 교육에는 철저를 기해야 할 것이오.”
“심려 마십시오. 전하의 우려를 불식시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방 공무원이 승진하여 지방관이 되는 경우는 극히 소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정조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기야 지방관이 되려는 지방 공무원은 과인의 윤허를 받아야 하고, 더구나 지방관으로 승진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지방 공무원이 얼마나 되겠소. 그렇다면 알겠소이다. 그리 시행하겠소.”
“감사합니다, 전하.”
장준하가 정조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서자 최성용은 그 뒤로 채용 시험에 대해 관보에 게재하고 앞으로 아전들은 급여를 받는 지방 공무원이 되어 신분 보장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시험은 준비 기간이 있으므로 10월부터 3개월간 3번에 걸쳐 시행을 하기로 하였다.
인원은 300개 지방 관아를 기준으로 평균 30명을 뽑기로 하고, 총 9,000명의 인원을 선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장용외영의 군관 임용과 신문 발행 문제도 협의를 했다.
화성의 장용외영은 가온에서 인원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최성용은 그동안 제주에서 훈련받은 인원 중 선별하여 정예병을 가온의 간부들과 함께 들어온다고 정조에게 알렸다.
신하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방법으로, 이들의 신분을 위장할 수 있는 호패를 제공하고 그동안 제주에서 교육받은 인원이 아니면 합격하기 어려운 이론과 실기 시험을 10월 이전에 시행하기로 건의했다.
정조는 기다리고 있던 가온군이 조선에 들어온다는 사실에 무척 흡족해 하면서 최성용의 건의를 즉석에서 수용하여 주었다.
긴 시간의 회의는 정조의 적극적인 협조로 끝이 났으며, 정조는 상당히 흡족한 마음으로 대궐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내내 정조의 손에는 은화가 들려 있었다.
1792년 6월 10일 북미 상항(샌프란시스코) 동백(새크라멘토)시.
북미 지역에는 지금 금광 채굴이 한창이었다. 그동안 5,000명의 인원이 추가로 이주하여 왔다. 호주의 원주민과 조선 출신 백성들로 구성된 북미 이주민들은 각지의 금광으로 파견되었고, 동백시의 금광에서는 벌써부터 많은 양의 금이 생산되고 있었다.
상항에는 지난 3월에 나포된 에스파냐 범선 한 척이 정박되어 있었다.
북미 지역은 동백시부터 알래스카까지 총 네 곳의 금광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채굴하던 1800년대와는 달리 21세기 장비가 동원되자 1800년대의 5배 이상 되는 생산 능력을 보여주었다.
가온군은 북미 지역 해안에 계속하여 헬기를 띄워 탐사를 계속하였다.
지금쯤이면 조지 밴쿠버 선장의 탐험대가 태평양 연안을 탐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라도 함은 상항과 밴쿠버를 오르내리며 이들을 기다린 지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사이에 내륙에서는 북미 원주민과의 교류에 나서기로 했다.
중앙의 대초원 지대를 지나 로키 산맥 너머 태평양 지역에는 원주민들도 거의 살지 않았다. 이 지역 많은 수의 원주민들은 대부분이 로키 산맥 안에 살고 있었다.
가온이 분리를 생각하고 있는 애리조나는 현재 에스파냐의 영토였다.
호주21여단 이기호 중령은 북미 원주민들을 직접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멀리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고 기록된 아이다호 지역까지 탐사단을 파견했다.
김철승은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누에바에스파냐의 행동에도 촉각을 세웠다.
이미 지난 3월 그들의 범선을 한 척 나포해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의심한 에스파냐의 도발을 경계하고 있었다.
지금 상항에는 연해 범선 함대의 범선을 지원받아 세 척의 기범선이 정박해 있었다. 김철승 대령은 다음에 제작되는 비행선을 상항에 주둔시켜 주기를 위국공(衛國公)에게 청원하여 놓은 상태였다.
한 달 동안 바다를 정찰하던 헬기에서 연락이 왔다. 드디어 탐험대로 보이는 범선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김철승 대령은 소리를 치고 싶을 정도로 기쁜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 드디어 발견한 모양이구만. 마스트에 영국기가 걸려 있다는 보고군.”
“한 달이 넘는 탐사가 결실을 본 모양입니다.”
권철용 중령이 김철승 대령의 말에 화답했다.
김철승이 다시 말을 했다.
“그런가보네. 조지 밴쿠버 선장의 탐험대가 맞는지 확인할 길을 찾아봐야 하겠네.”
“그냥 그대로 격침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닐세. 그래도 확인은 하는 게 좋을 듯하네. 혹시 다른 함대일지도 모르니.”
김철승의 지시로 함대를 확인할 병력이 마라도 함에서 고속정을 탄 채 백기를 걸고 범선에 다가갔다.
영국의 범선 함대도 마라도 함을 발견하고는 돛을 올리고 배를 멈추고 서 있었다.
한참 후 그들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고속정의 무전은 그들이 역시 밴쿠버의 탐험대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것을 확인한 김철승 대령은 바로 포격을 명령하였다.
물론 그들을 설득하여 돌려보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북미 대륙 태평양 연안의 상황이 유럽에 알려지고 말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커다란 폭음과 함께 범선에 포탄이 작렬하였다. 화약 저장고에 맞았는지 탐험선치고는 대형인 1,000톤급의 함선이 엄청난 유폭을 일으키면서 순식간에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
그렇게 세 척의 배가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면서 태평양의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주변 바다는 순식간에 배에 있던 물건들과 부서진 나무 조각들로 뒤덮여버렸다.
그 사이사이에 탐험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김철승 대령은 헬기를 띄워 바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전원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시간 여행 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김철승 대령은 이런 일방적인 학살 명령을 내리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감정은 무시하기로 했다.
자신은 군인이고 군인은 명령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을 잡아 포로로 활용을 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받은 명령은 전원 사살이었다.
이러한 학살 행위가 감정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명령이었다.
앞으로 로키 산맥의 서쪽은 적어도 한 세대는 유럽열강의 손에서 멀어져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인하여, 역사적 사실로 감안할 때 이제 태평양 연안으로 올 탐사단은 당분간은 없었다.
지금쯤 동부 시베리아(사백력)도 가온의 수중에 거의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알레스카는 가온무역에 귀속될 것이고 이제 허드슨베이사와 중미의 에스파냐 세력만 견제 한다면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도 미국이 로키 산맥을 넘어오는 시기는 앞으로 30년이 지난 1820년대였다.
가온은 이들이 단 한 발자국도 로키 산맥을 넘어오지 못하게 할 계획이다.
허드슨베이사는 병력이 많지 않아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멕시코의 누에바에스파냐만 집중적으로 상대하면 충분하다.
김철승 대령은 아직은 상항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먼저 지금까지 점령한 지역을 몇 개월간 안정을 시켜놓고 본부의 지원을 받아 9~10월경에 남하를 할 계획이었다.
벌써부터 동백(새크라멘토)시에서는 많은 양의 금 생산을 시작했고 캐나다 지역도 곧 양산 체제로 들어선다는 보고였다.
다만 알래스카 중앙의 금광은 지형 관계로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김철승 대령은 호주 21여단장 이 중령의 의견대로 북미 원주민들과의 접촉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바다를 순찰하는 기범선 함대에게 에스파냐 세력을 집중 감시를 하라고 지시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