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01)

사백력 평정

1792. 5. 5. 사백력(斯白力) 네르친스크 전방 5km.

이종찬 대대장을 대장으로 하는 서방 원정대가 네르친스크가 보이는 곳까지 진출을 했다.

사백력의 스타노보이 산맥과 흑룡강을 끼고 나 있는 사백력을 종단하는 길은 러시아가 지난 100년간 동부 사백력에 진출하면서 개척한 길이었다.

이종찬은 1,000명의 가온 군과 푸가초프 백작이 지휘하는 1,000명의 시베리아 군을 이끌고 네르친스크의 5km 전방에 도착해 있었다.

2달간의 사백력 종단은 생각보다 빠른 진군을 했다.진군을 하는 동안 있었던 러시아 군의 소규모 초소는 2,000명의 군 병력이 공격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후방으로 거의 대부분 철수를 하여 비어 있었다.

하늘에서 비행선이 이들의 진로를 정확히 잡아주었고 준비해간 장비들은 다행히 봄이 되서 해빙이 되어 질척해진 사백력의 땅에도 별다른 문제없이 주변에 있는 석재들을 이용하여 도로를 넓히고 다지는 작업을 하면서 전진했다.

20여 개의 버려진 요새는 그대로 두고 통과를 했다.

요새의 위치는 비행선에 의해 바로 하바롭스크로 알려 졌으며 하바롭스크의 병력이 요새 당 1개 소대씩 파견배치가 되어 요새 보강 공사에 한참이었다.

추운 사백력의 겨울을 지내기에는 러시아가 만든 요새는 너무 엉성했다.

요새 보강에 필요한 건축 자재는 비행선이 날라주어 빠르게 공사를 하면서 이들 요새에는 곳곳에 이제는 가온 군과 친숙해진 에벤키족을 비롯한 사백력의 원주민을 위한 시설도 건설하였다.

요새와 요새사이에 처음으로 전화선을 연결했다.

청진에서 생산되는 전선으로 제주도와 개발되는 모든 개척 지역에 전화선이 연결되었으나 외부 노출 문제로 유구도는 아직 개설되지 않았다. 이번에 사백력의 방어를 위해 처음으로 전화선을 개설했고 하바롭스크에도 증기터빈이 공급되어 그동안 군용발전기에 의지하던 전기 생산이 화력 발전소에서 생산을 시작하였다.

지금은 동명시와 하바롭스크를 연결하는 전화선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러시아군과의 전투는 3차례 있었으나 단 한 명의 인명 피해 없이 끝이 났다.

이종찬은 이 전투에 가온군과 시비르군을 적절히 배정하여 이들의 전투력을 높여주었고 전투에서 항복한 포로들은 전부 끌고 네르친스크까지 왔다.

포로들이 동행하게 된 것은 푸가초프 백작이 부탁을 하여 이루어 졌으며 포로들도 동행하는 동안 푸가초프 백작의 계속된 설득에 거의 넘어와 있었다.

행군을 하는 동안에도 3차례 전투를 하는 동안에도 시비르군은 계속 가온 군에게 훈련을 받으며 서서히 일당백의 강병으로 거듭났다.

아르군 강과 실카 강이 만나 흑룡강을 이루는 지점에 있는 네르친스크가 건설된 곳은 수백 미터의 고원 지대에 요새가 건설되어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개설되면서 도시가 축소되었지만 지금의 네르친스크는 시베리아로 진출하는 전초기지로 상당한 규모의 성체를 갖고 있는 요새다.

이제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비행선이 전해준 정보에 의하면 요새 안에는 수천의 병사들이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포도 처음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전장식 대포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위력이 있는 대포일 것이다.

특히 시비르군에게는 앞으로 계속 상대할 무기였다.

이종찬은 인명 피해를 최소화 하기위해 일단 사신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네르친스크를 방어하는 러시아군 사령관은 세르게이 이바노프 남작이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남작도 처음에는 정치범으로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30대에 네르친스크로 유형(流刑)되어 10년간을 보내다 복권되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남작은 이곳 네르친스크에서의 생활에 적응되었고 페테르부르크의 정치판에 염증을 느껴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이곳에 눌러 앉았다.

그렇게 되자 예카테리나 여제는 5년 전에 네르친스크의 군사와 행정권을 세르게이 이바노프 남작에게 주었다.

그동안 네르친스크는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튼튼한 성체를 지었고 도시도 정비를 하여 많은 발전을 하였다. 성에는 지금 5,000명의 군인들과 10,000명이 주민들이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남작은 자신이 만든 성루에 올라 백기를 들고 걸어오는 사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신들은 성문을 2km를 남겨두고 멈추어 섰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남작은 이들을 만나기 위해 성문을 열고 사신들과 같이 3명으로 구성하여 마중을 나갔다.

한참을 걸어가던 백작은 사신들 중 낯익은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푸가초프 백작이었다.

푸가초프 백작은 페테르부르크에 있을 때 아주 친하게 지냈었다.

짜르의 감독관인 드미트리가 작년에 하바롭스크로 모피를 수거하러 갔을 때 그가 반역했다는 것을 들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남작은 지인을 적으로 만나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세 사람은 푸가초프 백작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다가섰다.

푸가초프 백작도 세르게이 이바노프 남작이 다가오는 것을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푸가초프.”

“오랜만이네, 이바노프. 이렇게 만나서 되어서 아쉽네.”

“나도 동감이네. 하지만 이런 선택에 후회는 없네.”

“도대체 왜 그런 결정을 했는가. 자네 집안도 생각해야지.”

“이바노프 우리가 언제까지나 끌려 다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예카테리나 여제는 이제 너무 나이가 들었네. 사리분별을 못하면 물러나야 되는 것 아닌가. 짜르의 판단이 흐려지면 온 나라의 백성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네. 이젠 전쟁도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전쟁광에 섹스광은 진절머리 난다네.”

“그렇다고 반역을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보게, 이바노프… 나는 반역을 한 게 아니네. 나는 살기 위해서라도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우리들의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네.”

“아니, 푸가초프 백작!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짜르의 군대는 50만이나 된다네.”

“병사가 아무리 많으면 뭐하는가. 문제는 힘이 문제일세. 부실한 무기로 덤빈다면 아무리 많은 병사가 있어도 그것은 기름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네. 지금 우리와 같이 온 군의 화력은 자네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무기를 지닌 군대일세. 이바노프 남작 친구로서 권하네. 항복하시게. 내가있던 하바롭스크에서 벌어진 전투를 자네는 모르나. 2,000명의 병사들이 불과 30분도 안 되서 전멸을 당했네. 그 전투는 전투가 아니네. 일방적인 학살 이었어 다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전투였네. 그것도 내가 백기를 내걸어 그 정도에서 끝이 난 걸세.”

이바노프 남작도 드미트리로부터 하바롭스크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하여 들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바노프 남작은 푸가초프 백작을 잘 알고 있었다. 젊었을 적에 자신과 같이 전투에도 여러 번 참전하였다.

푸가초프는 용감한 장교였다. 그런 백작이 하는 이러한 말은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 한마디에 전의(戰意)를 접을 수는 없었다.

“이보게 이바노프 잘 결정하게 자네의 결정에 수많은 생명이 걸려있다네. 하바롭스크의 이반대위도 한 번의 잘못된 결정으로 30분 만에 2,000명의 목숨과 결국은 자신도 목을 매고 말았다네. 내가 자네의 결정을 돕기 위해 이들의 화력을 한 번 보여주겠네. 잠시 기다려보게.”

푸가초프는 옆에 대동한 통역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통역관은 헤드셋으로 본대의 이종찬 소령에게 연락을 하였다. 연락을 받은 이종찬 소령은 동행한 가―구 자주포가 부대 앞으로 나왔다. 통역관의 연락을 받은 푸가초프 백작은 이바노프 백작에게 말했다.

“이바노프 자네의 성벽을 바라보게. 포탄은 앞으로 3발이 발사된다네.”

이바노프는 푸가초프가 손짓으로 가리킨 성벽을 보면서 말했다.

“어디서 포탄이 날아온다는 것인가.”

“그냥 지켜보게.”

이바노프가 보니 지금 어디에도 대포가 보이지 않았고 가―구 자주포는 지금 5km 밖에 있었다.

이바노프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엔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성의 정면이 박살이 나면서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꽝꽝거리는 두 발의 포탄이 성벽의 상단을 때렸다.

포탄에 맞은 성벽이 흙이 무너지듯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성벽 위에 있던 수십 명의 병사들도 같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린 성벽에 깔린 병사들을 들어 올리고 병기들을 수습한다고 혼란스러운 네르친스크가 멀리 있는 이바노프 남작의 눈에도 보였다.

이바노프는 전율을 느꼈다. 짧지 않은 군 생활에 이렇게 위력이 있는 대포는 본 적이 없었다.

넋을 잃고 무너져 내린 성벽을 바라보는 이바노프를 보고 푸가초프 백작이 말했다.

“이보게, 이바노프. 저 폭탄 수백 발이 네르친스크에 떨어진다면 어찌되겠는가. 저들에게 성벽은 단지 돌무더기 일뿐이네. 내가 직접 격어보지 않았는가.”

이바노프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을 했다.

“말이라도 그런 말을 말게. 후! 문제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푸가초프는 이바노프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이보게, 이바노프. 나와 같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보세. 저들은 나에게 시베리아의 서부와 중앙에 나라를 만들라고 권하였다네.”

“그럼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 건가?”

“그들은 그들의 고토라고 주장하는 바이칼호 동쪽의 시베리아 그들의 말로 사백력만을 원한다네.”

그 말을 들은 이바노프는 생각을 하는 듯 잠시 침묵하였다. 잠시 침묵하던 이바노프가 푸가초프에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항복하면 우리들은 어찌 되는가.”

“이들의 계획은 동부 시베리아에서의 러시아 세력의 완전 철수일세. 아마도 이르쿠츠크나 더 서부로 이동을 해야겠지. 서부 시베리아는 사람이 살기 좋은 곳도 많지 않나. 우리도 굳이 이 추운 곳에 살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 말에 이바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바노프가 결정을 한 것 같다.

“잠시 기다려주게 내가 돌아갔다가 다시 나오겠네.”

“알겠네. 나도 돌아갔다가 자네가 나오면 다시 나오겠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본대로 돌아갔다.

이바노프는 돌아가고 나서 바로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3시간이 지나서야 이바노프가 다시 나왔다.

푸가초프가 그를 맞으러 나갔다.

“시간이 꽤 걸렸네. 어떻게 협의는 잘되었는가.”

“늦어서 미안하네. 자네가 제시한 문제로 논의를 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네. 우리가 결정했다네. 항복하겠네. 단 조건이 있다네. 우리를 전부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참여 시켜달라는 것과 이주를 하게 될 때 우리들의 재산들을 전부 갖고 갈 시간을 달라는 것일세. 그리고 그대의 부대와 같이 온 부대가 시내로 들어왔을 때 우리들 가족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일세.”

이 당시 점령군은 점령지를 약탈하고 방화와 강간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알겠네. 자네의 말을 대장에게 전하겠네.”

푸가초프 백작의 말을 들은 통역관은 이바노프의 말을 이종찬에게 전했으며 당연히 그의 부탁은 받아들여졌다

먼저 러시아 출신 시비르병사들이 입성을 하여 네르친스크를 무장해제를 시켰다. 수석총(燧石銃)을 비롯한 모든 무기들은 성의 정문 앞에 모아 놓았다.

이종찬은 일단 사냥꾼의 총도 모두 압수를 하라고 했다.

시비르군에 의해 도시가 정비된 후 이종찬 소령의 가온군이 러시아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네르친스크의 성 앞으로 진군을 했다.

네르친스크의 성 앞에는 5,000명의 러시아군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고 시베리아 군이 그들을 주위에 서 있었다. 그들의 주위로 많은 시민들이 나와 있었다.

이종찬 군이 도열해 있는 러시아군 앞으로 도착하여 섰다.

이바노프 남작은 러시아의 국기를 접어 이종찬 소령에게 전달을 하였다.

이종찬은 이바노프 남작의 결단에 경의를 표하였으며 이바노프 남작은 주민들의 안전을 부탁하였다.

간단한 의식이 끝나고 이바노프 남작과 푸가초프 백작을 동행한 가온군은 시청을 향하여 행군을 하였다.

보무당당하게 들어오고 있는 가온 군을 보기 위해 연도에는 많은 시민들이 나와 있었다. 이윽고 시청에 들어선 이종찬은 네르친스크의 현황에 대하여 물었다.

네르친스크는 병력이 5,000명이고 주민이 20,000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종찬은 앞으로 진격할 밝달호까지 있는 요새나 시에 대하여 물었다.

이바노프 남작이 설명을 했다.

인고다 강과 치타 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치틴스크(치타)는 코사크 요새에서 출발하여 아직도 요새에 불과하고 주둔해 있는 병사도 수백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큰 도시는 셀렝가 강과 우다 강의 합류점에 건설되어 1775년 시로 승격된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였다.

이곳은 지금의 네르친스크 정도는 되지 않지만 3,000명 정도의 병사와 10,000명의 주민들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바노프 남작은 자신에게 시간을 줄 것을 부탁했다. 치틴스크(치타)요새는 자신의 관할 요새이므로 별문제 없이 접수가 가능하고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의 시장은 자신과 친분이 있어 설득을 해 보겠다고 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도 자신들과 같이 대부분이 유형자 출신들이기 때문에 러시아에 보이지 않게 불만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거였다.

사백력 평정 287

이종찬은 즉석에서 승낙을 하였고, 이바노프 남작과 푸가초프 백작은 도시가 안정되면 바로 출발을 하기로 하였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비르군 100명이 동행을 하였다. 두 사람은 1달 만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100명의 인원이 추가되었다.

치틴스크(치타)요새의 군 지휘관과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시의 시장 일행이었다.

이종찬은 이들을 환대를 하였고 이들은 가온의 정책에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이로써 가온이 목표한 밝달호 동안의 동시베리아 점령은 끝이 났다.

주민들은 추후 이동을 하기로 하고 병사들의 군수물자를 싣고 베르흐네우딘스크로 출발을 했다.

중간에 있는 치틴스크의 병사들도 모두 대동을 하고 베르흐네우딘스크에 도착하니 러시아 출신 시비르병사들이 10,000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가온군과는 달리 기병들로 천 명 있었다.

이종찬 부대가 목적지인 베르흐네우딘스크에 도착하기 전에 네르친스크와 치틴스크에는 이미 가온의 병사들이 주둔을 시작하였다.

네르친스크의 성벽은 이미 보수가 끝나있었다. 다른 요새들과는 달리 네르친스크에는 그동안 가온군에 동화된 러시아인 10명이 시정을 보좌하기 위해 군과 같이 들어왔다. 사백력의 짧은 농사철로 주민들을 독려하여 일상 생활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종찬이 도착한 베르흐네우딘스크는 네르친스크 정도의 크기였으나 조금 더 교통의 요충지로 인한 탓인지 성주변이 조금 더 발달해 있었고 주변에 군사들을 조련하기 좋은 넓은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이종찬은 10,000명의 시비르군을 조련할 훈련소 건설을 지시하였고 이제는 시비르군이 된 병사들은 빠르게 막사를 건설했다.

이들이 막사를 건설하는 동안 가온군은 밝달호까지 진군하였다.

“이곳이 우리 조상들의 기원지인 밝달호구나. 참으로 아름답구나.”

이종찬이 바라보고 있는 밝달호는 물이 너무 맑아 햇빛이 미치는 곳까지 바닥이 보였다.

이종찬은 준비해온 고무 보트를 호수에 내려놓고 알혼섬으로 보트를 몰았다. 보트를 몰아 섬으로 가는 동안 이종찬 소령은 주변의 경관을 보면서 감탄에 감탄을 하였다. 과연 ‘시베리아의 진주’라고 불릴 만한 경치였다.

이종찬이 도착한 알혼섬의 중앙에는 1000미터가 넘는 산이 있으며 그 산은 거의 수직으로 융기되어 있어 마치 거대한 석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섬에는 약간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으나 이들의 방문을 그저 바라보고 만 있었다.

이종찬은 수백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벽의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으로 이 알혼섬의 이 석벽은 우리 민족의 성지로 가꾸어질 예정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밝달호 주변의 경관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사진에 담았으며 그 사진은 바로 가온본부로 보내졌다.

이종찬은 금년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원정을 끝낼 계획이었다.

아직 6월 중순이었기 때문에 이종찬은 일단 이르쿠츠크와 안가라 강 연안에 있는 브라츠크까지 점령하기로 했다.

여기만 정리되면 가온의 사백력 고토 회복은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이종찬은 가온군 500명과 훈련받은 시비르군 1,000명을 인솔하고 다시 행군에 들어갔다. 이 행군에는 푸가초프 백작과 이바노프 남작이 동행하기로 했다.

밝달 호를 횡단하기로 했다.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에는 제법큰 배들이 있어서 병력 수송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가―구 자주포를 싣고 가기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자주포는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에 두고 장갑차만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1,500명의 병력은 20여 척의 배를 타고 가기로 하고 모든 인원이 배에 승선하자 배가 항구를 벗어나 호수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이 출발을 하고 나서 장갑차가 출발을 했다.

장갑차는 일단 도시를 벗어나서 강으로 들어갔다. 100km를 내려가자 바이칼 호수가 나왔고 다시 전진을 하자 밝달 호에서 유일하게 발원하는 안가라 강이 나왔다. 이르쿠츠크는 이 강에서 60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강의 양안에 도시가 건설되어 있었다.

이종찬은 일단은 시청이 있는 강의 서쪽에 상륙하였다. 이들의 상륙을 지켜보고 있던 이르쿠츠크는 발칵 뒤집혀졌다.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공략을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대부대가 지금 상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일은 싱겁게 끝이 났다.

부대가 상륙을 마치고 전투배치를 마치자 푸가초프 백작과 이바노프 남작이 나서서 이르쿠츠크로 들어가서 협상을 하였다.

사백력 평정 291

가―구 자주포는 없었지만 준비해간 박격포와 장갑차에 탑재된 화력 시범을 본 이르쿠츠크의 시장은 큰 문제없이 푸가초프 백작과 이바노프 남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동참하게 되었다.

이 당시 작은 요새에 불과했던 브라츠크도 바로 항복을 해왔다.

본래부터 러시아의 짜르에 불만이 있었던 이들은 전투를 벌여 이르쿠츠크를 방어하는 것보다는 푸가초프 백작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한 것이다.

이들의 생각은 소규모전투는 모르겠지만 도시 전체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해서 이긴다 하여도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 이들에게 더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안가라 강 서안에 있는 이르쿠츠크의 항복은 이종찬 소령의 배려로 푸가초프 백작이 받기로 했다. 지금부터 서부 시베리아는 이들의 영토이기 때문이었다.

이르쿠츠크와 브라츠크의 병사들은 10,000명의 병력이었다.

이들도 이전과 같이 모든 병장기를 압수하고 가온의 지휘로 군사 훈련에 들어갔다. 가온은 새로이 편성된 시비르군을 위해 15,000정의 제이스 소총이 공수되었으며 대포만큼은 기존의 러시아 대포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푸가초프 백작과 협의하여 안가라 강과 예니세이 강을 경계로 영토를 확정하였으며 두 강의 소유권과 밝달 호의 소유권을 가온의 소유로 하고 원주민들의 사냥은 국경 경계를 넘어도 각국이 문제 삼지 않기로 하는 시베리아 왕국과 가온 무역이 최초의 계약을 맺게 되었다. 두 강은 앞으로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어 엄청난 양의 전력이 생산될 것이고 가온은 이를 이용하여 사백력 발전에 밑거름을 그릴 계획이었다.

이종찬―푸가초프조약은 시베리아의 국경을 확정짓는 조약이었으며 이 계약서는 후일 장준하의 추후승인을 거쳐 완성을 본다.

이 계약으로 인하여 안가라 강 동안에 있는 이르쿠츠크의 요새와 그동안 점령한 지역의 러시아 주민들의 대대적인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 러시아인 중 훈련을 받고 있는 시비르군과 농사를 마무리 지을 인원을 제외한 사백력의 모든 인원이 이르쿠츠크로 이동을 했다. 이들의 이동은 3개월이 걸렸으며 추위가 오기 전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수확물을 모두 거두어 이동을 하게 되었다.

이제 사백력은 훈련을 받고 있는 20,000명의 병사들을 제외하면 러시아인은 안가라 강과 예니세이 강 너머로 완전히 소개되었다.

앞으로 시비르왕국의 발전은 지금 훈련을 받는 20,000명의 병력과 지도부의 정치력에 따라 달라질 예정이었다.

가온군의 교관들과 1,000명의 교육받은 시비르군은 20,000명의 병력을 강도 높게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 사이 이들의 소문을 들은 중부 시베리아의 요새들이 속속 항복해 오고 있어 푸가초프 백작을 비롯한 시베리아 정부 지도자들을 기쁘게 해주고 있었다.

이종찬은 가온 본부에 치틴스크(치타) 남동쪽 300km 아르군 강 유역에 있는 발레이 지역의 금광 채굴을 위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가온에서는 즉각 지질 전문가를 비행선으로 공수시켜 주었고 파견된 이 들 지질 전문가들은 얼마 되지 않아 대형 광맥을 찾아내었다.

이 광산은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매장된 광산으로 골드러시의 대표 격인 캘리포니아 지역의 몇 배에 이르는 양이 매장되어 있었다.

기후문제로 채굴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지만 이 광산으로 가온의 금 보관 계획 목표를 한참 높여 놓았다. 이전에 러시아는 시베리아에서 채굴되는 막대한양의 금과 은으로 황실의 엄청난 사치를 누렸으며 1800년대 후반기 그들이 함대를 만들고 운영하는 자금으로 사용 하였었고 러시아는 시베리아 지방에서 나오는 금 등 지하자원으로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이 무렵 러시아는 흑해 연안의 베사라비아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연합군과 드네스트르 강을 사이에 두고 계속하여 소모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 사령관 수보로프 백작은 겨울 내 병력을 다시 모아 오스만 제국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는 병력을 시베리아 방향으로 보낼 수 없었다.

작년 7월 이즈마일 요새의 폭격으로 만든 전황(戰況)으로 가온의 시베리아 계획은 가온의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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