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01)

변화의 시작

1792. 4. 10. 북한산성(北漢山城) 행궁(行宮).

그동안 조선의 상권도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송상부터 내상에 이르기까지 도고상업을 금지되면서 자유 경쟁 체제가 도입된 이후 각자의 상단들은 내실을 착실히 다져 나가면서 서서히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자유 경쟁을 하게 되자 상단은 자연스럽게 성장을 하게 되었고 이 성장은 물건의 매매에서 벗어나 직접 제조업에 뛰어들 준비들을 하게 되었다.

조선의 공업은 가내수공업 수준이었고 그것도 대부분이 진상품을 만드는 정도의 규모였었다.

상업의 발전으로 물품의 유통이 활성화되자 가내수공업 수준의 공업도 점차 확대가 되기 시작하여 초기 수준의 소규모 공장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조선에서 처음으로 급여 소득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온의 상업을 전담하는 최성용은 이러한 보고를 받자 물류 유통 방법을 혁신할 순간이 왔음을 알았다.

지금까지는 육상 운송 수단은 사람의 힘이나 우마차를 이용하는 것이 전부였었다.

최성용은 북한산성으로 출장을 가서 양일현 상단의 양일현 사장을 불렀다.

“어서 오십시오, 양 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녕하셨습니까? 사장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위국공(衛國公) 합하께서도 강녕하신지요?”

“예, 합하께서도 잘 계십니다. 안 그래도 양 사장님 말씀을 자주하십니다.”

“미천한 놈을 이런 자리까지 오르게 해주신 것 만해도 은혜가 하늘같은데 제 생각을 해주시다니 백골난망이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 둘째 아들놈이 합하께 올리는 편지입니다. 그놈이 요즘 한글을 깨우쳐 이렇게 글을 써주네요. 선물은 뇌물방지법으로 드릴 수가 없다고 하니 이렇게 못 쓰는 글이지만 써주니 합하께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난번 제주에 가니 아들놈이 주었습니다.”

최성용은 양일현의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편지를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어떻게 보면 위국공이 양일현에게는 평생의 은인일 것이다.

“그렇습니까? 당연히 전해드려야지요. 합하께서도 아드님을 대견해하실 겁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차를 마시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양일현은 오늘 부른 이유가 궁금하였지만 말이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최성용이 본론을 꺼냈다.

“잠시 밖으로 나가시죠.”

최성용과 양일현은 행궁의 대전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조금 전에 없던 것이 서 있었다.

“오늘 양 사장님을 오시라고 한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이리 오시죠.”

그것은 손수레와 인력거였다. 손수레를 처음 본 양일현은 그 생김새가 물건을 옮기는 데 쓰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손수레라고 합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물건을 옮기는데 편리한 물건입니다. 한 번 해보시죠.”

양일현이 손수레의 앞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기존의 마차와는 아주 다르게 편리했다.

양일현이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무로 만든 바퀴입니다. 안에는 이러한 모양의 내피가 있습니다.”

최성용은 옆에 분해되어 있는 손수레의 부품을 일일이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었다.

그제야 구조를 이해한 양일현이었다.

“이 손수레는 물건을 옮기는데 아주 편리하게 물건을 운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양을 하면 사람을 탑승시켜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최성용은 그러면서 옆에 있는 인력거를 가리켰다.

“아, 참으로 편리한 기구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태우고 운송을 하면 상당히 도움이 되겠습니다. 저보고 이것을 팔라고 보여주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이것을 양 사장님이 직접 만들어 파십시오.”

“예? 저에게 주신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저는 이것을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저희들이 처음에는 모든 부품을 공급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단순하게 조립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러다 차츰 실력이 쌓이면 저희들이 공작 기계를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생산하셔도 됩니다.”

양일현은 꿈만 같았다. 처음 중국어를 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들과 광저우에 가서 쌀을 구매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사업을 하기 시작하더니 이런 기회가 또 찾아온 것이다. 양일현은 최성용을 보고 말했다.

“해보겠습니다. 아니 꼭 해내겠습니다. 위국공 합하와 사장님의 배려에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저에게 주어진 일 반드시 만들어 내겠습니다.”

“예, 그러셔야지요. 그런 생각만 계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공해야 다음이 또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장님이시라면 해내실 겁니다.”

최성용과 양일현은 다시 행궁으로 들어가 사업 계획을 검토하기로 했다.

양일현이 부품 생산을 하려면 그 생산 공장은 원자재 수급이 편리한 청진 공업 단지에 두기로 하고 먼저 조립 공장은 전국으로 물건 수송이 유리한 지금의 영등포 지역인 부평부에 건설하기로 했다.

손수래 공장은 3개월 후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양일현은 그동안 공장 설립에 필요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양일현의 공장은 여의도가 바로 보이는 곳에 지어졌으며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기초를 높게 하여 공장 건물이 상당히 커보였다.

양일현은 공장의 기초에 조선에서 처음으로 시멘트를 사용하고 외벽은 가온 벽돌에서 생산하는 벽돌로 공장을 지어 조선 최초의 근대식 공장을 지었다.

북한산성에서는 지금 마지막 기수의 용호영 군관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5기째인 용호영 훈련은 중반을 넘어서인지 현대의 장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동안 앞선 기수들의 말을 들으며 이들은 반은 훈련된 상태였다.

과연 조선 제일의 용호영이다. 용호영의 훈련은 작년 3월부터 시작한 훈련이 15개월 만인 오는 5월 말로 종료가 된다. 앞으로는 기수별로 돌아가면서 정신 교육과 사격 훈련을 비롯한 근대 전투 훈련을 주기적으로 실시할 예정이고 정조도 이들의 훈련에 대만족을 표시했다.

용호영은 정조 임금이 각별히 생각하는 부대였고 특별대우를 할 정도의 부대로 북한산성 훈련을 받은 이후 이전과는 다른 완전한 경호 부대로 거듭 태어났다.

정조 임금에게 가장 필요한 신변에 대한 위험을 일차는 해소된 것이다.

짧은 훈련이 얼마의 성과가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겠지만 단체 훈련이 주는 일체감은 많은 문제들을 충분히 덮을 정도였다.

조선에서 무관들이란 당파에 관계없이 문관의 하위직급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이 숭문을 국시로 하면서 개국한 이후 무관에게 문관과 동일한 대우를 한 적이 없었다.

그저 특별한 한두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은 조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당과는 한 발짝 물러서 있었으며 조선의 무관들은 어쩌면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인지도 몰랐다.

최고의 직급이 정3품 절충장군에 불과한 무관은 애초부터 문관과 동격이 될 수 없는 편제였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가온군은 이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용호영은 육체적인 훈련만 받은 게 아니다.

무관도 자신만 열심히 한다면 최고위직에 오르고 국가대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정신 교육도 병행한 것이다.

가온은 이러한 어찌 보면 무력해진 조선의 무관들에게 숭무 정신을 함양시키는 정신교육을 3개월간의 북산산성훈련에 많은 주안점을 두고 교육했다.

그래도 조선의 용호영인데 무력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고 가온은 이런 용호영에게 동기부여를 하였고 그것이 훈련을 극대화시켜 이제 마지막 기수들이 훈련을 하고 있는 연병장의 열기는 정말 뜨거웠다.

최성용은 양일현을 면담하고 돌아와 위국공에게 그의 둘째 아들이 쓴 편지를 전해 주었다. 편지의 내용은 짐작대로 고마움을 써내려간 편지였다.

연필로 또박또박 쓴 편지를 본 장준하는 시간 여행 때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각했다. 둘 다 결혼할 나이였었지만 군 복무 때문에 항상 떨어져 생활해야 했던 아이들이라 더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시간 여행 후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있는 와중에도 가끔씩 아이들이 생각나 우울해지고는 했다.

‘양성찬 올림’이라고 쓴 편지를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편지지에 떨어졌다. 그것을 누가 볼세라 얼른 닦은 장준하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장준하는 최성용을 불렀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최성용에게 장준하가 말했다.

“최대령 양일현 사장의 집을 알고 있나?”

“지금을 모르지만 구영진 시장께 알아보겠습니다. 한번 찾아가 보시게요?”

“그래, 한번 알아보게.”

위국공의 집무실을 나선 최성용은 구영진에게 전화를 하여 양일 현사장의 집을 수배를 했다. 다행히 양일현 사장의 사택은 바로 찾았다.

‘출륙 금지령’으로 본토와의 내왕이 중단된 지금 유일하게 오갈 수 있는 사람이 허가받은 상인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사람이 양일현이었다.

양일현은 돈이 조금 모이자 제주도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집을 새로 지었고 그 집이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벽돌로 지은 양옥집이었다.

넓은 마당이 있는 그 집은 주변의 집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서 제주시민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장준하는 최성용의 안내로 양일현의 집을 방문했다.

위국공의 방문을 통보받은 제주시는 이미 양일현의 집에 공무원을 파견시키고 있었다. 장준하는 자신이 갈 때까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말라고 하여서 양일현의 식구들은 높은 사람이 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몰랐다.

집에는 다행히 양일현의 부인과 3명의 아이들이 모두 있었다.

양일현의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찾아온 용건을 말하자 아이들이 나왔다.

아이들도 앞에 있는 처음 보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짐작했다.

“네가 양성찬이냐?”

장준하는 아이들 중 둘째로 짐작하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정복을 입고 승용차를 타고 온 장준하를 본 아이들은 몸이 굳어 말을 하지 못하고 눈만 굴리고 있었다.

그래도 둘째가 그들 중 용감하였다.

“제가 양성찬인데요. 근데 누구세요?”

“그러냐? 반갑구나. 난 네가 편지를 쓴 위국공이라는 사람이다.”

아이들은 너무 놀라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준하를 바라보았다.

자기들 집에 이렇게 높은 사람이 찾아올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양일현의 부인이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트릴 정도로 놀랐다.

잠시 소란이 있었고 장준하가 마루에 오르자 아이들과 양일현의 부인이 앞에 앉았다.

장준하는 양성찬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양성찬은 눈이 초롱초롱한 게 아주 똑똑해 보였다.

“성찬이는 올해 몇 살이냐?”

“올해 9살이고요, 제주초등학교 2학년입니다.”

제주에서는 작년부터 정규학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 2학년이 성찬이가 나에게 편지를 다보내고 고마워서 찾아왔다.”

“아니요. 고마운 것은 우리들이에요.”

“아니. 너희들이 왜 고맙니?”

“아버지께서 항상 위국공 합하의 은혜는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엄마가 매일 아침마다 위국공 합하께서 건강하시라고 물 떠놓고 기도하고 있는데요.”

그 말을 들은 장준하가 양일현의 부인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부인은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맙습니다, 부인.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니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릴 말이 없습니다.”

그러자 양일현의 부인이 고개를 들고 말을 했다.

“아니옵니다. 합하께서 저의 집안에 베풀어 주신 은혜가 하해와 같사온데 제가 해드릴 게 없사옵니다. 그래서 하는 것이니 너무 질책하지 말아주시옵소서.”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것은 양 사장님이 하신 일에 대한 보상입니다. 열심히 하신 분에게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장준하는 양성찬을 위해 준비해간 학용품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받아들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잠시 앉아 있으면서 양성찬과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다음에 다시 온다는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는 길 내내 장준하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시간 여행을 하고 난 후 처음으로 편한 마음을 갖게한 만남이었다.

1792. 4. 15. 창덕궁 선정전.

정조는 지난1791년 여름 특별히 평안감사(平安監事) 홍양호(洪良浩)에게 명하여 선조 때 명나라에 동방문사(東方文士)로 이름을 날리며 한호(韓濩)의 글씨와 최립(崔.)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던 차천로(車天輅)의 유작들이 그동안 문집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알고 문집 발간을 명하였다.

이를 위해 내각(內閣, 규장각)에서 교정을 보게 하였고 몇 개월 후 평안감영에서는 정조가 발간을 명하였던 책을 필서체(筆書體)목활자(木活字)인 기영목활자(箕營木活字)로 인쇄가 되어 오산집(五山集)이라 이름을 붙여서 진상되었다.

오늘은 홍문관 수찬 정약용(丁若鏞)이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정조 자신에게 올라왔다.

정조는 1776년 청에 간 사신을 통하여 ‘고금도서집성’이란 백과사전을 들여왔다.

정조는 이를 정약용에게 주어 성제 연구에 참고하게 하였다.

이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안에 1627년 예수회 선교사와 명의 왕징이 지은 기기도설(奇器圖說)이 있었다.

정약용은 이를 참고하여 서양식 축성법을 연구한 성제(城制)와 거중기(擧重機)를 만드는 이론을 제공한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쓰게 된 것이다.

정조임금은 이를 크게 기뻐하여 정약용을 불러 치하하였고 다시 별무사 전수 서이수를 불러 정약용과 함께 거중기를 만들어서 지금 별무사에서 쌓고 있는 여의도의 제방 공사에 활용하게 하였다.

정약용과 서이수는 여의도 제방 공사장에서 직접 거중기(擧重機) 4대를 제작하여 현장에 활용하였다. 10년을 예정으로 천천히 하려던 제방 공사가 1년의 공사로 상당한 진척을 이뤄 이미 기초를 다 쌓고 여기에 더하여 거중기(擧重機)를 활용하니 공사 진척이 엄청나게 속도가 나기 시작하였다.

서이수는 영등포쪽 하천을 파서 홍수에 대비하여 여의도를 분리하는 공사를 하고 있으며 여기서 나오는 흙으로 장마 때 상습 침수 지역인 영등포 방면에 제방을 더 높여 쌓는 공사를 겸하여 시공하고 있었다.

정조는 이미 수원에 화성(華城)을 쌓을 것을 이미 1789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화산으로 이장을 하면서 수원에 대한 장기적이 계획에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 정약용이 만들어 바친 기중가설(起重架說)의 거중기를 만들어 여의도 제방 공사에 사용을 해보니 그 쓰임새가 놀라웠다. 정약용은 기중가설(起重架說)에 한 사람의 인력이 이 거중기를 이용하면 240kg까지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하였는데 과연 이 거중기를 이용하여 들어보니 그 힘이 그대로 나왔다.

이 보고를 들은 정조는 정약용을 불러 다시 한 번 더 크게 치하했다. 이 거중기 또한 수원부에 성을 축성하는데 도움이 될 것은 불문가지였다.

1792. 4. 20. 가온 군수 산업 단지 엔진 개발팀.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던 채굴 장비용 증기기관과 발전용 증기터빈, 그리고 3,000톤급 함선용 디젤엔진이 완성을 보았다.

이 세 엔진의 개발은 이전의 엔진 개발과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 특히 증기기관은 금이나 은 광산 채굴 장비를 에 투입하여 광부들의 안전사고도 예방하면서 생산성 증대에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고 특히 발전용 증기 터빈엔진은 개척지발전에 많은 기여를 할 것이다.

최성용은 채굴용 증기기관을 연해주와 사할린 그리고 호주로 비행선을 이용하여 각 광산으로 보냈다.

이 세 곳은 이미 화력 발전을 하기 위한 시설을 모두 갖추고 발전소에 필요한 증기 터빈엔진이 개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 개발되는 엔진이니만큼 발전용량이 1㎿급에 불과하였지만 각 지역에 전원을 공급하기에는 충분하였다.

특히 동명시(東明市)에는 열병합발전소가 건설되어 있어서 발전소의 준공은 다른 곳과는 달리 그 쓰임새가 2배였다.

만들어진 증기터빈도 즉각 수송이 되었다.

그동안 1척의 비행선이 더 제작되어 2척으로 늘어난 비행선은 각각 101금강호와 102금강호 같이 일련번호를 부여하기로 했으며 평균시속 150km의 속도로 북미지역의 상항(桑港)까지 4일 반나절의 비행이 가능할 정도로 비행선 운용이 숙달되었다.

상항에는 아직까지 화력 발전소 시설이 준비가 되지 않아 주민들의 이주가 좀 더 늘어나면 그때 발전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증기터빈과 대형 디젤엔진이 개발되면서 그동안 준비한 청진과 동명시를 지나 하바롭스크를 잇는 노선과 호주의 신부산(新釜山, 멜버른)과 고선지시를 잇는 노선이 일차로 철도 노선 공사가 시작이 되었다.

레일의 폭도 영국식 표준궤도인 1.435m(4’8½”)를 우리식으로 미터법에 맞게 1.5m로 규정했다.

청진에서는 그동안 송유 관공사와 연계하여 상당한 거리의 레일을 깔고 있었기 때문에 기관차가 만들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증기터빈의 개발은 가온의 사업에 접목되어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불을 밝히는 전기를 군사용 발전기에 의지하거나 광산 개발이나 채굴장비에 사용되는 동력원을 대형 증기기관으로 대체하자 이전과 비교할 수없는 용량의 동력원은 특히 광산 개발과 채굴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화순 항에 있는 전함 수리소에 비치된 증기터빈과 여러 함정의 증기터빈엔진을 모방하여 만들었으나 일일이 모든 부품을 수작업으로 깎고 주물로 하나하나 새로 만드는 작업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앞으로의 엔진제작은 큰 무리 없이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되었다.

1번 엔진을 제작하면서 많은 부품을 동시에 제작을 했기 때문에 추가 생산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기관차가 목표였다.

엔진 개발팀은 두 가지 모델의 열차를 만들기로 했다. 하나는 증기터빈을 이용한 증기 기관차였고 또 하나는 디젤엔진을 장착한 전기식 디젤 기관차였다.

엔진이 개발 되고난 후의 기관차 개발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단지 증기기관차의 동력 전달 장치 문제로 잠시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것은 곧 해소가 되었다.

앞으로 1년 이내 기관차의 시제품 생산을 목표로 개발에 들어갔다.

1792. 4. 25. 창덕궁(昌德宮) 선정전(宣政殿).

정조는 대소 신료들이 있는 편전에서 용상을 두드리며 대노하여 신료들을 질책하고 있었다.

“아니, 그자가 과인의 신하인가 아니면 파당의 신하인가. 어찌 그런 작당을 벌이고 있는가. 정균관의 장의라는 자가 무슨 의도로 이런 행동을 하였는가. 이는 과인을 능멸하고 조정을 자신의 파당으로 채우자는 것이 아니요.”

선정전에 모인 수많은 신하들은 정조의 질책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정조는 지난 정조 13년(1789년) 12월에 그동안 노론이 독점하고 있던 이조전랑의 전랑통청권(銓郞通淸權) 폐지하면서까지 노론의 권력독점을 막고 남인의 등용을 이끌어 왔었다.

전랑통청권이란 조선 시대에 관리들의 추천권을 말하며 전랑이란 이조(吏曹)의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함께 이르던 말이다. 조선시대는 관원을 천거·전형(銓衡)하는 권한이 이조(吏曹)에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낭관인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에만 맡겼다.

이토록 관리의 임용에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직책으로 전랑(銓郞)이라고 불렀다.

이조전랑은 낮은 직급에 관계없이 삼사 인사권을 주관하게 되어 큰 실권을 잡았다.

이조전랑에는 이렇게 독점적 권한을 누렸으며, 그 후임도 전랑만이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선조 때 조선시대 당쟁을 초래한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분쟁도 바로 이 전랑 추천에서 비롯되었을 정도로 막강한 자리였다.

정조는 이러한 이조전랑의 전랑통청권(銓郞通淸權)을 폐지하여 조정의 관리 추천권을 재상에게 맡겨서 서인독점에서 남인의 등용을 유도하였다.

그런데 오늘 이것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난 것이다.

관리가 아닌 유생들의 상소는 성균관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성균관의 오늘날 총학생회장격인 장의(掌儀)만이 모든 유생들의 상소를 관리하였으며 장의(掌儀)의 동의 절차를 거쳐야만 승정원에 봉입할 수 있었다.

이 동의 절차를 근실(謹悉)이라하며 갑술환국(숙종 20년(1694년)에 인형왕후 복위 문제로 일어난 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사건)이 후 남인의 근거지인 영남 유림의 상소를 봉쇄하기위해 대대로 서인들이 장의(掌儀)의 직책을 맡아왔었다.

성균관의 장의는 이번에도 영남에서 올라온 상소를 문제가 있다 하여 승정원에 봉입조차 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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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영남의 남인들은 남인출신 수찬을 지낸 김한동(金翰東)을 내세워 단독으로 상소를 하여 이 사실이 정조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정조는 성균관에 있는 영남유생들의 상소를 가져오라했다.

그 상소는 소두 이우가 주동이 되어 10057명의 유생들이 연명한 만인소(영남만인소)였다. 상소의 내용은 임오의리(壬午義理)에 관한 내용이었다.

영남만인소는 노론 벽파 유성한(柳星漢)이 지난 3월 도산서원에서 치러진 별시를 문제 삼아 정조가 경연에 참여하지 않고 쾌락에만 힘쓴다며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영남 유생들이 이에 반박하여 올린 상소로 사도세자가 죽은 지 30년 되는 해인 올해 사도세자의 신원을 회복해 주자는 상소였다.

이러한 상소를 문제가 있다하여 아예 승정원에 봉입조차 하지 않은 것이었다.

정조는 아무리 화가 났지만 성균관의 장의를 벌 줄 수는 없었다.

영조의 유지로 사도세자의 신원 문제는 정조 자신이 왕으로 있는 한은 풀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었으나 이 영남만인소는 정계의 엄청난 파급을 몰고 왔다.

정조는 4월 27일 소두, 이우 등을 불러 편전에서 소의 내용을 직접 읽게 하고 그들의 용기를 치하하였으나 아직 힘이 부족한 정조는 노론을 직접적으로 치죄하지 못했다.

정조는 상소를 갖고 온 소두 이우와 영남 유생들을 격려하며 환향을 종용하였다.

이 상소가 받아들이지 않자 영남 유생들은 다시 10368명이 연명한 2차 영남만인소를 상소하여 더욱 격렬하게 주장했다. 정조는 이들의 말이 장하다고 계속 칭찬은 했으나 노론의 눈치 때문에 영조의 금령과 자신의 즉위교서를 들어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노론은 얼마 전 자파의 윤구종이 경종의 비인 단의왕후의 능을 지나면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아 이 문제가 탄핵이 되자 노론을 믿고 건방지게 행동하는 윤구종을 정조가 직접 문초하여 잘못을 시인을 받았고 유배형을 결정하였고 윤구종은 이때 맞은 곤장의 장독으로 죽는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의 의견 차이로 이때부터 노론 내부에서도 본격적으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분열하게 된다.

영남의 유생들이 노론을 향한 회심의 일격이 적중한 것이다. 이로써 임오의리(壬午義理)는 정국의 현안으로 대두되었으며 앞으로의 정국 운영에 가장 큰 화두가 되었다.

1792. 5. 2. 제주도 주민교육 훈련소.

제주 출신 병사들 중 1년 동안 조교로 주민 교육을 담당하면서 간부 교육을 받던 1,000명의 병사들이 오늘 부 사관으로 임용되었다.

“부대 차렷. 합참의장님께 대하여 받들어 총.”

“충성!”

임용된 부사관을 대표하여 고진성하사가 대표로 병력을 지휘하였다.

단상에는 합창의장 이형구 대장과 부의장 송기훈 상장 등 전군 주요 지휘관들과 내외 귀빈들이 참석해 있었고 옆에 있는 연병장 상단에는 임용되는 부사관들의 가족들이 이들의 임용을 축하해 주기 위해 나와 있었다.

후보생들의 인사를 받은 이형구가 훈시를 하기 위해 단상에 섰다.

“귀관들은 조선 출신으로는 최초로 오늘 부사관으로 임관을 하는 것이다. 앞으로 귀관들 후배들이 귀관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갈 것이다. 여러분들이 가는 길은 전부 새로운 길이 될 것이고 여러분들의 행동은 전부 후배들의 귀감이 될 것이다. 우리는 군인이다. 군인은 나라에 충성하고 명예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앞으로 군에 남을 여러분들은 주변의 어떠한 유혹에도 초연해야 하고 어떠한 감언이설에도 넘어가면 안 된다. 오로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동료들과 생사를 나누고 부하들에게는 자애로운 상관이 되어야 한다. 본관은 오늘 임관하는 부사관들 중에 반드시 최고 지휘관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여러분의 임관을 축하한다.”

이형구 의장의 훈시가 끝나자 내외 귀빈들에게 인사가 있었고 부모님들과 친지들이 내려와 계급장을 달아 주었다.

많은 예식의 절차를 마치자 사회자가 임관식을 마친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1,000명의 임관된 부사관들이 모자를 날리고 환호성을 울렸다. 서로서로를 축하해 주고 격려해 주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형구 대장을 비롯한 귀빈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단상을 내려갔다.

임관된 고진성 하사를 포함한 1,000명의 부사관들은 이제 각지로 파견되어 군의 중간 간부로 복무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최초로 임관된 간부로 많은 일이 이들 앞에 펼쳐질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 조선을 개혁하고 백성들을 변화시킬 주체 세력으로 커나갈 것이다.

이들이 자대에 배치되어서도 앞으로의 일을 위해 계속된 교육이 실시될 것이다.

위로 정치적인 문제와 조정의 문제는 시간 여행을 한 가온이 담당할 것이고 이들을 비롯하여 제주에서 교육받은 조선 출신 사람들이 백성들이 교육과 변화를 담당할 것이다.

특히 군 간부 교육을 받은 부사관 출신의 간부들이 백성들의 교화에 중심 업무를 담당할 것이다.

3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전원이 배치 받은 자대로 가기위해 화순 항에 집합을 하였다.

이들 중 가장 많은 인원이 호주로 배치가 되었다.

호주는 지금 호주 원주민의 교화를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교화된 인원이 지금은 10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1년 정도 제주에서 조선 백성들을 교육시킨 경험이 호주 원주민들의 교화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홍병화 사관학교장과 이들을 교육시킨 교수들의 전송을 받으며 각자의 배에 오른 부사관들이 드디어 화순 항을 출발했다.

선착장에서 이들을 환송하는 많은 가족들은 울기도 하고 손을 흔들기도 하면서 이들의 장도를 축하해 주었다.

고진성은 연해주에 배치가 되었다.

교육 중 연해주는 지금 러시아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전쟁 중이라는 것을 들었다.

전쟁은 곧 군이 가장 필요로 하는 곳으로 고진성은 무섭기는 했지만 북부군에서도 최전방을 자원했다.

고진성의 생각으로는 군이 가장 필요로 하는 전장이자신의 미래를 보장받고 남보다 앞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000명의 임관 동기 중에 10명의 동기들이 고진성과 같은 생각으로 연해주 최전방 부대에 자원했다.

고진성과는 다르겠지만 각자의 임지로 떠나는 배에 승선한 1,000명의 부사관들의 마음에는 각자 큰 꿈이 있었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제주민의 관직 등용을 꺼려하였고, 이후로도 출륙금지령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제제로 관직에 임용되기기 어려웠다.

그나마 급제를 하여 등용이 되어도 파당이 약하거나 학문적인 배경이 없어 고관으로 올라가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런 이유로 양반이었지만 과거 공부는 거의 포기한 제주의 양반 자제들이 이번 간부 후보생에 대거 지원하였고 제주 출신 간부들은 앞으로 군에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들 이후로도 인구에 비례하여 군으로 진로를 정하는 제주 출신들이 많았고, 이들은 군에서도 서로를 챙기면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후일 숙군의 대상이 되어 많은 간부들이 옷을 벗기도 했지만 제주 주민들이 갖는 군에 대한 생각은 조선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각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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