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광저우
1792. 3. 25. 일본 나가사키 가온 무역상관.
나가사키 가온 무역상관에 몇 사람의 방문이 있었다.
쓰시마번주(對馬藩主) 소 요시카쓰(宗義功)와 숙노 등 대마도의 소 씨 일행이었다. 현 번주는 소 씨 가문의 32대 당주이자 12대 번주(藩主)였다.
기정진 나가사키 상관장과 석원형 과장이 이들의 방문을 맞이하였다. 그동안 나가사키 상관은 많은 발전이 있었다. 사쓰마번(薩摩藩)에서는 아예 나가사키에 사람이 파견 나와 있었고, 숙노(宿老)인 카바야마 치카라는 수시로 상관에 들러 기정진과 석원형의 자문을 들었다.
지난 오사카상인들 문제를 단 한 번에 풀어준 이래 사쓰마번(薩摩藩) 번주(藩主) 시마즈 나리노부(島津.宣)는 가온 무역에서 부탁하는 일은 무조건 들어주었다.
역사에서도 번의 제정 적자 문제로 긴축 제정을 펼치다 아버지에게 강제로 은퇴를 당했듯이 사쓰마번(薩摩藩)의 번주(藩主) 시마즈 나리노부(島津.宣)와 숙노(宿老)인 카바야마 치카라에게는 제정 문제가 번의 가장 큰 우환이었다.
그것을 가온 무역에서 숨도 쉬지 않고 풀어주었으니 기정진은 이들에게 어찌 보면 생명의 은인이었다.
실제로 숙노(宿老) 카바야마 치카라는 제정 문제로 긴축을 주장하다 사쓰마번(薩摩藩)전대 번주에게 할복을 명령받아 자결하였었다.
나가사키 부교소(長崎奉行所)의 지토(地頭) 가토 마사모리(家藤昌盛)도 지난번 쇼군의 정실부인인 시게히메(계명은, .大院)의 편지를 받은 이래 단 한 번도 이들의 일에 간섭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온 무역과 사쓰마번과의 교역에서 나오는 엄청난 양의 세금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한다는 것을 안 가토 마사모리(家藤昌盛)는 일본인 특유의 친절함으로 기정진과 석원형에게 엎어졌다.
가온 무역과 사쓰마번은 지금까지 은 수백 만 냥의 거래가 있었다.
나가사키 광저우 229
앞으로 가온 무역에서 신제품이 나오면 나올수록 사쓰마번은 점점 가온 무역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의 인구는 3,000만 명을 헤아릴 정도로 많았으며 최대 도시인 에도는 이미 인구가 100만을 넘는 엄청난 소비 도시였다.
여기에 300개의 번과 수만 석의 고쿠다카(石高)인 고위급 무사들의 소비 성향은 가히 중국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호화스러웠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유곽이 발달한 일본의 특성으로 가온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소비는 대단한 수준이었다. 가온 무역은 막부와의 협상에서 무관세 협정을 맺었고 관세는 수입을 하는 사쓰마번이 5%의 수입관세를 물기로 막부와 협상을 하였다.
사쓰마번도 경쟁이 없는 제품에 물리는 관세는 제품 값에 추가하면 되었기 때문에 불만 없이 막부와 협정을 맺었다.
얼마 전부터는 뉴기니에서 생산되는 기름야자로 만든 비누에 첨단 기술이 가미된 최고급 향을 넣어 만든 고급 비누가 비누 크기의 반에 해당하는 은이 제품 가격일 정도로 엄청난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목욕 문화가 거의 없었다.
아직까지 일본은 목욕 문화가 발달되지 않을 시기였지만 고급 비누가 게이샤를 통하여 엄청나게 팔려나가자 바로 다이묘의 주변 여인들과 이어서 상류층으로 급속하게 번지며 엄청난 소비를 촉진시켰다.
가온 무역에서 모피에 이어 두 번째 고급화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가온 무역은 조선에서 들여오는 천일염도 사쓰마번에게 판매를 하게 하였다.
이러한 제품의 작년 1년 판매 금액이 3월부터 12월까지 계산을 하여서 가온 무역의 순이익이 천은 300만 냥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사쓰마번은 가온 무역과의 교역으로 천은 200만 냥의 거액을 챙겼다.
가온 무역이 결제 수단으로 은보다 금을 요구하여 약간의 손실은 있었지만 이것은 전체 수익에 차지하는 비용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쓰마번은 그동안의 만성적인 적자를 단번에 만회하였다.
이제 사쓰마번이 일본 제일의 번이 된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쇼군의 정실부인이 전대 번주의 셋째 딸이고 경제적으로는 수십 만 석에 더하여 은 200만 냥의 수입이 추가되었다.
가하번(加賀藩)이 100만석의 고쿠를 자랑하지만 이제는 사쓰마번이 명실상부한 일본제일의 번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씀씀이가 켜져 에도의 전대 번주의 생활은 호화의 극치를 달리기 시작했고 덩달아 사쓰마번도 그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차츰 소비 지향적으로 변했다.
이제 사쓰마번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은 에도막부의 쇼군이아니라 가온 무역이 되었다.
사쓰마번은 자신들도 모르게 가온 무역의 깊은 수렁에 한 걸음씩 빠져들고 있었다.
막부에서도 세금으로 은 100만 냥의 세금을 챙겼다. 이 정도의 세 수익이면 좌도도의 손실을 메우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막부의 재정도 이 관세 수익으로 엄청난 도움이 되었고, 막부에서도 많은 세수가 들어오는 가온 무역과의 교역을 특별히 권장할 지경이 됐다.
자연스럽게 에도에서는 사쓰마번의 전대 번주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점점 커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전통적으로 경쟁 상대인 조슈번(長州藩)에서는 난리가 났다.
모리 가문의 63대 당주이고 조슈번의 11대 번주인 모리 나리후사(毛利.房)는 번주가 된지 2년도 되지 않은 시기였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앙숙 관계인 사쓰마번이 잘나가는 모습에 배가 아팠다.
그렇다고 막부에서 인정한 교역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조슈번은 속을 태우고 있었다.
조슈번은 간몬해협 건너편의 사가번(佐賀藩)과 후쿠오카번(福岡蕃)으로 사람을 보내 사쓰마번의 독주를 막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이미 국정원의 요원들이 큐슈 지역 곳곳에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슈번의 움직임이 바로 국정원에 포착되었다. 아직까지는 이들이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되는 시기여서 석원형 과장은 이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였다.
이럴 때 쓰시마번주(對馬藩主) 소 요시카쓰(宗義功)가 찾아온 것이라 가온 무역은 긴장을 했다.
기정진은 쓰시마번주 일행이 오늘 상관을 방문을 하겠다는 기별을 주어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은 예로부터 대마도에 대하여 이중적인 잣대로 바라보았다.
한편으로는 대마도를 조선의 속령으로 생각하여 벼슬을 내리고 삼포에 왜관을 열어 주는 등 쓰시마번이 일본에서 조선 무역을 독점하면서 부를 축적하게 두다가도, 한편으로는 왜구의 소굴이라고 정벌을 감행하기도 하는 등 버리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계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쓰시마번도 조선과 일본에 양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지키고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점차 일본화 되어가다 이즈음에는 완전히 일본화가 되었다.
기정진이 먼저 소 요시카쓰(宗義功)에게 인사를 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쓰시마번의 번주(對馬藩主)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조선의 별무사(別貿社)의 종5품 별좌(別坐) 기정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저의 상관을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참근교대(.勤交代)를 위해 에도로 가던 길에 나가사키에 들러 가온 무역 상관을 찾은 소 요시카쓰(宗義功)는 기정진의 환대에 더욱 몸을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이렇게 지방의 일개 번신에게 조선의 종5품 관리께서 몸을 낮추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편하게 대하여 주십시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래도 번주님이신데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지금까지 조선은 모든 교역을 부산포를 포함한 삼포에서 우리 대마번의 중계 무역 독점권을 인정해 주어서 귀국과 원활한 교역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교역을 하시면 저희 번은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하십니까?”
“지금까지 귀 번이 하고 있던 조선의 내상과의 교역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을 것인데요. 저희는 내상이 교역하는 물목은 손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번에 인삼을 가져가시지 않았습니까?”
“인삼은 조정에서 홍삼과 함께 전매권을 실시하는 바람에 그리된 것입니다. 이는 내상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나머지는 저희들이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희 쓰시마는 그 인삼 교역으로 번의 제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귀 별무사의 조처에 저희 번의 제정이 막대한 어려움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어떻게 조치를 부탁드립니다.”
“다른 문제는 모르지만 주장전하께서 결정하신 일을 가지고 저의가 이러라 저러라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저의 별무사는 단지 왕실직할 기관일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지내다가는 저의 쓰시마는 앉아서 죽고 맙니다. 저의 소씨 가문은 대대로 조선에서 벼슬을 내려준 가문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저의 번의 수만의 백성들의 생사가 걸려있는 일입니다. 이전과 같이 약탈의 길로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석원형 과장이 나섰다.
“도주님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약탈이라니요. 그럼 그동안 조선에서 출몰하던 왜구들이 대마도의 짓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소 요시카쓰(宗義功)를 보좌하고 있던 무사가나서서 말했다.
“말씀은 그쪽에서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왜구라니요. 말씀을 골라 하십시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어려움을 말씀 드린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도주님의 말씀을 협박으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어려워도 약탈을 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에도(江戶)로 참근교대(.勤交代)하러 가시는 길이 아닙니까? 참근교대(.勤交代)를 하러 가시는 분이 이제 와서 조선의 신하 운운하시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말씀 아닙니까?”
석원형 과장이 강하게 나가자 소 요시카쓰(宗義功)의 일행들은 잠시 할 말은 잊었다.
조선의 관리들은 자신들에게 이렇게 강하게 나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조선의 관리들은 명분만 세워주고 체면만 세워주면 그만이었다.
앞에서는 목에 힘을 주고 뒤로는 은밀히 뇌물을 요구하는 것이 조선의 관리였는데 지금 앞에 있는 별무사의 관원들은 이전의 조선 관리와 전혀 달랐다.
번주의 은밀한 협박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오히려 대놓고 맞받아치기까지 하는 것이다.
말들이 험악해지고 목소리가 높아지자 기정진이 나서서 무마를 했다. 다 같이 좋은 방안이 없는지 찾아보자고 달래서 쓰시마번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끝을 내었다.
협상 아닌 협상은 그렇게 불편하게 끝이 났다.
가온 무역에서는 대마도에게 이전과 같이 혜택을 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전이야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으로 대마도를 밀어주었지만 지금 가온 무역이 계획하는 그림에는 대마도는 아예 들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터 이들의 도발에 준비는 있어야 했다.
이들이 돌아가고 나서 정국을 오판한다면 본토의 백성들이 피곤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기정진과 석원형은 그들이 가고 난 뒤 제주의 국정원으로 이들과의 만남을 보고를 하였고 제주의 국정원은 이 보고를 바로 위국공(衛國公)에게 보고를 했다.
보고를 접한 위국공 장준하는 이형구 합참의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어 대마도의 대비를 지시했다.
이형구 대장은 즉각 김기수 중부군 함대사령관을 호출하여 대마도 주변해역의 경계 강화를 지시하였고 이지시는 연안함대에 곧바로 통보가 되어 개량된 판옥선 3척이 즉각 투입되었다.
이형구 대장은 혹시 모를 대마도의 도발에 대비하여
이기형 중부군 사령관에게도 경계 지시를 내려 제주도의 경계 강화에도 힘을 썼다.
이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기성진과의 만남을 하고난 대마도주 소 요시카쓰(宗義功)와 일행들은 별다른 해결책도 얻지 못하고 자신들이 머무는 여곽으로 들어와 논의를 했다.
지금 별무사의 입장이 저렇다면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은 자신들의 입지는 거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대세를 이루었다. 대마도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마도는 어차피 자급자족이 불가능하였기 그들에게 조선과의 교역의 수익은 삶을 영위하는 생명줄이었다.
별무사가 이렇게 일본과의 교역을 직접 나선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사(枯死)될 것은 안 봐도 눈에 보이는 상황이었다.
별무사가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들이 만들어야 했다. 소 요시카쓰(宗義功)는 가신들에게 명을 내려 지금 대마도에 있는 배 중 일본 본토와의 교신을 위한 배를 제외한 모든 배들을 모아서 조선의 동해안을 휩쓸어 버리고 오라는 지시를 했다.
소 요시카쓰(宗義功)의 생각은 일단 조선에서 왜구가 침범을 하면 전례에 비춰본다면 쇄국을 더욱 강하게 할 것이고 다음에는 대마도에 사람을 보내 왜구의 근황을 물어보는 순서를 밟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에도에 동행하려던 숙노와 무사대장이 밤을 틈타 은밀히 여곽을 빠져나가 나가사키 항에 정박해 있는 대마도주의 배를 타고 바로 출항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는 국정원에서 고용한 일본인 정보원이었다.
정보원은 즉각 이 사실을 석원형 과장에게 알렸고 석원형 과장도 지급으로 제주의 국정원 본원에 대마도의 이 사안을 보고를 했다.
제주도는 즉각 비상이 걸렸다. 가온이 시간 여행을 하고 처음으로 내리는 비상령이었다. 제주도 일원은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었으며 주요 지휘관들은 늦은 밤이지만 전원이 주요 지휘관 회의에 참석을 했다.
지휘관들의 논의 결과는 섬멸이었다.
어차피 대마도는 후일 도모를 해야 하는 우리의 고토였다. 지금 이들의 도발은 후일 가온이 결행하고자 하는 대마도 인종 청소의 성격을 묻는 아주 적절한 도발이었다.
32대를 내려오는 소 씨 가문의 가신들의 충성도는 전 일본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높았으며 이들은 전향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이전부터 갖고 있었던 국정원의 판단을 받아들여 섬멸을 결정했다.
쓰시마의 숙노와 무사대장은 밤을 새워 배를 몰아 다음날 오전 일찍 이즈하라(嚴原)에 도착을 하였다.
이들은 상도(上島)와 하도(下島)의 모든 배들을 이즈하라(嚴原)에 집결시켰다. 두 섬의 배들 중 전투에 쓸 수 있는 배를 추려서 300여 척의 배를 선별하였다.
배들이 모두 모인 것은 하루가 지나서였고 이들은 섬에 있는 남자들 중 칼을 쓸 수 있고 조총을 쏠 수 있는 사람들 중 전투력이 있는 사람들로 이즈하라성에 남아있는 무사들을 포함하여 대마도에서는 대단한 인원인 5,000명을 선발했다.
선발된 대마도 인원은 조선에 들어가 약탈을 한다는데 환호를 보냈다.
특히 그동안 연습만 해오면서 실전이 없어 늘 불만이 쌓였던 무사들과 차출된 병사들은 조선 여인들의 이야기를 하며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동안 한참 동안을 약탈이란 것을 잊고 살다가 다시 인간의 본능으로 돌아온 이들은 배가 빨리 떠나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약탈을 하러 간다 해도 준빈 해야 했다.
이들이 모든 배에 올라 이즈하라(嚴原)를 출항한 때는 3월 29일 오전이었다.
이들의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연안 함대와 중부군의 장병들은 이들을 찢어 죽이고 싶도록 이가 갈렸다.
이들이 지금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장병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간부들은 많은 애를 썼다.
이즈하라를 나온 대마도의 선단이 진로를 동쪽으로 바꾸자 이들의 항로가 경상도 방면이라는 것을 파악한 지휘부는 좌도도를 지키는 함선을 재외한 모든 중부함대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100여 척의 선단을 구성한 대마도 군이 부산의 기장앞바다를 지날 무렵 중부군 함대와 조우하게 되었고 결과는 일방적인 섬멸이었다.
대마도의 이즈하라에서 출발한 300여 척의 배는 모조리 수장이 되었고 타고 있던 대마도군 5,000명도 전멸했다.
그날 밤과 다음날에 걸쳐 부산의 기장 앞바다에는 수십 구의 시체들이 떠올랐다.
바다에 때 아닌 수많은 왜구의 시체가 떠오르자 기장에서는 난리가 났다.
혹시 왜구들이 침범을 하다가 배가 뒤집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조정으로 장계를 올리게 되었다.
정조는 기장에서 올라온 장계를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준하에게 연락을 하였고 장준하는 대마도의 일을 알려주었다.
이에 진노한 정조는 다음날 조회에서 별무사의 무역선과 왜구들이 격돌하여 그들을 격멸하였다고 말하고 부산포를 제외한 제포(내이포)와 염포의 왜관을 폐쇄하라는 전교를 내린다.
신하들은 정조의 하교를 시행하면서 별무사가 그렇게 강한 군대가 있었는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서서히 별무사에 대한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어찌하였든 국왕의 병권이 강하면 자신들이 좋은 게 없기 때문이다.
1792. 4. 5. 광저우 가온 무역상관.
엄청난 크기의 안휘상인 저택(徽商大宅院)은 그 크기와 화려함이 일개인의 주택의 크기를 압도했다.
저택의 입구에 화려한 돌장식의 대문부터 10,000㎡의 면적에 20여 채의 건물 군과 100여 개의 방과 화려한 정원을 가진 저택은 청국전역에서도 100여 채 정도밖에 없는 명물이었다.
이경식 상관장은 요즈음 정신이 없었다.
매월 중국으로 들어오는 물량이 천은 수백만 냥 이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매월 홍삼 오천 근과 가온 무역의 주력 상품을 비롯하여 조선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들도 종종 들어오고 있었다.
이는 양일현 상단의 물품으로 그 양도 상당히 늘어나 천은 일만 냥 정도가 되었다.
양일현 상단은 1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양일현 상단은 국정원의 조선 내 정착에 지대한 공이 있어 가온 무역에서는 그에게 많은 배려를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배려보다는 양일현 사장은 그 배려를 넘어설 정도로 상재에 밝았으며 특히 조선의 특산물 중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개발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위해 매월 광저우를 방문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초기에 위국공이 하사한 홍삼 20근(천은3,000냥)으로 시작한 사업이 이제는 청국과 연간 천은 10만 냥이 넘는 교역을 하는 상단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조선의 국내 상권도 팔도에 수십 개의 지점을 둘 정도로 성장을 하였다.
조선 내 상권은 국정원의 거점 확보 때문에 만들게 된 지점이 이제는 전부 흑자로 돌아설 정도로 안정권에 들어갔다.
이경식 상관장은 송지청과 왕정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9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역이 점점 늘어나 천은으로 매월 삼백만 냥에 이르렀다.
가온 무역도 이들과의 교역으로 천은 150만 냥의 수익이 남았다. 가온 무역은 천은 삼백만 냥을 전량 금으로 교환하여 금 삼십만 냥씩을 거두어 들였다.
북부 지역의 모피 무역까지 포함하면 연간 금(金) 사백만 냥의 거래였다.
150톤의 금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지금의 계산이었다.
청국과의 거래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송지청의 왕정조를 대동하고 상관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송 대인.”
“안녕하십니까? 이 대인.”
서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곧바로 차가 나왔다.
차는 중국인이 좋아하는 보이차였다.
운남의 특산 보이차 중 가장 고급의 금과공차(金瓜貢茶)였다.
송지청은 차 맛을 칭찬해 주었고 이경식은 그 말에 화답을 하였다.
이경식이 말을 꺼냈다.
“오늘 두 분 대인들을 오시라고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제부터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준비라 하시면 무엇을 준비를 하란 말씀이신 건지?”
송지청이 이경식의 말에 의문을 표시했다.
“지금 저의 가온 무역과 매월 천은(天銀) 삼백만 냥의 거래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최소한 천은 백만 냥 이상의 수익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금까지 반 년 이상의 거래가 있었으니 자금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있을 겁니다. 지금부터 거사 준비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정조가 이경식의 말을 받아 답을 하였다.
“안 그래도 저의 교내에서도 그 말이 지금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말만 오가는 경우입니다. 좋은 고견이 계시면 알려주십시오.”
“지금부터 백련교도들 중 정예들을 모아서 모처로 집결시켜 군사 훈련에 들어가야 합니다. 어차피 청국과의 싸움은 군사력으로 승부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필요한 경우 저의 가온 무역에서 만든 소총을 판매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를 공략할 것인지도 지금 미리 결정해 놓아야 합니다. 거사를 하고나면 순식간에 장악을 해야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만들 계획도 세워야 하고 군사들을 조련할 교관들도 필요하고 군수물자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자 송지청이 나서서 말을 했다.
“이 대인, 그러지 마시고 이 대인께서 도와주십시오.
이 대인께서 교관을 추천해 주시면 우리 백련교는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우리 백련교는 최소한의 인명 피해로 우리가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나가사키 광저우 245
송지청은 이미 가온 무역의 군사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송지청이 이경식에게 부탁을 한 것이고 이경식도 이러한 답을 들으려고 유도를 한 것이다. 이경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송 대인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저의 가온 무역에서 백련교도들을 군사훈련 시킬 교관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군사들의 조련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적어도 십만 명 이상의 군을 조련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송지청이 다시 말을 했다.
“예, 저희들이 십여 년 전에 관군들에 쫓겨 사천으로 들어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천 땅은 천혜의 지형이 많아 숨어서 군사를 조련하고 양성하기에 좋은 땅이 많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조련 장소와 주변 준비를 하시고 인원들을 모집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있으니 돌아가셔서 교의 지휘부와 상의하시고 적당한 시간을 정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훈련시킬 병사들의 집결 방법과 인원 파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파견될 교관들의 숫자가 나옵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서 정확한 일정을 갖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송지청이 돌아갔고 송지청이 다시 찾아온 것은 열흘이 지난 때였다.
송지청은 양성할 병사의 수를 10만 명으로 잡았다.
이경식은 송지청에게 병사들을 조련할 시간을 6개월로 잡았고 기수별로 일정 숫자의 인원을 모집할 것을 권하였다. 이경식은 이들 10만 명의 인원을 조련할 시간을 2년으로 잡았다. 역사에서 송지청은 1794년 청국 관원에 잡혀 처형된다.
이경식은 만일을 대비하고 혹여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대비하여 시간을 1794년으로 정한 것이다.
송지청은 매월 5000명의 인원을 모집하기로 하고 장소를 사천의 험준한 산속으로 결정하였다.
병사들의 모집과 사전 준비를 위하여 9월부터 훈련을 시작하기로 하고 이경식도 이들의 일정에 협조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송지청은 제이스 소총 5,000정을 먼저 구입을 원하였다. 소총의 대금은 천은 20냥으로 하기로 하고 총3만정의 소총과 실탄을 구입하기로 하였다.
송지청이 돌아가자 이들과의 협의 사항을 제주도로 보냈다.
제주도는 9월에 파견할 교관들의 선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