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유구)
1791. 7.31 일본 나가사키(長崎) 항(港).
3월21일 나가사키에 온 기정진과 석원형이 그동안 협상을 하던 오키나와에 대한 문제가 결론이 났다.
별무사(別貿社) 별좌(別坐) 기정진과 수개월의 지루한 협상 끝에 에도막부의 은밀한 지원으로 사쓰마번의 전대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와 기정진은 ‘기정진―시마즈 협약’을 맺게 되었다.
기정진―시마즈 협약.
1. 에도막부와의 입장을 고려하여 오키나와 할양은 사쓰마번과 가온 무역과의 협약으로 한다.
2. 오키나와는 사쓰마번의 지배를 벗고 가온 무역의 속국으로 독립한다.
3. 사쓰마번은 일체 오키나와 내정에 간섭할 수 없으며, 지금 파견 나와 있는 인원은 전부 가온 무역이 파견한 직원과 인수인계 후 오키나와에서 철수한다.
4. 이후 유구 왕국과 청국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외교 문제는 가온 무역이 해결한다.
5. 오키나와의 사탕수수 산업은 지금과 같이 사쓰마번이 독점한다.
단, 이때 인부들은 사쓰마의 사람을 쓰며, 만일 오키나와의 인력을 사용할 경우 그에 따른 일당을 지급하며 이때 일당은 조선의 예에 준한다.
6. 앞으로 조선의 별무사에서 나온 물품은 사쓰마번이 일본의 판매를 독점한다.
단, 상호 간 가격이 맞지 않을 경우는 예외로 한다.
7. 홍삼, 인삼, 성냥, 발화기 구필은 별도의 규정을 정하여 가격을 정한다.
8. 사쓰마번은 가온 무역에서 나온 물품이 일본에서 복제하여 유통되는 것을 철저히 막는다. 이를 위해 막부가 특별히 천왕의 칙령을 발표하기로 한다(막부의 명으로 특허법을 만들어 발효하기로 한다).
오키나와는 가온 무역의 직할령(直轄領)이 되었다.
가온은 협약과는 별도로 사쓰마번의 전대 번주(前代藩主)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에게 황금 1,000관(3.75톤)의 황금을 주었다.
그리고 막부(幕府)의 수석 로추(首席 老中)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를 통하여 역시 1,000관(3,75톤)의 황금이 뇌물로 막부에 들어갔다.
이는 그동안 좌도도의 황금이 들어오지 않아 재정에 어려움이 있던 막부에 숨통을 트여주게 되었고, 니가타 문제로 곤경에 처해 있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의 위상을 조금은 높여주었다.
당시 일본의 경제권을 쥐고 있던 오사카 상인들은 이 협상에 땅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화가 난 오사카 상인들은 사쓰마번(薩摩藩)의 전대 번주(藩主)가 그동안의 차용해서 쓴 차용금의 상환을 요구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기정진은 금 500관에 달하는 차용금을 사쓰마번(薩摩藩)의 번주(藩主) 시마즈 나리노부(島津?宣)에게 빌려주어 오사카 상인의 차용금을 일시에 상환하게 하여 두 부자 간의 서먹했던 사이도 해결을 하게 해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현 막부의 쇼군의 정실부인인 전대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의 셋째 딸인 쇼군의 정실부인 시게히메(계명은 ?大院)가 쇼군에게 말하여 막부에서 별도로 사람을 보내 기정진에게 감사의 예를 표하고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一瀉千里)였다.
막부의 특명으로 나가사키 항에 66,000㎡(20,000평) 넓이의 부지가 무상으로 제공되었고, 모든 편의를 봐주라는 막부의 지시에 나가사키 봉행소의 관리가 상주를 하며 편의를 봐주자 기정진 등이 너무 과도한 친절에 오히려 사양을 할 정도가 되었다.
가온 무역은 이 자리에 창고와 상관을 지었다.
이때 사쓰마번(薩摩蕃)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었다.
가온 무역의 건물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양식으로 조선의 양식과 서양의 양식이 혼합된 양식으로 석재와 조선에서 벽돌과 시멘트를 운송하여 지어졌다.
건물을 준공할 동안 천막을 치며 외부에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건물이 지어졌다. 이 건물은 특히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장준하가 특별히 지시를 하여 화려하고 장엄하게 지어졌다.
3층 건물로 지어진 상관은 건물을 준공하고 천막을 거둬내자 그 아름다운 모습에 단번에 나가사키의 명물이 될 것은 불문가지였다.
건물이 준공되기 전 8월부터는 가온 무역에서 생산되는 많은 제품들이 사쓰마번을 통하여 엄청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하였다.
제품은 조선과 같이 시작은 성냥과 비누, 발화기, 재봉틀과 홍삼과 인삼, 구필 등이었다. 특히 홍삼과 발화기는 초기 생각한 연간 예상 판매량인 홍삼 2만 근을 3개월 만에 판매하는 엄청난 실적을 올렸고, 발화기는 가온이 넘겨주는 값의 5배의 이익을 사쓰마번에 남겨주며 1만 개가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이는 예상하지 못하는 숫자였다. 이미 일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시장이었다.
홍삼을 청국보다 약간 비싼 은 200냥에 넘긴 것을 사쓰마번은 100냥을 붙여 오사카의 도매상에 넘겼다.
불과 6개월 만에 홍삼과 발화기만의 판매고로 무려 은 300만 냥 이상을 벌어들인 사쓰마번은 전대 번주의 정치력과 맞물려 일본 제일의 번으로 우뚝 선다.
이렇게 되자 사쓰마번은 가온 무역과 기정진―시마즈 협약에 대한 고마움으로 잔뜩 허리를 낮추었다.
아직까지 오키나와의 지리적 중요성을 잘 모르고 있던 사쓰마번은 눈앞의 엄청난 수익에 더 군침이 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온 무역은 일본에서의 제품 판매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사쓰마번에 모든 제품의 판권을 넘긴 이상 당분간은 그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기로 했다.
일본에서는 홍삼과 발화기가 대유행을 했다.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홍삼을 먹고 발화기를 들고 다녀야 대접을 받는 유행을 낳았다.
특히 화류계에서 이 현상이 더 심하여 당시 인구 100만의 소비 도시 에도(도쿄)에서는 게이샤들이 자신들의 직급을 홍삼과 발화기에 맞추는 현상이 급속도로 번졌다.
발화기는 고급 문양을 여러 제품들이 출시가 되었다.
이 여러 문양의 라이터를 모으는 것이 게이샤들에게 유행을 하여 게이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한량들이 너도 나도 선물을 하여 또 다른 소비를 낳았다.
광저우에서도 오스만 제국에 상품이 선적되었다.
이러자 지난번 유럽 물건 선적에는 가만 있던 광저우의 월해관(?海關, 세관)에서 이의가 있었다. 아무리 가온 무역이 하는 일이 중국과의 교역이 아니라 서양과의 무역이라 하더라도, 일단 광저우에 가온 무역의 배가 들어온 이상 세금을 내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가온 무역 광저우 상관장 이경식은 월해관 관리 송지청에게 뇌물로 입막음을 하였지만 언제까지 이런 편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래저래 오키나와 문제가 가온 무역의 핵심 화두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791. 8. 10. 오키나와(沖繩) 나하(那覇) 슈리성(首里城).
오키나와 나하시 류큐(琉球) 왕국의 궁성 슈리성.
외양은 붉은색으로 바닥에 석재가 깔려 있었고 일본풍보다는 중국풍이 더 많이 나는 건물이다.
왕성은 나하 항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세워져 있었으며 주변의 건물들과 여러 풍광이 참으로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유구 왕국은 1429년 오키나와 주변 왕국을 통일하여 중계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다가 1609년 사쓰마번에 점령된 이래 번의 지배하에 있었다.
1791년경의 유구국은 번창하던 중계 무역의 급격한 쇠퇴로 경제가 악화되어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지금은 14대 상목왕(?穆王)이 30년째 재위에 있었고, 20만여 명의 인구가 있었다.
오키나와는 제주도보다 약간 작은 섬이었지만 제주도보다는 인구가 훨씬 많았다.
오키나와의 조선 할양에 관한 조약을 설명하러 사쓰마번의 숙노(宿老)인 카바야마 치카라가 직접 스씨마번 번주의 문서와 일본 천왕의 교지와 쇼군의 정식 문서를 갖고 유구궁성이 있는 오키나와의 나하시로 최성용 대령을 대동하고 갔다.
가온에서는 오키나와의 지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최성용을 직접 파견시켰다.
최성용과 숙노(宿老)인 카바야마 치카라가 슈리성 정전(首里城正殿) 상목왕을 알현했다.
“전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저는 사쓰마번의 숙노 카바야마 치카라입니다.”
“오, 그대는 사쓰마번(薩摩蕃)의 숙노 아니오? 반갑소이다. 그래, 번주도 잘 계시지요?”
“전하의 염려 덕분에 번주님께서도 평안하십니다.”
“그래요.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셨소이다. 그래, 무슨 일로 과인을 찾아온 것이오?”
“예, 이번에 저희 사쓰마번이 아쉽게도 류큐왕국(琉球王?)을 가온 무역에 할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하께 상황을 말씀드리고자 찾아뵈었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슈리성 정전(首里城正殿)의 용상(龍床)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상목왕(?穆王)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세우며 말했다.
“무어요? 우리 유구왕국(琉球王?)을 가온 무역에 넘기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리고 가온 무역은 무어요?”
상목왕(?穆王)의 말에 사쓰마번(薩摩蕃)의 숙노 카바야마 치카라라는 그동안의 경과를 모두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일본 국왕의 교지와 쇼군의 정식 문서, 그리고 번주의 문서를 함께 상목왕(?穆王)에게 전하였다.
모든 문서들을 읽어본 상목왕은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찌푸렸다.
한나라의 운명이 당사자를 제외한 문서 몇 장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에 약소국의 서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최성용 대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숙노 카바야마 치카라는 혹시 돌발 변수가 있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옆에서도 느껴졌다.
만일 할양을 유구왕국이 반대한다면 사쓰마번(薩摩蕃)의 전 병력을 동원하여 몰살을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오키나와를 가온 무역에 넘겨야 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약소국의 처지를 통감하며 상목왕은 갈라진 목소리로 카바야마 치카라에게 말했다. 잠시간의 고뇌가 상목왕의 목소리를 갈라지게 한 것이다.
“알겠소. 사쓰마번과 상국인 일본국이 우리 유구의 문제를 그리 처리한다고 하니 그 조치에 따르겠소.
그럼 지금 궁전에 파견 나와 있는 사쓰마번(薩摩蕃)의 관리들은 어떻게 되는 거요?”
“전하의 말씀이 있었으니 가온 무역 직원에게 인수인계를 한 후 귀국 조치시키겠습니다.”
“그건 그렇게 하시오. 이분이 가온 무역에서 오신 분이오?”
상목왕은 고개를 돌려 최성용을 쳐다보았다.
최성용은 유구의 말이 일본의 방언이라는 말을 듣고 왔었지만 왕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최성용은 거수경례를 하며 일본어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저는 가온 무역의 최성용 대령이라고 합니다.”
상목왕은 처음 들어올 때 해군 정복을 입고 있는 최성용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사쓰마번의 숙노 카바야마 치카라와 대담을 하느라고 미처 인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카바야마 치카라와 말을 마치고 새삼 최성용을 쳐다보니 그 형상이 실로 대단했다.
최성용은 키가 180㎝로 몸이 단단한 체형이었기 때문에 1790년대 사람들과는 확실히 머리 하나는 큰 키였다.
기골이 장대한 최성용이 하얀색 해군 정복을 입고 정모를 쓰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갑자기 등이 섬뜩하였다.
상목왕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최성용 대령이라고 하였소?”
“그렇습니다.”
“그래, 사쓰마번(薩摩蕃)과 모든 일을 마쳤다고 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 그대들 가온 무역은 우리 유구왕국을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러자 최성용 대령이 나서서 말했다.
“저희는 유구왕국을 완전히 가온 무역의 식민지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식민지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저희는 조선 국왕 전하의 왕실 친위군으로 가온군이라고 합니다. 전하께서 염려하시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조공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상목왕은 최성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사쓰마번(薩摩蕃)은 핑계만 있으면 조공과 공물을 요구하여 유구왕국이 몰락할 정도로 엄청난 제정 압박이 있어 왔는데 조공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다.
상목왕은 다시 한 번 최성용에게 물었다.
“조공을 할 필요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자세한 문제는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기본적인 저희들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렇소? 그럼 그 문제는 다시 이야기합시다.”
상목왕은 최성용이 사쓰마번의 숙노가 있어 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돌렸다.
카바야마 치카라는 그것을 눈치채고는 정전을 나와 그동안 궁전에 파견 나와 있던 사쓰마번의 관리들 10여 명에게 최성용이 데려온 직원에게 업무 인수를 지시했지만 별다른 업무 인수가 없었는지 10여 권의 책자를 건네고는 말 몇 마디로 간단히 인수를 마쳤다.
그러자 카바야마 치카라는 이들을 대동하고 정전에 들어와 인사를 하고 사쓰마번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한나라를 200년 가까이 식민지로 다스리던 것치고는 너무나 간단한 인수인계였다.
최성용은 카바야마 치카라가 나간 사이 상목왕과 대화를 시작했다.
“전하께 먼저 그동안 조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무슨 사과요?”
“지난 200년 전 우리 조선국의 제주 목사가 저지른 죄에 대한 사죄입니다.”
본래 조선과 유구왕국은 상호 간에 최혜국 대우를 해주던 긴밀한 사이였었다. 일본 유구에 침략할 15세기 말 유구국왕이 사쓰마번(薩摩蕃)에 볼모로 잡혀갔다.
당시 유구왕국의 세자는 부왕의 석방 교섭을 위해 갖은 보물을 싣고 사쓰마번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되어 제주도로 표류하였다.
그러자 제주 목사는 그 보물을 탐내어 석방을 호소하는 세자 일행을 전부 참수해 버렸다고 한다.
세자의 참수 소식이 유구왕국에 알려지자 국교를 단절되었고, 제주도민이 표류해 유구로 오기만 하면 전부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에 제주 주민들이 전부 전라도 패찰을 소지하였고, 유구에 표류만 하면 전라도 사람이라고 우겼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그간 묻혀버려 야화(野話)로 전하여 왔지만 최성용은 정중히 이 일을 사과하였다.
최성용의 생각지도 않은 사과에 상목왕(?穆王)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200여 년이 흘러 자신도 잘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사과하는 최성용 대령이 좀 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온 사신들은 으레 자신들이 상국 사람으로 행세를 하였지 이렇게 자신들의 잘못을 먼저 사과하는 경우는 없었다.
“허, 나도 기억이 잘 안 나는 200년 전의 일을 사과하다니 참으로 고맙소.”
“아닙니다. 저희 조상들의 잘못을 이제라도 전하께 사과드릴 수 있어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의 국왕 전하를 대신하여 조선의 위국공(衛國公) 합하(閤下)의 전언입니다.”
최성용은 정중하나 절도 있는 동작으로 위국공의 친서를 전하였다.
내용은 한문으로 전부 번역하여 상목왕이 충분히 읽을 수 있었으며, 그 내용은 최성용의 말대로 앞으로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지난날의 사과였다.
“허허, 이리 고마운 일이 있나. 으레 상국에서 조공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이제 유구의 백성들이 한시름 덜은 것 같소이다.”
“앞으로는 조선과 유구와의 상국 관계만을 정확히 해주십시오.”
“그것은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리고 앞으로 가온 무역에서 왕실 친위군을 유구에 파견하여 유구의 국방을 책임질 계획입니다.”
“그래요? 그건 더욱더 고맙소. 사실 우리 유구는 사쓰마번(薩摩蕃)의 식민지로 지내온 지 200년이 지나 그들의 수탈로 거의 군권이 소멸되어 만일 사쓰마번이 철수하면 그 공백을 메울 군의 존재가 필요했소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유구왕국은 사쓰마번(薩摩蕃)의 수탈로 인해 재정이 극도로 어려워서 상비군을 운영할 수 없는 형편이오.”
“걱정 마십시오. 이제부터는 우리 가온군이 국방을 책임질 것이고 앞으로 수탈이나 조공은 일체 없을 것입니다.”
“다행이오. 그렇게 되면 우리 백성들이 얼마나 편해지겠소.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나라가 작든 크든 일국의 왕이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한결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사쓰마번(薩摩蕃)에서 운영하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임금 착취를 당하는 인부들을 전부 귀가 조치를 시킬 것입니다.”
“그 말이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우리 가온 무역이 사쓰마와 협약을 할 때 단서 조항으로 넣었기 때문에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이제 모두 해방입니다.”
“그래요? 아! 고맙소, 정말 고맙소.”
최성용의 말을 들은 상목왕은 크게 기뻐하며 용상에서 내려와 최성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현재 오키나와의 사탕수수 농장에는 30,000여 명의 유구인(琉球人)들이 노예와 다름없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과인이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는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의 힘든 생활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는데, 이제 경이 과인의 숙원을 풀어주는구려. 정말 고맙소.”
“아닙니다. 전하 이제 유구와 조선은 한나라나 다름없습니다. 앞으로 누구도 유구 백성들에게 착취를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저희들이 반드시 막아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주위에 있던 유구국의 신하들도 모두 기뻐하며 손을 잡고 서로를 축하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유구 국왕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역사는 물 흐르듯이 흐르는가 보구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오. 후일 때가 되면 알려주리다.”
최성용은 상목왕의 말에 더 물어보지 않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유구왕국에서의 가온의 정착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가온은 유구도를 비롯한 유구 왕국 전체를 제주도와 같은 방식으로 교화를 시키기로 하고 상목왕의 제가를 구했고, 상목왕은 이상할 정도로 흔쾌히 가온 무역의 청을 받아들여 주었다.
상목왕은 여기에 더하여 최성용과 가온 무역이 사용하도록 식명원(識名園) 전부를 내주었다.
식명원은 유구 왕실의 별원이고, 그 안에 있는 어전은 이며 왕실의 별저이자 영빈관이었다.
넓고 아름다운 식명원을 가온 무역이 사용하도록 내준다는 것은 얼마나 상목왕이 가온 무역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식명원은 유구에서 가온 근거지가 되었다.
때마침 청진의 함선 조선소에서는 1,500톤 급의 엔진을 장착한 대형 범선 3척이 진수를 마쳐 바로 나패(那覇, 나하) 항으로 처녀 항해에 나섰다.
올 연말까지 10여 척이 진수될 범선은 제주의 경공업 단지의 제품을 유구의 나패 항으로 실어 나르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나패 항은 조선의 제품을 전 세계에 실어 나르는 중계 무역항으로 키울 예정이었고, 최성용이 상목왕에게 앞으로 중계 무역항으로의 나패 항를 육성시키겠다는 말을 하자 상목왕과 유구의 모든 신하들이 만세를 불렀다.
나패 항이 앞으로 중계 무역항이 된다면 나라의 발전은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가 해방되던 날인 8월 15일은 유구왕국 최대의 축제일이었다.
최성용은 상목왕에게 건의하여 유구국의 모든 신민들이 이날 하루는 마음껏 놀 수 있게 해주었다.
최성용도 급히 광저우에 사람을 보내 많은 축제 물자를 공수하여 이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이날 이후 유구에서 가온의 입지는 무풍지대였다.
최성용은 제주도 주민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3여단의 여단장 유경원 중령의 병력 중 1,000명의 부대원과 지금 해군의 제주 병력 중 3,000명을 유구에 파병하여 제주 주민 교육과 똑같은 교육을 실시했다.
앞으로 가온에서는 유구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여 태평양함대 사령부로 발전시킬 계획이었다.
나패 항 항구는 8월 말부터 중계 무역항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였고, 각국의 상관은 광저우와 같이 조계지를 지정하여 운영하였다.
지금도 오키나와의 나하 시에 가면 있는 ‘국제 거리’라고 이름 지어진 조계지에는 처음에는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등의 상관이 들어섰고, 계속하여 늘어나 각국의 상관이 세워졌다.
기범선이 사용할 해군 기지는 지금의 미군 기지가 있는 포첨(우라소에, 浦添) 시에 건설하기로 하였고, 비행장과 시간 여행을 해온 함대를 숨기기 위해서 건너편에 있는 우리마시를 개발하기로 했다.
가온 무역은 나패 항 일대를 국제 자유 무역항으로 개항하여 개발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철저한 쇄국을 하여 타국과의 접촉을 금지시키기로 하였다.
최성용은 상목왕과 협의하여 유구 총독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식명원에 총독부를 두었다.
유구총독은 상목왕의 부탁과 장준하의 명으로 최성용이 맡기로 하였으나, 최성용의 업무가 과중하여 임시로 3여단장 유경원 중령을 최성용 유구총독을 대리한 대리 총독에 임명했다.
유구의 주민교화는 제주도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30,000명의 해방된 노동자들은 유구의 여론을 이끄는 중심 세력들로 이들이 솔선하여 교화 교육에 동참하자 빠르게 조선화(朝鮮化)되기 시작했다.
가온군은 유구의 전통을 완벽히 보전하는 교화 정책을 실시했다. 전통을 보전하고 실시하는 새로운 조선의 신교육은 유구 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진행됐다.
상목왕과 세자를 비롯한 왕족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유구의 모든 나라가 교육장이 된 분위기였다.
특히 교육을 위해서는 당분간 농업 활동을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나패 항으로 들여오는 수십만 석의 쌀을 본 유구의 왕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기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