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타 폭격
1791. 6. 20. 좌도도(佐渡島) 일본 본토 관측소.
며칠 전부터 일본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좌도도 주둔군 박정기 소령에게서 들은 최성용 대령이 이번에 위국공(衛國公) 장준하의 허가를 얻어 좌도도에 방문하였다.
10년간 장준하를 보좌하며 잃었던 현장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충성! 어서 오십시오.”
“충성! 박 소령, 그동안 수고가 많았네.”
“아닙니다.”
서로 군례를 한 최성용과 박성기 소령은 손을 맞잡고 반갑게 악수를 하였다.
좌도도는 점령된 후 6개월 동안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그동안 광부를 비롯하여 약 6,000명의 사람들이 빠져나가서 민간인은 약 4,000명 남짓의 광부들과 300여 명의 농부들만이 남아 있었다.
제주도의 절반 정도 크기인 854.88㎢의 면적에 비하면 거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온은 이곳에 육군 훈련소를 건설했다.
그동안 일본 본토를 마주 보는 주요 거점 지역 20여 곳에 155밀리 곡사포와 가-육(K-6) 기관총이 탑재된 가-구(K-9) 자주포가 배치되어 있어서 좌도도가 요새화되어 있었다. 가-구 자주포에 장착된 155밀리 곡사포는 평소 사거리 45km와 최고 사거리 60km로, 좌도도에서 일본 본토를 직접 타격할 정도의 사거리를 갖고 있었다.
좌도도는 날씨가 온난하여 4월 말경에 벌써 벼를 파종하였다. 넓은 구니나가(國仲平野)에 300여 명의 농부들만으로는 농사짓기가 힘이 들어 박 소령은 가온에 농기계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여 시간 만나면 박정기 대대병력이 농사에 지원을 했다.
다행히 5월 초 2,000명의 제주 병력이 넘어와 숨통이 트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박정기 소령도 모내기 때 3일 동안 대민 지원을 나갔다가 몸살이 나서 혼이 났었다.
차라리 힘든 산악 훈련이나 전투 체력은 지금도 손쉽게 뛸 수 있었는데, 몸에 맞지 않는 단순 반복 노동인 농사일은 참으로 힘들었다. 그래도 전 대대 장병들이 기분 좋게 대민 지원에 임해주어서 참으로 고마웠다.
제주 출신 신병들은 처음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는 주눅 든 것 같은 행동을 하였으나, 가온군의 선임들의 따듯한 배려로 이내 군 생활에 적응이 되었다.
특히 대민 지원에 있어서는 2,000명이 일치단결하여 모내기 등을 순식간에 끝마쳐주어 박 소령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제주 병력이 오고도 1달이 지난 6월 초에는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휘관들이 좌도도에 들어왔다.
제주 병력은 곧바로 별도의 부대로 편성되었고, 경력이 많은 부사관 출신 간부들의 노력으로 정예병으로 거듭났다. 선임 하사는 가온군 사병에서 차출하였다.
이 선임 하사들도 전원 가온군의 사병 출신으로 사관학교 입교를 앞두고 실전적 간부 교육의 일환으로 배치를 시켰다.
작년 12월 초부터 시작된 제주 병력의 의식화 교육과 군사 교육은 철저한 상관에 대한 복종심과 애국심으로 똘똘 뭉치게 하여 간혹 이들이 지나친 충성심을 보여 상관들을 당황스럽게 하기도 했다.
좌도도에 온 후로도 제주 병력은 교육과 훈련은 계속 병행했다. 훈련은 가온 장병들과 합동 훈련이 실시되었다.
제주 병력은 엄청난 훈련으로 이미 강군이 되어 있어서 부대 측정의 경우 가온군이 밀리는 경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시간 여행을 한 가온군이었다. 가온군은 왕실 친위군으로 모범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제주 병력보다 더 많은 훈련을 받아야 했다.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그것도 적응이 되어 오히려 전투력 상승 효과가 일어나 부대 내 기강이 엄정해지고 부대가 적당히 긴장되는 등 좋은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최성용은 박정기 소령에게서 가온군과 제주 병력과의 시너지 효과에 대한 말을 들으며 좋은 쪽으로 반응이 온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박 소령이 최성용 대령을 인도한 것은 좌도도에서 일본 본토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었다.
이곳에 본토를 관측하는 관측소를 설치했다. 평상시 날씨가 좋으면 본토가 육안으로도 보이는 곳이다.
“이리로 들어오시죠.”
최성용은 박정기의 안내를 받으며 관측소에 들어가 박정기가 보여주는 레이더를 보았다 그곳에는 수많은 점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음, 많기도 하구먼. 언제부터 이들이 집결하기 시작하였나?”
“보름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하여 어제 오늘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좌도도 인근의 번에 대대적으로 소집령이 내린 것 같습니다.”
“상당하구먼. 얼마정도 되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지만 약 1,000여 척 이상은 되어 보입니다.”
“그래, 알겠네. 헬기는 어찌 되었나?”
“지금 헬리포트에 대기 중에 있습니다.”
“그럼 그리로 가세.”
박정기가 최성용을 안내하여 사도가성 주변 개활지에 조성된 헬리포트로 최성용을 안내했다.
이미 시동이 걸려 있던 헬기는 최성용이 탑승을 하자 바로 이륙했다.
헬기가 이륙하고 10분이 되지 않아 니가타 항이 보이기 시작하자 헬기가 급격히 상승을 시작했다.
얼마를 상승한 헬기가 공중에서 정지를 하자 최성용은 헬기에 장착된 항공 촬영용 정밀 카메라로 니가타 항을 내려다보았다.
항에는 박정기 소령의 말대로 부근의 모든 배를 징발하였는지 여러 모양을 한 배 1,000여 척이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많이도 모았군. 정말 대단하네.”
에도막부의 수석 로추(老中)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도 지금 니가타 항에 와 있었다.
자신이 주도가 되어 추진하고 있는 간세이 개혁(寬政改革)으로 정국을 이끌던 와중에 사도가 섬이 누군가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도가 섬을 탈출한 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이전의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시대 다이묘 복장을 한 귀신들이 섬을 점령하였다고 했다.
그 말을 믿을 수 없던 막부에서 수차례 병력을 파견하였으나 전부가 몰살되어 섬을 다시 회복하자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에도의 민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에도막부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에게 전권을 주어 좌도도(佐渡島)의 회복을 꾀하게 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이에 좌도섬 부근에 있는 모든 다이묘들에게 동원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사도가 섬과 가장 가까운 항구인 니가타 항에는 본주의 모든 배들이 동원되어 1,000여 척이 넘는 대선단이 모여 있었고, 인근 가가번의 가나자와 항에도 500여 척의 선단이 모여 있었다.
니가타 항은 막부 직할령이었으며 니가타를 감싸고 나가오카 번이 있었다.
고쿠다카(石高) 11만 5천 석인 나가오카번의 9대 번주(藩主)인 마키노 다다키요(牧野忠精, 1766년~1831년)도 나가오카 성을 나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와 같이 니가타 항에 같이 서 있었다.
지금 니가타 항에는 쌀 등 산더미 같은 군수품이 야적되어 있었고, 50,000명의 병력이 1,000척의 배를 타고 대기하고 있었다.
노토반도 서쪽에 있는 번은 가가번으로 번 청이 가나자와에 있었다. 가가(加賀)번은 가가 100만 석(加賀百万石)으로 불리어질 정도로 에도막부 최대 번이다.
가가번의 당대 번주(藩主) 마에다 시게노부(前田重靖)는 이 전투에 참여하기 싫었다.
하지만 막부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자신이 보유한 모든 함선과 주변 다이묘들이 보내온 배와 병사들을 모아 500여 척의 배와 30,000명의 병력을 준비하여 가가번의 숙노(宿老)를 대장으로 삼아 니가타 항을 향해 배들을 출항시키고 있었다.
마에다 시게노부(前田重靖)는 자신 가문의 시조인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유훈으로 이 전투에 병력을 보내기 싫었지만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직접 니가타까지 온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직접 이 전투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서 대신 가가번의 숙노(宿老)를 보내게 되었다.
가나자와 항을 출발한 500척의 배는 노토반도(能登半島)를 돌아 도야마만을 따라 항해를 하여 니가타 항 앞에 대기하고 있던 배들과 동시에 좌도도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헬기에서 니가타를 바라보던 최성용에게 무선이 날라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방금 레이더에 노토반도 쪽에서 이동하는 선단이 잡혔습니다.”
“그래? 알겠네.”
교신을 마친 최성용은 헬기 기장에게 노토반도 쪽으로 이동을 지시했다.
헬기가 기수를 돌려 노토반도 쪽으로 이동을 하였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노토반도가 나왔고, 헬기는 기수를 노토반도를 따라 이동을 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대규모 선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성용은 이들이 어디로 이동을 하는지 한동안 항로를 지켜보다가 배들의 항로를 추적하라고 명령하고는 헬기를 돌려 귀환하였다.
섬에 내린 최성용은 좌도도의 현황을 점검하였다.
지상병력은 2,500명이었고, 일본 본토 쪽에 면한 20곳에 요새가 만들어져 있었으며 충무공 이순신함이 동해상에 대기하고 있었고, 윤영하급 함정이 2척, 참수리급으로 개조한 선박 5척이 좌도도 해안을 순시하고 있었으며 헬기는 4대가 헬리포트에 대기하고 있었다.
최성용 대령은 박정기 소령에게 물었다.
“박 소령, 지금 부대에 포탄 등 소모품과 탄약의 보급은 어느 정도 되어 있는가?”
박정기 소령은 부대 현황 서류를 보이며 말했다.
“좌도도에는 지금 충분한 양의 탄환과 포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전투 시 필요한 소모품도 충분히 보급되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군.”
좌도도의 보급에 대하여 말을 주고받던 이들에게 관측소에서 연락이 왔다. 노토반도를 지난 배가 니가타 항으로 방향을 선회를 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이들이 니가타에 집결하여 동시에 쳐들어올 모양이군. 그렇다면 전 병력 중 경계병을 제외한 병력에게 휴식을 지시하게. 진돗개 하나를 그대로 유지하게.”
“알겠습니다.”
박정기는 최성용의 지시를 전 부대에 하달하였다.
최성용은 다시 박정기 소령에게 물었다.
“박 소령, 지금 네이팜탄이 얼마나 있는가?”
잠시 서류를 뒤적이던 박 소령이 말했다.
“9발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최성용은 가온의 이형구 대장에게 연락을 하였다.
잠시 후 이형구 대장과 무선이 연결되었다.
“최 대령, 수고가 많다. 상황이 어떤가?”
최성용은 지금까지 상황을 보고 하였다.
“장군님, 지금까지 보고드린 상황을 판단하면 이번에는 좀 더 강력한 작전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막부에서 도발해 오면 언젠가는 직접 접촉에 의한 교전이 예상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측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래, 그럼 최 대령 생각은 어떤가.”
“다른 생각을 못하게 대단위 폭격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생각지 않은 방법이네. 잠시 기다려 보라우.”
최성용의 건의를 들은 가온 지휘부는 급히 회의를 하였고 잠시 후 결과를 갖고 이형구 대장이 최성용을 호출하였다.
“최 대령, 자네가 건의한 작전을 승인하겠네. 두 번 다시 다른 마음 먹지 못하게 불벼락을 내려주지.”
“감사합니다. 여기서도 작전에 따른 준비를 하겠습니다.”
최성용의 건의로 니가타 항의 폭격이 결정되었다.
시간은 모든 배들이 모이는 내일 아침 여명으로 결정되었다.
1791. 6. 21. 05: 00 제주도 송악산 비행장.
C-130 수송기 12대가 차례로 이륙을 하고 있었다.
활주로에 켜진 조명 유도등을 따라 한 대 한 대씩 이륙을 시작하였다.
우종철 중장이 이번 니가타 폭격을 지휘하기 위해 C-130 수송기에 직접 탑승을 했다.
“우종철이다. 이번에 귀관들과 함께 비행을 하게 되었다. 목표 지점까지 앞으로 30분 있으면 도착을 한다.
곧 날이 밝아올 것이니 비행에 만전을 기하기 바란다.”
우웅~
묵직한 중음을 토하며 송악산 비행장을 이륙한 허큘리스 12대가 동북쪽 니가타 방향으로 비행을 하기 시작하였다.
1791. 6. 21. 06:00 니가타 항 상공.
이미 날은 밝아져서 사방이 훤했다.
12대의 비행기가 니가타 상공에 도착을 하였다.
우웅~
12대의 허큘리스가 토해내는 프로펠러 소리가 사방을 울리자 배 안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과 아침 일찍 출항을 위해 항구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사람들이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들리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순간 하늘에서 많은 숫자의 무언가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허큘리스가 폭격기로 개조를 하지 않아 폭탄을 전부 사람들이 손으로 일일이 투하를 했다.
니가타 항에는 어제 가나자와 항을 출발한 500척의 배가 밤사이 들어와 총 1,500여 대의 배가 대선단을 이루어 80,000명의 병사를 태우고 나가타 항을 꽉 메우고 있었다. 그 위로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저게 무언가?”
“나도 잘 모르겠네.”
꽈광!
화악~
“으악!”
“사람 살려!”
꽈―과과―광!
화악~
떨어지는 폭탄을 보고 저게 무언가? 하는 의문을 가지며 쳐다보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대폭발이 시작되었다. 네이팜탄이었다.
폭발 중심 순간 최고 3,000도의 고열을 동반한 폭발은 수십 미터의 불기둥과 함께 반경 30미터를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목선이 차곡차곡 도열해 있는 항구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불바다가 되어버렸다.
하늘에서 폭탄이 폭발하는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고, 배에 실려 있던 화약의 유폭으로 니가타 항은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4대의 비행기가 폭탄 투하를 마치고 돌아가자 잠시 후 2차 폭격이 시작되었다. 이미 백여 발의 폭탄 투하로 불바다가 된 니가타에 다시 폭격이 감행되자 니가타가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다.
폭격의 여파로 불에 타고 있던 배들에 다시 폭격이 시작되자 배들이 순식간에 터져나갔다. 배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바다로 뛰어내리기만 했다.
하지만 네이팜탄의 특성으로 바다 전체가 불바다가 되자 이들은 피할 장소를 찾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3차 폭격은 고폭탄에 의한 정밀 폭격이었다.
4대의 허큘리스는 2차례 폭격으로도 남아 있던 배들과 니가타 항 주변을 정밀 폭격하여 철저히 파괴를 했다.
이 폭격은 50km 떨어진 좌도도에서도 목격이 될 정도로 니가타 항 부근을 태우고 엄청나게 타올랐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와 마키노 다다키요(牧野忠精)는 니가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서 불바다로 변하고 있는 니가타 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 마키노 다다키요(牧野忠精)의 요청으로 니가타에서 떨어진 마키노 다다키요(牧野忠精)의 별장으로 술을 마시러 갔다 술을 한잔하고 게이샤를 끼고 자다가 커다란 폭음 소리에 놀라 뛰어나온 것이었다.
만일 다른 날과 같이 니가타 항에 있었다면 자신도 저 불바다 속에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계속하여 유폭과 함께 배들이 폭발을 하고 있었고, 니가타 항에 쌓아놓은 전시 물자는 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재앙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폭격이 하늘에서 내린 재앙이라 생각한 주민들이 아무도 니가타 항 주변을 가려하지 않아 불은 꺼지지 않고 번져나가 3일간 꺼지지 않고 주변을 태웠다.
니가타 항을 빠져나온 주민들을 설득하고 협박하여 억지로 주민들을 동원하여 니가타 항을 수습하러 들어갔으나 항구 주변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완전히 전소되었다.
폭격이 있은 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니가타 항으로 들어가 선착장 주변을 둘러보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말을 잊었다.
바다에는 아직도 쉴 새 없이 연기를 내뿜으며 타고 있는 배들이 수없이 떠 있었다.
1,500척의 배와 배 안에 타고 있던 80,000명의 병사들이 단 한 명도 대피하지 못하고 전멸했다.
싸우다 졌으면 할복이라도 해야 하지만 이건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늘의 재앙이었다.
나가오카번 번주 마키노 다다키요(牧野忠精)에게 뒷수습을 부탁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에도로 돌아가기로 했다.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이미 막부에는 전령을 보내 현 상황을 보고하였다.
니가타항의 사태로 인해 후폭풍은 무척 크게 나타났다. 농촌 진흥과 무사들의 검약 정책을 추진하던 관정개혁(寬政改革)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실패로 인해 추진 동력을 잃어버려 그 이후 강력하게 진행시키지 못하다 결국에는 2년 후 그의 실각과 더불어 개혁의 중단까지 여파가 미쳤다.
에도에서는 이번의 대재앙이 하늘에서 막부에게 경고를 주는 것이라는 말이 은밀히 나돌았다.
에도의 공기가 갑자기 흉흉해지자 막부의 모든 관리들이 말이 더 이상 퍼지지 않게 서둘러 진화에 나섰고, 막부는 이후로 두 번 다시 좌도도를 도모하지 않았다.
좌도도 주변에 사는 인근 주민들도 악마의 섬이라고 하여 좌도도 섬 가까이로는 절대 다가오지 않았다.
니가타 항도 항 주요 시설도 이번 폭격으로 전소되었으며, 이 일로 니가타 항은 쇠락하여 두 번 다시 이전의 성세를 구가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