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01)

변화가 시작되다

1791. 5. 15. 여의도(汝矣島) 별무사(別貿社) 상관(商館) 개관식(開館式).

여의도에 건설 중이던 별무사 건물이 준공됐다.

건물은 조선의 건물과는 다르게 적벽돌로 지어졌다.

2층으로 지어진 특이한 양식의 벽돌 건물과 대형 창고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별무사는 한 층의 건평이 330㎡인 2층 건물의 본관 건물과 뒤에는 부속 건물 2동, 옆에는 역시 벽돌로 대형 창고 3동을 지어졌다.

창고는 앞으로 10여 동을 지을 계획으로 계속적으로 건설되고 있었고, 건물의 창문은 조선에서는 최초로 유리를 끼워 넣었다.

기존의 조선의 방식과는 다른 벽돌로 지은 건물은 곧바로 한성 인근에 명물이 되었다.

건물을 짓고 있을 때도 양반들이 배를 띄워 건물을 구경할 정도였고, 영등포 방면의 부평부(富平府) 백성들은 일부러 구경을 하러 오고는 했다.

그동안 조선은 2월부터 상업이 독점 체재에서 자유 경쟁 체제로 전환된 이후 엄청난 현상들이 일어났다.

전국의 5일장은 병영 상인(兵營商人)들이 노력으로 엄청나게 활성화되었고, 각자의 상단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전문 분야를 내세워 5일장은 물론 상설 장시를 활성화시켜 나갔다.

천일염과 염장한 생선들이 싼 가격으로 시장에 돌기 시작하였고, 백성들도 하나둘씩 남는 잉여 농산물을 가지고 시장에 나와 좌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민들 스스로 시장 경제에 참여하게 되니 5일장이 자연스럽게 커져 나갔다.

불과 3개월의 기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선에 물산이 돌기 시작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고, 조선 최초의 개인상단인 양일현 상단이 별무사 옆 부지를 빌려 집을 짓고 장사를 시작한 이래 전국에서는 여러 상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별무사(別貿社) 개관식(開館式)이 있는 날이다.

전국의 주요 상단의 대방들과 한성 주변의 상인들 대부분이 참석했다.

“지금으로부터 별무사 관아 및 상관 개관식을 거행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개관식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테이프 커팅을 했다.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전 대방께서 직접 찾아주시니 영광입니다.”

“당연히 저희 송상이 찾아뵈어야지요.”

“감사드립니다. 자, 모두들 안으로 드시지요.”

서이수 전수가 상단 대방들을 인솔하고 상관으로 들어갔다.

“안이 상당히 넓습니다.”

“예, 이 건물은 기존의 조선의 건물과는 달리 건물의 높이를 높게 하여 상당히 넓어 보일 겁니다.”

그러자 경상의 대방이 물었다.

“전수 어른, 저 창문에 달려 있는 것이 유리창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저 유리창은 이번에 별무사가 양이들의 문물을 본따 만든 것이기는 하나 아직까지는 생산하기가 쉽지 않은 귀한 것입니다.”

전창진이 서이수에게 물었다.

“그렇습니까? 들리는 말로는 이번에 대궐에도 일부 건물 보수에 이 유리창을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송상 대방 전창진의 말에 서이수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계시는 궐내 중요 시설물에 우선 설치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문에 붙인 한지가 좋기는 하나 일정 기간이 지나면 더러워지기가 쉬워서 늘 새로 갈아야 하는 불편을 해소하고 유리와 한지를 이중으로 덧대어 시공을 하면 보온 작용을 하는 효과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효과도 볼 수 있습니까?”

“예. 우리 한지와 유리를 어느 정도 공간을 띄워 시공하면 이중으로 시공한 효과가 있어 보온 효과가 상당하다고 합니다.”

서이수와 전창진의 대화를 듣고 있던 대방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것도 있구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경상의 대방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난번 보여주신 물품들이 선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여러 품목을 선보이면 과소비가 조장될 우려가 있어 가장 필요한 몇 가지부터 천천히 시작하려고 합니다.”

평양의 유상 대방이 물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어느 것부터 시작합니까?”

“처음에는 홍삼과 천일염, 그리고 염장한 각종 생선들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특히 소금은 지난번 말씀드린 대로 평양의 유상과 전라도의 병상이 전국 장시를 비롯한 5일장에 풀 것이고, 염장 생선은 경상의 조운선을 타고 한성과 내륙으로 운송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물품은 언제부터 출시가 됩니까?”

“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성냥과 연필 비누 등은 다음 달부터 당장 시작할 계획입니다. 각지의 상단에서도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가온에서는 조선에 판매되는 필수품은 최소한의 이익을 제외하고는 염가에 공급하기로 했고, 각 상단에서도 어느 정도의 유통 마진 이상의 이문을 붙이지 못하게 했다.

송상 대방 전창진이 말했다.

“앞으로는 이곳 여의도가 조선의 도매 기능을 감당할 것 같습니다. 각 상단들이 이 주변에 전부 점포를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경상 대방이 말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서이수 전수가 말을 했다.

“지난번 회합 때 말씀드린 대로 도고상업 등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만 않으시면 별무사에서는 앞으로 적극적으로 여러분들을 도와드릴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상단도 마음을 열고 적극적인 자세로 대처해 나갑시다.”

병상 대방 나승엽이 각 상단의 대방들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하자 아무 말이 없던 대방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의도는 앞으로 마포의 상권 중 도매 기능이 이전해 와 새로운 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별무사는 향후 여의도를 조선의 모든 상단들이 모여 전문적인 도매 기능을 하는 시장으로 발전시킬 계획이고, 조선의 상단들을 효과적으로 통제 및 지원하면서 건전한 근대 자본으로 성장되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이 개관식에 가온에서 온 몇 사람이 별무사가 만들어 놓은 안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정철학 국정원 차장과 그를 보좌하는 요원들이다.

정철학은 앞으로 울릉도에서 교육을 마치고 조선에 들어올 국정원 요원들의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여의도의 별무사 상관 개관 행사에 맞추어 침투했다.

정철학은 여의도에 있는 별무사 안가에서 상주를 할 예정이었고, 국정원 요원들이 교육을 마치고 들어오기 전까지 정철학은 먼저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역사 연구회 회장인 권오인 선생이 부탁한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한 역사서 수집이었다.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네 가지 사서,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記), 북부여기(北夫餘記), 태백일사(太白一史) 원본을 찾아내는 것을 비롯한 우리 민족의 역사서를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한단고기가 1911년에 쓰여졌다면 그때까지 신라시대 때 책인 삼성기(三聖記)도 어떠한 형태로든 책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규원사화(揆園史話)와 발해 역사책인 진역유기(震域遺記), 신라시대 박재상이 쓴 부도지(符都誌), 발해시조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조그만 단서가 되는 책이라면 무조건 수집하기로 했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이전의 사서를 모조리 불태워버렸다고 해도 분명히 어딘가에 우리의 귀중한 역사서가 남아 있으리라는 확신 하에 그 소재를 탐색하고 수집하기 시작했다.

역사서의 수집은 조선의 상단 특히 송상이 운영하는 보부상들에게 부탁을 하기로 했다. 정철학은 이들 보부상들이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로든 가는 특성을 생각하여 이들을 활용하기로 했으며, 혹시 조선의 썩어 빠진 생각을 갖고 있는 양반들의 반발을 우려해 비밀리에 역사서를 수집하도록 부탁했다.

전창진도 별무사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것을 알고는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었다.

정철학은 전창진에게 우리나라의 역사가 적힌 어떠한 종류의 역사책이든 가져오기만 하면 조선시대의 책은 그 책과 같은 무게의 은을, 고려시대의 책은 그만큼의 금을 주기로 했고, 특히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책은 그 책 무게의 2배의 금을 주기로 했다.

이러한 역사책의 진위 문제는 일차로 서이수와 그가 추천한 학자들의 일차 검수를 거치기로 했다.

서이수 전수는 지난 가온에서의 교육으로 우리 민족의 바른 역사 세우기에 대한 것을 교육받아서 성리학만을 공부할 때 생각하던 역사 의식이 완전히 바뀌어 이제는 철저한 민족사관학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으며, 자신이 수집한 10여 권의 책도 조건 없이 희사해 주었다.

별무사의 이러한 노력으로 수만 권의 책들이 모여졌고, 조선의 각지는 역사서를 찾아서 한 몫 쥐려는 일들이 각지에서 은밀히 일어나기도 했다.

이 역사서 찾는 작업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 후일 중국과 일본 전역을 샅샅이 훑으면서까지 수백 년간 지속되었다.

그 결과로 그동안 우리의 역사를 신화로만 치부했던 식민 사학자들이 생각하는 범위를 훨씬 넘어 한단고기의 내용이 대부분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물론, 세계사에서 가장 오랜 문명인 홍산 문명이 우리 민족의 태초 역사임을 밝혀내는 쾌거를 이룩하는 등 세계 역사를 전부 새로 쓰게 되는 아주 중요한 역사서와 그것을 입증할 사료들을 속속 찾아내게 된다.

이 활동의 중심이 되어 움직인 것은 당연히 국사 연구회였으며, 이 국사 연구회는 후일 일본에도 들어가 일본서기의 날조되고 왜곡된 부분을 일일이 바로잡는 일도 하였고, 특히 우리 역사가 전래되어 성립된 일본 역사를 철저한 조사와 고증을 거쳐 확립시켰다.

이때로부터 활동을 개시한 역사 연구회는 그 후 수백 년을 지속적으로 연구 및 수집 활동을 하면서 전 세계에서 최고의 역사 연구기관이 되었으며, 학자들이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될 정도가 되었다.

1791. 5.20. 10:00 제주 주민 훈련소.

제주도는 6개월간의 주민 의식화 교육으로 몰라보게 주민들의 생활이 변했고, 그중 가장 많이 변한 것이 사람들이 쓰는 말이었다.

가온은 주민 교육을 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사투리 교정이었다.

처음 시간 여행을 하고 조선의 백성들과 대화를 할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말이었다. 특히 제주도의 방언은 거의 외국어 수준이었다.

6개월을 군사 교육을 병행하면서 실시한 의식화 교육을 받은 지금 대다수 주민들이 일부러라도 스스로 표준말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제주 주민들 대부분은 4월부터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제주도 경공업 단지의 공장에 취직이 되어 쌀과 함께 월급이 주어지자 그동안 교육받은 효과가 있었는지 주민들의 생활은 빠르게 시장 경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동안 농업단의 노력으로 조선의 채소와는 다른 신품종 채소가 보급되기 시작하자 부지런한 주민들은 너도나도 텃밭에 채소를 심어 자급자족을 시작했다.

가온에서는 당분간은 어떠한 씨앗도 버리지 못하게 하고, 씨앗을 가져오면 일정한 양의 채소를 주는 등으로 씨앗을 계속하여 확보해 나갔다.

시간 여행 당시 넘어온 소규모 양계장을 활용하여 만든 대단위 양계장으로 양계의 집단화를 이룰 수 있어서 계란과 육계도 조금씩 시장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대정농공단지 옆에 있던 대형 흑돼지 농장에서 규격돈(規格豚)이 출하되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축산 시장이 시장도 활성화되었다.

아직까지는 젖소가 부족하여 우유의 공급은 당분간 시간이 걸리겠지만 2~3년 후부터는 공급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호주에는 시간 여행을 해온 500여 두의 젖소가 종우로 농업단 수의사의 보호를 받으며 사육되고 있었다.

농협단은 육우로 쓸 종우도, 흑우를 비롯하여 조선의 소 500마리와 광저우에서 구입한 소 2,000여 두를 호주로 보냈다.

가온은 계속하여 소를 구입하여 호주에 대대적으로 축산업을 진흥할 계획이다. 앞으로 지금의 소를 시작으로 하여 계속 증식을 거듭한다면 10년 후에는 엄청난 수의 소를 보유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싼 가격에 안정적인 육류와 유제품이 공급되어 누구나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로 만들어 주민들 식생활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제주항에 오늘 처음으로 본토 주민들이 들어왔다.

1년에 20만 명씩 10년을 계획하고 시행하는 주민 교육이 처음으로 시행하는 날이다.

“자, 줄서서 내리세요.”

“어이, 거기 있는 양반, 천천히 내려오세요.”

“자, 여자분들은 이쪽으로 서세요.”

“으앙!”

“아니, 너는 왜 우니?”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우리 엄마 좀 찾아주세요.”

“그래, 알았다 내가 찾아줄 테니 울지 마라. 뚝.”

“아저씨, 우리 엄마 꼭 찾아주세요.”

주민들을 내리는 제주항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부두 건너편에서 주민들이 하선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장준하가 물었다.

“최 중령, 이번에 들어오는 주민들은 얼마나 되나?”

“이번에는 3,000명이 들어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네?”

“그렇습니다. 지금 본토의 가뭄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수용 시설을 좀 더 보강해야겠구나.”

“아무래도 미리 준비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저 사람들 복식이 저게 무언가 너무 심하구나.”

“차마 옷이라고 부르기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얼마나 힘들게 살았으면 저 정도겠습니까?”

장준하와 최성용이 배에서 내리는 본토 주민들을 보며 말을 하고 있었다.

주민들의 옷차림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날씨가 따듯한 하삼도의 유민들을 모아온 탓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차마 옷이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누더기였다.

“이 사람들 교육은 앞으로 어떻게 시행되나?”

“주민들은 6개월은 제주도에서 교육을 하고 6개월은 각자 배치될 현지에서 교육을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그나저나 저들에게 입힐 옷은 준비가 잘 되었나?”

“이번에 영국에서 들여온 천으로 일괄적으로 황토색을 물들인 개량 한복을 충분히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주민들 위생도 철저히 챙기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그동안 제주도가 변화하는 것을 몸소 봐온 제주시장 구영진은 유민들이 배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전에 목민관으로 있을 때는 가난은 나라도 못 막는다는 핑계를 대고 외면만 하던 유민들이었다.

그러나 가온군은 달랐다.

가온군은 조선의 누구도 하지 못한다는 주민들 가난 구제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지난 6개월간의 짧은 시간에 제주도민이 변화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구영진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신봉하며 평생을 매달린 성리학으로 과연 이렇게 어려운 백성들을 얼마나 먹여살릴 수 있는가.

처음의 위국공(衛國公) 주변의 인사들이 하는 것을 보고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속으로 혀만 차고 있었던 자신이 아니던가.

자신도 그동안 계속되어 온 공무원 교육원에서의 교육과 김석태 지사를 비롯한 가온시 공무원들의 자세를 보고는 비로소 이들이 진정한 목민관들이다, 라고 생각하며 얼마나 자신을 부끄러워했던가.

구영진 시장은 이전까지 외면만 하고 틈만 나면 잡아들여 관노로만 삼으려하던 유민들을 보고 눈물을 쏟는 자기 자신이 너무너무 부끄러웠다.

구영진 시장은 울고 있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몸소 나서서 이들의 손을 이끌고 인도했다.

이전 같으면 더러운 것이 옷에 묻을세라 피하고만 다녔지만 오늘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다.

배에서 내리는 어린아이는 안아서 내리고 애지중지 들고 온 옷 보따리는 보따리 주인보다 더 소중히 다루어주었다.

구 시장이 몸소 나서 팔을 걷어 부치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공무원들과 제주 병력이 그의 모습에 너도 나도 나서서 유민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통제를 하자 항구는 무거운 분위기가 걷어지고 아연 활기를 띠 시작했다.

유민들도 처음에는 어디로 끌려온지 몰라 어색해하다 앞에서 솔선수범하여 자신들을 보살피고 돌보는 이가 제주 목사라는 말을 듣고 유민들은 처음에는 믿지 않고 웅성거리다, 그 말이 사실인 것을 알게 되자 유민들 사이 아낙네들 중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이들도 있었다.

조선의 그 어느 수령이 구영진처럼 유민들을 대우해 주는 수령이 있었던가.

그저 틈만 나면 수탈을 일삼는 것이 조선의 수령들이 아니던가. 자신들도 그러한 수령과 아전들 등쌀에 못 견뎌 고향을 등지고 유민으로 떠돌거나 그 힘든 화전민이 되지 않았는가.

항구에서는 누구 하나 유민들에게 강력하게 통제하는 사람이 없었다. 유민들을 안내하는 사람들은 친절하고 상냥하게 안내를 했다. 처음에 서먹하던 수천의 유민들도 그러한 모습을 보고는 자신들이 먼저 나서서 ‘이것을 할까요’, ‘이리 하면 됩니까?’ 라고 묻는 광경은 참으로 가슴 먹먹한 광경이었다.

이들이 하선하는 것을 도우러 온 김석태 지사를 비롯한 제주도청의 가온 출신 공무원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으로 보고만 있었다.

얼마나 그동안 관청이라는 곳을 어렵고 무서워했으면 구 시장의 솔선수범 한 번에 수천의 사람들이 저렇게 변할 수 있는지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유민들은 구영진 시장의 솔선수범으로 빠르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유민들은 제주항에 입항하자마자 천연두 예방 접종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제주도 생활이 시작되었다.

훈련소에 입소하는 첫날 가져온 옷을 전부 빨고 소독하고 개개인 전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목욕을 시켰다. 처음 제주도에서는 단발령을 실시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주민들 스스로가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제주 주민들 중에는 머리가 조금만 길면 관리하기 귀찮다고 빡빡 밀어버리는 사람도 상당수 나왔다. 이제 제주도민은 누구나 머리가 짧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이것도 철저한 위생 교육의 산물이었다. 본토에서 넘어온 주민들은 제주항에서의 감동을 받아서인지 주변 환경에 주눅이 들어서인지, 머리를 짧게 잘라도 누구 한 사람 반발하거나 저항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머리기 짧았기 때문인 탓도 있었다.

그리고 전원을 영국에서 구입한 천으로 만든 색깔이 황토색으로 물들인 생활 한복을 지급하여 입혔다.

밤 새워 배를 타고 와서 피곤하기도 하련만 누구 한 사람 나와서 큰소리치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은 이미 지도군에 있었던 약 1개월간의 기간 동안 어느 정도 정신 교육을 받았고, 지도군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자 유민들은 군말 없이 지시에 따랐다.

그동안 힘 있고 가진 자들의 등쌀에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유민이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숙식이 해결되자 나머지는 자동이었다.

당분간은 6세 미만의 어린이들을 제외하고는 각자 나이와 성별로 구분하여 일괄 수용되었다.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자르고 개량 한복을 입히자 주민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 달라졌다.

아직은 낯선 환경에 주눅 들어 있는 주민들을 제주 출신 조교들이 그동안 배운 바대로 주민들을 잘 이끌었다.

조교 1명이 3명의 주민을 담당하므로 친절하고 절도 있게 주민들을 이끌어 나가니 유민들이 곧 이들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여 빠르게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오전부터 들어온 주민들을 정리시키느라 하루가 바쁘게 지나갔다. 다음날부터는 새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본토 주민들은 다음날 아침이면 깨달을 것이다.

1791. 5. 20. 연해주 흥개호(興凱湖) 대평원.

호주에서 개척호가 5만 석의 밀을 실고 동명항에 들어왔다. 모든 장병들을 동원하여 하역한 밀은 곧바로 트럭에 실려 흥개호 대평원으로 옮겨졌다.

기다리고 있던 트랙터는 밀이 들어오자 바로 나누어 싣고 파종을 시작하였다.

지난 2개월 넘는 시간 동안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트랙터를 동원하여 경상도 면적의 대평원을 경지 정리를 했지만, 아쉽게도 밀이 도착할 때까지 총 목표 면적에 절반 정도도 정리를 하지 못했다.

농업단은 우선 가장 토질이 좋은 지역을 경지 정리를 했고, 나머지 지역도 계속 경지 정리를 하면서 파종하기로 했다.

지평선이 보이는 들판에 수십 대의 트랙터가 파종을 위해 일렬로 나가는 것이 장관을 이루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밀은 조선 백성들의 허기를 없애는 중요한 식량 자원이 될 것이다.

5여단장 장도현 중령은 수십 대의 트랙터가 파종기(播種機)를 달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씨를 뿌리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참 장관이다. 우리가 지평선을 바라보며 파종하는 대단위 농장이 얼마나 있는가. 이제 이곳은 우리 땅이다. 이곳은 발해가 망한 후 800년 만에 다시 찾은 이 땅을 잘 지켜야 한다.”

장 중령은 혼자 다짐을 했다. 뒤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신경진 중위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진 중위도 장도현 중령의 말을 백번 공감했다.

지금이 넓은 대지가 전부 가온의 영토다. 대평원을 전부 개발하면 거의 경상도 넓이의 농지를 개발할 수 있었다.

15일이면 2,000명의 제주 출신 신병을 받는다. 들리는 전언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사기도 높고 군기가 엄정한 신병들이라고 한다.

6월 말이 되면 부사관 출신 소위와 중위들이 훈련을 마치고 임관되어 돌아오기 시작하면 정식으로 부대 편성을 하려고 아직은 준비하고만 있었다.

1791. 6. 1. 창덕궁(昌德宮) 선정전(善政殿).

정조 대왕은 만조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어명을 내렸다.

도승지는 왕명이 적힌 교지를 읽었다.

“과인은 지난 봄부터 금난전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 지난 정미년(1787년)에 정미통공(丁未通共)을 실시하였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잠시 뜸을 들인 도승지가 다시 목소리에 힘을 주어 교지를 읽어 내려갔다.

“이에 고민하던 중 좌상(左相)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늘부터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완전히 금지시킨다. 이로써 백성들이 도가 상업에 대한 폐해가 시정되기 바라노라. 다음으로 오늘부터 도량형을 통일한다.”

도량형의 통일 부분을 읽기 시작할 때 정조는 가만히 신료들을 살펴보았다.

“이는 무지한 백성들이 교활한 상인들에게 속아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전국 곳곳마다 전부 조금씩 다른 방식의 도량형을 통일하여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고자 함이다. 이 도량형의 통일이 반드시 지켜져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백성이 없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무분별한 서원의 증설을 일체 금지한다. 지금 조선에 서원이 너무 남발되어 본래 학문의 도량으로 구실을 못하고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선왕 제위 14년(1738년, 영조 14년)에도 대대적으로 서원을 정비에 하여 200여 개소를 철폐하여 700여 개소만 남기고 정비한 적이 있었지만, 그 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 또다시 늘어나 이전과 같이 되었다. 과인은 앞으로 서원을 증설하는 것을 절대 금한다. 앞으로 서원을 대대적으로 개혁할 것이니 이 또한 즉시 시행하라.”

신료들은 각자 복잡한 심정을 숨기고 도승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으로 아라비아 숫자의 사용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는 숫자를 표기하는 데 상당한 불편함이 있다. 이는 문자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사용하는 데 많은 불편함이 있다. 이에 과인은 새로이 누구나 편히 사용할 숫자 표시 문자로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할 것을 주창하노라. 이 네 가지 사항은 과인이 백성들의 삶을 돌보자 함이니 즉시 시행하라.”

도승지가 왕명을 제창하였다.

그러자 신료들을 중 제제공이 나서서 물었다.

“전하 다른 것은 다 알겠사온데 아라비아 숫자는 어떤 것인지 저희들은 처음 듣는 말이옵니다.”

그러자 정조가 말했다.

“그것은 과인이 알려주겠노라. 상선(尙膳)은 준비한 것을 가져오라.”

상선이 넓은 종이에 쓰여 있는 것을 가져와 걸었다.

거기에는 아라비아 숫자와 한문의 숫자 표기 방식이 쓰여 있었다.

“지금 경들이 보고 있는 것과 같이 한자로 숫자를 표기하려면 보는 대로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오. 하지만 보는 바와 같이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를 하면 아주 간단하게 할 수 있소. 한번 보시오.”

상선이 걸어 논 종이에는 0부터 9까지의 표기법과 그 시용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조선의 역대 국왕 중에 천재로 존경받는 정조의 차분한 설명은 단 한 번의 설명으로 거의 모든 신료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0(零)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였으나 나머지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도 평생을 공부해 온 조선의 관료들이었다.

정조의 명은 즉시 시행되었다.

금난전권의 금지가 권신들에게 뒷주머니를 막는 일이었지만 드러내놓고 반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조의 왕명은 조보(朝報)를 통해 조정의 모든 관료들과 한성의 상공인에게도 알려졌다.

각 지방 외관의 경우는 ‘표준 계량 용기’와 ‘표준 자’를 파발을 통하여 전 조선에 전해졌다.

지금 시대는 정조 즉위 중반기로, 정조의 힘이 가장 강성하던 시기로 명분이 있는 정조의 왕명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힘 있게 받아들여졌다.

특히 도량형의 미터법과 아라비아 숫자의 도입은 호조의 적극적인 반영으로 그 보급이 급물살을 탔다.

도량형은 미리 최성용과 별무사의 언질을 받은 상인들도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호응을 하였다.

악덕 상인들이야 도량형이 여러 가지 혼재되어 있는 게 눈속임을 위해서 좋지만 상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통일이 되면 될수록 좋았기 때문에 상단들도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호조에서도 속아문의 모든 아전들을 철저하게 교육시키고 그 보급에 힘써 빠르게 미터법은 정착되기 시작했고 각 5일장을 비롯한 상설 장시에도 호조와 각 지반의 호방이 나가 도량형 계도에 적극 나섰다.

조선에서 정책이 상하가 이해관계가 맞아 혼연일체로 시행되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1791. 6. 2. 10:00 합동사관학교(合同士官學校) 연병장(練兵場).

제1기 사관학교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장준하는 임관하는 200명의 사관들의 계급장을 일일이 달아주었고 이들은 전원 중위로 임관됐다.

“부대, 차렷.”

“위국공 합하께 대하여 받들어 총!”

“충! 성!”

“귀관들은 오늘부터 위관으로 임관되었다. 이제부터는 귀관들이 우리 가온군 나아가 대한의 군을 책임질 간성이 된 것이다. 오늘 임관하는 사람들은 그간의 경력을 인정받아 중위로 전부 임관하게 되었다. 알아야 될 사실을 어느 자리에 가더라도 여러분들이 이제는 군을 이끌어야하는 최 일선 사관이라는 사실이다. 부디 부하들을 잘 이끌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최고의 장교가 되기를 바란다. 임관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여러분의 앞길에 행운이 항상 깃들기를 바란다.”

오늘 임관하는 장교들은 전부 중위로 임관했다.

부사관들 중 나이가 많은 주임 원사들은 그들이 맡고 있는 업무를 위해 위관으로 임관을 포기하고 부 사관으로 남았으며, 장준하는 이들을 영관급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었다.

오늘 임관하는 위관들을 위해 가온의 모든 지휘관들이 이들을 축하해 주었고, 이들의 군 경력을 높이 사서 이번에 입대한 조선 병사들의 지휘를 맡겼다.

성대한 졸업식을 마친 위관들은 바로 각자의 임지로 떠났다. 가온사관학교는 2기 사관생도부터는 500명의 생도를 받았다.

매월 졸업생들이 임관되면 현재의 간부 부족 현상이 어느 정도는 해소될 것이다. 가온의 지휘부는 2년의 기간 동안 군에 남으려는 전 병력을 사관학교에 입교시켜 장교로 임관시킬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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