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광저우
1791년 3월 24일 일본 나가사키 항(長崎港).
기정진 별무사 별좌와 석원형 과장은 엔진을 부착한 판옥선을 타고 나가사키 항에 입항했다.
조선의 대일 무역은 대마도가 독점하고 있었다.
대마도는 양국 간 무역을 중계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섬의 4%만이 경작지로 식량이 항상 부족하였던 대마도는 일본과 조선에 양속 관계를 유지하였다.
현재 번주(藩主)는 소 요시카쓰(宗義功 1785~1812)로 소씨 가문의 32대 당주이자 12대 번주였다.
기정진과 석원형이 조선의 판옥선을 타고 항구에 입항을 하자 나가사키 전체가 들썩였다.
조선 개국 이후 최초로 조선 상인이 먼저 일본에 입항한 것이다.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조선 상인 입항은 나가사키의 일대 사건이었다.
항구의 관리는 기정진과 석원형 일행을 나가사키 부교소(長崎奉行所)로 안내해 갔다. 나가사키는 막부 직할령으로 이전의 좌도도와 같이 막부에서 지방관 지토(地頭)가 파견 나와서 다스리고 있었다.
봉행소(奉行所)에 이르자 관리는 잠시 석 과장 일행을 기다리게 하고는 봉행소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봉행소 관리는 석 과장 일행을 지토다이의 집무실인 봉행소 내 대면소(對面所)로 이들을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나는 나가사키의 지토 가토 마사모리(家藤昌盛)라 합니다. 그래, 조선에서 오셨다고요.”
석원형 과장이 가토 마사모리의 말에 답을 했다.
“예, 저희는 조선의 주상 전하의 허가를 얻어 막부와 직접 교역하기 위해 온 가온무역의 나가사키 담당 과장 석원형이고, 이분은 조선의 왕실 직할 별무사 별좌(別坐)로 조선의 품계로 종5품의 해당하는 관리이십니다.”
“기정진이라고 합니다. 조선의 별무사 별좌로 있습니다.”
기정진은 시간 여행 전 대정농공단지의 축협공장에서 일본에 제주 흑돼지를 수출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이번에 가온무역의 일본 상관장에 임명되었으나 외부적으로는 조선 왕립 기관인 별무사 별좌의 신분을 겸직하여 나가사키에 왔다.
에도막부는 전란 후 조선에 수차 요청하여 선조 40년부터 다시 교역을 실시하였고, 신문물을 전수받기 위해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기도 하는 등 조선과 에도막부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하였다.
석원형 과장이 내민 조선 국왕의 교서를 받아 든 나가사키의 지토(地頭) 가토 마사모리는 교서를 다 읽어보고 말했다.
“조선에서 우리 일본과 직교역을 원하시면 우리 일본은 언제라도 환영합니다. 상인들과의 교역도 좋은데 조선에서 관리가 직접 파견되셔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교역하시겠다고 하니 저희 입장에서는 황송한 일입니다. 하지만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쇼군(將軍)께 장계를 올려야 하니 잠시 막부의 허가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지내시는 데 불편하지 않게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 무역회사에서 쇼군께 드리는 진상품입니다.”
기정진 별좌는 가온에서 가져온 물품을 내밀었다.
그것은 팔만대장경의 완판 인쇄본 1질과 아주 고급스러운 명품 자기 1질과 홍삼 30근이었다.
가토 마사모리는 앞에 있는 진상품 중 홍삼이 가장 탐이 났다. 조선의 홍삼은 일본에서는 너무 귀하여 1근에 일본은(日本銀) 500냥(상평전 2,000냥)의 엄청난 금액으로 거래되었다.
당시 환율은 일본의 은이 청국에 비해 싸고, 청국의 금이 일본에 비해 가격이 낮았다. 이러한 환율로 송상의 경우 일본에 인삼을 팔아 은으로 정산을 하여 청국에 그 은을 팔아 막대한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나가사키 지토인 가토의 탐욕 어린 눈빛을 바라본 석원형 과장은 별도로 가져온 5근의 홍삼을 가토 마사모리에게 내밀었다. 가토의 입이 귀에 걸렸으며,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나가사키 봉행소의 선박이 정조의 교지와 가온무역의 진상품을 갖고 에도로 출발하였고 이들은 한 달은 있어야 돌아올 것이다.
조선의 상인들과 관리들이 교역을 위해서 봉행소에 머문다는 소문이 있자 부근 규슈의 번에서 교역을 위해 은밀히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규슈(九州)에는 구마모토 번(熊本藩), 시마바라 번(島原藩), 사쓰마 번(薩摩藩), 후쿠오카 번(福岡蕃), 사가 번(佐賀蕃), 가라쓰 번(唐津蕃), 구루메 번(久留米蕃), 야나가와 번(柳川蕃), 고쿠라 번(小倉蕃) 등이 있었다.
규슈에 있는 번들 중 처음으로 사람이 찾아왔다.
석원형은 찾아온 손님을 확인하기 위해 봉행소 객관을 나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누구십니까?”
“예. 저는 사쓰마 번의 관리로 있는 가바야마 치카라라고 합니다. 이번에 귀국에서 나가사키에 상관을 내신다고 하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석원형은 가바야마 치카라를 기다리게 하고는 객관 안으로 들어갔다.
“상관장님, 밖에 사쓰마 번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교역을 하기 위해 온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들어오라고 하시지요.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기정진은 사쓰마 번에서 온 손님을 모시라고 하면서 일본에 올 당시 최성용과 나누었던 밀담을 생각했다.
“축하드립니다, 상관장님.”
“고맙습니다, 사장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전 시대에서 일본과 무역을 해보셨다는데 나가사키는 가보셨습니까?”
“초행입니다. 저희는 대부분이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오사카에 거래선이 있어 규슈 쪽은 처음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며칠 전 저희가 드린 책자는 읽어보셨는지요.”
“예, 몇 차례 정독했습니다.”
“그 책에서도 나온 바와 같이 지금 일본은 상품경제가 크게 발전해 오사카, 에도, 교토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상품 경제권을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특히 오사카 상인이 일본의 모든 경제권을 쥐기 시작할 때로, ‘오사카 상인이 화를 내면 천하의 제후들도 겁을 낸다’고 말할 정도로 상인 계급이 두드러진 성장을 하는 때로 사회적으로는 상인들이 부유해지면 질수록 중하층 무사들과 평민들은 나날이 궁핍해져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 에도막부로 인하여 계급 간의 갈등이 증폭되는 시기입니다.”
최성용은 일본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계속했다.
“일본의 인구는 약 3,000만에 달할 정도이고, 각 지방에 독자적인 시장들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자본주의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는 시기로 관장님이 나가사키에서 얼마나 이들을 흔들어주느냐에 따라 일본의 경제가 요동을 칠 수 있을 겁니다. 이전 시대 일본에 당한 것을 맘껏 풀어보십시오.”
“알겠습니다. 저도 이번에 자원한 이유가 이전 시대 그들과 무역을 하면서 당한 추악한 짓거리들을 반드시 그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서입니다.”
“많이 힘드셨나봅니다.”
“말도 마십시오. 저같이 축산물을 수출하는 일은 언제 어느 때 말도 안 되는 하자를 잡을지 몰라 거의 칼날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뒤집어엎고 싶어도 농민들이 고생 고생해서 키운 거라 성질대로 할 수도 없고 그것을 교묘히 이용해서 값을 후려치는 것을 보면서도 벙어리 냉가슴을 얼마나 알았는지 모릅니다.”
“그 정도로 심했습니까?”
“말도 마십시오. 일본인들은 오죽하면 자신들이 살 때와 팔 때의 얼굴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예. 고생 많이 하셨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저들 위에 있으니 그들을 잘 주물러보십시오. 그리고 이번에 나가사키에 나가시면 교역을 하기 위해서 여러 번에서 사람들이 찾아올 것인데 그중 사쓰마 번을 중점적으로 공략하십시오.”
“그들을 공략해야 되는 목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건만 팔기 위해 일본에 상관을 세우려는 것이 아님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번에 일본에 상관을 세우는 주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그 이유는 …….”
기정진은 최성용과 은밀히 나눈 밀담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있던 중 손님이 들어온 것을 알리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그를 맞이했다.
사쓰마 번에서는 생각보다 나이가 젊은 사람이 찾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사쓰마 번의 숙노(宿老)인 가바야마 치카라입니다.”
기정진은 일본에 오기 전에 최성용과 나누었던 밀담에서 들었던 사쓰마 번의 상황을 기억해 냈다.
지금 사쓰마 번의 번주는 시마즈 나리노부(島津?宣)로, 시마즈 가문 제26대 당주이자 사쓰마 번의 제9대 번주인 시마즈 나리노부는 아버지인 8대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가 1787년 1월 은퇴하면서 번주에 올랐으나 아버지가 실권을 쥐고 있어서 허수아비 번주다.
1809년 긴축재정을 실시하려다 에도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던 전대 번주가 긴축재정을 거부하면서 번주에서 강제로 물러나는 비운의 번주였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가바야마 차카라는 근사록파(近思錄派)로 1809년 긴축재정을 위한 정책에 반대하던 전대 번주인 시마즈 시게히데로부터 할복을 명령받는 인물이다.
가바야마 치카라는 전대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가 에도에서의 화려한 생활로 인해 번의 재정이 적자에 허덕이는 이때, 사쓰마 번의 적자 재정을 타파하기 위해 조선의 물건을 받아 교역을 하여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이곳 나가사키 봉행소에 기정진을 찾아온 것이다.
“그래,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저는 이번에 조선에서 일본과 직접 교역을 하기 위해 나가사키에 상관을 개설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저희는 조선과 직접 교역을 원합니다.”
“그렇습니까? 그 문제는 아직까지 막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항이라서 우리는 지금 막부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번과 교역을 하시면 막부의 허가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대 번주님께서 에도(江戶)에 계시고, 특히 전대 번주님의 셋째 따님인 시게히메(계명은 ?大院) 님은 쇼군의 정실부인이십니다. 허가 문제는 저희들이 책임지고 받아내겠습니다.”
가바야마 차카라의 말에 기정진 상관장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교역에 관한 허가 건은 기다리면 된다고 하고 사쓰마 번은 저희들과 어떤 교역을 하시기 바랍니까?”
“지금 조선에서 홍삼이 양산되기 시작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들에게 그 홍삼의 일본 독점 판매권을 주십시오.”
“아니, 홍삼 양산은 지금 조선에서도 아직 발표하지 않았는데 어찌 알고 계십니까?”
“사실 저희들은 조선과 직접 교역하기 위하여 조선의 내상(萊商)과 직접 접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내상이 지금까지 교역 물품을 제외하고는 앞으로의 신규 교역은 왕실 직할 기관인 별무사가 전담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정보를 입수하였는데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사쓰마 번에서는 저의 별무사가 홍삼의 독점권을 주면 우리에게 무슨 이득을 주시겠습니까?”
“저의들이 무엇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기정진은 답을 하지 않고 가바야마 차카라에게 역으로 물었다.
“사쓰마 번에서는 홍삼과 인삼을 1년에 최소한 어느 정도 판매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가바야마 차카라는 말했다.
“홍삼은 1만 근 정도 인삼은 2만 근 정도는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기정진은 가바야마 차카라에게 성냥과 발화기를 보여주었다.
가바야마 차카라는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 이것은 성냥이라는 물건입니다.”
기정진은 말과 함께 성냥을 ‘착’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을 켰다.
“아니, 부싯돌도 없이 불이 붙습니까?”
“예, 한번 사용해 보시죠.”
가바야마 차카라는 자신도 기정진과 같이 불을 붙여보았다.
기정진이 가져온 성냥은 딱성냥으로 아무 곳에나 그어도 불이 붙었다. 가바야마 차카라는 신기하였다.
“이 성냥은 서양에도 없는 물품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번 보시죠.”
기정진이 들어 보인 것은 발화기로 외부에는 은입사가 되어 있어 아주 고급스러웠다.
가바야마 차카라는 발화기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상당히 화려한 장식으로 이루어진 라이터는 한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아주 고급스러운 장신구입니다.”
그러자 기정진이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장신구가 아니라 이렇게 사용하는 겁니다.”
라고 하면서 발화기의 뚜껑을 열고 손을 움직여 불을 붙였다.
“착.”
소리와 함께 붙은 불은 성냥과는 다르게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타올랐다.
“이야! 이거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동안 침착함을 유지하던 가바야마 차카라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감탄사를 표시하였다.
발화기를 받아 든 가바야마 차카라는 수십 번을 켰다 껐다 하면서 발화기에 경탄을 표하였다.
“어떻습니까. 이것은 발화기(發火器)라는 것으로 조금전의 성냥은 서민용이고 이 발화기는 상류층을 상대로 한 물품입니다.”
그 말에 가바야마 차카라가 대답하였다.
“이 발화기는 에도에 가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겠습니다. 상류층의 번주와 상급 무사들이 담배를 피울 때 사용하거나 게이샤들의 노리개로 인기가 대단할 것 같습니다.”
당시 에도(현 도쿄)는 인구 100만의 대도시였다.
“우리 별무사에서는 인삼과 홍삼 그리고 성냥과 발화기의 일본 독점 판매권을 한 곳의 번(蕃)에 드리려고 합니다. 다른 품목도 많이 있지만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소비재로 당장 현금화가 가능한 물품입니다.”
기정진이 다시 말을 계속했다.
“이 물품을 사쓰마 번에 독점 판매권을 드리면 막대한 수익이 발생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면 지금 사쓰마 번의 어려운 재정은 한순간에 풀어질 것입니다. 저희가 귀 번에 독점 판매권을 드리면 귀 번에서는 무엇을 해주시겠습니까?”
당시 사쓰마 번은 90만 석의 영주였지만 실제로는 50만 석 정도였다.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하였지만 막부의 정책으로 에도에 저택을 두었던 탓에 씀씀이는 계속 늘어만 가서 번의 재정이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실제 이 시기 일본의 거의 모든 번들이 적자투성이로 부체를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재정이 최악의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사쓰마 번의 재정을 관리하고 있던 가바야마 차카라는 생각했다. 지금 앞에 있는 물품만 독점할 수 있다면 번의 재정은 지금보다 2배 이상 늘어날 것은 분명하였다. 그리만 된다면 사쓰마 번은 일본 최대의 번이 되어 막부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는 일이었다.
만일 이 독점 판매권이 자신들과 경쟁 번인 조슈번(長柱蕃)으로 넘어간다면 그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가뜩이나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 그리된다면 사쓰마 번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에 봉착한다.
그러면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은 이미 사쓰마 번의 어려운 재정 상태까지도 알고 있었다.
가바야마 차카라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아도 이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생각다 못해 가바야마 차카라가 말했다.
“그러면 저희들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기정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오키나와의 할양(割讓)입니다.”
“예?”
캬바야마 차카라는 생각지도 않은 기정진의 답에 깜짝 놀랐고 옆에 있던 석원형도 깜짝 놀랐다. 아무리 막대한 이득이 오는 거래라고 하지만 영토를 할양한다는 것은 자신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지금 조선과 거래한다면 잠시 생각만 해도 한해에 은 수백만 냥의 이득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토의 할양은 달랐다.
“그것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번주님이 허락하시어도 전대 번주님의 인가가 있어야 하는 사항입니다.”
그 말에 기정진이 말했다.
“오키나와는 지금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중 외교정책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사쓰마 번에서는 오키나와에서 나오는 흑사탕 이외에는 별다른 수익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사쓰마 번(薩摩蕃)에서도 중국 때문에 완전 통치가 곤란하다면 실익을 찾으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가바야마 차카라가 기정진의 말을 이어 대답했다.
“하지만 그곳은 흑사탕이 나오는 사탕수수 농장이 있어 사쓰마 번의 재정에 막대한 도움을 주고 있는 곳입니다.”
“아! 저희는 흑사탕 생산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저희는 그곳을 이용하여 교역을 하고자 할 뿐입니다. 사탕수수 농장은 지금과 같이 계속 경영하십시오. 그것은 완전히 문서화해 드릴 수 있습니다.”
사쓰마 번은 오키나와에서 나오는 사탕수수의 흑사탕을 철저히 통제하여 상당한 부를 쌓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 일은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니 돌아가서 번주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우리도 처음 사쓰마 번에서 찾아오셨으니 일단 기득권을 드리겠습니다만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말게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빠른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기정진은 인사를 하며 은근한 압박을 해놓았다.
사쓰마 번은 조선과 교역 협상을 하고 돌아온 가바야마 차카라의 협상 내용을 갖고 회의를 거듭하다 결론이 나지 않자 에도에 있는 전대 번주인 8대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에게 결정을 일임하기로 하고 에도로 사람을 파견했다.
사쓰마 번에서는 이 결정을 기정진에게 급히 전하면서 그의 동행을 부탁해 왔다. 기정진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변복 동행하여 에도로 들어갔다.
에도에서 기정진과 시마즈 시게히데와 한 달이 넘는 지루한 협상 끝에 그 해 7월말이 가서야 조약을 하며, 조약에 의해 오키나와의 할양이 이루어진다.
오키나와는 1609년 사쓰마 번의 침략으로 사쓰마 번에 점령되어 식민지화되었으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사쓰마 번의 전략으로, 대외적으로는 독립국 형태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류큐 왕국은 이 때문에 중국과 일본에 동시에 조공하는 양속 관계가 유지되었다.
‘기정진-시마즈 협약’은 다음과 같다.
1. 에도막부와의 입장을 고려하여 오키나와 할양은 사쓰마 번과 조선의 가온무역과의 협약으로 할양한다.
2. 류큐 왕국은 사쓰마 번의 지배를 벗고 가온무역의 속국으로 독립한다.
3. 사쓰마 번은 앞으로 일체 오키나와 내정에 간섭할 수 없으며, 지금 파견 나와 있는 인원은 그동안의 업무를 가온무역에 인수인계 후 전원 철수한다.
4. 오키나와의 사탕수수 산업은 지금과 같이 사쓰마 번이 독점한다. 단, 이때 인부들은 사쓰마 번의 사람을 쓰며 만일 오키나와의 인력을 사용할 경우 그에 따른 일당을 지급한다. 이때 지급하는 일당은 조선의 예에 준한다.
5. 앞으로 조선의 가온무역에서 나온 물품은 사쓰마 번이 일본의 판매를 독점한다. 단. 가격이 맞지 않을 경우는 예외로 한다.
6. 사쓰마 번은 가온무역에서 나온 물품이 일본에서 복제하여 유통되는 것을 철저히 막는다.
7. 이를 위해 에도막부가 특별히 천왕의 영을 발표하고 막부의 명으로 특허법을 만들어 발효한다.
위와 같이 7가지 항의 협약을 하였다. 그리고 전대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는 협약과는 별도의 협상 대가로 3.75톤의 황금(금 1,000관, 현재 가격 2,000억 원)을 따로 요구하였고, 별무사에서는 두말하지 않고 그 돈을 만들어주었다.
이로써 4개월간의 협상 끝에 오키나와가 조선의 영토가 되었다.
사쓰마 번은 이 협약으로 일약 일본 제일의 부강한 번으로 부상하지만 사쓰마 번의 급작스런 부상으로 에도막부는 두고두고 골머리를 썩인다.
힘의 균형이 깨진 번들은 나가사키 번과 같은 전통적인 사쓰마의 경쟁 번을 위시하여 전국의 대형 번들이 은밀히 군비 증강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고, 국정원의 각 번들에 대한 이간책으로 점점 골이 깊어진다.
오키나와의 지리적 중요성을 모르고 있던 일본은 눈앞의 엄청난 이익에 급급하여 단지 관리가 힘들어 땅을 포기한 청국과 조선과 같은 우를 범한다.
오키나와는 가온의 태평양 진출에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이며 앞으로 오키나와를 기점으로 태평양의 섬들을 공략하여 서양 세력을 일소할 것이다.
태평양은 현재 괌 섬이 있는 마리아나 제도는 스페인령이었으며, 유황도와 오가사와라 제도 등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나가사키는 외국인 전용 거주 공간으로 청국의 상인들은 도진야시키(唐人屋敷, 30,000㎡에 2,000명 수용)에 거주하였고, 네덜란드인은 데지마(出島, 15,369㎡)라고 하는 인공 섬에 거주하였다.
서양의 외국인의 감시가 상당히 엄하였으나 청국 상인에게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개항 이후 거주지가 제한되었으나 1784년 대화재 이후 외국인의 나가시키네 주거지 건축이 허용됐다.
가온은 협정이 채결된 후 나가사키 봉행소의 허가 절차를 밟아 66,000㎡(20,000평) 넓이에 창고와 가온무역 상관을 지었다.
이때 사쓰마 번의 대대적인 인적, 물적 지원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가온무역 상관은 청국과 네덜란드의 상관과는 달리 일반 상인들에게는 일체의 물품을 팔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과 아무런 마찰이 없었다.
이러한 일은 특히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생각하는 청국인들의 은근한 압박을 피할 수 있었다.
1791년 3월 26일 청국 광저우 항 영국조차지.
광저우에는 별무사별좌(外需司別坐)로 임명된 가온무역 이경식 상관장이 대외 업무를 총괄하고, 국정원 유럽과장 김영석과 중국과장 이영달이 요원 4명과 양곡 매입을 위해 제주상단 양일현 행수가 동행하였다.
이경식 상관장은 가온의 주민으로 중국어에 능했다.
이번 별무사의 중국 진출에 스스로 자원하였으며,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임명되었다. 양일현은 광저우에 도착함과 동시에 이전 미곡상을 찾았다.
이전에 거래한 미곡상과의 협상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50만 석의 미곡을 구입하기로 하고 가격은 춘궁기를 감안하여 1석당 5냥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양일현은 이때 상술을 발휘하여 미곡의 가격 250만 냥(천은 62만 5,000냥)을 홍삼으로 치르기로 협상했다.
홍삼의 가격은 책문후시(柵門後市)의 홍삼 가격인 천은(天銀) 100냥보다 조금 비싼 천은 150냥으로 정했다.
이 당시 홍삼은 가공하기 쉽지 않아 생산이 어려웠기 때문에 가격이 비쌌다. 책문의 청상들이 천은 100냥을 주고 구입한 홍삼을 광저우에 오면 천은 200냥 이상의 가격으로 광동 상인에게 넘겼다.
천은 150냥의 가격은 둘 다 만족하는 가격이었으며 홍삼 4,167근은 미곡이 전부 모이는 대로 수시로 넘겨주기로 하였고, 계약금조로 50근의 홍삼을 미곡상에게 넘겼다.
이때는 별무사에서 강화도에 증포소(烝包所)를 두고 홍삼을 본격적으로 생산했다.
강화도에 증포소를 만든 이유는 향후 강화인삼의 산지이기도 하였지만 위국공 장준하의 홍삼에 대한 남다른 애정 때문이었다.
강화도에 증포소가 있어야 장준하가 수시로 왕래가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증포소는 매년 5만 근 정도의 홍삼 가공이 가능한 시설로 준공되었다. 송상의 인삼 수매로 인하여 인삼 수급에는 문제가 없었으며, 향후 10만 근 생산 규모로 확대할 계획이었다.
인삼은 강화, 금산, 풍기 세 곳에서 재배한다면 그 물량은 충분히 수매가 가능할 것이며, 이에 따라 인삼과 홍삼 값도 저절로 내려가는 효과도 바라볼 수 있었다.
상호간 만족한 가격으로 흥정하여 보고를 하자 최성용은 이 일을 장준하에게 보고하였다. 크게 만족한 장준하는 특별히 양일현에게 홍삼 20근을 포상했다.
이 당시 청국은 뉴호록 화신(?祜祿和?)이 건륭제의 전폭적인 신임으로 청국 조정의 사실상의 수상격인 수석군기대신(首席軍機大臣)에 이르러 조정의 영수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789년 화신은 자신의 아들이 건륭제의 막내딸 고륜화효공주와 혼인하자 건륭제의 사돈이 되었고, 각지의 지방관이 자신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파면을 시킬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청국은 본래 해금(海禁) 정책으로 서양과의 교역을 금하였다. 그동안은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근거지로 하여 중국 무역 독점권을 행사하였으나 영국 등이 계속하여 청국에 개항 요구를 하여 1685년 해금을 해제하면서부터 광저우를 개항하였다.
해외무역이 허가되면서 세관인 월해관(?海關)이 광저우에 설치되었으며, 1757년부터 해외무역을 광저우 한 곳에만 한정시키자 광저우는 중국 유일의 무역항으로 상당한 발전을 하였다.
서양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선박을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의 선박이 내항하여 중국 수출품인 차, 비단 등의 대금으로 해마다 수천만 냥의 외국은(外國銀)이 흘러들어 와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경식은 별무사 별좌의 신분으로 광저우 세관인 월해관을 찾아갔다.
“안녕하십니까?”
광저우 항에 조선의 판옥선이 입항한 사실을 알고 있던 월해관 관리 송지청(宋之淸)은 이경식이 월해관으로 들어와 인사를 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시오. 조선에서 오셨다고요? 청국 말에 상당히 능하십니다.”
이경식은 말을 돌려 말했다.
“예, 제가 사역원(司譯院)의 관리로 있다가 이번에 아국(我國)의 주상 전하 명을 받들어 별무사 별좌에 임명되어 이곳에 왔습니다.”
이경식이 말을 하고 정조의 교지를 송지청에게 공손히 건네주었다.
교지를 받은 송지청은 말했다.
“교역은 만주의 책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렇게 거리가 먼 광저우까지 오실 필요가 있습니까?”
송지청의 말에 이경식이 답했다.
“저희 조선은 대대로 물자가 부족하여 상국인 청국과도 교역하고 일본과도 교역해 왔으나 계속 물자가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상국(上國)의 물자도 교역을 하고 이곳 광저우에 있는 양이(洋夷)들과도 교역을 할 수 있을까 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이경식이 조선의 형편이 어렵다고 돌려서 말했다.
“그 정도로 물자 부족이 심각합니까? 어차피 이곳 광저우는 양이들과 교역을 하기 위해 개항한 무역 항구입니다. 아국과는 정상적인 세금만 납부하시면 교역을 허락하겠습니다. 속방(屬邦)의 어려움을 상국이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일 아니오. 하, 하, 하.”
속방 운운하는 송지청의 말에 속이 울컥하였으나 이경식은 꾹 참았다. 그래도 송지청은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받았던 국정원 교육 중 보통의 청국의 관리로는 드물게 조선에 호의적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저희들이 상관을 개설하려면 어디가 좋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감사의 인사입니다.”
이경식 상관장은 홍삼 10근을 송지청에게 내밀었다.
내밀어진 물품이 홍삼인 것을 보고는 송지청이 반색을 했다.
조선의 상관은 송지청의 배려로 광저우 항의 가장 요충지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안전과 앞으로 상관에서 일할 일꾼들의 통제가 우려된다는 핑계로 조계지(租界地) 지정을 받아냈다.
후일 서구 열강이 조계지에서 행정 자치권과 치외법권을 누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송지청에게 부탁을 하여 광저우 관청의 허락을 받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출입할 수 없도록 조치하였다.
물론 이때도 뇌물이 들었으나 앞으로의 중국 내의 일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였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허가를 받아냈다. 조계지와 상관 건물의 값을 치르고, 입주를 하니 날짜가 5일이나 지났다.
이경식 상관장은 상관 건물로 조계지 안에 매물로 나와 있는 안휘상인(安徽商人)의 대저택을 구입했다.
구입한 대저택을 중심으로 연이어져 있는 사합원(四合院) 구조의 집들을 10여 채 구입하여 집과 집 사이 골목에 높은 담장을 쌓아 사각형의 경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담장을 광저우 관청과 협상하여 조계지 경계로 하기로 협의를 끝냈다.
물론 이때도 뇌물이 들어갔다. 이경식 관장은 속으로 10원짜리 동전을 수없이 날리며 욕을 했지만 그들의 노골적인 금품 요구에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당시 청나라 관리들은 무엇을 요구하던 무조건 뇌물이 선행되어야 할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청국 조정의 영수인 화신의 부패가 최일선의 행정 현장까지 썩어버리게 했다.
상관을 매입해 주변 주택을 연결하는 공사를 하고 조계지를 획정하는 등 정신없는 5일간의 시간을 보냈다. 이경식 관장은 그사이에도 이영달팀이 전해 오는 광저우에 대한 탐문 결과를 전해 들었다.
광저우의 청국 상인들은 안휘상인인 신안상인들이 있었으나 예전과 달리 대상인이 거의 없어졌다.
광저우에는 광동 지역의 광동 상인들의 연합체인 광둥십삼행(廣東十三行)이라고 하는 행상제도(行商制度)가 운영되고 있었다. 이들 행상이 그중 총상(總商)이라는 대표를 선출하여 관세징수의 연대책임을 부담하고 외국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우리가 상대하던 미곡상도 이 행상 중 일인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경식 관장은 양일현 행수를 불렀다.
“양 행수님, 이번에 미곡 중개로 고생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마땅히 할 일입니다. 그리고 위국공 합하께서 많은 상급을 주셔서 송구할 따름입니다.”
“예, 위국공 합하의 전언을 말씀드립니다. 이번에 수고하신 양 행수님께 지금의 홍삼을 미곡상에게 넘겨 천은을 마련하여 조선에 필요한 물품을 수입해서 들여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양일현이 반색을 했다.
“정말입니까. 제가 한 일은 당연한 일인데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다니 감읍, 감읍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저희들이 아직 청국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여 청국에 팔 홍삼 가격을 천은 100냥 정도로 계산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양 행수님이 노력하여 그 값을 올려놓으시지 않았습니까. 저희들은 그 가격을 올리기까지 들어갈 시간도 절약하고 우리에게 막대한 차익을 남겨주셨으니 당연히 보답해드려야지요.”
이경식 관장은 말을 계속 전했다.
“위국공 합하께서는 홍삼으로 청국의 미곡을 수입하겠다는 생각을 한 일은 가온이 생각지 못한 방법이라고 칭찬하시면서 이번에 상금으로 받으신 홍삼을 청국에 팔아 조선의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실 수 있는 교역의 기회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치품 수입은 자중해 주시기를 부탁하셨습니다.”
“아, 홍삼을 내려주신 것만으로도 감읍할 일인데 이리도 제 편의를 봐주시다니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합하의 말씀대로 사치품이 아닌 조선에 필요한 품목으로 교역 물품을 구입하겠습니다.”
양일현은 홍삼 20근(천은 3,000냥)을 밑천으로 청국의 물품을 수입하였다. 조선에 돌아가 그 물품을 처분한 양일현은 천은 5,000냥의 재원을 만들었다.
이후 양일현은 그 천은 5,000냥을 자본으로 자신의 상단을 만들었다. 양일현 상단은 상권 자유화 조치 이후 최초로 조직된 조선 상단으로 별무사의 도움도 있었지만 양일현은 특유의 근면성과 협상력으로 후일 조선의 손꼽히는 대기업의 회장이 된다.
기업가로 성공한 후 양일현은 장준하의 은혜를 잊지 않았고 후손이 없었던 장준하에게 자신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입적시켰다. 양자로 입적한 그의 아들이 후일 대한제국의 조선 출신 최초의 수상이 되었다.
이경식 관장은 상관을 정리하여 간판을 내걸었다.
‘가온무역’. 한글로 작성한 현판은 조선 최초의 외국 주재 상관이었다. 이경식 관장은 교역을 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는 대로 서양인들과 중국인들을 초청하여 대규모 연회를 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