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진출
1791년 3월 1일 9시 북한산성 훈련소(北漢山城 訓練所).
그동안 날씨 등으로 연기 되었던 용호영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북한산성에는 지금 하성호 대대의 50명의 병력과 훈련단의 50명의 교관 그리고 100명의 저격대대와 헬기관련 인력 10명이 상주하고 있었다.
창덕궁에는 지난 1월 말 CCTV 등 보안시스템이 설치되어 100명의 인원이 빠져나와도 정조를 경호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용호영의 군관들은 오늘 ‘왕실친위군’이라고 하는 부대에 군사교육을 받으러 왔다.
용호영의 군관들은 조선에 이런 부대가 있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주상전하의 특별한 하교가 있었고, 자신들의 수장인 용호영 별장 신처선이 인솔하여 왔기 때문에 별 의문 없이 북한산성으로 따라왔다.
앞으로 100일간 훈련을 받는다고 하는데 어떤 훈련인지도 궁금했다. 자신들은 그래도 조선 제일의 용호영 아닌가. 이들은 어떤 훈련도 견딜 자신이 있었다.
용호영의 군관 100명이 북한산성에 도착을 해서 연병장 단상 앞에 도열하여 섰다.
이들 앞에는 이상하게 생긴 빨간 모자를 쓴 사람들이 서 있었다. 행색을 보니 조선의 군복을 입고 있고 수염은 기르고 있었으나 무언가 자신들과는 달리 어색해 보이는 것이 그 몰골이 보기에 흉했다.
교관들을 본 용호영 군관들이 웅성거렸다.
“저들이 우리 조선 사람이 맞는가?”
“옷은 조선의 옷인데 키가 저렇게 크고 얼굴이 흰 것을 보니 양이 같기도 하네.”
“그것도 그렇지만 뭔가 모르지만 우리하고 달라 보이네.”
“그래, 그런 거 같으니.”
막 누군가 호통을 치려고 할 때 신처선 용호영별장과 홍병화 훈련소장이 단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이 단상에 오르자 의문을 참지 못하고 용호영 군관 하나가 신처선 별장에게 말했다.
“영감, 이들은 누구이옵니까? 누군데 우리와 무언지 모르게 다른 것 같습니다. 혹시 양이들이 아닙니까?”
그 말에 용호영 별장 신처선이 답했다.
“그대들은 들으라. 이분들은 효종대왕의 친위군이다.”
그 말에 조용하던 군관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손을 들어 이들을 진정시킨 신처선이 군관들에게 장준하에게 들었던 가온군의 150년을 이야기하였고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인들이다. 특히 그대들은 주상전하의 안위를 보살피는 조선제일의 용호영이다. 어떤 의문도 말하지 마라. 지금부터 주상전하의 교지를 읽겠다.”
정조의 교지라는 말을 들은 용호영 군관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고 신처선은 들고 온 교지를 읽었다.
교지(敎旨)는 가온군이 효종대왕의 친위군이며, 이들이 조선과 조금 다른 이유는 그동안 너무 멀리 떨어져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풍습이 많이 변해 그러니 의문 갖지 말고 그대로 따르라는 전교(傳敎)였다.
정조의 전교를 받은 용호영 군관들은 속으로는 그런가? 라는 의문이 들었으나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군관들이 수긍에 빛을 보이자 그제야 홍병화 중령이 나섰다.
“나는 이곳 훈련소 소장 홍병화 중령이다. 여러분을 환영한다. 지금부터 앞에 있는 교관이 인솔하여 각자 여러분이 교육기간 중 지낼 내무반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훈련을 받기 싫은 군관들은 돌아가라. 지금 돌아갈 군관들은 지금 앞으로 나서라.”
그리고 그는 다시 단서를 달았다.
“단, 여기를 나서는 순간 귀관들은 용호영의 군관자격을 박탈당하며 파직된다. 파직당한 군관들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조선의 군부에 들 수 없다.”
조선의 양반들이 관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은 군관들은 누구 한 사람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시간을 주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홍병화 중령이 다시 말했다.
“귀관들은 귀관들의 의지로 본 훈련을 받는 것이다. 본 훈련은 총 3개월간 진행이 되며 낙오자는 바로 귀대 조치된다. 앞으로 귀관들은 훈련받는 기간 동안 이름도 없고 품계에도 관계없이 귀관들은 ‘00번 훈련병’이라 불리며 이는 예외 없이 적용된다. 무사히 훈련을 마쳐 건강하게 부대로 복귀하기 바란다. 지금부터 귀관들은 배정된 숙소로 들어가서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돌아온다. 앞에 있는 교관들이 귀관들을 인솔할 것이다. 각 교관들 위치로.”
“위치로”
교관들이 복명복창하며 앞으로 나섰다.
“방금 교관들이 본 소장(所長)의 말에 복명복창했다. 앞으로 귀관들도 본 소장과 교관의 말에 반드시 복명복창하고 대답은 항상 크고 우렁차게 답하게 바란다. 알겠나?”
그러자 한 번도 복명복창을 해보지 않은 용호영군관들이 목소리가 아주 작게 답을 했다.
“예.”
“목소리 봐라. 그것밖에 못 내겠나. 알겠나?”
“예.”
“그래도 소리가 작다. 다시 알았나.”
“예!”
“대답을 하는 것을 보니 정신상태가 아직 멀었구먼. 일단 교관들 인솔하여 내무반으로 이동하라.”
교관들의 인솔로 자신들의 내무반에 들어간 군관들은 처음으로 받아보는 단체 합숙훈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들어간 내무반에서 한바탕 혼이 난 군관들이 어느 정도 군기가 든 모습으로 가온에서 가져온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뛰어나왔다.
최초로 현대식 훈련을 받는 용호영 군관들이다.
앞으로 3개월간 이들 군관들은 자신들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지옥 같은 훈련을 경험할 것이다.
홍병화 중령은 처음으로 받는 제식훈련에 발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군관들이 3개월이 지나면 어떤 모습을 할지 궁금했다.
그래도 조선제일의 용호영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잘 견뎌낼 것을 믿지만 그래도 무사히 잘 마쳤으면 하고 속으로 바랐다.
1791년 3월 1일 9시 제주 가온시 화순 항.
연해주를 공략할 제1원정단이 화순 항 광장에 집결해 있었다.
항구에는 원정단을 수송할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이번 원정은 사할린의 정복과 연해주의 러시아 세력의 소탕을 위하여 원정하는 만큼 원정단 장비도 대부분 육전(陸戰)을 위해 준비를 했다.
5여단 2,500병력이 전원 방탄복을 착용하고 모든 군장을 갖추고 부두 광장에 도열해 있었으며 분대장급 이상 모든 간부들에게는 전원 헤드셋이 지급되었다.
육상장비도 장갑차 30대를 비롯하여 자주포 10대와 수송트럭 30대를 비롯해 흑표전차도 10여 대를 실었다.
벌목을 위한 인력은 2차 보급 때 동행하기로 하고, 특히 지도군의 도공 5명과 벽돌공 50명이 동행했다.
이들은 연해주 주둔군의 주둔지 공사에 필요한 벽돌 제작을 위해 동행하였고 식량의 자급을 위해 1000여 섬의 벼와 20여 대의 트랙터와 콤바인 경운기 등도 실었다.
국민의례가 끝나고 사령관의 훈시시간이다.
“일동 차렷. 사령관님께 대하여 받들어 총.”
“충! 성!”
5여단장 장도현 소령의 지휘로 2,500명의 지상군 병력과 화순 항에 정박 중인 전함선의 승조원들이 일제히 이형구 상장에게 군례를 올렸다.
“세워 총.”
이형구 상장이 훈시를 했다.
“오늘 우리 가온군이 두 번째 원정을 떠난다. 장병들도 알다시피 연해주는 우리 민족에게는 한이 많은 땅이다. 많은 한이 서린 땅이니 만큼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곳에서 러시아 놈들을 몰아내야 한다.”
이형구 상장은 잠시 말을 끊고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연해주가 끝나면 다음은 시베리아고 다음은 만주다. 우리 겨레의 땅인 만주로 진군하기 위해서 꼭 이번 원정에서 승리해야 한다. 우리의 삼태극기와 우리군의 저 삼족오기를 우리 민족의 성지인 밝달호 알혼섬에 꽂아다오. 그곳은 천손민족(天孫民族)인 우리 민족의 성지다. 이번 연해주 원정은 연해주 땅의 획득도 있지만 가장 큰 목적은 밝달호에 우리의 조상님의 혼백을 모시는 일이다.”
이형구 상장과 병사들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귀관들은 앞으로 밝달호의 알혼섬으로 성지순례를 하는 우리 후손들이 여러분의 밝달호 탈환을 두고두고 감사해 할 것이다. 무사히 작전을 마치기 바란다. 이상.”
평시와는 다르게 사투리를 섞지 않고 말하는 이형구 상장이 함경도 억양이 섞여 발음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강한 그의 말투가 장병들에게 더 다가왔다.
5여단은 연해주까지 동행을 하다가 부대를 나눠 1개 대대는 사할린을 점령하기로 했다.
러시아는 현재 예카테리나 2세의 치세로 프랑스 대혁명의 반동으로 자유사상을 탄압하는 등 정국이 어수선 하던 시기였고 오스만 제국과는 전쟁 중이었다.
사할린은 1799년 에도막부가 섬의 권리를 주장하며 남부를 통치하기 전까지는 무주공산이었으며 러시아도 1821년에 와서야 사할린 북부 지역을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78,000㎢ 면적의 사할린에는 원주민으로 남부에 약간의 아이누족과 북부의 길랴크(니브히)·오로크인이 살고 있었지만 그 수가 미미하였다.
연해주는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
흑룡강을 기점으로 남북 구분을 하여 러시아와 청국이 영토를 정했으나 오소리강을 기준으로 하는 만주와 연해주의 구분을 명확히 획정하지 않았었다.
러시아의 17세가 자료에 보면 오소리강(烏蘇里江)을 을 좌우로 하는 연해주 영토는 조선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고, 청국에서도 연해주에 대한 관할 문제는 그들의 역사서에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청국의 힘에 눌린 조선이 자신의 땅을 방치하고 있다가 간도는 청국에 연해주는 1860년 베이징조약에 의해 완전히 러시아의 영토가 된다.
만주는 봉금령(封禁令)에 의해 1750년대까지는 엄격히 한인(漢人)의 만주 이주를 엄격히 금지를 하였지만 18세기 말부터 봉금령이 지켜지지 않게 됨으로써, 한인들의 이주가 점차 증가되는 시점이었다.
오소리강(烏蘇里江)을을 경계로 동쪽인 연해주는 만주족도 거의 살지 않는 땅으로 발해 유민들과 조선 백성들이 두만강 주변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연해주 원정단이 화순 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1791월 3월 3일 9시 제주 컨벤션센터.
가온에서 첫 번째 입학식이 있었다.
제주 컨벤션센터 야외공간인 이어도 플라자에서 장준하를 비롯하여 가온의 모든 지휘관들과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의미 있는 제1회 입학식이 있었다.
의학대학(화학) 입학생 100명 가온대학교 150명 가온 통합 사관학교 200명의 신입생들이다.
사관학교는 먼저 중사이상의 3개월 교육생들이 입학하였다. 광장에 도열한 학생들을 대표하여 사관학교 입교생 전진한 상사가 신입생들을 선도했다.
“전체 차렷. 국기에 대하여 경례.”
전 참석자들이 삼태극기와 삼족오기가 휘날리고 있는 국기 게양대를 향해 경례를 했다. 가온에서 삼태극기를 국기로 새로 개정하고 첫 번째 맞이하는 입학식이다.
학생들 중에는 사관학교 입교를 희망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먼저 현역들의 교육을 우선하여 시행을 하고 학생들은 희망자에 한하여 학교 수업과 병행하여 학군단의 군사 훈련을 받기로 했다.
자신들의 꿈을 위해서 더 고생하는 것은 그 학생들의 몫이었다.
가온대학에서는 50퍼센트의 학생들에게는 기초과학을 가르치기로 했고 이들은 졸업 후 3개월간의 훈련 후 학사장교로 임관시키기로 하였으며 가온에서는 이들 전원을 연구 인력으로 육성시키기로 했다.
본인이 꼭 일선 부대로 가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되도록 이들이 계속공부를 하여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거나 기초과학과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기를 원했다.
지금 가온에 있어서는 학생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물들이기 때문이다.
시간여행을 하기 전 모든 학교에 있는 약간의 불량스런 학생들이 지난번 ‘하나회’ 조치로 인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면학 분위기가 주위에서 놀라움을 표할 만큼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부족한 공부를 채우는 일이 힘들었지만 만능 학생으로 만들려는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한 가지만 잘하면 되는 시대였으므로 곧 자신들의 특성을 찾을 수 있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마치고 장준하가 단상에 서자 인사가 있었고 이어서 장준하의 훈시가 있었다.
“오늘 이 자리는 정말 뜻 깊은 자리입니다. 우리의 앞날의 버팀목이 될 가온대학교와 가온의대 그리고 가온사관학교의 입교식이 최초로 거행되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조선을 개혁하고 나라를 발전시켜 우리나라를 세계 최강의 강국으로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세계 최강이라는 이야기에 학생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여러분 앞에는 여러분을 끌어줄 선배들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전통을 만들고 여러분들이 학풍을 만들어야 합니다. 부디 여러분들이 명예로운 전통과 면학의 학풍을 조성하여 세계 각국에서 가온대학교와 가온의대에 유학하는 것을 꿈으로 생각할 만큼 가온대학교를 학문의 가온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가온대학교는 부영철 총장님과 여러 교수님들이, 사관학교는 홍병화 교장과 여러 교수들이 여러분들을 잘 이끌어주실 겁니다. 정해진 시간동안 최선을 다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장준하의 인사말이 끝나고 부영철 총장의 축사와 함께 입학식이 끝이 났다.
많은 박수를 받으며 입학식을 마친 이들의 머리 위로 수리온 헬기 편대의 축하 비행이 있었다. 가온의 또 다른 의미의 발걸음을 내딛는 하루였다.
1791년 3월 4일 10시 동명 항(블라디보스토크) 해안.
1,400㎞의 거리를 평균시속 15노트(27㎞)의 속도로 순항하여 3일 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예정으로 항해를 하고 있었다.
원정단을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인 ‘동명(東明)’ 항에 내려주고 1개 대대병력을 사할린으로 수송하여 사할린 섬의 코르사코프 항이 있는 아니바만의 끝에 상륙하기로 하였다.
아니바만은 3월까지는 얼어 있어 쇄빙선(碎氷船) 없는 지금은 통행이 어려웠다. 드디어 동명 항 예정지(블라디보스토크)가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발해 멸망(926년) 이후 865년 만에 다시 찾아오는 우리 땅이다. 항모 광무황제함의 함장 박용현 대령은 5여단장 장도현 소령과 함께 동명 항이 들어설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의 얼음이 녹아 약간의 유빙이 떠다니기는 하였지만, 배를 접안하는 데는 큰문제가 없었다.
“장 여단장, 장병들과 장비의 하역을 하여도 문제가 없겠나?”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다. 바로 하역 작업을 시작해도 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박용현 대령의 지시로 화물의 하역이 시작되었다.
먼저 사할린 점령을 위해 10대의 장갑차와 10대의 트럭과 흑표전차 1대를 제외한 모든 장비들이 하역을 시작했다.
“날씨가 추울 것 같아서 전부 방한복을 착용시켰는데 낮에는 비교적 날씨가 포근합니다.”
장도현 여단장의 말에 박용현 대령이 말했다.
“그렇군. 위도가 높아 추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날씨가 좋네.”
“이런 정도의 날씨면 하역작업에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북위 43도 위치에 있는 동명 항의 날씨가 해양성 기후라서 대륙의 기후보다 상대적으로 덜 추웠다.
3시간 정도 시간이 흐르자 1차 하역이 끝났다.
박용현 대령은 하역이 끝나는 것을 보면서 바로 광무황제 함을 돌려 사할린으로 향했고 그 뒤로 LST함 1척이 따라오고 있었다. 항모는 이틀을 더 항해하여 목표한 사할린 최남단에 도착했다.
항모에서 헬기가 떠올라 정찰에 들어갔고 상륙을 위해 먼저 LST함에서 KAAV7A1장갑차가 내려졌고, 장갑차가 바다를 운항해서 육지로 상륙을 시도했다.
얼마를 전진하자 바다의 유빙이 떠다니는 지역으로 진입했다. 장갑차는 조심스레 접근을 시도했다.
하지만 유빙의 크기가 대단히 크거나 떠다니는 유빙이 불규칙해 육지 접근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수차례 육지로 접근을 시도하다가 장갑차에 탑승한 5여단 5대대장이 교신을 하여왔다.
“박기영 대위입니다. 지금 상태로는 유빙으로 인해 상륙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억지로 하면 일부 장비는 상륙이 가능하겠으나 안전사고가 우려되는 상황이라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일단 철수를 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장갑차가 철수를 하고 박기영 대위가 항모로 올라와 박용현 대령에게 정식 보고를 했다.
박용현 대령은 대대장의 보고를 듣고는 ‘이러하니 러시아가 그렇게 부동항에 집착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하였다.
박용현 대령은 동명 항으로 귀항하여 유빙이 제거될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사할린에 상륙하기로 하고, 사할린 정찰을 나간 수리온 헬기의 귀함을 명령하였다.
헬기가 각각의 함정으로 귀함을 하자 박용현은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동명 항으로 귀환하였다.
1791년 3월 6일 연해주(沿海州) 동명 항(東明港).
사할린 상륙에 실패한 5대대를 다시 동명 항에 내려놓은 광무황제 함과 LST함은 병력과 장비가 하역을 마치자 배를 돌려 화순으로 향하였다.
이틀 전 상륙한 5여단 본대는 이전 시대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항의 도면을 참조하며 가장 빠른 항구 정비 작업에 들어갔다. 다행히 주변에 좋은 흙이 많아서 벽돌 공장의 가마작업에 바로 착수할 수 있었다.
3월이기는 하지만 연해주의 날씨는 아직 밤에는 영하권으로 내려갈 정도로 쌀쌀했다.
날씨를 고려하여 전 장병들이 방한복을 착용하고, 모든 막사에는 유류 난로로 난방을 하여 추위는 크게 느끼지 못했다.
이전의 시대였다면 기름을 아끼라고 계속 훈령이 내려왔을 것인데 지금의 원정단은 더워서 윗옷을 벗을 정도로 기름을 때도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간부들이 순찰을 하며 춥게 지내지 말라고 온도를 올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막사 생활은 여러 가지 불편함을 몰고 온다. 여름의 장마 이전에는 어떻게 하든 막사 생활을 끝내야 했다. 장도현 여단장은 여단을 나누었다.
1대대는 주변 지형 탐색과 혹시 만날 수 있는 청국과 러시아인들의 정찰을 위해 중대별로 장갑차와 트럭을 동원하여 순찰을 실시하게 하였다.
당분간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전부 압송하거나 반항을 심하게 하는 등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무조건 사살을 명령했다.
1대대는 4개 중대로 나누어 중대별로 지역을 정찰하기 시작하였다.
2대대는 벽돌공장의 인력을 지원하고, 3대대는 2분의 1을 동행한 농업팀을 지원하고 본부대대와 나머지 2분의 1의 3대대병력은 동명 항 건설 작업에 투입했다.
5대대는 비행장 건립에 투입을 해서 다음에 올 공병단이 작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송악산 비행장에 있는 C-130 수송기를 적절히 활용한다면 시베리아 정찰 및 가온과의 수송시간의 단축 등 많은 효과를 볼 수 있어 이번 동명 항을 건설하는 옆에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했던 것이다.
많은 항공 수요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약 2㎞ 정도의 활주로 1면과 헬기계류장을 만들기로 했으며, 포장에 쓰이는 아스팔트는 송악산 저유소에 넘쳐나고 있었다.
동명시 주변에 발전소를 건설할 장소도 물색했다. 수력발전소가 있으면 좋았으나 화력발전에 필요한 석탄산지가 있어도 좋았다. 도시발전을 위해서는 발전소 건설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아쉽게도 주변에는 수력발전소를 건설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화력발전은 40㎞ 떨어진 곳에 석탄산지가 발견되어 화력발전소 부지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대단지 정유공장과 석유 저장시설 부지 조성 공사를 동명 항 항만공사와 연계하여 실시하였다.
정유공장과 저유시설은 사할린에서 한반도를 관통하는 송유관이 연결되면 이곳에서 정제할 예정이다.
동명 항 주변이 온통 기계소리로 뒤덮였다.
나무를 잘라서 목재를 만드는 팀과 바닥을 정비하여 터를 다지는 팀 벽돌공장에서 벽돌 제작 작업에서 나는 소리, 땅 파는 소리, 대형장비들이 항구의 외항에 방파제 작업하는 소리, 드넓은 동명 항이 있는 일출만(동명 항을 끼고 있는 만)이 온통 소음천지였다.
정찰을 나간 지 한나절도 되지 않아 1대대 3중대에게서 연락이 왔다.
조선인 부락을 발견하여 그 일대를 포위하고 촌장을 여단본부로 압송 중이라는 연락이었으며, 그런 전송이 연이어 5곳에서 들려왔다.
특히 두만강 하구 쪽으로 이동하던 1중대는 대단위 부락을 발견했다는 전갈을 보내왔으며 역시 촌장을 대동하고 귀환 중이라는 보고였다.
조선족 부락을 발견한 것이 5곳이라는 보고를 받고는 장도현 여단장은 수색을 중지하고 1대대를 현재 지역에 대기하라고 지시하였다.
잠시 후 조선족 부락의 촌장들이 모두 모였다.
조선족 촌장인 송진구는 이상한 복장을 하고 말도 없는 마차를 타고 다니고, 키는 자신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이 사람들이 조선말을 쓰고는 있지만 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촌장인 자신을 따라오라는 이들의 말에 마을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할까 싶어 따라왔지만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먹고살기 어려운 조선 땅을 버리고 이곳에 온 지 자신이 벌써 4대째였다.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은 없었지만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초기 선조들이 힘들여 개간한 땅이 이제는 제법 되어 먹고살 만하였다. 추운 날씨가 문제이지만 그것도 몇 대를 오면서 적응이 되어서 충분히 견딜 만했다.
이제는 돌아가려고 해도 호패가 없어서 돌아가지도 못했다. 5명의 촌장들이 모두 모이자 장도현 소령은 그들을 앉게 하고 꿀 차를 한 잔씩 타주었다.
양봉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에서는 꿀은 귀한 식품이었다. 따듯한 꿀 차로 불안한 마음을 녹이는 촌장들을 보고 장도현 소령이 말했다.
“본관은 조선의 왕실친위 가온군의 5여단장인 소령 장도현입니다.”
장도현이 오기 전에 여러 가지로 불리던 가온군의 호칭을 ‘왕실친위 가온군’이라고 통일했다.
“저희들은 주상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이번에 연해주 지역을 평정하러 왔습니다. 흑룡강 서안의 간도 지역도 이곳이 정리되면 곧 진출할 계획입니다. 그동안 조정에서 연해주 관리를 소홀히 하여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앞으로는 조정에서 관리가 파견 나와 연해주를 관리할 것입니다.”
“말을 바로 하시오.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아예 버려둔 땅이지요. 간도도 그렇지만 본래 우리 땅인데 땅이 넓어 관리가 힘들고 여진족과 싸우는 것도 겁을 내고 해서 버린 땅이 연해주가 아닙니까?”
촌장 중에 나이가 가장 젊은 사람이 카랑카랑한 소리로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제 저희가 주상전하의 어명을 받고 이곳에 왔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여러분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최대한 들어 드리겠습니다.”
장도현 소령이 말을 하자 촌장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조금 전에 말을 한 젊은 촌장이 일어서서 말하였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세금도 납부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앞으로 연해주에서는 여러분에게 농사를 짓는 데 세금을 징수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단지 교역을 하거나 물건을 팔 경우는 일정한 세금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광산을 개발하는 것은 이전에도 그랬지만 조정의 허가를 얻기 전에는 불가합니다.”
촌장들은 여전히 웅성거리면서 자기들끼리 의견을 주고받았다.
“군정(軍政. 전정, 군정, 환곡 중 군정)은 없으나 새로운 징병제도에 의한 병역의 의무는 있습니다. 부역은 완전히 면제되며 조정에서 일손이 부족하여 사람을 동원할 경우 반드시 일당이 지급됩니다. 이전과 같이 강제로 부역을 한다거나 군대를 징발하는 경우는 절대 없습니다.”
군대를 징발하게 되면 그만큼 보상을 준다는 소리에 촌장들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리고 연해주는 당분간 군정(軍政. 군인 정치)을 실시합니다. 이에 따른 시행령은 추후 인구조사가 끝이 나면 발표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이번에는 송진구가 나서서 말하였다.
“저희들이 도와드릴 일이 무엇입니까?”
“저희들은 이곳에 처음 왔습니다. 이곳의 상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고 지도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같이 연해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길안내와 주변 부락의 인구조사 협조 등이 필요합니다.”
장도현 소령이 말하자 촌장 중에 이런 말이 나왔다.
“앞으로도 북관개시에 이곳에 있는 조선인들도 참여할 수 있습니까?”
그동안은 여진족들만의 개시로 간도와 연해주의 조선인들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제는 조선인들이 개시에 참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개시는 여진족을 위한 개시입니다. 앞으로는 이곳 동명 항에 상설 장시를 개설합니다.”
“그게 사실이오?”
“곧 이곳에 조정에서 허가한 상인들이 와서 상점을 개설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외국에 사시는 것이 아닙니다. 연해주는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조선의 땅입니다. 당연히 개시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가신다면 여진족의 물건을 사러 가시면 됩니다. 앞으로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이곳으로 오십시오.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만일 청국이 이곳까지 도발해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럴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연히 싸워서 이겨야지요.”
“청나라의 팔기의 힘은 대단합니다. 그들을 정면으로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하하, 우리 왕실친위 가온군은 그들을 단숨에 제압할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싸움을 걸지는 않지만 만일 청국이 도발을 해온다면 그들을 철저하게 섬멸할 계획입니다.”
장도현 소령은 촌장들이 하는 질문을 하나도 넘기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연해주에 사는 조선족들이 비로소 가온의 정책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이제 조선의 땅이다. 촌장들이 장도현 여단장의 말에 그제야 수긍하기 시작을 했다.
촌장 한명이 현실적인 말을 했다.
“만일 청국이 힘이 강력하여 가온군보다 더 세다면 우리는 모두 몰살되는 것 아닙니까? 차라리 그들에게 적당히 공물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어떠한 경우라도 공물은 절대 없습니다. 만일 우리 힘이 약해 청국에 밀린다면 그럴 일도 없겠지만 그럴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 가온군 전원이 옥쇄(玉碎)를 하는 일이 있어도 절대 여러분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조금 전 상당히 비판적으로 말하던 젊은 촌장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게 흐느끼다가 곧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했다.
장도현 소령은 영문을 몰라 당황해 하였다.
그러다 그를 말리려고 하자 그의 옆에 있던 나이 많은 촌장이 그를 눈빛으로 제지하였다.
한참을 대성통곡을 하던 그 젊은 촌장이 눈물을 그치더니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장도현 소령에게 큰절을 올렸다.
당황한 장도현은 어리둥절하였다. 큰절을 하고 일어선 촌장이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150년 전에 효종대왕께서 북벌을 하신다고 할 때 저희들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였는지 아십니까?”
어리둥절한 장도현 소령이 촌장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 촌장이 말을 이었다.
“저는 광해군 시절 강홍립 장군을 따라 1618년 만주에 올라온 조선의 13,000명의 군대의 김경서(金景瑞) 부원수의 부관이었던 김치선 장군의 6대손으로 이름이 김종진이라고 합니다.”
촌장이 자신의 내력을 소개했다.
“당시 항복한 병사들 대부분은 조선으로 돌아갔으나 10명의 간부들은 청에 계속 억류 중에 있었습니다. 이때 김경서 장군이 후금의 진영을 염탐하여 조선에 보내려다 탄로가 나 그만 처형되었습니다.”
“으음.”
촌자의 이야기에 장도현 소령이 안타까운 탄식을 터뜨렸다.
“그때 김경서 장군을 모시던 저의 6대조도 그 바람에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후금에 계속 잡혀 있게 되었고 그 후손들이 청국의 압박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해와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효종대왕께서 북벌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에 조선에 가지 못하고 같이 이주한 10여 명의 후손들과 조선에서 넘어온 100여 명의 조선인들이 북벌을 내응하기 위해 10여 년간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효종대왕께서 돌아가시고 북벌의 꿈이 무산되고 15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 후손들은 그때 일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긴 시간을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절대 돌아가지도, 여러분을 버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지요. 그래야지요.”
김종진은 장도현 소령의 말을 듣고는 다시 대성통곡을 했고 옆에 있던 촌장들도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장도현 소령은 김종진의 말을 들으며 인연이란 참으로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지금 시대로 시간여행하여 이곳에 와서 효종대왕의 친위군이라 하고 정조와 협상을 하였는데 멀고 먼 연해주에서도 효종대왕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인연이라 생각하였다.
장도현은 가온 본부에 이 사실을 알리라고 부관에게 지시를 하였고, 이 소식은 즉각 가온의 위국공 장준하에게로 알려졌으며 장준하는 이들의 충성을 높이 사 특별히 정조에게 이 일을 알려주었다.
훗날 정조는 그들의 마을에 ‘충절의 고향(忠節之鄕)’이라는 친필현판을 하사하였고 장준하는 그들의 마을에 직접 찾아가서 그들을 위무하고 전 마을 사람들에게 푸짐한 상급과 10여 명의 후손들에게 국가 유공자 대우를 해주었다.
김종진과 촌장들의 도움으로 연해주 일대의 인원을 조사한 결과 2만여 명의 조선인들이 100여 개 부락을 이뤄 살고 있는 것이 파악되었으며, 여진족은 오소리강(烏蘇里江. 우쑤리강) 너머에 몇 개의 부락을 이루며 살고 있으나, 강을 사이에 두고 거의 왕래가 없다고 했다.
연해주 지역 거의가 조선인 일색이었다.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서 흑룡강을 넘어 현대의 하바롭스크 지역까지 올라가야만이 러시아인들이 요새가 있으나 거의 개척민 수준으로 있으며, 이곳은 가끔씩 사냥꾼으로 보이는 무리가 2~3명씩의 짝을 이뤄 간혹 보이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북관개시(北關開市)는 쌍시(雙市)라고도 불리며 함경도 회령과 경원에 개시가 열렸다. 회령과 경원 개시에서는 거의가 물물교환 형태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또한 개시 때에는 밀무역의 형태인 후시무역(後市貿易)도 함께 열렸다.
‘회령개시’는 매년 10월에 열렸으나, ‘경원개시’는 격년제로 열렸으며, 주로 회령, 경흥, 경원, 종성, 온성 등 함경도 이북 지방의 상인들이 참가했다. 회령·경원이 모두 개시되었을 경우를 쌍개시, 회령만이 개시되었을 경우 단개시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