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초석을 놓다
1791년 1월 2일 19시 가온 본부(本部) 위국공 집무실.
울릉도에서 외국인들을 교육하고 있던 신경식과 정철학이 회의 중인 장준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준하가 최성용 중령과 회의를 마치고 함께 들어왔다.
장준하가 들어오자 신경식과 정철학이 자리에 일어나서 인사를 하였다.
장준하가 두 사람을 보고 반색을 했다.
“어서들 오시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울릉도에 수용된 외국인들은 요즘 어떤가.”
신경식이 장준하의 말에 답을 하였다.
“예. 처음에는 약간 저항이 있었으나 지금은 상당히 안정되어 가고 있습니다.
처음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아 상당히 어려웠으나 이제는 수용 시설이 완비가 되어 별문제는 없고 안전사고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우리를 군사 쿠데타 세력으로 오인하고 있어 그들을 통제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어서 정철학이 일본인에 대하여 보고를 하였다.
“청진으로 갈 일본인 50명은 따로 불러 가혹한 정신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최소한 10년을 같이 보내야 하기 때문에 철저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장준하는 신경식과 정철학에게 국정원을 설립하고 국정원 초대 원장에, 신경식이 조선 문제를 담당할 제1차장에 정철학이 임명되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장준하가 말했다.
“그래, 수고들 했네. 앞으로 두 사람이 국정원을 잘 이끌어주고 수고해 주시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준하가 신경식과 정철학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조선 개혁을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해야 할 시기로 국정원의 힘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때이니 중심을 잘 잡고 업무에 임하여주시게.
아직까지 조선 내부 개입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주고 당분간은 정보 수집만을 하여주시게. 그리고 국정원의 인원 보강은 어느 정도가 필요한가.”
신경식 원장이 나서서 보고를 하였다.
“저희들이 그동안 울릉도에 있으면서 기본적인 인원 구성을 했습니다. 100명의 인원을 본부 20명, 중국 20명, 일본 20명, 국내 20명, 기타 20명으로 구분했고 이들은 지금 울릉도의 외국인에게 각국의 언어를 교습받고 있습니다.
이들을 지원할 인원은 조선 출신으로 100명 정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조선의 인원은 1차 교육을 마치는 2월 말에 선정하여 보내주겠네.
그리고 지금 청국의 상황이 양자강 지역의 백련교도가 준동을 시작하는 시기이네. 이들은 그동안 탄압을 받아오다 곧 봉기하여 청나라를 전란에 휩싸이게 할 것이네. 국정원에서 이들을 포섭할 계획을 세워주게. 되도록 전란을 오래 끌 수 있는 전략도 세워보고.”
“알겠습니다. 돌아가면 청나라 문제를 먼저 중점적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신경식 국정원장과 장철학 1차장이 장준하의 지시에 청나라 작전 팀을 선정하여 특별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보고를 하고 울릉도로 다시 돌아갔다.
백련교도의 난은 1796년 가경(嘉慶) 연간에 일어났지만 그보다 앞서 10여 년 전부터 각지의 교수(敎首)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시작됐다.
10여 년 동안 청나라 거의 전토를 전란에 휩싸이게 한 이 전란에 엄청난 전비를 쏟아부은 청국은 결정적으로 국력이 쇄약해지는 계기가 된다.
이 시기 청국의 각 지방의 관헌들은 백련교도 소탕령을 교묘히 이용하여 백련교도는 물론 일반 백성들도 백련교도로 몰며 전 재산을 몰수하는 등 엄청난 수탈을 자행했다.
백련교도는 이러한 엄청난 탄압을 세상의 종말로 보았으며 이러한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봉기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믿었다.
난은 초기에 불길 번지듯 엄청난 기세로 번졌으며 청국이 이들을 막기 위해 만주의 최정예 병력까지 불러들이자, 만주 지역은 병력 공백 상태가 초래되어 결정적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방치하게 된다.
1791년 1월 3일 10시 가온 본부.
가온은 전 주민들에게 주요 지휘관 회의 내용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농협 단장 : 이성규
요업 공업 단장 : 설상진
경공업 단장 : 장철호
화학 공업 단장 : 백기소
철강 공업 단장 : 이호
무기 개발 단장 : 이호(철강 공업단장 겸임)
제약 개발 단장 : 김재성
식품 공업 단장 ; 고성국
제지 공업 단장 : 이승호
전기 공업 단장 : 양석훈
국정원장 : 신경식
가온대학교 이사장 : 장준하
가온대학교 총장 : 부영철
가온의과대학 학장 : 황병권
주민 교육단 단장 : 김석태
국사 연구회 회장 : 권오인
그리고 자동차 섬유 기계 등
공석의 추가 임명은 수시로 하기로 했다.
국민 의식 : 천손사상을 기본 사상으로 한다.
국기 변경 : 기존의 태극기 문양을 민족 고유의 사상인 삼신 사상과, 천지인 사상에 입각하여 삼태극(三太極)기로 바꾼다.
가온의 문양 : 삼족오(三足烏)로 한다.
조선의 군 복무 제도 : 18세 이상 30세 미만의 장정들로 3년 복무를 원칙으로 하고 여성들은 3년간 군수산업체에서 대체 복무를 한다.
여성은 이것으로 군 복무를 완료한 것으로 하며 여성들이 군 입대를 원할 경우 남성들과 동일하게 적용한다.
3년의 군 복무 후 6개월에 보름씩의 훈련을 1년에 1개월간 훈련을 받고 5년의 예비군을 거치면 군 복무를 완료한 것으로 한다.
대체 복무자는 복무 기간을 4년으로 하며 예비군훈련은 동일하게 한다.
30세 이상 40세의 경우 3년간의 지방군(1년에 6개월의 군 복무)으로 편성한다.
이 또한 복무 후 예비군 5년을 거치나 만 40세가 넘으면 자동으로 완료된다.
40세 이상은 군수공장 2년 대체 복무로 완료한 것으로 한다.
이때 가족들의 식생활을 위해 기본적인 식량은 지급한다.
군 복무는 모든 주민을 대상으로 한다.
군 복무 기피자는 검거될 경우 3년간의 중노동형 후 대체 복무로 하고 복무 기간을 2배로 하며, 군 복무(대체 복무 포함)를 거치지 않으면 모든 관직의 진출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18세 미만의 청소년의 경우에는 학교에서 일정한 군사교육을 받는다.
조선의 학제 : 조선의 모든 주민은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6-3-3-4학제를 도입하며 고등학교 졸업까지 전부 의무교육을 시행한다.
의무교육은 군사교육을 포함하여 실시하며 프러시아 방식을 도입한 군사학교 방식으로 운영하고 앞으로 조선에 진출하기 전 10년의 기간 동안에도 모든 조선의 이주민을 대상으로 먼저 실시한다.
가온대학교 설립 : 가온의 주민은 전원 대학 졸업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가온 주민이 조선에 들어가고 나서도 계속하여 실시되며, 30년간의 특례 입학 기간을 정하여 가온 주민들의 2세들도 교육한다.
조선 주민의 경우 일정한 영재 이상의 능력자를 선별하여 입학을 허용한다.
사관 교육 : 가온의 병사들과 부사관들은 본인이 원할 경우 전원 사관 교육을 받고 장교로 임관한다. 이에 따라 가온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추후 설립될 정규 사관학교는 삼군통합사관학교로 운영한다.
금주령 통금 해제 : 그동안 주민들의 협조로 가온 지역 치안이 안정이 되어 1월 1일자로 금주령과 야간 통금을 해제한다.
가온 본부의 발표는 예상한 것도 있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사항도 있었다.
특히 천손사상과 역사연구회의 우리 역사 찾기는 상당히 활발한 토의와 논의가 있었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권오인 선생의 특강을 듣기를 원해서 가온에서는 제주컨벤션센터에서 상당 기간 권오인 선생의 특강을 실시하기도 했다.
나머지는 대체적으로 주민들이 충분히 납득할 발표였기에 별 반발 없이 받아들여졌다. 특히 통금과 금주령 해제는 가온 지역이 안정된 것을 대변하는 것이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791년 1월 3일 10시 가온 본부 위국공 집무실.
북한산성의 하성호 대위를 통해 어제저녁 정조에게서 하사품이 도착했다.
장준하에게는 부월(斧鉞)이 좌도도에서 일본을 물리치고 승전한 송훈 대위에게는 어검(御劍)이 하사 됐다.
상선 김시묵이 북한산성의 하성호 대위에게 전달된 하사품이 도착을 한 것으로 정조가 군기시(軍器寺)에 특별히 영을 내려 제작한 것이다.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부월(斧鉞)은 휘하 장병의 생사 여탈권을 준다는 의미다. 상당한 공이 들어간 것이 역력한 부월을 장준하는 최성용에게 집무실 벽에 장식을 하라고 지시를 했다.
장준하는 정조가 송훈 대위에게 하사한 검을 바라보았다.
어검은 국왕이 군인에게 내리는 최대의 영예다.
하사한 어검의 검면에는 ‘위국충정(衛國忠情) 만고불멸(萬古不滅)’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은입사(銀入絲)되어 있었고 검집에는 백호가 양각되고 은은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기품이 넘쳐흘렀다.
손잡이를 포함하여 90㎝ 정도의 검은 기품이 있었다.
“어검이 다르기는 다르네. 기품이 넘치는 것을 보면.”
“저같이 칼에 문외한도 보니 상당히 정성이 들어간 작품 같습니다.”
최성용의 말에 장준하가 말을 했다.
“내가 아직은 야전 군인의 정열이 남아 있는가보네. 칼을 보고 이렇게 흥분이 되는 것을 보면. 그리고 송훈 대위에게 연락은 하였나?”
“예. 연락을 하였으니 도착할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두 사람이 어검을 들여다보고 감탄을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충성. 대위 송훈 연락받고 왔습니다.”
“아, 그래. 어서 오게”
장준하는 송훈 대위가 오자 자리에 일어나서 자신의 책상 앞에 섰다.
영문을 모르는 송훈이 자세로 바로하고 장준하의 앞에 섰다.
“최 중령, 그것을 가져오게.”
최성용이 가져온 검을 받아 쥔 장준하가 송훈 대위에게 말하였다.
“이 검은 주상께서 송 대위의 전공을 높이 사서 하사하시는 어검이네. 자, 받게.”
“감사합니다.”
어검을 받아 쥔 송훈 대위의 인사가 있었고 장준하는 그런 송훈을 자리에 앉혔다.
“그래, 저격대대는 휴가를 잘 보내고 있는가?”
“예, 부대원들이 충분한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 자네 부대가 큰 전공으로 어검을 하사받았으니 부대원들에게 회식이라도 시키게. 최 중령, 송 대위 부대로 회식 물품을 지급해 주게. 부대원이 100명이니 넉넉히 지급하고.”
장준하의 치사에 거듭 사의를 표한 송훈 대위는 한걸음에 부대로 돌아왔다.
송훈 대위는 정휘 중위와 류원형 중위를 비롯하여 전 부대원을 소집했고 전원이 부사관 이상인 병력이 모두 모인 것은 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송훈 대위가 부대원에게 말했다.
“오늘은 우리 부대에게 뜻깊은 날이다. 주상 전하께서 우리들의 좌도도 점령의 전공을 높이 사서 가온부대 처음으로 이렇게 어검이 하사되었다.”
송훈 대위가 손에 들고 있는 어검을 들어 올리자 모여 있던 부대원 전원이 박수와 함께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위국공 합하께서 부대원 전원 회식을 위해 하사품을 내려주셨다. 그동안 금주령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였는데 기분 좋게 한잔하자.”
“와~.”
커다란 함성과 환호가 부대 연병장에 울려 퍼졌다.
자리를 부대 회식 장소로 옮긴 저격부대원이 모두 자리를 잡자 송훈 대위가 건배 제의가 있었다. 한 손에 술잔을 든 송훈 대위가 부대원들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세계 최강의 부대다. 우리가 찍어서 넘기지 못하는 목표는 없다. 조선을 세계 최강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한번 해보자. 자, 잔 들어라. 건배하자. 세계 최강을 위하여.”
“위. 하. 여.”
100명의 부대원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우렁찼다.
부대원들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와 큰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져 나갔다.
이때의 일로 인해 이후부터 저격대대 부대 문양에 어검이 새겨졌다.
1791년 1월 3일 13시 가온 본부 위국공 집무실.
위국공의 집무실에 일단의 가온 지역 주민들이 찾아왔다.
그들을 면담한 최성용은 위국공에게 보고를 했다.
그들은 가온 지역의 자동차와 오토바이 판매 및 정비 업체 관련 사람들 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들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린 장준하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저희들은 가온 지역에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정비와 판매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희들이 찾아온 것은, 며칠 전 발표에 보니 자동차 공업단이 아직 결성이 되지 않은 것을 보고 저희들끼리 의논하여 찾아뵈었습니다.
저희들은 대개 20~30년 기간 동안 자동차 관련 업에 종사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가온에서는 저희들이 자동차 공업에 필요한 현장 경험이 있습니다. 가온 본부에서 지원을 해 주신다면 자동차 공업 육성을 위해 일해보겠습니다.”
대정자동차공업사 대표인 최욱이 자동차 관련 주민들을 대표하여 말했다.
“저희들이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지금 저희들의 정비 인력과 관련 인력이 약 100여 명 정도 됩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먼저 자동차공업에 기초가 되는 증기기관과 내연기관을 만들려고 합니다.
부족한 것은 설계 능력인데 군수 단지의 연구인력 중 기관 설계가 가능한 인력과 단지 내 있는 정밀기계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지금 저희들이 조사한 바로는 서양의 증기기관이 대량생산을 막 시작하는 단계이고 기관차용 엔진은 아직 만들어지기 전으로 알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증기기관을 만들어 수출용으로 사용을 하고 내연기관은 처음에는 2행정기관부터 시작을 하여 4행정기관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일차적으로 기존의 자동차와 오토바이 엔진을 역설계하여 생산할 계획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필요한 설계 인력과 개발 인력은 저희가 파악하여 도와드리겠습니다.”
장준하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최성용에게 관련 인력 파악을 지시를 하고 자동차 공업 육성에 필요한 제반 문제를 지원하라고 지시를 했다.
장준하의 말에 최욱 일행은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 나갔다.
처음으로 주민들이 발의하여 창립되는 공업단으로 장준하는 그들의 적극적인 의지가 고마웠다.
장준하의 지시로 국방과학연구소의 인력과 군수 단지 인력 중 신청을 받았다.
군 인력에서는 비행단의 정비 인력 중 후일 비행선 및 비행기 엔진 제작에도 필요한 엔진 개발을 위해 150여 명이 참여했고, 이에 따라 전부 300명의 인원을 선발하였고, 자동차 공업단은 단장에 이번 주민 대표인 최욱이 임명되었으며, 엔진 개발 팀은 국방과학연구소의 기성훈 선임연구원이 팀장으로 선정되었다.
기존의 자동차 엔진과 항공 정비창이 보유하고 있는 수리온 헬기 엔진과 C―130 수송기 엔진 1대를 분해하고, 해군 함선 정비소에 있던 가스터빈과 디젤엔진도 분해했다.
엔진 개발 팀은 슈퍼컴퓨터를 검색하여 모든 엔진의 설계 도면을 찾아냈고 분해된 엔진을 일일이 대조하며 역설계를 시작했고 증기기관과 증기터빈 등의 설계도를 입수하여 설계를 시작하였다.
증기기관차도 지금부터 개발하면 유럽에 20년 정도 앞선 시기로 개발하기 딱 좋은 시기였다.
모든 설계 및 생산은 당연히 인치법이 아닌 미터법에 입각해서 설계를 했다.
1791년 1월 5일 9시 제주도 일원.
“전체 차렷. 국기에 대하여 경례.”
군수 단지 지원 본부 광장에 일단의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가온의 국기 게양대에는 1월 2일 회의를 마치고 장준하가 최성용에게 지시하여 만들어진 삼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고 그 옆에 삼족오기도 나란히 걸려 있었다.
국민의례를 마치고 장준하의 훈시가 있었다.
“여러분께서는 앞으로 주민들의 안전을 책임질 경찰에 임명되었습니다.
이전 시대에도 주민의 안전한 생활을 위해 봉사하는 경찰로 근무했던 것과 같이 앞으로도 우리 가온 시민뿐 아니라 제주도 전역의 치안 안정을 위해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은 100명의 인원에 불과하지만 그 100명이 밀알이 되어 새로운 경찰상을 확립하시는 초석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경찰의 창설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경찰은 시간여행 때 중문 지구대와, 대정 지구대 경찰 30명이 넘어왔고, 군단 헌병대에서 수사 인력을 지원받고, 가온의 주민들 중에서 지원을 받아 100명의 인원으로 출범을 하게 됐다.
이들은 지금 교육받고 있는 제주 주민 중 30~40대 인력에서 300명을 뽑아 충원하는 등 총원 400명으로 인원을 구성하기로 했다.
지금 선발된 인원 100명의 경찰 인력을 3개월간 재교육을 실시하기로 했고 제주경찰청장에는 중문지구대장출신의 최철휴 경감이 맡기로 했다.
경찰청 창설을 마친 장준하는 바로 차를 몰아 제주컨벤션센터로 갔다.
제주컨벤션센터에서는 공무원들의 시무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여느 해보다 며칠 늦은 시무식은 몇 가지 사항이 추가되었다.
장준하는 제주도 전역을 관리할 제주도지사에 교육단장인 김석태 전 부지사를 임명하고 공무원교육원장을 겸직시켰다.
공무원교육원은 제주평화센터를 개조하여 사용하기로 했고, 평화센터 근무자들에게 교육원 실무를 전담시켰다.
컨벤션센터의 대회의실에는 200여 명의 인원이 앉아 있었다.
국민의례를 마치고 사회를 맡은 최성용이 단체장 인선을 발표했다.
“지금부터 각 단체장들의 인선을 발표하겠습니다. 먼저 제주시장입니다. 제주시장에는 구영진 전 제주 목사께서 임명되셨습니다. 구영진 시장께서는 앞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듣자 조선의 지방관 복식을 한 구영진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시무식이 열리는 오늘 조선 출신 관리들 중 구영진과 김천석도 같이 참석을 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보는 엄청난 건물에 압도되어 있었다.
한 달 정도의 기간 동안 어느 정도 교육되었다고는 해도 이렇게 큰 건물을 난생처음 보는 구영진과 김천석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친위군의 신위가 어디까지인가? 어떻게 이런 건물이 있단 말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목사 영감, 이걸 정말 사람의 힘으로 지을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전하의 교지로 친위군을 따르라 해서 따르지만 위국공이 다스리는 가온의 힘이 끝을 알 수가 없구나. 그나저나 김 현감, 앞으로 잘 부탁드리오. 우리 한번 힘을 합쳐 주민들을 잘 이끌어 새로운 제주를 만들어봅시다.”
“아닙니다. 이번에 시장님으로 선임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부시장으로 소임을 다해 충심으로 보필하겠습니다. 위국공 합하께서도 말씀하신대로 우리가 솔선수범해서 주민들 교화에 힘써야겠습니다.”
구영진과 김천석은 조선의 관리 중 처음으로 교육을 받은 효과가 있어서인지 주민을 위하자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제주목사 구영진은 제주시장으로 선임이 됐고, 김천석 현감은 부시장에 선임됐다.
가온 지역은 가온시로 승격되어 시장에는 신기철 대정읍장을, 부시장에는 정순호 안덕면장을 임명하고, 그 조직 인선은 신기철 시장에게 일임했다.
시간여행 당시 넘어온 공무원과 관련 기관 인원은 80명으로 전원을 가온시청 공무원과 공무원교육원 교수로 겸임 발령하여 제주목과 정의현의 모든 관원 및 아전 200여 명의 교육에 들어갔다.
체아직인 관원들과 특히 아전들은 어느 정도 교육이 된 자들이었지만, 대대로 그 직이 세습되면서 그동안 조선에서 엄청난 문제점을 일으키고 있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은 ‘조선은 아전 때문에 망한다’고 할 정도로 그 폐해가 극심했다.
조선은 아전의 녹봉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알아서 뜯어먹고 살라는 것으로, 아전들이 벌이는 생계형 범죄는 눈감아주었다. 말 그대로 죄를 지으라고 내버려둔 것이었다.
생계형 범죄와 탐욕스런 수탈의 차이가 어떻게 경계를 지을 수 있나. 아전들의 수탈은 처음에는 생계형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한 수순으로 조직적인 수탈을 하였으며 이들 수천 명은 조선을 썩고 곪게 만들어 후일 조선 후기 민란의 결정적 원인이 된다.
조선의 백성은 왕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무서웠다.
가온은 앞으로는 이들 아전들을 철저하게 교육시켜 지방 공무원에 맞는 관리로 육성할 계획이다.
제주도의 아전들 중 주민들 수탈을 심하게 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있는 아전들을 조사하여 그들의 재산 전부를 국고로 환수하였고 아전을 5년 노역 형에 처하였다. 100명의 아전 중 그 수가 40명에 달했다.
가온에서는 이 기회에 그동안 조사해 두었던 양반들 중에 주민들에게 토색(討索)질을 일삼고 심지어 사형(私刑)까지도 자행해 온 양반 50명도 동일한 조치를 했다.
이 조치에 반발한 해당 양반들은 자신의 노비들을 풀어 저항하려고 하였으나 1개월간의 교육으로 어느 정도 의식이 깨인 노비들이 단 한 명도 동조하지 않아 그들의 저항은 허무하게 끝났다.
악질 아전과 양반들을 처리한 교육단은 신분제 철폐를 위한 교육의 강도를 높여갔다.
1791년 1월 9일 가온 본부(本部) 위국공 집무실.
드디어 조선 관리들의 교육이 끝이 났다.
이들은 내일 북한산성에 들어가는 송훈 대위 일행과 같이 한성으로 돌아간다.
그동안 교육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조선의 관리들을 장준하가 처음으로 면담했다.
박지원을 비롯한 네 명의 관리는 처음 보는 위국공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박지원이 조선의 관리들 대표로 인사를 하였다.
“위국공 합하를 뵈옵니다.”
“반갑습니다. 그동안 교육을 받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동안 좋은 경험이 되었으면 합니다.”
장준하가 말하자 신하 중 한 사람이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저는 19세부터 스승님을 모시며 상업을 진흥하여 조선을 부국강병 시키자고 배웠습니다. 인연이 있어 청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신분 차별의 타파와 상공업 장려를 통해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고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킬 것을 어명에 따라 주상 전하께 올린 구폐책(救弊策)의 상소에서도 말씀 올렸고, 이를 위해서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작년(1790년)에도 청국에 다녀오고 나서 그러한 생각이 더해졌는데 이곳 가온에 와서 보고 배우고 나서 제 생각이 얼마나 정저지와(井底之蛙)였는지를 절감했습니다.
이번 가온에서 보고 배운 내용은 제가 주장한 ‘청국을 배워 그들의 문물을 조선에 받아들이자’는 수준과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생각했던 문물과 너무 엄청나게 달라서, 처음에 저희들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인가 하고 동료들과 논의도 있었고, 주상 전하께서 저희들보고 직접 가서 봐야 한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그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이번에 배운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가온과 협의하여 백성들을 교화시켜 반드시 조선이 개혁을 할 수 있도록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말을 한 사람은 박제가(朴齊家)로 조선의 관리들을 대표하여 말하였다.
위국공 장준하가 다시 말했다.
“여러분들은 내일이면 조선으로 돌아가면 곧 임지로 부임을 하실 겁니다. 우리 가온의 인력이 여러분들이 임지에 도착을 하고 1개월 정도 지난 3월 초순경에 도착을 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여러분들이 부임하는 지역에 자원을 개발하고 공장을 설립하여, 백성을 고용하여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공장에서 나오는 물건을 유통하여 상업을 진흥시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세수 증대에도 힘쓸 계획입니다.
그리고 남는 생산품은 전량 외국에 수출하여 외화를 획득할 계획입니다.
이는 조선의 국가 대계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사업으로 당분간은 청국이 모르게 추진을 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기밀 유지가 필요하니 부임하시면 저희들이 들어갈 때까지 백성들의 교화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박지원(朴趾源)이 나서서 말했다.
“염려 거두시지요. 저희들이 단단히 준비하여 차질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북학파(北學派)출신들인 이들은 가온에서 받은 교육에 힘입어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인 현실개혁론자가 되었으며 더 철저한 가온학파가 됐다.
장준하가 이들을 일부러 선정하여 교육시킨 이유는 조선에서 외국을 문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가장 많이 되어 있는 이들을 교육하여 가온의 맹신자로 만들기 위함이었고 그것은 보기 좋게 적중했고 조선에서 새로운 학파가 새워지게 됐다.
장준하가 말을 끝내자 최성용이 말을 했다.
“제가 이번에 조선의 별무사의 관리를 맡은 최성용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대외무역을 담당할 가온무역의 사장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서이수(徐理修) 전수와는 앞으로 많은 일을 같이 해야 되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서이수 전수가 최성용의 말에 화답했다.
“별말 씀 다하십니다. 오히려 제가 최 중령님 부탁을 드리고 지도를 받아야 되는 일이 많을 겁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바랍니다.”
최성용은 서 전수에게 대외적인 활동에 필요한 몇 가지 주의와 당부를 했다.
아오지 탄광이 있는 경흥의 박지원, 무산철광이 있는 무산의 박제가, 공업단지를 조성할 청진의 유득공(柳得恭)에게도 임지에 부임하면 각각 해야 할 일과 일정에 대하여 알려주었다.
이들은 최성용의 말에 하나하나 묻고 답하며 한마디 말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1791년 1월 10일 8시 가온 화순 항 광장 충무공이순신급 대조영 함.
송훈 대위의 저격대 병력 100명과 군단교육대장 홍병화 중령, 교관 선발대 다섯 명이 비행장 광장에 도열해 있었고, 북한산성에 동행할 박지원을 비롯한 조선의 관료 네 명이 그 옆에 대기하고 있었다.
박지원 등은 앞에 있는 배의 크기를 보고는 도저히 그 크기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박지원이 말했다.
“세상에 산만 한 배라고 하더니 정말 믿기지 않구나. 어떻게 이렇게 큰 배가, 그것도 쇠로 만든 배가 있단 말인가. 닻도 없고 노도 없이 엔진이라는 기계의 힘만으로 움직이다니 정말 이 쇠로 만든 배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구나.”
그들은 이번 교육 시간에 500톤급 연안 경비함을 타보았다.
그 배도 처음 보았을 때 엄청나게 크다고 생각했지만 충무공 이순신급 대조영 함은 아예 그 크기가 달랐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이형구 상장을 비롯한 군단의 지휘부가 도착을 했다.
이 상장과 군단 지휘부가 연단에 오르자 곧 출정식이 거행되었다.
선임인 홍병화 중령이 부대를 지휘하였다.
“사령관님께 대하여 받들어 총.”
“충! 성!”
북한산성으로 출정하는 장병들의 인사를 받은 이형구 상장이 훈시를 했다.
“귀관들은 오늘 북한산성으로 출정을 한다. 북한산성은 하성호 대위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귀관들이 북한산성에 가는 이유를 잘 알 것이다.
업무에 대한 주의는 하지 않겠다. 귀관들은 앞에 있는 국기를 봐라. 귀관들은 우리가 이번에 처음으로 선정한 삼태극기를 달고 출정하는 것이다. 결코 삼태극기에 부끄럽지 않게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리라 믿는다.
특히 저격대대 귀관들은 주상 전하께 어검을 하사받은 최초의 부대다. 부대의 명예에 걸맞은 활약을 기대하겠고 모쪼록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전원 건강하게 복귀하기 바란다. 이상.”
이형구 상장의 짧지만 의미 있는 훈시를 들은 병사들은 지휘부에게 출발 인사를 마치고 바로 출발 대기를 했다.
이들을 바라보는 조선의 관리들은 그들의 군기가 엄정함에 부러움을 느꼈지만, 이들의 조선에 들어가서 용호영과 장용영을 훈련시킨다고 하니 곧 조선에도 이들과 같은 부대를 보유하리라는 생각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특히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검서관 이덕무(李德懋)와 장용영 장교 백동수(白東修)와 공동 저술할 정도로 군사력 강화에 관심이 많은 박제가는 가온군의 절도 있는 행동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부임하면 무산의 군사력을 강화하여 정예강병으로 만들 결심을 했다.
110명의 인원이 대조영 함에 승선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선의 관리들이 배에 오르자 함장이 이들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대조영 함 함장 변기영 중령입니다.”
박지원 일행이 배 위에 오르자 함장 변기영 중령이 영접하였다.
박지원 일행과 변기영 중령이 서로 인사를 마치자 변기영 중령은 바로 출항을 명령하자 대조영 함이 서서히 항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박지원 등은 이 거대한 배가 서서히 미끄러져 나가자 4,500톤급 함정이 운항하는 것을 처음 본 일행은 교육을 받으며 말로는 들었지만 신기하기가 그지없었다.
이런 산만 한, 그것도 돛도 없이 철로 만든 배를 움직이는 이들의 기술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화순 항을 빠져나오자 대조영 함은 인천을 향해 곧 전속 항진하기 시작했다.
30노트(시속 48㎞)의 속력으로 대조영 함이 바다를 가르며 항해를 하자 그 빠름이 대단하였다.
‘무슨 배가 말같이 빠르게 항해를 하다니 아! 이들의 기술이 정말 대단하구나.’
박제가는 배가 가는 것도 신기하였는데 그 빠르기가 말처럼 빠르다는 것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조선의 관리들의 눈에는 149.5m의 길이에 7.4m의 너비를 가진 4,500톤급의 대조영 함은 말 그대로 거대한 동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