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01)

마음의 초석을 놓다

1791년 1월 1일 6시 제주도 성산 일출봉.

제주도 화순 항에서 10,000톤급 화물선 1척과 LST함 2척이 3,000여 명의 가온 주민들을 태우고 조선에서 처음 맞이하는 해맞이 행사와 합동 차례를 지내기 위해 0시에 화순 항을 출발하여 4시에 성산포 항에 도착을 했다.

장준하를 비롯한 주요 지휘부 인사 전원과 독신으로 넘어온 주민들과 군인 중 근무조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합동 차례를 지내기 위해 성산일출봉에 왔다.

일출봉에서는 해맞이 행사와 차례를 지내기 위해 일출봉 앞쪽 초지에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앞에 의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주변은 이미 군용 발전기를 이용하여 주변을 대낮같이 밝혀놓았다.

장준하와 일행들이 자리에 앉고 주민들 대부분이 올라오자 행사가 시작됐다.

막간을 이용하여 군단 음악대의 연주가 있었고, 시간이 되자 사회자의 진행으로 합동 차례가 진행되었다.

장준하가 가온 전체를 대표하여 초헌관(初獻官)이 되고, 아헌관(亞獻官)에 주민들을 대표하여 김석태 전 제주 부지사가, 종헌관(終獻官)에는 청소년들을 대표하여 대정고등학교 3학년 양정현 군이 종헌관이 됐다.

차례가 진행이 되고 축관(祝官)인 장철호 박사의 축문이 모든 이의 머리 위로 울려 퍼지자 참여한 주민들과 군인들 사이에 간간히 흐느낌이 들려왔다.

장준하도 시간여행 당시 두고 온 아이들이 생각이 났다.

딸만 둘을 둔 장준하는 둘 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고, 좋은 직장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다니던 아이들이었다.

장준하는 그의 아내와 5년 전에 사별했다.

유난하지는 않았지만 장준하는 아내를 아꼈고, 아내 또한 군인 탓에 이동이 잦은 생활을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잘 따라주었던 사람이었다.

사별 후 고생만 시키다 먼저 보낸 사람에 대한 미안함과, 대부분을 제주도의 관사에서만 보내는 생활 때문에 혼자 사는 것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지금껏 혼자 지내고 있었다.

이런 날 자신도 유난히 가족이 생각나는데 다른 사람들도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장준하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시간여행을 같이 온 지휘관들 대부분이 가족을 두고 혼자 넘어왔다.

40~50대 초반의 나이에 한국의 다른 부모들같이 아이들의 진학 문제로 서울 또는 진해에 집을 두고 혼자 제주도에서 생활해 왔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장준하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형구 상장이 시선을 돌려 장준하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서로의 마음을 읽은 둘의 입가에는 쓸쓸한 미소가 어렸으며, 이형구 상장이 조그맣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자, 장준하도 손을 가볍게 들어 이형구 상장에게 답변해 주었다.

차례가 모두 끝이 나고 곧이어 해가 뜨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구름이 거의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에서의 신년 일출을 보게 되었고,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소망을 빌어 해에게 띄워 보냈다.

해맞이 행사와 합동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장준하는 최성용과 간단한 오찬을 하고 관사에서 쉬고 있을 때 관사로 김석태 지사가 찾아왔다.

1791년 1월 1일 13시 위국공(衛國公) 장준하 관사.

장준하는 찾아온 김석태 지사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지사님”

장준하는 현관을 들어서는 김석태를 보고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고 그 손을 반갑게 잡은 김석태가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합하. 아까는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예, 지사님도 새해 건강하십시오.”

관사 현관에서 서로 새해 인사를 하고 장준하가 김석태를 거실로 안내를 하는데 김석태 지사가 거실로 올라서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김석태 지사 혼자가 아니고 일행이 있었다.

“선생님, 이리 오르시지요.”

김석태는 그 사람을 불렀고 김 지사의 말에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은 장준하가 처음 보는 사람으로 나이가 60대 정도로 보이고 회색 두루마기에 한복을 받쳐 입고 중절모를 쓴 백발의 노인이었다.

장준하와 최성용은 누군가 하고 의문을 가졌지만 나이가 들었고 김 지사가 존칭을 쓰는 일행이라 최성용은 그 사람을 정중히 거실로 안내를 했다.

이윽고 김석태 지사와 동행한 노인이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관사 거실의 안락의자에 네 명이 앉았으나 처음 보는 노인으로 자리가 약간 어색해지려고 하자 곧 바로 김석태 지사가 그 사람 소개를 했다.

“합하, 인사드리겠습니다. 옆에 계신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왜곡되고 날조된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 평생을 바쳐 우리 역사를 연구해 오신 국사학자이십니다.

우리 가온이 앞으로 새로운 세상을 헤쳐나갈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우리 민족의 올바른 역사 정립과 그에 따른 민족의 정체성 확보가 가장 시급하다고 봅니다.

선생님과는 이전에 제가 공무원교육원 교수 시절부터 인연이 있어 외부 강사로 몇 번 초빙하여 공무원교육원에서 특별 강의를 부탁드린 분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본래 댁이 경북 안동인데 제주도에 우리 역사의 귀중본이 있다고 하여 불원천리 내려오셨다가 우리와 같이 시간여행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우리와 같이 오신 줄을 몰랐는데 우연히 가온 시내에서 뵙고 제가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서 모셔 왔습니다. 앞으로 우리 주민들의 역사 교육과 통일된 민족 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실 분이기 때문에 모셔 왔습니다.

선생님은 금년 연세가 칠순이시고 함자는 권자 오자 인자 쓰십니다.”

김석태 지사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 노인을 소개했고 그의 말이 끝나자 장준하와 최성용은 세삼 앞에 앉아 있는 노학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먼저 노인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다.

“권오인이라고 합니다.”

권오인 노인이 자신을 소개하자 장준하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잘 오셨습니다. 장준하라고 합니다. 원치 않은 시간여행을 했지만 지금 저희들이 우리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쓰려고 하는 이때 가장 필요한 분이 선생님 같은 분이십니다.

저희들도 지금 알고 있는 역사가 잘못됐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선생님께서 계신 것은 세상에 그 무엇보다 든든한 힘이 됩니다. 앞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아주십시오.”

장준하의 정식 인사를 받은 권오인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답례를 하고 말했다.

“초야에 묻혀 평생을 글만 본 촌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만 다른 일도 아니고 우리 민족의 진실한 역사를 찾는 일에는 짧은 지식이나마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바로세우고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은 지금이 시점에서는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김 지사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제가 합하를 찾아뵙고 역사 바로 세우기와 민족 정체성 회복을 부탁을 드리려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런 계획을 하고 계셨다니 저희들은 한시름 놓았습니다. 앞으로 저희들이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는 우리 민족의 위대성에 대해 많은 지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최성용은 장준하와 대화를 하고 있는 권오인 선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세가 70이라고 하지만 나이를 나타내는 것은 백발이 된 머리뿐이고 얼굴은 붉고 눈은 형형하여 마치 50대 후반 같았고, 목소리는 작지만 힘이 있고 꼬장꼬장함이 묻어 나오는 전형적인 학자의 풍모였다.

권오인 선생은 몇 시간에 걸쳐 자신이 아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 강론을 했고 김석태와 장준하와 최성용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았지만 권오인 선생이 말하는 우리 역사를 들으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장준하는 권오인 선생에게 내일 지휘관 회의에서 강론을 부탁했고 권오인 선생은 장준하의 말에 흔쾌히 승낙을 했다.

장준하는 내일 지휘관 회의에 별도의 시간을 배정하여 권오인 선생을 모시기로 했다.

1791년 1월 2일 7시 위국공 집무실(執務室) 옆 회의실(會議室).

계해년(癸亥年) 첫 번째 주요 지휘관 회의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장준하와 이형구 상장, 송기훈 중장, 우종철 비행단장의 군 지휘부와 김석태 지사, 장철호 박사, 백기소 박사, 이호 박사 등이 모두 모였다.

최성용 중령이 사회를 보았다.

“지금부터 1791년 계해년(癸亥年) 첫 번째 주요 지휘관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국민의례가 있겠습니다.”

최성용의 사회로 국민의례를 마치고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장준하의 개회를 시작으로 주요 지휘관 회의가 시작되었다.

“현재 우리들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 총 다섯 곳으로, 지도군, 울릉도, 좌도도, 호주 원정단과 제주 전역에서 교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곧 용호영의 교육과 봄이 되면 청진의 공업단지와 제1원정단의 원정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지난 몇 개월간의 조선에서의 생활을 겪어보셨으니 각자 자신의 분야별 보고 및 토론이 있었으면 합니다.”

장준하의 말이 끝나자 장철호 박사가 말했다.

“위국공께서 말씀하신 순서대로 보고를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도군의 상황입니다. 지난 20일 지도군에 입성한 이래 총 4개소로 인원을 나눠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요업단은 벌써 적벽돌 생산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생산된 적벽돌은 먼저 압해도 도공들 숙소를 위해 사용했고, 지금 제주도 교육장의 물량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생산량은 하루 10팔레트 정도를 생산을 하고 있지만 지금 가마를 증설하고 있어서 3일 후면 그 5배의 생산이 가능합니다.

1팔레트의 양은 보통 소형 지게차가 한 번에 뜰 수 있는 정도의 양을 말하며 벽돌의 경우 16장×6장×12단=960장입니다.

염전에 쓸 평판도기의 경우는 하루 생산에 약 1,000평 정도를 생산하고 있으나 이 가마도 며칠 후면 그 생산량도 3배 증산이 가능합니다.

유리공장의 경우 이제 기초 바닥공사 중에 있고 우선 실험실 정도의 규모로 시작을 하려고 합니다. 유리 생산이 가능해지면 그때부터 대량생산 체제로 가려고 계획 중입니다. 아직은 유리 생산이 안 되고 계속 실험 중에 있습니다.

염전은 증도 지역과 자은도 일대 내해 지역으로 나눠서 시작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던 시대에 한국의 천일염의 65%인 195,000톤이 신안군 일대에서 생산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생산량이 더 많았으나 중국의 소금이 수입되어 수익성이 떨어진 염전을 폐쇄한 것이 이 정도의 양입니다.

저희는 지도군 일대를 개발하여 조선의 석(40㎏=90ℓ)으로 환산하면 약 750만 석인 30만 톤의 소금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술로 3년 정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충분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중 10%를 세금으로 납부를 한다고 보았을 때 평상시 조선의 쌀값 4냥의 1/2인 소금 값을 1석에 2냥으로 환산해도 연간 150만 냥에 이릅니다.

양대 변란 이후 계속된 공신전 남발과 양반의 증가, 서원의 증가로 인해 조정에서 관리하는 토지가 계속 줄고 있기 때문에 세수도 따라서 줄고 있는 지금 이 정도의 세수는 조선 재정에 숨통이 트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염전 공사 진척 상황은 작년까지 전체적인 밑그림 단계인 기초 토목 단계를 시공하고 있으며, 금년 1월 중순부터는 본격적으로 염전을 조성하려고 합니다.

첫 수확을 하는 3월경에는 금년 계획 면적의 10% 정도가 조성될 것으로 예상되고, 인력은 비금도 출신 가온 주민 유석원, 유재원 형제의 감독하에 농업단 300명과 지도 군민 3,000명의 인력이 담당하고 있어 인력 수급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금년 말까지 전체 목표량의 30% 정도인 250만 석이 생산되고, 1석에 2냥으로 계산을 하면 500만 냥의 수익이 수치상으로 예상됩니다만 이렇게 많은 소금이 대량으로 본토로 들어가면 조선에서 소금 가격이 폭락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소금가마를 독점하고 있는 종친부와 권문세가들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어 폭락을 방지하는 선에서 방출을 하고 남는 소금은 전량 중국과 일본 수출로 돌릴 계획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이고, 단 조정에서 필요한 구황염은 전량 무료로 제공할 계획입니다.

그러한 여러 정황을 판단하여 소금의 수익이 300만 냥 선으로 예상됩니다.

지도군에서 일하는 인부가 염전과 요업을 합해서 약 4,000명입니다.

그들에게 지급되는 인건비로는 도공을 포함해서 한 달에 25,000냥과 약 3,000석(12,000냥)의 쌀이 지급됩니다.

또한 현장의 인부들과 공부를 배우는 아이들과 식사를 도와주는 부인들 500명의 점심과 가온 주민들의 식사로 한 달에 약 2,000석의 쌀이 들어갑니다.

이에 따른 비용으로 부식을 포함하여 월 20,000냥이 지급되어 한 달 소요 경비를 넉넉히 잡으면 월 60,000냥의 비용이 들어가서 연간 72만 냥이 소요됩니다.

300만 냥의 수익에서 10%의 비용을 세금으로 잡아 비용을 공제하고 상인들의 유통 마진을 제하면 약 100만 냥의 순수익이 예상됩니다.

이 정도면 초기 요업단에 들어가는 비용과 지도군 주민들의 의식주 생활을 개선시키고 교육시키는 비용은 충당이 가능할 것이며, 소금은 강진의 병영 상인(兵營商人)을 통해서 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전국의 오일장과 장시(場市)를 통해 유통을 하려 합니다.”

장철수 박사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이형구 상장이 말을 이어받았다.

“이번에는 제가 보고하겠습니다. 좌도도는 1여단 3대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대대장 박정기 대위가 섬을 관할하고 있으며, 일본의 도발을 우려하여 100명 특수효과 팀도 상주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좌도도에 일본이 몇 번의 내습을 하였으나 피해 없이 전부 격퇴하였고, 좌도금광에서는 매월 금 500㎏, 은 5톤, 구리 5톤의 생산되고 있습니다.

울릉도는 현재 도동항 건설공사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장학수 소령의 통신단이 성인봉에 12월 1일부터 중계국 설치를 시작했습니다.

성인봉이 워낙 험하여 장비를 광무황제 함의 지원을 받아 헬기로 이송했으며, 다행히 시간여행 때 같이 넘어온 시멘트가 어느 정도 있어서 철근 콘크리트로 기초를 해서, 헬리포트를 비롯한 주변 설비 등 모든 설비를 완공하고 지난 25일 통신단원 전원이 철수했습니다.

울릉도 중계국은 무인 중계국으로 운용될 예정입니다.

울릉도에 수용된 외국인 300명과 국정원, 기부부대원 100명 등 400명은 현재도 각자 교육 중에 있고, 이번에 청진공업지구에 제철소 건설에 파견할 일본인 50여 명을 따로 정신교육 중에 있습니다.

외국인들은 한국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은 그들의 이전 이력 등 모든 것을 완전 무시하고 정신교육과 앞으로 머물 나리분지의 정비와 숙소 건설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울릉도 나리분지는 앞으로 특수 훈련장으로 사용을 검토 중에 있습니다.”

이형구 상장의 보고가 끝나자 송기훈 제독의 보고가 이어졌다.

“다음은 제가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흑산도 항은 지리적 이점이 있어 앞으로 서해의 거점 군항으로 개발할 계획입니다.

지금 흑산 항은 거의 개발이 되지 않은 있는 상태로 항의 앞에 있는 내영산도와 외영산도를 잇는 방파제와 수로 공사를 하여 양항으로 조성할 계획입니다.

흑산 항을 군항으로 조성하면 앞으로 서해안 방어 및 중국 본토 공략의 주요 거점으로 육성할 것입니다.

항모 광무황제 함은 아직 동해에서 좌도도의 작전을 원거리 지원하고 있습니다. 호주 원정단은 지금쯤 파푸아뉴기니 섬을 지나 산호해안 부근에 있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해도를 이용한 항로 개척이라 함대의 기동력을 살리지 못하고 주변 바다 상황을 계속 정탐하며 운항하고 있어 약간의 시간이 더 걸리고 있지만, 장병들 사기가 높아 별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작전 개시일인 1월 15일까지는 충분히 작전 지역에 도착 가능합니다.”

송기훈 제독의 보고가 끝나자 이어서 김석태 부지사가 보고를 하였다.

“12월 5일부터 실시된 제주 일원에서 주민 교육 사업은 초기의 우려와는 달리 주민들이 별다른 저항 없이 교육에 임하고 있습니다. 위생 교육을 기본으로, 한글, 산수, 군사훈련 등 4개 부분으로 나누어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군사교육은 40세 미만의 인원을 중점적으로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그중 18세부터 30세까지의 인원 40,000명이 군사훈련 중점 대상입니다.

반강제적이기는 하지만 점심을 제공하면서 실시하는 교육이라 참여율도 높고 18세기 한글과는 달리 사용이 편리한 우리 시대의 한글로 교육을 시키니 주민들 교육 성과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3개월 교육 후 교육 참여도에 따라 차등의 혜택이 주어진다고 하니 놀라울 정도의 진척을 보이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3개월 교육이 끝나서 분류를 하면 상당한 교육 효과를 보이는 주민들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신분 문제는 상당한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철저한 정신교육을 통해 교육을 하고 있지만 신분 문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장준하가 모두의 말을 듣고 참석자들을 돌아보며 말을 했다.

“자, 그럼 잠깐 휴식을 취하고 다음부터 문제점과 해결책을 논의하기로 합시다.”

장준하의 말에 따라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회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1791년 1월 2일 9시 위국공 집무실 옆 회의실(會議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따듯한 차와 떡을 비롯한 간단한 요기 거리가 나와 참석자들의 허전한 속을 달래주었고 9시부터 회의가 속개됐다.

먼저 장철호 박사가 전 시간 장준하의 말을 받아 발언을 했다.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우선 주민들 생활용품 문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주민들 교육에 가장 필요한 것이 필기도구의 개발입니다.

그중 우리 주민들에게 교육에 꼭 필요한 종이와 연필과 흑연에 광물질 등을 섞어 만든 색연필을 먼저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조선의 백성들뿐 아니고 우리 가온의 학생들에게도 당장 필요합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현대적인 연필과 색연필은 아직 유럽이 생산되기 직전입니다. 1795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실용화된 것으로 지금 만들면 앞으로 필기구 시장을 석권할 수 있어 수출에도 많은 수익도 예상됩니다.

만드는 방법이 간단하고 주민들 교육 효과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들 수만 있다면 볼펜도 개발해 주셨으면 합니다.

1938년에 발명될 볼펜이 지금 시대 만들어진다면 혁명에 가까운 전기가 될 것이고 지금의 기술로는 개발이 어려울 것이어서 서양이 특허제도를 잘 활용하면 엄청난 부가가치를 내는 상품이 될 것은 자명합니다.

다음으로 성냥과 라이터의 개발이 필요합니다. 지금 시대 불씨는 수석식 소총이 만들어질 정도로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때로는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입니다.

성냥은 여러 단계를 거쳐 1845년대 지금의 성냥이 만들어지고 라이터는 1900년대 초반에 실용화됩니다. 이 모두가 지금 개발되어 보급된다면 주민들 생활 개선 효과는 물론 대외적으로는 막대한 수출도 예상됩니다.

앞으로 100년 이상 수많은 곳에서 벌어질 국지전 및 전면전에서 볼펜과 라이터 및 성냥의 쓰임새는 엄청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누입니다. 조선 백성들의 위생 교육과 개선을 위해서 비누는 반드시 선결될 과제입니다. 위생 개념이 전혀 없는 조선은 역병으로 인하여 수많은 인명의 희생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주민들이 손, 발만 깨끗하게 씻고 물만 끓여 먹어도, 모든 전염병의 80~90%는 예방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몇 가지 물품의 개발을 먼저 부탁드립니다.”

장철호 박사가 말을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이호 박사가 말했다.

“이것은 제 전공은 아니지만 건의드릴 부분이 있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청진에 중공업 단지 조성을 준비 중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중공업 단지를 조성하고 개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력이 필요합니다.

수력발전이 있으면 좋으나 지금 조선의 여건상 개발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 먼저 남제주발전소의 발전기 30㎿급 1기를 이설하여 화력발전소 건설을 먼저 하는 것이 공업 단지를 조성하는 데 필요합니다.

제철소를 건설하여 대량의 철을 공급하면 공업 발전에 엄청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조선의 현재 기술력으로 근대화된 중공업을 바로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제철소 건설은 적어도 5년 이상의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하고 여기에도 많은 전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제철소가 건설되기 이전의 대안으로 전기로 건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도군에서 내화벽돌 제조에 들어갔으니 곧 완성을 볼 것이고, 그러면 30㎿급의 화력발전소의 용량으로 상당한 전기로 운용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겁니다. 전기로는 나중에도 꼭 필요한 시설이므로 먼저 준공을 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그리고 청진공업단지에서 가장 먼저 합성고무를 이용한 전선 공장과 시멘트 공장을 우선 준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합성고무는 전선 생산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 합성고무를 이용하여 조선의 마차 바퀴를 개선하고, 손수레와 인력거 등을 만들어 보급한다면 주민생활 개선을 물론 상품 유통에도 상당한 혁명이 예상됩니다.

시간을 두고 조선을 개혁하려면 가온이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 편의 용품과 이동수단 개발부터 시작하여 주민들의 삶을 질을 조금씩 점진적으로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진행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각 현장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건설을 하기 시작하면 시멘트가 많이 필요할 것이므로 시멘트 공장도 우선 준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금 교육을 받고 있는 조선의 네 명의 관리들이 돌아가 임지로 부임을 하기 전에 서이수(徐理修) 별무사 전수(典需)와 같이 수출 문제를 관리할 우리 측 인사의 선발과 청진 중공업단지(淸津重工業團地)를 총괄 관리할 지원단의 선발도 필요합니다.”

이호 박사의 말에 이어서 최성용 중령이 말을 하였다.

“지난 12월 1일 ‘미래기획단’의 기획안에 의해 설립된 의약품 개발에 나섰던 20명의 의료진은 사실 위국공 합하의 명으로 지난 10월 1일부터 극비로 천연두 예방접종약을 배양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 상당량이 배양하여 되어 1월 말경이면 계획한 대로 가온 주민 전부와 제주도민 전부를 접종할 수 있는 양이 만들어집니다. 최초의 천연두 예방접종은 오는 2월 1일부터 전면적으로 시행하려고 합니다.

다행히 통합병원 내 종균 배양실에 천연두 예방약이 밀봉 보관되어 있어서 종균 배양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예방약 생산을 빨리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제주도 밖으로 나가는 주민들과 장병들에게는 먼저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주민들과 여러분들께 비밀을 유지한 이유는 천연두의 공포심을 미리 알릴 필요가 없어서입니다. 위국공 합하의 지시로 김재성 중령 팀이 극비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500명의 의약품 개발 기술단의 노력으로 버드나무에서 살리실산을 추출 가공하여 국산 아스피린을 개발했고, 페니실린도 개발에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개발된 제품의 약효 및 약리작용을 검증해야 하고 대량생산이 아직 준비되지 않아 지금은 실험실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다른 약들도 복제 약 개념의 개발이라서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예상되고는 있으나 주민들 건강에 직결되는 문제라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우수한 한의학을 접목하겠다는 의지들이 대단하여 필요한 진통 소염제 일부를 제외하고는 화학 약이 아닌 생약 개발을 하겠다고 여러 준비들을 하고 있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와 함께 알코올 에탄올 아세톤 등 지금 가온에서 보유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약품들을 분야별로 개발에 나서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큰 문제가 없는 약들은 5년 이내 전부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최성용의 보고에 참석자들은 장준하가 주민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경의를 표했다. 그동안 모든 사람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전염병인데 시간여행 후 정신없던 와중에도 장준하는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고, 참석자들이 ‘역시 지도자는 다른 사람과는 한 발 더 앞서서 보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마음속으로 장준하에 대한 생각을 하던 장철호 박사가 최성용을 보고 말했다.

“최 중령 대학 문제는 어떻게 정리되었소?”

“예, 대학 설립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학은 의과대학과 일반 대학교로 처음부터 분리를 하려고 합니다.

지금 가온에는 두 개의 고등학교가 있고 금년에 250명의 학생들이 졸업을 합니다. 이번 졸업생 중 100명을 의과대학에 진학을 시켜 의학과 약학, 화학을 전공시키고 나머지 150명을 각 지원 학과별로 인원을 배정하기로 하고 우선은 공과 계통을 주로 교육시키기로 했습니다만 교수진이 절대 부족합니다.”

장준하는 오늘 논의된 안건을 최성요의 도움을 받아 하나하나 정리했다.

지도군과 좌도도, 울릉도는 목표대로 진행되고 있었고, 호주 원정단은 남태평양에서 호주로 항해하며 작전 중에 있었다.

제품 개발이 우선 필요한 것은 연필, 볼펜, 성냥, 라이터, 비누, 합성고무이고 공장은 전기로와 전선 공장, 시멘트 공장 건설 등이 나왔다.

인력 문제는 대학의 정원과 교수 확충, 청진 공단 지원단의 인원 구성이었다.

장준하는 이들의 보고와 문제점 대책 등을 정리하다가 이형구 상장을 보며 질문을 했다.

“이 상장, 현재 군 병력 충원 계획은 세워져 있는가?”

“지금 교육을 받고 있는 제주 주민들 중 2~3만 정도의 병력 충원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조선 백성들의 군 복무 문제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 지 결정이 먼저 되어야 병력 충원의 계획이 섭니다.

일단 조선 내의 문제는 우리가 들어가는 10년 이후로 미뤄두고, 현재 통제가 가능한 제주도의 주민들과 앞으로 10년 동안 들어올 조선의 백성들 약200만여 명의 문제만 선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장준하가 이형구 상장의 말에 대답을 했다.

“군 복무 문제는 우리가 전에 의논하는 방식인 의무병제와 예비군제로 운영합시다. 그것이 지금의 조선의 상황에서는 최선이라는 판단입니다.”

그러자 군 복무 문제는 전에 깊이 있게 논의한 사항이라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복무 문제는 이 상장이 전체 의견을 조율하여 세부 사항을 준비해 주기 바랍니다. 군 복무 문제는 그 정도로 하여 결정을 하고, 이호 박사.”

“네, 합하(閤下).”

“이 박사 전공인 총기류를 한번 만들어볼 수 있겠소?”

“무슨 총을 말씀하시는지요.”

“지금 서양은 전부 전장식 수석 소총으로 이 소총이 1840년대까지 사용이 되는 것은 잘 알 거요. 내가 만들고자 하는 소총은 지금 수석 소총의 개량 형과 1828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드라이제(Dreyse) 소총과 동급의 후장식 소총이오.

내 생각은 우리가 유럽의 무기 발달 속도보다 10~20년 정도 앞선 기술로 계속하여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서 군수 시장에 쏟아놓는다면, 유럽 각국의 개발 의지를 꺾어 유럽의 군수 시장을 완전 종속시키든지, 아니면 최소한 군수 시장을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는 판단이오.

드라이제 소총을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개발하여 1800년대 초반 시판할 수 있으면 좋겠고, 지금 시대에 맞는 후장식 대포도 만들어보시오.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 전함 수리소 장병들과 같이 전함 연구를 시작해 보시오. 1805년 트라팔가르해전에서 2,000톤급 전열함이 나오기 시작하니 우리는 지금부터 장갑함 등을 연구해서 선점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 보시오.”

장준하의 말에 이호 박사가 답을 했다.

“예. 소총 등 총기류 부분은 제 전공이니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함 부분은 합하의 말씀대로 충분히 시간을 갖고 연구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최 비서관 지금 울릉도의 신 과장과 정철학 중령을 들어오라고 하고 청나라에 대해서 최 비서관이 참석자들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게.”

장준하의 말에 최성용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을 했다.

“청나라는 지금 최전성기를 구가하고는 있으나 건륭제의 총애를 받는 만주인 출신 의정대신(議政大臣) 화신(和申)이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엄청난 뇌물을 끌어모으며 그 횡포가 점점 극에 달하고 있고, 관료들과 상인들도 축적된 재화로 사치가 극에 달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어 이럴 때 국정원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청나라를 뿌리부터 흔들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최성용의 보고가 끝이 나자 이어서 장준하가 모두를 보고 말했다.

“앞으로 국정원의 활동도 여기 계신 분들에게 그 활동을 소상히 알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오늘 회의에서 발의된 생활필수품 개발에 대해서는, 연필, 볼펜 성냥, 라이터 공장과 비누 등 유지공업을 ‘경공업단’으로, 합성고무 등 석유화학 공장, 시멘트 공장, 석탄화학 공장, 화력발전소 건설을 ‘중공업단’으로, 전기로 공장, 제철소 건설을 ‘철강공업단’으로, 모두 3개 분야로 나누어 1차로 개발을 하고, 우선순위로는 오늘 나온 생활필수품공장부터 개발을 시작하겠습니다.

각 공장의 인력은 제주도에서 교육받은 인력을 먼저 투입하고, 반드시 그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복지 사업에도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공장 설립 시기 및 필요 예산 등 자세한 사항은 분야별 책임자가 작성하여 제출하고 최 비서관이 취합하고, ‘경공업단’은 장철호 박사님이, ‘철강공업단’은 이호 박사가, ‘중화학공업단’은 백기소 박사께서 맡아서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장철호 박사가 세 명을 대신하여 인사를 하였다.

장철호 박사의 인사를 받은 장준하가 계속해서 말을 했다.

“앞으로 별무사(別貿社)의 대외 업무를 담당할 ‘가온무역’을 설립할 것입니다. 여기 책임자는 지금까지 저를 보좌해 온 최성용 중령에게 맡겼으면 합니다.”

장준하는 다른 것도 아니고 앞으로 외국과의 무역을 전담할 가온의 조직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가온무역회사’의 대표 선임 문제이기 때문에 참석자들의 동의를 구했고 회의 참석자들은 최성용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선임에 만장일치로 찬성을 했다.

장준하가 최성용에게 바로 가온무역의 업무 지시를 했다.

“최 중령은 별무사의 대외무역 창구인 가온무역에 투입할 외국어 전공자 육성을 위해 울릉도 외국인의 활용도 고려해 보고, 특히 올 3월경부터 본격적으로 진출할 일본과 청나라의 나가사키와 광저우의 서양 세력과 교역 준비에 만전을 기해주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성용의 말이 있자 이형구 상장이 농담을 던졌다.

“최 사장, 장사 못해 우리 굶기면 안 돼.”

그러자 회의 참석자들이 최성용의 임명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박수를 치며 한참을 웃었고, 이형구 상장의 농담에 경직되던 분위기가 상당히 풀렸다.

지휘관들의 만장일치로 최성용에게 별무사와 가온무역의 관리가 맡겨졌고, 장철수 박사 등이 관리를 맡아 공단 건설에 착수하기로 했다.

장준하가 우종철 단장을 보고 물었다.

“우 단장, 비행선 개발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예, 비행선 제작은 항공 정비단을 중심으로 기본적인 지식을 쌓고 있습니다. 아직 헬륨가스가 생산되지 않아서 비행선 제작에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축적하는 데 주안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 계속 수고해 주시고 혹여 비행선에 활용될 수 있는 제품도 찾아보시오.”

우종철 소장과 말을 마치자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던 김석태 지사를 보고 말했다.

“김 지사님은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김석태 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꺼내었다.

“저는 주민 교육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전에 여러분들께 먼저 소개시켜 드릴분이 있습니다.”

김석태 지사의 돌연한 말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군가 하고 의아해 했다.

그러자 장준하가 김석태 지사를 대신해서 말을 했다.

“지금 김 지사님이 소개시켜 드리고자 하는 분은 그동안 왜곡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평생을 연구하신 재야 사학자로 저도 어제 처음 뵈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 나갈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입니다. 이번 회의 때 여러분들께 이분의 말씀을 들려드리기 위해 모셨는데 김 지사님께서 먼저 소개를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장준하가 권오인 선생의 약력을 소개를 하였고, 김석태 지사가 회의장을 나갔다 잠시 후 권오인 선생을 모시고 들어왔다.

권오인 선생은 어제와 똑같이 정갈한 차림의 복장이었고 권오인 선생이 참석자들의 앞에 서자 김석태 지사가 참석자들에게 인사시켰다.

“조금 전 합하께서 소개하신 권오인 선생님이십니다.”

그러자 권오인 선생은 어제와 같이 참석자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한눈에 봐도 학자로 보이는 칠순 어른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참석자들도 황급히 자리에 일어나서 답례를 했다.

최성용이 권오인 노인을 위해 의자를 가져다주었으나 권노인은 사양을 하고 최성용이 사회를 보던 자리에 섰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잠시 목을 가다듬다가 권노인 선생이 말을 했다.

높지 않은 목소리에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좌중을 압도했다.

“안동에 살고 있던 권오인이라 합니다. 칠십 평생을 위대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 살아온 저에게 오늘 이런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고맙고 감사합니다.”

권오인 선생은 감정이 격해지는지 목소리가 떨려 나왔고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말을 끊고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여러분들이 지금 조선에 와서 어떻게 앞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김석태 지사를 통해 잘 들었고, 여러분들이 되도록 조선 백성들의 피를 덜 보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육을 통해 개혁을 하자는 것에 저도 전적으로 찬성을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기 전에 우리가 여기 와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먼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하는 확고한 사상적 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은 우리가 누구냐 하는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자손인 천손 민족(天孫民族)입니다.

고래로 한국(桓國)에서부터 시작된 우리 민족은 신시배달국, 단군조선, 고조선, 북부여, 고구려, 발해를 거치는 동안에 우리 민족이 천손(天孫)이라는 높은 자긍심이 있었고, 다른 민족과는 다른 하늘의 후예, 천손이라는 사상을 대대로 계승하여 내려왔습니다.

이전에 누가 언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말살했는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면 되고, 후손들에게 올 바르게 가르치면 됩니다.

앞으로 모든 교육에 천손사상(天孫思想)의 고취(鼓吹)가 반드시 필요하고, 지금 제주도와 지도군의 주민들에게 시행되는 교육에도 당장 실시해야 합니다.

지금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는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주민들의 일체감을 조성하려면 통일된 정신교육이 필요합니다.

고려나 조선도 건국 초기 불교와 성리학 등으로 나라의 사상을 통일하여 건국으로 인한 혼란을 극복하고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지금 우리도 조선에 와서 개혁을 하려면 주민 의식 개혁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때 주민들의 의식화 교육에도 우리의 고유 사상인 천손사상의 도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의 천손사상은 모두가 하늘의 자손이므로 남녀의 차별도 없고 귀천도 없이 모두가 하늘 아래 평등하다는 사상입니다.

이런 민족적 자긍심을 처음부터 교육시켜 자신을 높이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며 앞으로 있을 본토 주민들의 교육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권오인 선생은 잠시 말을 멈추고 참석자들을 바라보다 다시 말을 했다.

“다음은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실제 역사도 신화라고 무시하며, 우리의 강역을 한반도로 국한해 버리는 식민사관에 의한 교육을 무려 100여 년간 받아왔고, 거슬러 올라가면 안타깝게도 삼국사기가 만들어질 때부터 우리의 원 역사는 무시되어, 중국의 사서에 맞추는 왜곡된 사관이 자리 잡아버렸습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는 우리의 역사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상당히 혼란스러우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기원전 7199년에 우리 역사 최초의 국가인 한국(桓國)이 세워진 것은 우리의 역사에 기록된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로 우리 후손들에게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중국이 그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25사의 정사 중 최고로 인정하는 사기(史記)에서도 나오듯이 그들의 조상이라는 황제헌원은 우리의 배달국의 14대 자오지한웅이신 치우천자께 목숨을 구걸하던 자고 사마천도 쓰기를 ‘치우는 고천자이고 황제는 제후국 소전의 아들이다’라고 분명히 쓰고 있습니다.

치우천자께서 다스리던 배달국의 일개 제후의 아들에 불과한 황제헌원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그들과 우리는 근본부터 다른 천손의 후예임을 모두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없는 일도 역사를 날조해서 사실로 만드는 일본도 있는데 역사에 분명히 존재하는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후손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왜 이전 시대 중국이 동북공정을 공공연히 수십 년 동안 하면서 역사를 왜곡하겠습니까? 역사가 열등해지면 주민들 의식 또한 열등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손의 후예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가 있고 그 당시 가장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던 민족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이 일은 그 어느 것보다 우선해야 하고 안 되면 힘으로라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권오인 선생의 크지 않지만 강단 있는 말에 숨소리도 내지 않고 경청했다.

권오인 선생의 말이 끝났지만 그의 말에 도취된 참석자들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장준하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권 노인에게 경의의 박수를 치자 모든 참석자들이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쳤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자는 데 반대할 사람이 그 어디 있겠는가.

한참을 박수를 치며 경의를 표하자 권 노인이 손을 들어 조용히 시켰다.

권오인 선생은 장준하 등이 자리에 앉자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기회에 태극기의 문양을 손봤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들 하십니까?”

권오인 선생의 느닷없는 제안에 참석자들은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태극기는 고종 황제께서 만드신 것으로 음양오행 사상에 맞게 가운데 태극 모양이 있고 4귀에 괘가 그려 있는 모양인데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나타난 음양오행 사상에 의한 지금의 태극 모양을 우리 민족의 사상에 맞는 천지인의 조화를 나타내는 삼태극(三太極)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습니까?”

권 노인이 말을 하자 참석자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최성용이 나서서 말을 했다.

“지금 조선 백성들의 의식 개혁을 위해 천손사상의 고취에 맞물려 가온의 문양을 지정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이전 시대 대통령의 문양인 봉황(鳳凰)이 있고, 용을 잡아먹는다는 새인 금시조(金翅鳥), 그리고 태양의 새인 삼족오(三足烏) 등이 있습니다. 용은 지금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고 있어서 제외를 했습니다.”

여러 제안이 나왔지만 가온의 문양은 태양의 새인 삼족오(三足烏)로 결정했다.

천손사상의 이론적 제공은 학교에 있는 국사 담당 교사들과 주민들 중 자원봉사자들로 구성하여 토대를 만들기로 하고, 그 교사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 한단고기를 비롯한 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당연히 권오인 선생이 담당하기로 했다.

제주와 지도군과 가온 주민들 교육을 위해 1개월 이내 교육 자료를 만들어 교육시키기로 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역사를 연구하기로 했다.

후일 전 세계에서 역사 연구에 가장 권위 있는 사학 연구기관인 ‘역사연구회’가 태동되는 순간이다.

이 역사연구회의 회장에는 당연히 권오인 선생을 위촉했고 권오인 선생도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금 가온은 가온 미래기획단이 발족된 이래 온통 공부 분위기였다.

지금부터 공부를 해야 10개로 나누어진 각 분야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고 지금이야 비상시국이어서 계획경제를 하지만, 곧 있을 개별적인 능력이 발휘될 시기로 복귀할 때를 대비하여 모든 주민들이 하나라도 더 배우려 하고 있었다.

가온은 여기에 더해서 천손사상과 우리의 본래 역사를 교육해서 주민들 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앞으로 모든 역사에 이 내용을 반드시 포함해서 교육하기로 했다.

가온에서는 많지 않은 인원을 적재적소에 균형 있게 배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공업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너무 부족했다.

점심시간을 넘겨 회의가 진행되었다. 점심시간을 너무 넘기며 회의가 진행되자 장준하는 권오인 선생을 모시고 회의 참석자들과 함께 식당으로 올라가 식사를 하고 계속 진행하자고 하고 회의를 정회 했다.

본부 건물의 제일 높은 층인 11층 구내식당의 간부 식당으로 올라간 일행은 잠시 후 앞에 놓인 것을 보고 궁금증을 가졌다.

그곳에는 시간여행 후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음식이 놓여 있었다.

“오늘 점심이 라면입니까?”

“특식인가 보네요.”

“라면이 아직도 남아 있었나?”

참석자들이 라면을 보면서 한마디씩을 하였다.

그러자 최성용이 말했다.

“이 라면이 가온에서 처음 개발하여 시제품으로 만든 라면입니다. 그래서 여러 간부 분들께 처음 시식을 해보시라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래요? 그럼 조선에서도 라면을 먹을 수 있겠네. 그럼 조선 백성의 식생활 개선에 엄청난 도움이 있겠구먼. 참으로 잘했네.”

이형구 상장의 말에 장준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그럼 드십시다.”

라면 맛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전날 자신들이 먹었던 대량생산되어 규격화된 라면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깔끔한 맛은 더 좋았다.

이형구 상장의 말대로 라면은 주민들의 식생활 개선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포장재와 밀가루의 대량생산이었다. 조선에도 밀은 있지만 대부분이 대량생산이 어려운 분상질밀(粉狀質小麥)로 밀가루의 양산을 위해서는 경질밀(硬質小麥)의 대량재배가 필요했다.

포장재는 청진 공단에 화학 공장을 생산하면 될 것이고, 밀은 서양에서 구입을 하거나 아니면 청나라의 북쪽 지역 신강 쪽에서 종자를 구하기로 했다.

만일 금년에 구입이 어려우면 당분간은 소량 생산을 하면서 생산기술을 축적하기 위해 조선의 밀을 사용하기로 했다.

점심식사를 마친 간부들이 다시 회의실로 내려갔다.

1791년 1월 2일 15시 본부 회의실(本部 會議室).

늦은 점심을 하고 회의실로 내려가 잠시 휴식 후 회의가 속개되었다.

두 시간여의 토의를 더 거쳐 최종안이 조율되었다.

위국공 장준하가 회의 참석자들을 보고 말했다.

“오늘 토의되고 발의된 안건에 따라 각 분야별로 업무 분담을 했습니다. 각 분야별 단장들은 각자의 업무별로 준비에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선임된 대표들은 내일 자로 발표하겠습니다.”

장준하의 말이 끝나자 이형구 상장이 나섰다.

“지금 군 문제는 장비에서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만 소모품이 문제입니다. 아직 전면전이 전개되지는 않았지만 소모품의 수급이 필연적 문제로 대두되니, 지금부터 준비가 미리 필요합니다.

지금의 군수 단지는 해군 지원 단지라서 육군의 보급에 필요한 시설물이 많이 없습니다. 앞으로 군수품도 중요한 수출품이 될 것이니 이호 박사가 맡으신 총기류 개발에 인원 보강과 시설물 확충이 요구됩니다.”

이형구 상장의 말에 이호 박사가 답을 했다.

“그 문제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본래 함 탑재 장비 개발단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소모품 개발이 필요합니다.

지금 서양은 아직은 흑색 화약의 시대이고 1800년 뇌홍의 발견되고 하면서 탄환이 발전하는 직전 단계로 탄환도 선점의 효과를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육군에서 사용되는 탄환 등의 제조 방법은 알고 있고 어느 정도 장비도 있으나 제주에서는 양산 체제에 따른 대규모 화약 공장의 건립이 안전사고 문제 등으로 어렵습니다.

아직 당장의 어려움은 없는 것 같아서 부지 물색에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면 좋은 결과를 보고드리겠습니다.”

이호 박사가 답변을 하자 이형구 상장은 오전에 발의한 조선의 군 복무 문제가 정리된 것과 이호 박사가 육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와 만족감을 나타냈다.

장준하는 장시간의 회의를 끝내면서 말하였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조선에 온 것은 그 누군가의 우리 민족에 대한 보살핌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정조 사후 이어질 세도정치와 외세의 침략, 무능한 지도자들이 벌이는 이전투구, 결국에는 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와중에 온갖 고통을 당해야 하는 조선 민초들의 아픔을 막으라고 우리를 이리로 보내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이 요즘 제 마음입니다. 조금 더 노력합시다. 그래서 꼭 좋은 결실을 맺읍시다. 오늘 수고 하셨습니다. 이상으로 회의를 끝마치겠습니다.”

장준하의 말에 모두 공감을 하면서 1791년 첫 번째 주요 지휘관 회의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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