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01)

각 처에 놓이는 초석

1790년 12월 25일 가온 본부 위국공 집무실.

그동안 쌀 수입을 위해 광저우로 파견 나간 일행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들이 쌀 구입을 위해 가져간 돈은 은(銀) 10톤으로 당시 무게로 환산하면 천은(天銀) 270,000냥이다.

제주상단의 양일현 행수가 수완이 있어 천은(天銀) 1냥에 쌀 1석을 구매하기로 결정하고 총 270,000석의 쌀 중 절반을 1차로 구매하여 들여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머지 물량은 2개월 후 선적을 하기로 하고 1차분을 싣고 광저우를 출발한다고 연락이 왔다.

이번 쌀 수입으로 제주도와 지도군 주민들의 식량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장준하는 지금 가온에 와서 신교육을 받고 있는 박지원, 박제가, 서이수, 유득공의 근황을 최성용에게 물었다.

“최 비서관, 지금 가온에 온 관리들의 교육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나?”

“안 그래도 그 문제로 합하(閤下)께 보고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조선의 관리들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놀라울 정도로 열정적으로 교육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조선의 관리들 교육을 조금 더 연장시켰으면 합니다. 합하(閤下)께서 주상전하께 약간의 시간을 더 주실 수 없나 말씀드려 주십시오.

일반 교육만 실시하려다 이들의 열정에 이 기회에 중화학 공업의 기본 개념 정도는 확실히 이해시켜 보냈으면 좋겠다고 교육단이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그건 내가 전하께 재가를 받아줄 테니 그대로 시행하게.”

장준하는 그날 밤으로 정조에게 연락하여 관리들 교육 연장에 대하여 말을 했고 정조는 흔쾌히 재가를 해주었다.

정조는 그들이 교육 일정을 늘리면서까지 수학을 하는 것에 적극 호응해 주었으며, 부임할 임지에는 1월말에 업무 인수인계를 하기로 하고 부임이 늦어지는 것을 미리 각 부임지에 알려주기 위해 특별히 선전관을 파견하도록 했다.

통상적으로 조선의 지방관의 교체는 봄과 가을에 이루어지나 지금은 가온군의 부탁으로 이뤄진 인사라서 특별히 1월말에 부임을 하기로 했다.

1790년 12월 25일 보르네오 20㎞ 해상 마라도 함.

김영훈 특수 기동함대 사령관은 마라도 함 함장 손영석 대령과 함께 앞에 있는 보르네오 섬을 쌍안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보르네오 섬은 75만㎢의 면적으로 풍부한 지하자원과 엄청난 원시림으로 합판 재료로 쓰이는 목재와 원목 등 그야말로 원자재의 보고다.

지금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7세기부터 자바 섬에 진출하여 세를 키워가다 1619년 자바의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 총독부를 건설하여 인도네시아 전체를 점차 식민지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1790년대는 자바 섬 동부의 마타람 왕조가 멸망하고, 서부의 반탐 왕조는 네덜란드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는 시기이다.

반탐 왕조도 결국은 1845년 멸망해 완전히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된다.

향료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세기 포르투갈을 이곳에서 마카오로 밀어내면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1790년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50여 척의 무장 범선과 3,000여 척의 상선 10만 명의 직원을 보유하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규모로 커졌다.

이러한 동인도회사도 지금은 보르네오 개척은 뒷전이었다.

동인도회사는 향료 무역에만 집중하면서 말레이시아에 발을 내리고 있는 영국 세력을 견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1790년의 보르네오는 약간의 지하자원을 제외한 전토가 미개척 상태로, 소수의 네덜란드인이 자바와 가까운 서부 지역에 전진기지를 건설하여 진출해 있는 정도였다.

섬 주민으로는 해안에 약간의 중국인들과 원주민들이 거주해 있고, 내륙 지역은 울창한 삼림으로 인하여 거의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원시림의 미개척지로 어떻게 보면 손대기 딱 좋은 상태였다.

“손 대령, 여기서 봐도 참 대단하구만. 저 나무들 좀 보게. 얼마나 큰 거야? 저게.”

“그러네요. 저도 저렇게 큰 나무는 처음 봅니다.”

원정을 오기 전 원정단 고급간부 교육 때 본 자료에 나와 있던 것을 상기하던 김영훈 제독이 손영석 대령을 보고 말했다.

“손 대령, 지금 원정단의 함장과 7여단장을 불러오게. 잠시 회의를 해야겠네.”

김영훈 제독의 말에 마라도 함 함장 손영석 대령은 지휘관을 소집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7여단장 이은성 소령, 효종 함장 김기철 대령, 경남 함장 이선국 중령, 전북 함장 양상기 중령, LST5 함장 정진영 중령, LST6 함장 정경태 중령, 손원일 함장 최정호 중령이 모였다.

김영훈 제독은 지휘관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 보르네오 섬 북단을 통과하고 있다. 지금 네덜란드인이 자바의 바타비아에 총독부를 세워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고 있지만 보르네오에는 전진기지 형식으로 서부 지역에 요새를 세워 일부 지역에 주둔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이번 원정 전 교육을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한반도보다 3.5배 정도의 넓은 면적에 원주민이라고는 고작 10만 명 정도만 있고 그것도 해안 지대에 몰려 있을 뿐이다.

서양인들도 아직 지하자원을 개발하거나, 플랜테이션농업을 하기 전으로 보르네오는 아직 미개척 상태다.

지금 우리 함대의 함정과 일부 병력을 남겨서 보르네오를 장악하여 서양 세력을 완전 섬멸하면 좋겠는데 귀관들 생각은 어떠한가?”

김영훈 제독의 말에 이지스 효종함 함장 김기철 대령의 말을 했다.

“제독님 말씀은 동의를 하는데 지금 우리 함정으로는 무리가 따를 것 같습니다. 저희들 함정이 LST함 2척을 제외하면 기함 마라도와 3척의 함정과 잠수함 1척, 군수 지원함 1척뿐입니다. 추가로 2척의 LST함이 장비를 싣고 온다고는 하지만 함정과 병력이 절대 부족합니다.

물론 이 정도면 지금 시대 그 어느 나라의 함대와 싸워도 섬멸이 가능하지만 넓고도 긴 보르네오의 해안을 몇 척의 함정으로 막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호주를 점령하면 영국과 호주와의 항로인 호주 서해안에서 영국 세력과 맞서야 되기 때문에 두 곳으로 병력을 나누는 것은 재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차라리 맞싸우면 쉬운데 막는 것은 오히려 더 어려움이 있습니다.”

효종함장 김기철 대령의 말에 LST5함 함장 정진영 중령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보르네오를 방어하려면 헬기 탑재가 가능한 LST함이 최소한 2척 정도와 호위함 정도의 함정 2척, 연안 초계함 1척 정도는 있어야 보르네오 섬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가온으로 병력 파견을 요청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김영훈 제독이 손영석 대령을 보고 말하였다.

“지금 가온에 남아 있는 배가 얼마나 있는가?”

손영석 대령이 김영훈 제독의 말에 자리에 가져온 문서를 보면서 말했다.

“지금 저희들 보유 함정은 지도군 쪽에 파견 나간 함정이 충무공이순신 함과 윤영하 함 1척 LST함 2척이고, 좌도도 방면은 LST함 2척과 윤영하 함 2척, 안중근 함이 나가 있고, 그리고 동해에 항모 광무황제 함이 작전에 나가 있습니다.

화순 항에 남아 있는 함정으로는 충무공이순신 함 1척, 경북 함, 윤영하 함 1척과 해경 순시선 2척뿐입니다. 좌도도에 나가 있는 LST함 2척은 물자를 좌도도에 하역하면 화순에서 다시 물자를 실어 호주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보르네오에 작전을 꼭 하시려고 하면 함정을 재배치하면 되겠지만 호주 문제도 있어서 그렇게 될 경우 한반도 방어 문제가 남습니다.

아쉽지만 지금 호주 작전이 끝나고 생각하셔도 충분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호주 공략을 하고 있는 지금 서양 각국에 우리들이 알려지면 상당한 불편이 예상됩니다.

지금의 함대로 호주 연안과 남태평양은 아예 죽음의 바다로 만들 수 있지만 보르네오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은 각국의 이해가 충돌하는 지역이라 최소한 제주도 주민들 교육을 마칠 동안이라도 비밀을 유지해야 되는데 이곳에서 격전이 벌어지면 우리들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제주도의 교육이 어느 정도 끝이 나서 인력 보강이 이루어진 후 생각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김영훈 제독은 손영석 대령의 말을 듣고 지휘관들의 표정을 쳐다보니 거의가 대동소이했다.

김영훈 제독도 손영석 대령의 분석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휘관들의 말처럼 잘못하면 보르네오가 계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김영훈 제독은 언젠가는 보르네오를 최소한은 원주민을 도와 그들을 네덜란드 식민지에서 독립시켜 가온의 우방국으로 만들자고 생각했다.

김영훈 제독은 각 함장들의 의견을 듣고 일단 보르네오 작전은 보류하기로 했다.

지금 가온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총과 칼이 아니라 인적 자원이었다.

‘그래, 기다리자. 우리에게는 아직도 시간이 충분하다. 우리가 못하면 우리 아들이 하면 될 것이 아닌가. 하나씩 하자. 아직은 사람이 너무 없다.’

지나치고 있는 보르네오 섬을 바라보면서 김영훈 사령관은 아쉬움을 달래었다.

1790년 12월 28일 지도군(智島郡) 압해도 가마.

드디어 처음으로 불을 지핀 가마에서 적 벽돌과 염전의 바닥에 사용할 밑판이 쏟아져 나왔다. 가마가 식고 안에 있는 적 벽돌과 판형도기가 나오자 주변에 있던 요업단의 도공들과 인부들이 환호성과 박수를 쳤다.

아직까지는 고령토나 다른 원료를 혼합하지 않고 순수 점토로만 적 벽돌을 생산할 계획이고 시간이 지나 도시의 주요 건물을 지을 때 배합 비율을 맞춰 아름다움을 살린 적 벽돌을 소성할 계획이다.

경기도 광주 분원요(廣州分院窯)에서 온 도기장 최석봉은 처음 이곳에 올 때 목포진에서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오게 되자 조정에서 자신들을 유배 보낸 것으로 생각했다.

평생을 아버지를 따라 분원에서 백자만 구워온 자신이 아무 잘못도 없이 유배가 된 것에 낙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잠시지만 조정을 원망도 하고 분한 마음에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유배가 되어 섬으로 끌려왔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요업단의 말에 따라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던 도기장 최석봉이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분원에 있는 관원들이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와 요업단이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는 하늘과 땅이었고 먼저 요업단은 말투부터가 달랐다.

분원(分院)에 있을 때는 50줄에 들어간 자신을 보고도 서른 살도 안 된 자들이 양반이라고 반말을 하는 것은 당연했고, 자신도 평생을 양반들의 반말이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아왔는데 요업단은 자신에게 깍듯이 존대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술을 인정하여 도공들의 관리 감독권을 맡기고 전적으로 자신의 말을 따라주었다.

기술을 천시하는 조선의 관리와는 전혀 다르게 자신에게 높은 대우를 하는 이들을 보고 다른 의도가 있는지 의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의 시간이지만 요업단이 최석봉 자신뿐 아니라 지도군의 보통 인부들에게도 연장자에게 말을 높이며 일을 시키는 것을 보았다.

이들의 행동은 지위가 높은 자들이 갖고 있는 오만한 자세가 아니었다.

연장자를 예우하고 기술자인 자신을 대우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고 몸에 밴 진심에서 우러난 행동이라는 것을 최석봉이 깨닫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도기장 최석봉은 신이 났다. 조선에서, 아니 태어나서 단 한 번이라도 이렇게 사람대접을 받고 일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도 도공이라면 조선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자신도 양반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조선의 다른 도공들과 양민들의 상황은 안 봐도 뻔한 상황이다.

이곳의 상황은 자신이 평생을 살아왔던 분원(分院)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차츰 상황이 파악되자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이곳에 온 것이 감사했다.

어떻게 하든 열심히 일해서 이 사람들의 눈 밖에 나지 않고 이곳에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더구나 여기서는 공부도 시켜주지 않는가.

처음 요업단이 한글을 가르치고 산수를 가르칠 때 뭐 하러 이런 것을 가르치나 하고 귀찮고 지겨운 생각을 했는데 그 생각은 바로 바뀌었다.

요업단이 가르쳐준 아라비아 숫자는 다음 날 현장에서 도공들에게 지시를 할 때 개수를 파악하는 데 바로 쓰였기 때문이다.

한자와는 달리 숫자를 쓰는 것은 더없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누구나 평등했고 열심히만 하면 요업단은 누구라도 대우를 해줬다.

신이 난 최석봉은 처음 적 벽돌을 만들 때 대궐에 납품하는 것 같은 적 벽돌로 생각해서 문양을 넣으려고 하였으나, 요업단장 설상진 박사의 말을 듣고 형태는 단순한 직사각형으로 규격은 동일한 크기로 만들었다.

설 박사는 지금 자신들이 만드는 적 벽돌은 궁궐이나 관에서 사용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주거환경 개선에 사용을 하려고 하니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모양이 단순하게 규격화해서 만들라고 했다.

설상진 박사가 여기서 생산되는 적 벽돌이 백성들이 살 집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된다는 말을 하자, 조선의 관리들이 자신들의 집이 아니라 백성들이 살 집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무엇을 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 없는 최석봉과 도공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도공들을 보고 설상진 박사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 까닭은 조선을 개혁하여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도공들께서는 앞으로 양반을 위하여 일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아예 버려 주십시오.

앞으로 많은 도자기도 만들겠지만 그 모두가 우리 조선의 부강한 앞날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앞으로 우리 후손들은 우리보다는 좀 더 나은 미래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염전에 가는 사각형의 판형도기도 그 쓰임새를 설명하며 튼튼하게만 만들면 된다고 했다.

설상진 박사의 말을 듣고 최석봉과 도공들은 처음으로 진짜 열심히 일을 했고 드디어 오늘 그 첫 제품이 생산되어 나오는 날이었다.

가마에서 출토되는 제품을 쳐다보는 도기장 최석봉은 이전 광주 분원에서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기분을 느꼈다.

이전에 광주 분원에서 만드는 모든 제품은 왕실에 진상을 하거나 양반들을 위해 만들어 왔는데 이번 제품은 마치 내 집에 물건을 내가 만드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나온 적 벽돌은 도공들의 숙소로 먼저 사용하기로 했다.

도공들은 신이 났다. 처음 제품을 만들고 나자 도공들은 황토로 만드는 적 벽돌을 위해 적 벽돌 전용으로 가마로 새로 만들고, 사각형의 단순 형태로 되어 만들기가 간단한 적 벽돌 만드는 법은 일반 인부들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전수하여 벽돌 성형을 맡기기로 했다.

이전의 조선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전 시대 도공은 물레를 잡기 위해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도공들도 설 박사와 요업단원들의 말을 듣고 스스로 변해갔다.

적 벽돌의 경우 오히려 인부들에게 점토를 개고 물의 비율을 맞추는 등 일을 시켜 적 벽돌의 소성(燒成) 과정을 분업해 나갔다.

설 박사는 도공들이 스스로 분업하여 대량생산의 기초를 다지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을 했다.

‘그래, 우리 선조들은 절대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단지 주어진 환경이 열악해서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것뿐이지. 봐라, 저 사람들을 조금만 동기를 부여해 주니 우리가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분업을 하는 것을. 우리가 앞으로 조선에서 할 일이 바로 이런 일이다. 조선 사람들 스스로가 깨어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주는 일이 바로 우리 가온이 할 일이다.’

설상진 박사가 이런 생각을 하며 도공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도 가마 확장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염전의 바닥에 사용할 판형도기용 가마도 추가로 더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판형도기가 생산 된다면 한 번 생산에 3,000평 정도의 염전에 깔 수 있는 양의 생산도 가능할 것으로 추산되었다.

설상진 박사는 적 벽돌과 판형도기 생산 성공과 가마의 증설을 위국공 장준하에게 보고를 하였다.

그날 오후 설상진은 도기장 최석봉과 도공대표 10명을 불렀다.

설상진은 자리에 앉는 최석봉을 보고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저희들의 한 일이 뭐 있습니까. 다 단장님의 지시 덕분입니다.”

가온 주민이 조선인을 교육시킬 때 제일 처음 한 것이 ‘나리’와 ‘마님’, ‘쇤네’ 등 자신들을 너무 낮추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듣기도 어색하였고 말끝마다 붙는 그런 말이 자신을 비하하는 말처럼 들려서 상당히 거슬렸고, 그래서 나온 대안이 ‘님’ 자를 붙이라는 것과 ‘제가’라는 말을 쓰게 하는 것이었다.

가온의 교육단에서는 계속해서 조선 백성들이 평상시에 사용하는 언어 순화 운동을 하고 있었다.

평생을 써온 말을 단숨에 바꾸기는 어려웠지만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하여 다시 교육을 시키니 주민들이 교육을 받으며 말투가 서서히 고쳐져 갔다.

최석봉 도기장도 그간 교육이 어느 정도 통하였는지 말끝이 많이 고쳐졌다.

설상진 박사는 최석봉 도기장의 말투가 많이 변한 것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도기장님 말투가 많이 고쳐졌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러자 최석봉도 설상진 박사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예.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오시라고 한 이유는 지금 제작하고 있는 적 벽돌과 염전용 판형도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벽돌과 도기는 약간의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으로 그것만이면 굳이 여러분들을 주상전하께 청을 넣어 이리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제작을 부탁드리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도기장 최석봉과 조선의 도공들은 설상진 박사의 손짓에 따라 그의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접시 종류와 모양이 이상한 자기(瓷器)들을 보았다.

그것은 서양에서 사용하는 양식용 그릇이었다.

최석봉은 접시는 만들어 봤지만 양식용 자기들은 처음 보았다.

그런데 모양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를 들여다보던 도공들은 그 순백색의 색깔과 얇고 가벼움에 놀랐지만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것을 한번 보시죠.”

설상진이 자기를 들어 해를 비추자 놀랍게도 반투명이기는 하지만 햇살이 비치며 뛰어난 투광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최석봉이 말했다.

“아니, 자기(瓷器)가 이렇게 가벼운 것도 놀라운 일인데 저렇게 얇게 만들 수 있고 햇살이 비치다니 정녕 이것이 양이들이 만든 자기입니까?”

최석봉의 말에 설상진이 말을 했다.

“예. 그것은 ‘본차이나’라는 골회자기(骨灰磁器)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골회를 이용하여 만드는 자기로 서양의 영국이라는 나라가 얼마 전부터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제품입니다.”

본차이나(Bone China)는 영국의 웨지우드(WEDGE WOOD)사가 1812년 개발한 제품으로 웨지우드는 이 제품을 만들어 유럽 제일의 도자기회사가 되었다.

이 사실을 설상진 박사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부터 20년 후에 만들어진다는 것은 설명이 곤란하여 지금 영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설상진은 골회자기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

“골회자기는 아교질이나 지방질을 채취하고 난 동물의 뼈를 태워서 가루로 만든 골회와 자토와 풍화 화강암을 섞어서 만듭니다. 그 비율은 기본적으로 45 대 25 대 30입니다. 비율은 토질과 여러 조건으로 배합 비율을 달리해서 만들 수 있고 거기에 연유(軟釉, 잘 용융되는 유약)를 사용하여 만듭니다. 그리고 이 자기는 조선백자와 달리 잘 깨지지 않고, 백자보다 낮은 온도에서도 만들어지는 장점이 있어 여러분들께서 자기를 구울 때 항상 어려움을 느끼는 불 온도를 기존보다 1할 이상 낮춰도 생산이 가능합니다.”

“아니, 그렇게 낮은 온도에서 만들면 유약이 제대로 녹지 않을 텐데요.”

“예, 그래서 이 자기가 백자보다 만들기가 쉬워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생산 때 발생하는 불량률을 현격히 낮출 수 있어서 생산성이 높고 잘 깨지지 않아 보관과 이동이 편한 점이 있습니다.”

최석봉은 설상진의 설명을 들으며 양이의 나라에서 만들었다는 골회자기가 자신들이 만든 백자와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설상진이 말이 계속 이어졌다.

“이 제품은 서양의 왕실과 양반들에게 상당히 높은 가격으로 팔리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이 만들어 서양에 판다면 많은 재화를 획득하여 조선의 세수를 증대시킬 수 있습니다.

최 도기장님과 여러 도공을 모신 이유는 이 골회자기를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습니까? 최 도기장님. 저는 도기장님과 여러 도공 분들의 기술이라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서양의 골회자기 수준 이상의 품질로 충분히 개발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 제품을 여러분들이 만들어 주신다면 우리들이 양이들에게 팔아 외화를 획득할 계획이고 여기에 더해 우리 요업단에서는 그 수입의 일정 부분을 여러분들에게도 나누어드릴 생각입니다.”

도기장 최석봉은 설상진의 말을 듣자 설상진 박사의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

말끝마다 자신에게 ‘님’ 자를 붙여 부르며 자신을 인정하는 것도 고마웠지만 개발이 완료되어 생산 수출한다면 일정한 수입을 더 준다는 건 말이라도 고마웠다.

자신도 도기를 만드는 도공이기 때문에 설 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도전해 보고 싶었고, 앞으로 얼마의 수입이 더 생길지는 모르지만 자신들을 인정해 준다는 설 박사 박사의 말에 돈보다 더 고맙고 감사함을 느꼈다.

최석봉이 도공을 대표하여 말했다.

“저희 도공들은 지금까지 관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을 하기만 해왔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박사님과 일행 분들을 뵙고 지금까지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하고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한 가득한데 이 자기를 만들어 팔아 수익이 나면 저희들에게도 분배를 해주신다니 말씀만 들어도 이 어찌 고맙지 않겠습니까.

해 보겠습니다. 반드시 이 양이들이 만든 자기(瓷器)보다 더 우수한 자기를 만들어 박사님과 여러분의 은혜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최석봉의 말에 모든 도공들은 고개를 숙이며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들의 말을 들은 설상진이 감사의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제품 개발에 전념하실 수 있도록 필요한 어떤 지원도 해 드리겠습니다. 실패를 걱정 마시고 충분히 시간을 두고 도전해 봅시다.

골회자기는, 여러분들께서 개발에 성공하면 대량생산에 필요한 기초를 정립하고 완성시켜, 앞으로 대량생산이 시작되면 여러분들은 부하 직원들에게 지금 적 벽돌이나 판형도기처럼 제작 기술을 전수해 주셔서 각 공정별로 분업이 되기 해주십시오.

이렇게 분업화된 공정이 만들어지면 각 공정의 관리자가 돼서 감독관으로 공정을 감독해 주시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일일이 직접 만드시는 것보다 후진을 양성해야 대량생산이 가능합니다.

앞으로 일정 시간이 지나 각 공정별로 기계화가 이루어지면 일하기가 훨씬 쉬워질 겁니다.

골회자기가 양산되기 시작하면 여러분의 의식주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도록 저희들이 책임지겠습니다. 저희들을 믿고 따라와 주십시오.”

설상진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는 최석봉과 도공들을 보고 다시 말했다.

“공장이 완성되어 본격 가동이 되면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만들어오신 백자를 앞으로 여기서도 계속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설 박사의 말에 도공들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설 박사가 웃으며 말을 했다.

“사실 저희들이 할 수만 있었으며 골회자기 같은 생활자기는 저희들이 만들었을 겁니다. 저희들이 기술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여러분을 모셔온 것입니다.

공장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시면 여러분들이 자신들 작품을 만드시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도공이자 예술가들입니다.

앞으로는 여러분들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 계획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생활 자기가 아닌 작품으로의 백자를 만들어서 우리의 문화의 우월성과 아름다움을 온 사방에 알리는 선봉이 되어 주십시오.”

도공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번쯤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후세에 남길 만한 백자를 만들고 싶은 것은 물레를 돌리는 도공들 누구나 갖고 있는 소망이자 꿈 아닌가.

설 박사의 그 말을 들을 도공들은 잊어버린 꿈을 되찾은 사람처럼 설렘과 기대감이 얼굴에 배어 나왔다.

설상진 박사는 그런 도공들을 바라보다 다시 말을 했다.

“그리고 내륙에 있는 가족들을 모셔 오시고 싶은 분들은 말씀하십시오. 저희들이 주상전하께 말씀드려 전부 모셔 오겠습니다.”

설 박사의 말을 들은 도공들은 그 말에 눈물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여기 와서 보니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사람대접 받고 살 만한 곳인데 조정의 명이 없어 아직 식구들을 데려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직접 조정에 품신하여 가족들을 데려오겠다고 하니 설상진 박사의 배려가 너무 고마웠다.

도공들은 밖에 있는 도공들과 상의해서 말을 하겠다고 하고, 도공 대표 중 한 사람이 서둘러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남아 있는 도공들에게 가족들의 문제를 물은 결과 도공 50명 중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가족을 데려오기를 원했다.

설상진 박사는 이들에게 잠시의 시간을 주면 가족들 전부를 모셔 오겠다고 하고 먼저 골회자기 개발에 주력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상진 박사가 도공들 가족에 대해 장준하에게 말을 하자 장준하는 그 일을 바로 정조에게 부탁을 했고 정조의 특별 배려로 도공의 가족들이 압해도로 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1790년 12월 31일 가온 위국공 집무실.

송훈 대위의 저격조 100명이 귀대를 했다.

특수효과 팀은 아직 상황이 불확실하므로 좌도도에 잠시 더 머물기로 했다.

송훈 대위가 귀대 신고를 이형구 상장에게 하였다.

“충성. 대위 송훈 외 100명은 좌도도 작전을 마치고 귀대하였음을 신고합니다.”

“충성. 그래, 수고들 많았다. 이번 좌도도 작전에 고생 많이 했다. 저격대대 명성에 맞게 깔끔하게 잘 끝내고 왔다. 정말 수고했다.”

이형구 상장은 송훈 대위를 치하하며 한 달여의 작전에 인명 피해 없이 귀대하였음을 거듭 칭찬하였다.

송훈 대위의 저격대대는 군단본부에 귀대를 하고 10일간의 휴가를 보내고 다시 북한산성으로 파견될 예정이다.

이형구 상장은 송훈 대위와 동행하여 위국공의 집무실로 향하였다.

이형구 상장이 최성용 중령에게 위국공에게 송훈 대위의 귀대 보고를 하러 왔다고 하자 최성용이 위국공께서 지금 기다리고 계신다고 바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곧바로 장준하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형구 상장이 위국공 장준하에게 송훈 대위를 인사시켰다.

“위국공 합하. ‘유령작전’을 마치고 좌도도에서 귀대한 송훈 대위입니다.”

“오! 송 대위,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장준하는 송훈 대위의 귀대 보고를 받고 환대하며 자리에 앉게 하였다.

이형구와 송 대위가 자리에 앉자 장준하가 말했다.

“한 달 동안 고생 많았지? 그래, 이번에 일본을 직접 접해보니 어떤가?”

“아직 좌도도에만 있어서 확실한 상황 파악은 되지 않습니다만 지금 일본의 전력이 별 우려하실 상황은 안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육지로 들어갈 경우 조직적인 저항이 아닌 산발적인 저항을 하는 경우에는 병력 문제로 상당한 문제점이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좌도도에서도 다이사도산지(大佐渡山地)와, 고사도구릉(小佐渡丘陵) 쪽으로 도망친 무사들이 10여 명 있었습니다.

남쪽의 고사도구릉(小佐渡丘陵) 쪽으로 도망친 무사들은 바로 잡혔지만 다이사도산지(大佐渡山地) 쪽으로 도망친 무사들은 최근에야 소탕을 하였습니다.

만일 본토 공략 시에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며, 공략을 하시더라도 구주(九州) 방면을 먼저 공격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본주(本州) 쪽은 저항이 상당하리라 예상이 되며 이에 따른 아군 측 인명 피해도 상당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음, 참고하겠네. 지금 막부에서 좌도도 쪽 공세는 어찌 되는가?”

“좌도도를 바로 보고 있는 나가오카 번(長岡藩)에서 수차 함대를 보냈으나 지금은 잠잠합니다.

현재의 번주(藩主)인 마키노 다다키요(牧野忠精)가 계속 막부의 압박을 받고 있어 곧 다시 도발이 우려됩니다만 지금까지는 ‘유령작전’이 잘 먹혀서인지 제가 귀대하기 직전에는 도발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유령작전을 타 작전 지역에도 적절히 활용하였으면 합니다.

인력 손실도 없고 지금 우리의 장비만 활용해도 별다른 준비가 필요 없으면서도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의의로 큰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좌도도에 남아 있는 1만여 주민들은 저희들을 전 다이묘가 보낸 군대로 알고 저희들의 지시에 복종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다이묘나 무사들에게 철저히 복종만을 강요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유령작전의 효과도 상당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장준하가 송훈 대위를 보고 물었다.

“섬을 탈출한 주민들은 어떻게 되었나?”

“점령 당시 저희들이 놓아준 좌도도 주민들이 1만 명을 상회할 정도입니다.

그들은 지금 막부 직할 항구인 니가타 항으로 대부분 피신을 했기 때문에 나가타 항과 나가오카 번(長岡藩)에 분산 수용되어 있을 것을 판단됩니다만 조만간 이들을 어디론가 보낼 것을 예상됩니다.

나가오카 번(長岡藩)에서는 1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갑작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다른 번에서도 이들을 데려다가 한겨울인 지금부터 내년 봄까지 그냥 먹을 것만 주기에는 식량 문제가 있는 데다 이들은 섬을 도망쳐 나온 죄인이기에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자 장준하가 최성용을 보고 말했다.

“최 중령, 그때 우리가 좌도도 작전을 할 때 이들 탈주한 주민들의 결과를 예상한 것이 있지 않나?”

장준하의 지시를 받은 최성용이 말을 했다.

“예. 이들을 1만 명 이상 대량으로 탈출을 시킨 이유는 소수를 탈출시킬 경우 막부 정책상 전원 효수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백성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하는 막부나 번이라도 1만 명을 한꺼번에 죽인다는 것은 그들로도 부담이 되는 숫자이기 때문에 이들을 지금 일본에서 성행하는 광산의 노동자로 보내지 않을까 예상했습니다.”

최성용이 말을 잠시 멈추고 장준하와 이형구 상장을 바라보자 이형구 상장이 최성용에게 다음 말을 재촉하는 시늉을 했고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이들 좌도도 주민들이 일본 각지의 광산으로 분산된다면 이곳의 일이 좌도도 주민들의 입을 통해 짧은 시간에 일본 전역에 퍼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소문은 침소봉대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소문이 어떤 식으로 확산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시대는 귀신이나 유령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라서 앞으로 좌도도로 오는 병력은 일단은 반쯤 전의를 상실하고 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희들 판단이었습니다.

소문이 확산된다면 좌도도 출전은 일본 병사들에게 귀신을 상대로 죽으러 가는 것으로 되어 그들 사기에 막대한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손쉽게 좌도도가 유령의 섬으로 인식되어 우리 측 병사들의 인명 피해 없이 그대로 우리 손에 들어오기 쉬워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좌도도를 마주보 고 있는 막부직할령인 니가타 항을 감싸고 있는 번인 나가오카 번의 번주(藩主) 마키노 다다키요는 마키노가문의 9대 번주로 고쿠다카(石高)가 12만 석이었다.

에도막부 시절 일본의 1석의 개념은 성인 남자가 1년간 먹을 곡식의 양을 말했다.

나가오카 번주 마키노 다다키요는 마침 참근교대(?勤交代)를 마치고 나가오카 영지로 돌아와 있었다.

지난 12월 초 대탈주를 한 좌도도 주민들이 자신의 영지 안에 있는 막부직할 항인 니가타 항에 쏟아져 들어왔을 때부터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니가타 항은 좌도도의 막부직할령에서 채굴되는 금과 은 등의 수송을 위한 항구인데 이번에 금과 은이 아니고 1만이 넘는 좌도도 주민들이 섬을 탈주해 도망을 나온 온 것이다. 이는 이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키노 다다키요는 주민들을 통해 좌도도 상황을 전해 듣고 이를 즉시 막부에 보고를 했고 도망 온 주민들의 처리를 의뢰했다.

좌도도는 자신의 영지가 아니기에 단순히 보고만 했다.

가뜩이나 세가 약한 나가오카 번으로서는 1만에 달하는 좌도도 주민들이 엄청난 부담이었고 한 달이 다 되는 지금 그들을 먹이는 양식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농사철도 아닌 지금 이들을 마냥 놀고먹게 할 수도 없었다.

마키노 다다키요의 보고를 받은 에도막부는 가온의 예상대로 자신이 살고 있던 곳을 허락도 없이 도망친 이들 좌도도 주민들을 일본 본주의 각 광산에 노예나 다름없는 죄수로 보냈다.

가온에서 예상하지 못한 것은 같이 도망쳐 나온 무사와 아시가루(足輕) 500여 명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참수하여 니가타 항에 효시한 것이다.

이들 좌도도 주민들은 본주(本州) 각지에 있는 광산으로 분산되어 평생을 노예같이 살았으며 가온의 예상대로 이들의 입에서 나온 좌도도 상황은 얼마 가지 않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일본의 모든 다이묘들이 알게 되었다.

그간 몇 번 막부의 함대가 좌도도로 들어오려고 했으나 특수효과 팀의 유령작전과 몰살 정책으로 단 한 척의 배도 돌아가지 못하고 바다에 빠진 일부 병사들만 살려서 돌아가게 했고, 얼마 전에는 막부의 지시로 나가오카 번에서 번의 숙노를 시켜 대대적으로 함대를 보냈으나 몰살을 당하고 겨우 조그만 배 한 척이 돌아왔을 뿐이다.

나가오카 번은 이 일로 영지의 무사와 아시가루 등 5,000여 명의 병력이 몰살되어 번의 병력 대부분을 잃는 막대한 타격을 받았고 당장 번의 치안 문제도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했다,

마키노 다다키요는 지금 번에서 불과 한 달 만에 일어난 상황을 수습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모아놓은 비축미도 좌도도 주민들이 오면서 상당량 소모가 되었고, 번의 대부분의 병력이 수장이 되자 당장 번 재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났다

다행히 인근 번에서 도움을 주어 위기 상황을 넘겼지만 그에게 좌도도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존재가 되었다.

에도막부에서는 몇 번이나 이러한 일이 있고 나자 그 이후 좌도도 이야기만 나와도 모두 눈치를 보고 피하는 형국이 되면서 좌도도는 점점 에도막부의 시선에서 멀어져 갔다.

막부의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나리도 즉위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가 간세이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것을 꼭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실정과 연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잠시 문제를 덮어두기로 했다.

아직 도쿠가와 이에나리 자신도 나이가 17세밖에 되지 않아 확실하게 일본 정국을 장악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송훈 대위의 말을 듣고 작전의 효용성이 대단한 것을 알게 되자 이형구 상장과 잠깐의 논의를 거쳐 그 자리에서 최성용에게 ‘유령작전’을 하나의 전술로 자리 잡게 하는 연구를 해보라고 지시를 했다.

최성용이 말을 마치자 장준하는 송훈 대위를 보고 다시 말을 했다.

“이번에 다시 또 북한산성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니 자네에게 미안하네. 이번 휴가 기간 동안만이라도 푹 쉬기 바라네.”

“감사합니다. 군인은 명령에 죽고 사는 몸입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송훈 대위는 장준하의 따듯한 말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장준하는 이형구 상장과 송훈 대위가 나가자 최성용에게 지금 제주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네 명의 조선 관리들(박지원, 박제가, 서이수, 유득공)의 근황과 제주 일주 도로의 진척 상황을 물었다.

최성용은 말했다

“그들이 이번에는 처음 접하는 중화학 공업은 저희들의 교육 수준을 따라오는 데 상당히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개념이라도 충분한 이해를 시켜주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이들에게 화학이나 중공업은 전혀 생소한 것이라 조금 시간을 두고 교육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솜이 물 빨아들이듯이 무섭게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속도라면 1월 10일에서 15일 정도에는 교육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도 고르고 고른 인재라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대단하네.”

장준하가 조선의 관리들을 칭찬하자 최성용이 다시 말을 했다.

“그리고 제주 일주 도로는 왕명으로 만드는 도로라고 하며 모든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현장이 거의 평탄 지형이라 땅을 고르고는 바로 다짐 작업을 하는 정도의 빠른 속도로 진행 중 입니다.

거기다 12월부터는 주민들이 적극 참여하면서부터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거의 전역에 비포장이지만 일주 도로가 연결되었습니다.

예전과 같이 4차선으로는 비포장으로 개통을 하고 1차로만 포장을 하고 난 다음에 수요 여건을 봐서 포장을 하기로 하고 일단 도로 개통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2차 선정도 넓이의 폭은 거의 작업을 마쳤다는 보고가 들어와 있습니다. 도로공사에 보상을 주지 않고 하는 작업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공사 진척이 빠릅니다.”

장준하는 그동안 수고한 공병단에게 연말이기도 하니 특식을 제공하라고 지시를 하고 조선의 관리에게는 곧 부임할 임지의 중요성과 별무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하라고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장준하는 정조와 교신을 위해 창덕궁(昌德宮)으로 연락을 했다. 잠시 후 상선 김시묵이 정조를 바꾸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오! 위국공, 잘 계시었소? 과인은 잘 있소이다.”

장준하는 정조에게 조선의 관리에 관한 일을 말해주었다.

“지금 이곳에 온 조선의 관리들이 처음에는 자신들과 너무나 다른 문화적인 관습 때문에 상당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만. 역시 그들은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조선의 지식인들인지라 초기의 우려와는 달리 엄청난 속도로 지식을 습득하고 있습니다. 이번 1월 15일경에는 교육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소? 다행이오. 그들이 그처럼 빨리 신문물을 습득해 나가다니 참으로 다행이오.”

정조는 그들의 학습 성과에 만족감을 표시하였다.

“예. 그러고 지도군에서도 지금 한창 여러 작업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속도라면 내년 3월부터는 1차로 소금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를 받았습니다.

처음의 수확은 적겠지만 가을부터는 본격적으로 생산이 되면 내년부터는 조선의 백성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내년까지 염전의 증설을 마치면 후년부터는 청과 일본에 수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되면 전하께서 추진하시는 개혁 정책의 재원 마련과 전하께서 계획하고 계신 화성 축성의 자금 마련에도 저희들이 일정 부분 기여할 것 같습니다.”

“오, 그렇소? 역시 위국공이오. 조정에서는 지금 과인이 화성에 성곽을 축조하겠다는 것을 몇몇 신료들이 은근히 막고 있었는데 잘되었소. 재원이 확충되면 수원성 축조에 신료들의 반대를 잠재울 수 있겠소. 잘되었소.”

정조는 기분이 좋은지 말의 끝마디에 대소를 터트렸다.

장준하가 정조에게 인사를 했다.

“전하, 금년이 지나가옵니다. 전하께서도 강녕하시고 왕실에도 무궁한 번영을 축원드리옵니다.”

장준하의 말에 정조가 화답하였다.

“그래, 고맙소. 경과 경의 부대도 금년 한해 과인과 조선을 위해 애썼소이다. 내년에도 모두 건강하시오.”

정조의 덕담을 들으며 교신을 마친 장준하는 조선에서 보낸 금년을 생각하면서 신년 첫날인 내일 가온에 남아 있는 지휘부 전원과 해맞이를 하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