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01)

조선에 초석을 놓다

1790년 12월 14일 좌도도 오키 항 20㎞ 해상 안중근 함.

오늘도 잠함 안중근 함은 좌도도와 일본 본토의 중간 해역에서 경계 중이다.

“저놈들 또 오네.”

12월 6일 주민 대 탈주가 이루어진 이래 일본 본토에서는 계속하여 배를 보내왔다. 해안 경비를 맡은 안중근 함이 계속하여 배가 오는 족족 침몰 수장시켰다.

그러자 처음에는 본토와 가까운 오키 항으로만 배를 보내다 배가 돌아오지 않자 본토에서 먼 방향인 료츠 항으로도 계속해서 배를 보내 탐문을 시켰다.

료츠 항(兩津港) 방면을 경계하고 있던 윤영하 함도 이들이 보이는 족족 수장을 시켰고 포로는 본부의 지시대로 아예 남기지 않았고 배가 침몰하여 바다에 떠 있던 일본군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전원 사살했다.

한동안 배를 보내지 않다가 이번에는 오키 항 쪽으로 아타카부네(安宅船)가 세키부네 등 2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몰려오고 있었다.

“이놈들 아타카부네가 이번에 같이 오는 것을 보면 이번에는 대가리가 오는 모양이네. 그렇다면 이번에는 쇼를 보여줘야겠다. 성기춘 대위, 특수효과 팀 준비시켜라. 그리고 광무황제 함에 연락하여 해리어기를 띄우라고 해라. 하늘과 바다의 용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마.”

좌도도와 일본 본토 사이는 대마도와 부산과의 거리와 같이 50㎞ 떨어져 있다.

부산에서 날씨만 맑으면 대마도가 육안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일본 본토와 좌도도는 동일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어서 크기가 큰 좌도도가 훨씬 잘 보였다.

일본 본토에서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섬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섬 주민들이 도망을 쳐 나왔고 무슨 일인지 확인을 하려고 10일 가까이 탐색선을 계속 보냈으나 배만 보내면 돌아오지 않으니 이번에는 아예 선단을 구성해서 몰려온 것이다.

안중군 함 함장 이만수 중령은 이제 다시 한번 쇼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이들에게 하늘과 바다의 쇼를 보여준다면 앞으로 이 섬이 계속하여 그들에게 유령의 섬으로 알려져서 사람들의 출입이 끊길 것이기 때문이다.

다이묘가 탄다는 아타카부네가 선단을 이끈다면 분명 다이묘나 그에 준하는 관리가 타고 있을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일본의 선단이 안중근 함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이놈들, 이번에는 물귀신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마.”

이만수 중령은 이번에는 물귀신 작전을 벌이기로 했다. 배들이 안중근 함이 기다리는 곳으로 다가오자 이만수 중령은 수중 폭파 팀을 올려 보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일본선단 중에서 적당한 크기의 배를 골라 폭파 팀이 배 밑바닥에 고리를 달고 잠수함에 연결했다. 작업을 20여 분 만에 끝낸 수중 폭파 팀을 이만수 중령이 잠수함으로 귀환시켰다.

수중 폭파 팀이 작업을 끝낼 무렵 특수효과 팀의 특수 영상 쇼가 시작됐다.

다이묘가 공중에 떠올라 그들에게 전과 같은 엄청나게 큰 형상으로 우르릉거리는 엄청난 소리로 말했다.

“이놈들, 또 왔느냐! 절대 다시 오지 말라 했거늘 왜 또 왔느냐.”

특수 영상의 엄청난 위용과 목소리를 들은 선단의 배에 타고 있던 병사들과 관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이때 좌도도를 탈출한 사람들 중 이들의 강요로 안내를 맡은 좌도도 출신 병사들은 엄청나게 놀라며 바다로 뛰어내리거나, 그대로 머리를 뱃바닥에 대고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아타카부네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 본토 출신 사람들은 하늘에 떠 있는 무서운 형상을 보고 등골이 오싹해지고 섬뜩하기는 했지만, 좌도도 출신들이 무슨 이유 때문에 저렇게 심하게 벌벌 떠는지 영문을 모르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으악! 배가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갑자기 옆에서 치는 소리에 그곳을 돌아본 순간 따라온 한 척의 배가 바다 속으로 쑥 하고 빨려 들어갔다.

그 상황을 쳐다보던 아타카부네에 타고 있던 병사들은 경악하였다.

좌도도에서 도망쳐 나온 주민들이 섬이 유령의 섬이 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설마 하였는데 잘 가던 배가 갑자기 바다 속으로 영문도 없이 빠져 들어간 것이다.

병사들이 웅성거리고 겁을 내기 시작하는 순간 이번에서는 하늘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쐐~액!

“으악! 악룡이다!”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있던 좌도도 주민들은 그 소리에 일제히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린 좌도도 출신 병사들과 주민들은 죽어라 하고 섬의 반대 방향인 본주(本州) 쪽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헤엄쳐 갔다.

해리어기에서는 지난번과 같이 네이팜탄을 아타카부네를 향해 투하했다.

꽈~광!

아타카부네에 타고 있던 선원들이 떨어지는 게 무언가 하고 고개를 조금 더 높이 하늘로 드는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언가가 펑 하며 사방이 불바다가 되었다.

해리어기는 세 발의 네이팜탄을 투하했으며 폭탄을 맞은 배들은 엄청난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며 타올랐다.

네이팜탄의 폭발로 주변 바다는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계속하여 특수 영상의 다이묘는 저주의 말을 퍼붓고 악룡은 하늘에서 굉음을 내고 돌아다니고 있고 사방은 불바다로 변했고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러다 쑥 하고 배가 한 척씩 바다에 빨려 들어갔다.

불타는 배, 불타지 않는 배, 가리지 않고 바다 속 수룡이 배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된 바다에서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뱃머리를 돌릴 수 있는 배는 모조리 돌려 본토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가겠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아타카부네를 비롯한 몇 척의 배는 이미 불이 옮겨 붙어 불타오르며 침몰하고 있었고 본토로 돌아가려는 배는 계속하여 수룡이 바다 속으로 끌어당겨 수장을 시켰다.

수중 폭파 팀은 바다 속을 돌아다니며 바다에 떠 있거나 눈에 보이는 자들은 전부 수중 작살 총으로 모조리 사살했다.

20척의 배 중에서 안중근 함이 일부러 놔준 작은 배 한 척과 미리 바다로 탈출하여 도망친 좌도도 원주민 10여 명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수장이 됐다.

순식간에 이들을 삼킨 바다는 이들이 바다 위에 남긴 부유물만이 떠 있었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일어난, 참으로 순식간의 일이다.

그리고도 본토에서는 수차례 탐색선을 보냈으나 돌아온 배가 전무하고 흐린 날만 되면 본주에서도 들릴 정도의 귀신의 호곡이 들려오자 좌도도는 점점 유령의 섬으로 인식되었다.

어부들도 섬 주변만 가면 돌아오지 앉은 사람들이 늘어나자 근처 어부들조차도 아예 섬 주위로 가려 하지 않았다.

후일 에도막부에서 대규모로 원정군을 보냈으나 모조리 수장되고 몰살되어 버려 좌도도는 정말 유령의 섬으로 인식이 되어 막부에서조차 포기하고 만다.

간세이개혁(寬政改革)으로 그나마 재정적으로 안정을 찾아가던 에도막부는 좌도도의 금과 은이 들어오지 않기 시작하자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재정이 흔들리자 막부 통치도 덩달아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고 막부 지배에 충성하던 번들도 슬금슬금 다른 생각들을 품게 되는 단초가 됐다.

좌도도의 파고가 일본 정국에 서서히 너울을 일으키며 다가가고 있었다.

1790년 12월 15일 9시 가온 화순 부두 광장.

그동안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호주로 원정을 떠나는 제2원정단이 출발을 한다.

부두 광장에는 7여단 병력 2,500명과 그들이 가져가는 장비가 도열해 있었다.

항구에는 이들을 수송하고 작전을 지원할 함대로 김영훈 소장의 기동함대가 맡기로 했다.

수송함정은 마라도 함을 기함으로 이지스구축함 효종과 호위함으로 경남과 전북이 전차상륙함 고준봉급 LST함 2척과 천지함급 군수지원함 백록 함, 214급 잠수함 손원일 함 등 총 8척으로 이루어진 함대였다.

이 함대 중 이지스구축함인 효종 함은 연료 보급이 6년인 핵추진 엔진이 탑재되어 보급에 문제가 없어 원정 단을 수송하고 나서 뉴칼레도니아 등 남태평양의 섬에서 서양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6개월의 서양 세력 청소 작전을 별도로 수행하기로 했다.

이 청소 작전을 위해 마라도 함에 윤영하급 함정 2척을 별도로 동행시켰다.

호주원정단이 7여단 병력 2,500명과 장갑차 10대, 수송트럭 20대, 채굴장비 20대와 헬기 5대(2대는 효종 함 탑재)를 지원 장비로 하고 이수성 중위의 탐사 팀 30명도 도열해 있었다. 특히 이번 원정에 농업단이 동행하기로 했다.

특히 본토와의 거리가 8,000㎞ 이상 되어 기후가 정반대고 농사를 하기에 적당한 땅이 많아 농협창고에 보관된 벼 1,000가마니와 시간여행 때 넘어온 곡물 씨앗, 트랙터 20대, 콤바인 1대, 경운기 5대 등의 농기계와 비료 등과 10명의 인원이 대규모 영농을 위해 추가됐다.

마라도 함은 원정단을 하선시키고 바로 돌아와서 장갑차 20대와 트랙터 30대를 추가로 수송하기로 했다.

원정단은 호주 점령 후 바로 대규모로 벼농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김영훈 소장이 단상에 있는 위국공 장준하에게 출국 신고를 마치자 광장에 도열한 장병들과 일부 장비들이 일제히 함정에 실리기 시작했다.

30여 분이 흐른 후 모든 장비와 인원을 실은 제2원정 단이 출항했다.

빠~앙!

마라도 함의 기적을 신호로 모든 함대가 서서히 화순 항을 빠져나갔다.

도선함의 인도로 제일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는 마라도 함의 선미에는 김영훈 제독이 서 있었다.

광장에 서 있는 장준하가 그를 바라보자 김영훈 제독이 거수경례를 했다.

답례를 한 위국공 장준하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김 제독, 잘 다녀오너라.”

장준하는 사관학교 한참 후배인 김영훈 제독이 떠나는 것을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김영훈 제독과 7여단 장병 등은 지금 출발하면 수년이 걸려야 돌아올 긴 항해를 떠나는 것이다.

화순 항을 출발한 호주원정단은 김영훈 기동함대 사령관의 호출로 마라도함의 아일랜드에 몇 명의 지휘관들이 모였다.

김영훈 제독과 마라도 함장 손영석 대령, 효종 함장 김기철 대령과 7여단장 이은성 소령이다. 김영훈 제독은 앞으로의 여정과 운항에 대하여 다시금 주의를 당부하였고 7여단장 이은성 소령에게는 여단병력의 건강을 신경 쓰게 했다.

아무래도 장거리 운항이라 육군병력의 건강이 신경 쓰였다.

잠시 일정을 논의하면서 간단한 회의와 담화를 나누던 지휘관들이 돌아갔다.

제주도의 외양으로 나온 함대는 김영훈 제독의 지시로 전 함대가 곧 속도를 내어 순항하기 시작했다.

이전과 달리 GPS가 없이 해도만을 의지해서 하는 항해라 항로를 일일이 확인을 하면서 가는 1개월의 긴 여정이지만, 목표의식을 갖고 출전하는 이번 원정은 시작부터 참여한 모든 장병들이 희망이 가득했다.

1790년 12월 20일 9시 가온 화순 항 부두광장.

드디어 지도군으로 파견되는 인원이 출발하기 위해 부두 광장에 집결해 있었다.

호주원정팀에 일부 민간인이 파견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가온 주민들이 500여 명이나 파견되는 작전으로 민간인의 피해가 염려가 되는 작전이다.

제주에서야 가온의 권역이었기 때문에 두발과 수염에 제한을 두지 않았지만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수염을 기르는 사람들이 제법 되었다.

지도군에서는 조선 주민들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하기 때문에 제주도와 달리 외모가 너무 다르면 곤란한 경우가 생길 수 있어 수염과 머리를 기르기로 했다.

수염은 몇 개월을 길러 제법 풍성해졌지만 머리는 하루아침에 자라는 것이 아니라서 곤란했지만 모자를 쓰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덮을 수 있었다.

가온군도 머리를 기르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수염만큼은 기르기로 했고, 짧은 머리를 감추기 위해 항상 모자를 쓰고 다니기로 결정해서 그나마 지금 시대의 조선인들과의 외양 차를 줄였다.

이번 주민들은 농업부에서 300명, 공업부에서 200명이 투입되었다.

농업단은 대정농협 조합장 출신의 이성규가 농협단장이 되어 인솔하며 농협출신 기사들이 파견되어 각 섬의 작물 현황을 파악하고 앞으로 유리가 생산이 되면 대규모 유리 온실을 만들어 시간여행 때 넘어온 작물과 종자를 이용하여 대량 배양에 나설 계획이다.

가장 중요한 천일염전 조성을 위해 농업단 인력이 투입되고 이를 위한 장비로 트랙터에 페이로더를 장착한 농기계와 공병단의 굴삭기, 로드롤러, 불도저, 덤프트럭 등의 중장비를 동원하여 지금 농한기인 점을 이용하여 염전조성을 시작해서 3월에 1차 수확을 목표로 추진하기로 했다.

가온 본부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병력으로 1여단 1대대 병력을 파견했다.

천일염전은 도기가 생산되면 판형도기를 생산해 깔거나, 화학 공장이 가동되면 비닐 장판을 깔기로 하고, 일단 토판 염으로 생산하기로 하였다.

토판염은 장판을 깔거나 도기를 깔았을 때 비해 생산량이 5분의 1이고 상당한 인력이 소요되는 생산법으로 천일염전의 바닥을 롤러나 인력 등으로 단단하고 평평하게 다져 소금을 생산하는 방법이다.

염전은 증도 주변과 비금도 안좌도 내해 주변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요업공업 팀은 가온연구단지 출신의 요업공업을 전공한 설상진 박사가 지도군의 요업공업단장이 되어 동행했다.

목포진에서 1㎞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압해도에는 대단위 도요지를 조성하기로 했다. 압해도 자체에도 양질의 고령토가 매장되어 있고, 목포진과도 가까워 도자기 원료의 운송 및 완성품의 국내 운송에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도자기는 제작 방법을 조선의 전통적인 가마방식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터널식 가마를 적용하기로 했다. 터널식 가마는 바닥에 레일을 깔고 그 레일 위에 도자기를 실은 대차(臺車)가 순차적으로 이동을 하는 방식으로, 예열대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고온부로 이동하는 방식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부터 대량생산을 위해 사용된 방식으로 여러 종류의 가마에 비해 열손실이 가장 적고 가마 바닥 면적이 작게 필요하고 노무비가 적게 들어가는 등의 장점이 있어 대량생산에 적합한 가마이다.

1790년에서 보면 조성 기술이 100년 정도 앞선 방식의 당시로는 첨단 가마로 외국과의 교역을 위해 대량생산으로 제품의 가격을 대폭 낮출 계획이다.

이 가마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내화 벽돌로 내벽을 쌓아야 하는데 내화 벽돌은 용광로 등 중화학공업에 꼭 필요한 재료로 중화학공업의 축도(縮圖)라고도 불린다.

앞으로 제철소를 만들어야 하는 가온으로서는 터널식 가마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내화 벽돌의 생산기술도 습득하기로 했다.

이 가마로 아직 조선에서 사용하지 않는 적 벽돌도 대량 생산하기로 했다.

적 벽돌을 이용해서 지금의 조선의 가옥 구조에 변화를 주어 사용하기 편리하게 바꾸고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 적 벽돌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계획이다.

적 벽돌이 사용되면 그동안 흙벽 위주인 조선의 건축 양식에 상당히 많은 변화가 올 것이다.

가온에서는 먼저 생산된 벽돌은 바지선을 이용하여 제주도로 옮겨 1차로 수용시설 건설에 사용하기로 하고 터널식 가마에 불을 때는 원료로는 장작이 아닌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중유를 사용하기로 하였으며 도공들은 전남 무안의 도요지와 경기도 광주의 관요에서 충원하기로 하고 정조에게 말씀을 드렸다.

상업용 도자기와는 별도로 작품용자기의 생산을 위한 가마도 건설하기로 했다.

유리는 자은도에 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생산은 보편적인 유리인 소다석회유리를 생산하기로 하고 생산가마 방식은 평로형 가마로 하기로 결정했다.

후일 대량생산을 위한 경험치 축적과 당장 필요한 수요 충당을 위해서 먼저 소형 가마를 설치한 후 수요를 보아서 증설을 하기로 했다.

2척의 고운봉급 LST선에 장비를 싣고 가온군은 1여단 2대대장 김회정 대위가 병력을 인솔하여 출발하였다.

지원함으로는 충무공이순신 함과 윤영하급 연안함 2척이 호위를 하기로 했다.

향후 지도군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은 비싼 조선의 소금 값을 낮추어 백성들이 싸게 사먹을 수 있게 하고, 염장법의 발달로 조선의 식생활에 일대 혁신을 몰고 올 것이고, 대량 생산된 소금은 일본과 중국에도 수출할 계획이다.

위국공 장준하는 이들을 보내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기대를 품었다.

민간인과 군인들의 첫 사업이기도 하고, 조선에 들어가 시행하는 첫 사업이라서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출항을 지켜보았다.

이 시간 지도군에서는 유동혁 군수와 전라우수사에서 파견 나온 100명의 병사들이 주민 소개령(疏開令)에 의한 주민 재편작업에 하고 있었다.

넓은 지역에 15,000명밖에 살지 않는 지도군은 당분간 어업이 금지되고 육지와 왕래가 끊기기에 작은 섬의 주민들의 생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된다.

게다가 가온의 개척단이 들어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하게 된다.

이런 때를 대비하여 지금 100여 개의 섬에 분산되어 살고 있는 주민들을 20여 개의 섬으로 소개(疏開)하는 중이었다.

그중에 인력이 가장 필요한 지도와 사옥도, 증도 주변의 염전과 비금, 도초, 하의, 상태, 장산, 안좌, 팔금, 암태, 자은도를 아우르는 거대한 내해 방면의 염전에 주민들을 집중 배치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어명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며 곧 임금이 보낸 사람들이 와서 일을 시켜 먹여 살릴 것이라고 계속하여 홍보를 하게 하였다.

주민 소개 재편 작업 중 반발한 소수의 양반들과 지시를 따르지 않는 일부 주민들을 강제로 내륙으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그중 가장 큰일 중 하나가 흑산도였다.

지도군의 큰 섬의 하나인 흑산도는 그 거리가 내륙과 멀어 흑산도는 가온부대의 군항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유동혁 지도군수가 일부러 흑산도까지 찾아와서 주민들을 모아놓고 설명을 하였다.

이곳에 조선의 수군이 주둔한다고 하자 섬 주민들 중 상당수의 인원이 수군에 징발될 것을 우려하여 내륙으로 이주했다.

흑산도 항에 정박하여 지도군을 지원할 함정으로는 충무공 이순신 함(4500톤급)과 연안 경비정 윤영하 함 2척을 고준봉급 LST함이 장비를 하선하고 흑산도 항에서 대기하기로 하고 이들 함정은 조선의 연안을 순시하면서 해안 경비도 담당하기로 했다.

유동혁 군수가 군내 모든 주민들의 이동을 마친 때는 12월 15일경이다.

유동혁 군수는 이현호 전라우수사에게 상황을 보고하였고 그 보고가 가온 본부에 전달이 되어 오늘 그동안 준비된 개척단이 출발을 하게 되었다.

1차로 흑산도를 목표로 하여 180㎞의 거리를 운항하기로 하고 출발하였다.

지금 흑산도에는 유동혁 군수가 개척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1790년 12월 20일 13시 흑산도(黑山島) 흑산 항(黑山港).

몇 시간 항해하여 개척단을 실은 함정이 흑산 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유동혁 지도군수와 지도군 병사 10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고, 흑산도 주민 대부분이 나와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아이고. 저게 뭐냐. 저기 저 있는 것이 배란 말이냐. 무슨 배가 산만 하다냐.”

120~30명이 승선하는 200톤 규모의 조선의 판옥선조차도 본 적이 없는 흑산도 주민들은 항구로 들어오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배를 보며 수군거렸다.

흑산도에 있는 고기잡이배들은 거의가 거룻배 수준으로 그 배들만 보다 충무공이순신 함을 보니 말 그대로 산만 한 배였다.

배들이 닻을 내리자 유동혁 지도군 군수가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유 군수도 앞에 있는 충무공이순신 함은 타보지 못했지만 임금을 호종할 당시 마라도 함에 승선한 경험이 있어 그나마 덜 놀랐다.

함대에서는 충무공이순신 함의 함장 김기수 중령과 1여단 2대대장 김회정 대위와 함께 하선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지도군수 유동혁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안녕하십니까? 충무공이순신 함 함장 김기수 중령입니다. 반갑습니다.”

반갑다고 내미는 손을 보고 ‘이들은 인사를 손을 올려서 하기도 하고, 앞으로 내밀면서 하기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자신도 손을 내밀었다.

김기수 중령은 자신도 모르게 내민 손을 보며 머쓱해하는 순간 앞에 있는 유동혁 군수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유동혁 군수는 깜짝 놀라 손을 빼려고 하였다.

조선에서는 상대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상상할 수없는 행동이었다.

“하하하, 저희들 인사법입니다. 불편해 하지 마십시오.”

김기수 중령의 말에 마음은 불편하였지만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옆에 있는 김회정 대위와도 악수로 인사를 나누었다.

유동혁 군수는 뒤에 도열해 있는 주민들 중에서 가장어른에게 가온군을 소개해 주었다.

“이분들은 주상전하의 친위군이요. 김좌수는 이리 와 이분들께 인사하시오.”

유동혁은 흑산도의 향리인 김 좌수(座首)를 가온군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유동혁 군수의 호명을 받은 김 좌수는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복식이 조선과 달라서 이들이 양이가 아닌가 생각을 하면서도 지도군 군수의 부름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안녕하시오. 난 이 흑산도의 좌수 김성일이오이다.”

나이가 40이 넘어 지금의 조선에서는 손자를 볼 나이인 김성일은 지금껏 보지 못한 요상하게 생긴 자들에게 왕의 친위군이라는 군수의 말에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려는 그의 눈앞에 하나의 손이 불쑥 내밀어져 있었다. 김성일 좌수는 금방 군수가 저들과 인사를 할 때 손을 잡은 것을 떠올리며 손을 잡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잠시 당황스러웠다.

그러자 김기수 중령이 그렇게 엉거주춤 서 있는 김 좌수를 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저 앞에 보이는 함정의 함장 김기수입니다. 저희는 주상전하의 친위군대입니다. 인사는 그냥 이렇게 제 손을 잡으시면 됩니다. 이게 저희들 인사법입니다.”

김기수 중령의 말에 몸을 세운 김 좌수는 쭈뼛거리며 앞에 내밀어진 손을 마주 잡았다.

이렇게 인사를 마치자 유동혁 군수가 김기수를 보며 말을 하였다.

“지금 바로 움직이시겠습니까? 아니면 잠시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그러자 김기수 중령이 유동혁 군수를 보며 말했다.

“지금 지도군에 저희들 숙소는 준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 준비를 한다고는 하였는데 짧은 기간이라서 전부를 준비하지는 못하고 반 정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압해도와 자은도 방면의 준비가 부족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지금 이동을 하시죠. 저희들은 여기 남을 것인데 흑산도 상황은 어찌 됩니까?”

“죄송스럽지만 흑산도도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나마 유향소를 임시로 관사로 사용하실 수는 있습니다.”

유 군수의 말을 들은 김기수 중령은 충무공이순신 함은 흑산도 항에 정박하여 부함장으로 하여금 장병들의 숙소 문제 등을 준비시키기로 하고, 자신은 다른 함선에 승선하여 지도군으로 이동하여 각 주둔지의 인원들과 장비들을 하역하는 것을 감독하기로 하고 함선들의 이동을 지시했다.

유동혁 군수와 김기수 중령이 윤영하급 초계함에 동승하고 흑산도 항을 빠져나가자 나머지 함정들이 흑산항을 빠져나갔다.

흑산도 항에 남은 충무공이순신 함의 부함장 강현수 소령은 함정에서 내린 20여 명의 병사들과 김 좌수의 안내를 받으며 유향소로 향했다.

흑산도의 유향소는 흑산항 바로 옆 마을 중간에 있었으며, 그들이 유향소로 향하자 마을 주민들이 우르르 뒤를 따라왔다.

곤란해하는 강현수 소령을 보자 김성일 좌수는 따라오는 주민들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주민들은 아쉽지만 발을 돌려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유향소에 도착한 강현수 소령은 유향소의 크기가 작은 것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현수 소령은 김 좌수에게 잠시 흑산도 상황에 대해서 물었다.

흑산도에 본래 250여 호, 1,0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수군이 주둔한다고 하자 징집을 우려한 주민들이 반수 이상 빠져나가 지금은 120여 호의 500여 명 정도가 남아 있다고 했다.

강현수 소령은 앞에 있는 홍도에 대해서도 물어보았으며 지금의 홍도는 섬에 주민들은 살고 있지 않고, 흑산도 주민들이 풍랑을 피하기 위해 머무는 정도라는 말을 들었다.

강현수 소령은 함정에서 20여 명을 더 하선을 시켜서 김 좌수의 안내로 주민들이 떠난 빈집을 조사하라고 했다.

한 시간여의 조사로 빈집들 파악이 끝나서 그 내용을 파악하니 의외로 깨끗한 집들이 상당수 있었다.

강현수 소령은 우선 병사들 50여 명을 추가로 하선시켜 당분간 빈집을 임시 주둔지로 사용하기 위해서 빈집들을 철저히 방역하고 청소를 하라고 지시했다.

1790년 12월 20년 15시 조선 지도군 일원.

유동혁 지도군수의 인도로 지도군 자은도(慈恩島)에 도착한 개척단 중 농협단원 200명과 요업단 인원 100명이 농협단장 이성규 단장의 인솔과 1여단 2대대의 2개 중대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자은도에 상륙을 하고 있었다.

고운봉급 LST함에서는 트랙터와 로드롤러 등 염전 조성에 필요한 중장비의 반이 하역되고 있었다.

자은도에 상륙한 농협단과 요업단은 장비를 먼저 하선시키고 오늘은 고준봉 함과 따라온 함정에서 1박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였다.

자은도에 인원을 내려놓은 나머지 배들은 농협단원 100명과 일부 장비를 그대로 싣고 증도(曾島)로 이동을 하였다.

증도의 인원은 자은도의 인원들과는 달리 지도군 관아에서 마련한 숙소가 준비되어 있었다.

농협단원은 각자 숙소를 배정받았으며, 배정받은 숙소는 염전 조성이 끝날 때까지 사용할 것이다. 증도에는 2대대 김회정 대대장과 본부중대 병력이 이들을 호위하기 위해 농협단과 같이 하선했다.

한편 다른 한 척의 고운봉급 LST함은 압해도(押海島)의 해안에 남은 장비를 하역하였고, 100명의 요업단원과 그리고 1개 중대병력이 상륙했다.

이곳 압해도에도 요업단원이 묵을 수 있는 숙소가 준비되어 있었다.

요업단원과 같이 내린 압해도 경비 병력 1개 중대는 텐트로 야영을 하기로 했다.

모든 인원과 장비들이 상륙하여 자리를 잡고 나자 시간은 18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여 다행히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다 마칠 수 있었다.

3군데 각 팀들의 보고를 받은 김회정 대위는 김기수 중령에게 전 지역의 상륙 작전 완료를 보고하였다.

해가 막 떨어지고 있는 바다는 고기 잡는 어민들이 없어 텅 빈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김기수 중령이 흑산도에서 업무를 지휘하는 강현수 소령의 보고를 받고 나자 비로소 하루 일이 끝났다. 기대감과 불안감이 상존하는 조선에서의 하루였다.

날이 밝자 지도군의 3군데 현장에서는 공사를 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자은도의 농협 기사를 비롯한 농업실사 팀이 군인들의 고무보트에 셋으로 나눠 타고 지도군의 농업 현황 파악에 나섰다.

안내를 맡은 지도군 병사들은 유동혁 군수의 지시가 있었는지 농협 기사들과 실사 팀을 어려워하면서도 친절하게 지도군 곳곳을 안내했다.

초겨울이라 밭에 작물이 심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농협 기사들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현재 지도군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고, 이 실사는 내년에 파종할 품종을 선택하거나 현대식 농법을 보급하는 데 밑바탕이 될 것이다.

유재원과 유석원 형제는 자은도에 지금 염전을 만들기 위해 자은도 갯벌과 바로 앞에 있는 비금도(飛禽島)를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어려서 유재원과 유석원 형제는 비금도에 살았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무렵 염전을 하시던 부모님들이 염전 통폐합으로 염전을 그만두고 가족은 제주도로 터를 옮겼다.

그 후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시간여행을 하여 시간개념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40여 년 만에 밟는 고향땅이다.

두 형제는 부모님을 따라 제주도로 가서 자리를 잡아 대정읍에서 형 재원은 농사를 짓고 동생 유석원은 횟집을 하고 있다가 시간여행을 하였다.

두 형제가 농업단에 자원하게 된 이유는 가온에서 그나마 염전이라는 것을 직접 접해본 사람들이 그들뿐이기도 하였지만, 어렸을 때 그들의 놀이터가 염전이었고 비금도가 그들의 고향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모님이 염전을 그만두시면서 무척 서운해하는 것을 본 그들이기에 비금도 일대에 염전을 개발한다는 말에 두말없이 자원하고 나섰다.

어려서 떠난 고향을 40여 년이 지나 50이 넘은 나이가 되어 돌아온 두 사람은 이곳 지도군에 온 누구보다도 감회가 남달랐다.

지금 그들과 같이 온 농업단에는 고향이 지금의 지도군인 사람이 두 명이 더 있었으나 염전에서 직접 소금 작업을 해본 사람들은 그들밖에 없었다.

두 형제의 아이들은 제주시로 통학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시간여행 때 아이들을 데려오지 못한 두 사람은 이곳에서 염전이 만들어지면 제주도에 있는 집사람들을 데려와서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

“감회가 남다른가 보네요.”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이성규 단장의 말이었다.

“그러네요. 고향은 같은 고향인데 마음이 그러네요. 지금 앞에 있는 섬이 비금도인데 저희들 살 때하고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유재원의 말에 이성규는 비금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한번 찾아보십시오. 혹시 조상들이 계실지 압니까?”

“그래 봐야겠습니다. 주민들 이주로 육지로 나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그들은 비금도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1790년 12월 21일 8시 지도군 증도(曾島) 공사 현장.

유동혁 군수가 지도군 주민들을 모아놓고 말을 하고 있었다.

모여 있는 증도 주민들 앞에는 가온의 주민들과 기술자들이 서 있었다.

“오늘부터 지도군 일대에 염전 시설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갈 것이오이다. 먼저 주상전하의 어명을 받고 염전 조성 사업을 지도하러 오신 가온농업단을 여러 백성들에게 소개하겠소.

여기 앞에 있는 분들은 우리 지도군의 백성 여러분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먹을 것을 주어 여러 백성들을 살기 좋게 하기 위해 오신 분들이시오.”

지도군수는 모여 있는 지도군 주민들에게 가온의 농업단을 인사를 시켰다.

가온농협단의 이성규 단장은 자신의 앞에 있는 농민들을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조선 백성들의 삶이 참으로 살기가 어려운가 보구나.’

이성규 단장의 앞에 서 있는 지도군 주민들의 복식이 참으로 초라했다.

남자들은 거의가 흰색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여인들은 그나마 치마에만 검은 계통의 물을 들였다.

옷은 전부 흰색이었지만 때가 찌들고 물이 들어 흰색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누런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성규 단장은 우리나라 민족이 흰색을 좋아하여 백의민족이라고 했다지만 생활이 어려워 옷을 물들일 형편이 안 돼 흰 무명옷을 그대로 입어서 백의민족이 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이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하게 됐다.

겨울에 들어가는 지금 솜을 누빈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아이들은 댕기도 땋지 않은 더벅머리에 버선도 신지 못한 맨발에 다 헤진 짚신을 신고 있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이성규 단장은 그들을 보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지금 이것이 조선의 현실일 것이다. 그들이 언제 멋을 내려고 옷에 물을 들일 생각을 하였겠는가. 단지 하루하루의 생활이 이들에게는 더 큰 일이 아니었겠나. 그래, 우리 농업단이 해보자.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조선을 개혁하자. 언제까지 이들을 이렇게 힘들고 고된 생활을 대물림해 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이성규 단장이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옆에 나란히 서 있던 가온에서 온 농업단원들의 생각 또한 이성규 단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도군 주민들은 가온의 농협단을 보면서 대부분 불안해 하는 얼굴이었다.

키도 조선 사람들보다는 머리 하나가 더 크고, 얼굴은 하얗고, 개량 한복이라고는 하지만 옷도 자신들이 입고 있는 것과는 다른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다고 기르기는 했지만 조선 사람과는 확연히 달라 보이는 이들이 말로만 듣던 서양 오랑캐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새로 부임한 군수가 임금님의 친위군이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 조선 사람들의 눈에 비친 가온 사람들의 모습으로는 이들이 의심을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겨울철이 시작되는 지금은 하루하루 먹고살기조차도 힘든 시기이고, 더구나 뱃일도 할 수 없는 이때 시키는 일을 하기만 하면 쌀과 돈푼을 준다는 말에 불안한 마음을 접고 일을 하기로 했다.

‘임금님의 친위군이라는 사람들이 설마 우리들을 죽이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지도군 주민들은 농협단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하기 시작했다.

지도군 전체를 항공 촬영을 하여 주변 지형을 숙지하여서인지 모든 공사들이 빠르게 진행됐다.

미리 준비를 착실히 한 것도 있지만 유동혁 군수가 가온의 지시에 따라 공사 현장별로 주민들을 잘 나누어놓은 것도 인력 활용에 큰 도움이 되었다.

도공들은 무안, 장흥 쪽의 도공 30명을 이현호 전라우수사의 도움으로 구할 수 있었고, 특별히 경기도 광주에서 20명의 도공들이 정조의 배려로 올 수 있었다.

특히 광주 분원요(分院窯)에서 온 도공들은 이현호 수사의 말에 의하면 정조의 특지(特旨)로 도공들을 특별히 선별하여 보냈다고 했다.

도요지에서는 우선 일반 가마를 먼저 만들어, 건물에 필요한 적 벽돌과 염전 바닥에 까는 판형도기를 만들기로 했다.

앞으로 도자기 공장에 조성할 대형 가마인 터널 가마에 필요한 내화 벽돌은 원자재 수급이 되는 대로 개발할 예정이다.

가마의 땔감은 계획한 대로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기름 버너를 이용하여 중유로 불을 때기로 하여 도공들의 일손을 크게 덜어주었다.

흙은 압해도에서 도기 공장을 만드는 주변에 대량으로 매장된 양질의 고령토를 먼저 사용하기로 하고, 차후에 공장이 증설되면 내륙의 고령토 산지에서 차츰 공급받기로 했다.

관군이 주둔한다는 말을 들은 주민들이 수탈과 군역을 피해 조금 더 육지로 빠져나가 지도군에는 약 12,000여 명의 주민들만이 남아 있었다.

가온 주민들은 조금이라도 일을 할 수 있는 주민은 전부 인부로 쓰기로 했다.

하루 일과 중 반드시 세 시간씩 공부를 하는 조건으로 품삯으로 한 달에 쌀 80㎏과 돈 60전씩을 주기로 했고, 기술직인 도공들은 그 두 배의 삯을 주기로 했다.

이 품삯은 당시 조선 시대 인부들의 품삯의 두 배 정도 되는 금액이다.

일은 비록 힘이 들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이 어부 출신인 섬 주민들은 이미 거친 바다에서 거룻배 정도의 작은 배로 힘들게 생활해 왔기 때문에 염전과 도기공장에서의 일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게다가 가온에서 지급하는 많은 품삯에 주민들이 점차 적극적으로 가온의 지시에 따랐다.

조선의 인부들 일당은 정조 사후 장례에 동원된 인부들이 일당 2전과 지금의 쌀 1되를 받았다고 하며 그 일당이 당시에는 상당히 후한 금액이었다고 한다.

하루 식사량으로 5홉(약 800g)의 쌀을 먹었다고 하는 조선 사람들의 식사량은 어마어마했으며 지금 시대 성인이 먹는 양의 거의 다섯 배에 달했다.

조선 시대 평민들은 평상시 밥상에 올라오는 반찬이 거의 없었고, 밥 먹는 것 이외에는 간식도 거의 없어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 밥뿐이었기 때문에 밥을 많이 먹었고, 밥 힘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이유에서도 현대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엄청나게 많은 양의 밥을 먹었다.

구한말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을 보면 밥상에 수북이 솟은 밥에 반찬이라고는 간장, 김치 또는 된장국이 전부인 경우가 많다.

가온에서는 이러한 습관을 바꾸기 위해 여러 식단을 짜서 주민들의 식생활 개선에도 힘썼다.

처음에 자율 배식을 하자 배가 터질 정도로 먹던 섬 주민들도 지속적인 지도와 앞으로도 계속 밥을 잘 먹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서자 차츰 밥 먹는 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한 번에 고쳐질 수 없듯이 시간을 두고 조금씩 바꿔야 한다. 밥 먹는 것 하나부터 바꿔나가는 것이 조선의 개혁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도 모든 사람이 가온의 방침을 전부 따라온 것은 아니었다.

지도군 내에서도 50여 명의 주민들이 가온의 방침에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교묘히 반발을 하면서 방해를 하였다.

반발과 방해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동안 어떠한 명목으로든 지도군 지역에서 일반 백성들보다 많은 기득권을 누리며 살아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온에서는 이들을 구태여 설득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방해를 하면 가온에서 기존의 조선의 관리들처럼 적당히 타협을 해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의도적으로 방해를 했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어느 곳에서나 기생충같이 존재하는 이들을 가온은 전부 잡아들여 제주도로 보내 1년간 육체적 훈련을 포함한 철저한 사상 개조 교육을 시키기로 했다.

만일 그래도 개조가 안 되는 사람이 나오면 그들을 울릉도로 보내 1년간 다시 가혹할 정도로 고되고 철저한 교육을 시키기로 했으며, 그래도 안 되면 개척지 각지의 광산으로 보내 전원 도태시키기로 했다.

교육 기간 동안에 이들은 자신이 먹을 것은 자신들이 직접 경작하도록 시켰다.

가온에서 계획하는 10년의 기간이 조선만을 개혁하기에는 충분하고 긴 시간일지 모르지만 가온에서 계획하고 추진하려는 더 큰일을 위해서는 결코 긴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도군 주민들은 하루 일을 마치면 각자 지정된 장소에 모여 공부를 했다.

2,500여 가구의 주민들 중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으니 4,000명 정도가 되었고, 각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에게는 전부 점심을 제공했다.

이때 조선에는 아직 점심식사의 개념이 거의 없을 때다.

잘사는 집의 경우도 점심은 간단히 먹거나 그냥 넘길 정도로 조선에서는 하루에 두 끼의 식사가 보통이었다.

그래서 들일을 하거나 힘든 일을 하는 일반 백성들에게 새참이라는 풍속이 생겨났으며, 들일을 하지 않을 때 먹는 하루 두 끼 식사에 그렇게 많은 밥을 먹었을 수도 있었다.

가온에서는 섬에 살고 있는 주부들도 전부 나와서 자신의 가족들인 인부들을 위해 밥을 짓거나 허드렛일을 도와주게 했다.

여자들도 나와서 인부들 식사 준비를 해주면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최소한의 양식을 들려주어 지도군에서 밥을 굶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없게 만들었다.

뱃일을 나갔다 남편이 사고를 당해 혼자가 된 과부들에게는 인부들의 식사 재료 준비 및 식당 관리를 전담으로 맡기고 일반 인부들과 같은 임금을 주어 그들의 살림을 보살펴 주면서 미래의 영양사와 조리사 교육을 시켰다.

가온에서는 여자들에게도 전부 규정된 시간을 교육 시켰고 특히 위생교육을 철저히 해서 각 가정에서부터 전염병 예방과 주민 건강에 힘썼다.

어린아이들은 전부 각 섬마다 마련된 학교로 나오도록 해서 공부를 시켰다.

이는 의무사항으로 실시했으며, 어린이들에게는 교재는 물론 교복과 점심식사를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앞으로 조선에 들어가 실시할 의무교육을 지도군과 제주도에서 먼저 실시했다.

주민들에게는 오전 일과 전에 한 시간 동안 군사교육을 시키고 일과 후 두 시간씩 공부를 시켰다. 군사 훈련은 제식훈련과 군사예절 등의 군 기초 훈련이며, 공부는 한글의 읽기와 쓰기, 산수, 국사 등이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아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공부였지만 생전 처음 하는 공부에 모든 주민들이 무척 어려워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일을 못한다고 하자 억지로라도 참여를 해서 공부를 했다.

지도군에서는 가온이 예상하고 있는 내년 3월 봄부터의 천일염 수확을 위해서 천일염전 만드는 일이 계획에 맞추어 진행되고 있었다.

조업이 금지된 지도군은 주민들 대부분이 어민들로 가온에서 일을 시켜 품삯을 주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라도 가온의 지시에 따랐다.

염전 조성 작업을 위해 가온 주민들과 가온의 농업단 기술자들이 지도군 주민들을 지휘하면서 본격적인 조성 작업을 시작했다.

다들 처음 하는 작업이고 기술자라고 해봐야 농업 전문가들인지라 처음으로 만드는 염전 조성 작업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기술자들은 먼저 갯벌의 흙을 다지며 장비가 들어갈 길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지도군 주민들은 식사 준비를 위한 취사장과 필요한 부품을 만들기 위한 목재소 및 인부들이 식사와 공부를 할 장소로 식당을 가설하기 위해 갯벌 위의 땅을 고르기 시작했다.

각자 팀을 구성하여 하는 일이라 감독자가 일을 지시하는 소리와 사람들이 그 지시에 따라 소리치며 움직이는 소리가 중장비의 기계 소리와 어울려 증도 주변뿐만 아니라, 비금도, 자은도, 안좌도의 내해에 울려 퍼졌다.

주민들은 처음 말이나 소도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중장비를 보고는 이들이 사술을 부려 중장비를 움직이는 것으로 알았다.

처음에는 지도군 백성들이 기계들을 보고 무섭고 놀라 중장비 근처에는 아예 가지도 않으려 했으나 며칠이 지나도 장비 소리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자 지도군 백성들도 중장비에 첨차 적응되어 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저 그러려니 할 정도로 장비 소리에 적응을 했지만, 기계를 보고 신기하고 재미있어 하는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어른들은 중장비 교육을 시킬 때까지 누구도 그 옆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지도군 거의 전역에서 이런 굉음이 울려 퍼지자 전체가 공사장이 된 것 같았다.

유리 공장은 설치할 시설이 많아 약간의 시간을 더 필요로 했지만 압해도의 도자기 공장에는 벌써 일반 가마가 완성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제품 정도는 생산이 가능할 정도로 진척이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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