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도도 점령
1790년 12월 5일 16시 좌도도 사도가성.
송훈 대위는 두 곳의 항구를 지키고 있는 9조, 10조를 제외한 모든 저격조의 현지 대기를 지시하고 오키 항의 경계를 5조와 안중근 함에 부탁하고 자신은 사도가성으로 이동을 시작하면서, 특수효과 팀에게 주민들 안정 작업을 지시했다.
주민들의 안정 작업도 특수효과 팀이 시작했다.
특수효과 팀은 몇 개의 영상을 동시에 섬의 공중에 띄웠다.
이번에 다이묘들은 지난번과 다른 위엄이 묻어나는 형상이었다.
섬 전체 10곳의 특수효과 팀이 쏘아올린 영상이 하늘을 수놓자 섬 전체가 그 형상으로 덮인 것 같은 형상이었다.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른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백성들은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할 터이니 안심하라는 말이었고,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혹시 무사와 아시가루가 있다면 지금 즉시 사도가성으로 귀환하라고 말했다.
특수영상의 형상이 계속하여 하늘에 떠 있으면서 가끔씩 이와 비슷한 말을 하며 자신의 말을 따르면 살려준다고 하였다.
산속에 숨어 있던 주민들 대부분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무 일이 없자 숨어 있던 주민들이 차츰차츰 자신들이 사는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늘에 형상이 떠 있어도 지난번과 달리 아무 일도 없자 남아 있던 주민들은 빠르게 안정을 취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형상이 사라졌다.
그 시간, 사도가성에 들어간 송훈 대위는 2조 조장 유원형 중위의 영접을 받고 있었다.
“충성. 어서 오십시오.”
“그래, 유 중위. 수고했다. 성은 정리는 끝냈는가?”
“예, 지금 성안의 정리는 모두 마쳤고 창고를 점검하여 지시하신 금괴 은은 창고에 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래, 다른 보고사항 있나?”
“예, 창고에 금, 은, 동괴가 쌓여 있는데 그 양이 상당하고 쌀도 20㎏ 정도 되는 포대가 엄청나게 쌓여 있습니다. 아마도 군량인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식량이다. 지금 좌도도를 점령하는 주목적도 식량 문제 해결에 있었는데 의외의 소득이었다.
잠시 후 성문 앞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일부 무사들과 병사들이 성문 앞에 모여들고 있다는 것이다.
송훈 대위는 성문을 적당히 열어놓고 병사들이 들어오는 대로 안으로 들여보내 제압하라고 지시했다.
시간은 흘러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성문으로 병사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는 대로 제압하여 감옥에 수감했다.
돌아온 병사는 하급무사 2명과 병사 100명이 전부였다.
이번 작전 동안 많은 수의 무사들이 사살되었기 때문에 무사들이 거의 없었다.
사도금산의 정휘 대위의 연락이 왔다.
1조와 8조가 매복해 있는 광산에는 모든 광부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광산에는 지금 아무도 없다고 하였고, 얼마 전 폭격으로 막부 파견 관리들은 몰살을 당하였고 사도가성에서 파견 나온 무사는 전원 사살했다는 보고였다.
송훈 대위는 평야에 있는 6조를 호출하여 그곳 농가의 상황을 물었다.
6조 조장의 보고에 의하면 이번 탈출에 상당한 사람들이 빠져나가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노인들이 대부분이고 무사나 병사들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일단 섬은 완전하게 장악되었다.
항구의 주민들은 아카도마리 항과 료츠 항의 주민들은 전부 탈출하여 완전히 빈 항구가 되어 지금 9조와 10조가 항구에 내려와 매복 중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송훈 대위는 지금까지의 경과를 가온 본부에 다시금 보고를 했다.
송훈 대위는 특수효과 팀 중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원을 선발했다.
송 대위는 그들에게 지금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병사들에게 우리는 다이묘가 보낸 신군(神軍)이라 말하고 투항을 권유해 투항을 하겠다는 병사들을 구분하여 수용하라고 지시를 했다.
투항을 권유하기 위해 병사들의 면담을 시작하자 그동안의 사건 때문인지 모든 병사가 순순히 투항하겠다고 하였고, 그들의 면담 내용을 그대로 수용을 하여, 송훈 대위에게 보고를 했다.
어느 정도의 저항을 예상하였으나 전원이 투항하는 것을 보고받은 송훈 대위는 1790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230년 후의 영상기술은 공포 그 자체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조에게도 통한 바와 같이 특수영상이나 여러 장비를 사용한 특수효과는 오히려 총보다 더 위력적이라는 것이 이번 좌도도 작전에서도 입증되었다.
송훈 대위는 이 작전의 성과를 정확히 보고하였고 좌도도의 결과를 확인한 가온은 차후 전투에서도 특수효과 작전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1790년 12월 5일 20시 제주도 가온 본부.
송훈 대위의 보고를 받은 위국공(衛國公) 장준하는 이형구 상장에게 좌도도의 식량은 현지 해결이 가능하니 주둔부대의 빠른 파견을 지시했다.
이 형구 상장은 자신의 성격답게 내일 바로 주둔부대를 출발하기로 하고 함정 지원을 부탁했다.
시간여행으로 다른 시간대로 넘어왔지만 이형구 상장의 부대는 지속된 훈련으로 항상 준비돼 있던 부대였다.
위국공 장준하가 송기훈 제독에게 선편(船便)을 확인하자 함정은 마라도 함이 지원 나가기로 했다.
이형구 상장이 잠시 후 1여단 3대대의 파견을 결정하고 보고를 했다.
최초 육상 진출과 3곳의 항구를 경비하기 위하여 KAAV7A1 장갑차 10대와 광물의 수송을 위하여 트럭 10대를 마라도 함에 실어 보내기로 했다.
특히 연안 경비를 위하여 해경의 연안 경비함 1척도 동행하기로 했다.
후일 해안 방어를 위해 가―구(K―9) 자주포도 배치하기로 했다.
1여단 3대대는 대대장 박정기 대위의 지휘 하에 내일 오전 출진하기로 하고 오늘 밤사이 출전 준비를 마치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좌도도는 주민들 안정과 섬 정비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제주의 가온 본부는 계획보다 빠른 출전 준비에 정신없이 돌아갔다.
1790년 12월 6일 좌도도 사도가성.
날이 밝자 송훈 대위는 전날 특수효과 팀의 주민 위무작업을 그대로 다시 시행하라고 지시를 하고 9조와 10조에게는 주둔부대가 오기 전까지 고무보트를 이용한 해상경계를 지시했다.
가온 본부에서 부대 출발을 알려온 것은 9시였다.
500㎞가 넘는 거리와 평균 항속을 감안하여도 오늘밤 늦게 좌도도 부근에 도착하여 해상에서 1박을 하고 내일 일찍 상륙할 것이다.
송훈 대위는 오늘도 특수영상에 의한 주민 위무 작업을 계속하면서 혹시 주변 산에 흩어져 있는 주민들의 귀가를 유도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일 오키 항에 들어오는 마라도 함에 실을 금, 은, 동괴의 이동을 위해 사도가성에서 오키 항까지 도로 정비 작업을 귀순한 병사들을 동원하여 시작했다.
다행히 그동안 수레로 광물의 이송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길은 생각보다 잘 정비되어 있어서 별 무리 없이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오키 항에 쌓여 있는 수많은 살림살이는 남아 있는 주민들에게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했다.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모여든 주민들이 순식간에 산더미 같은 살림살이들을 져서 나르기 시작했다.
피난하는 과정에 그래도 중요한 것들을 가져왔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더 쓸 수 있는 좋은 물건이라서 쌓여 있던 대부분을 주민들이 가져갔다.
이로 인하여 좌도도 주민들이 가온부대를 생각하는 시선이 더욱 부드러워졌고 가온은 항구 정비를 아주 쉽게 마칠 수 있었다.
계속되는 주민 위무 작업의 결과, 섬 주민들이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확실히 믿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섬 주민들은 무사들과 아시가루의 말을 듣고 가온군을 다이묘의 신군으로 믿는 눈치였다.
1조에게 지시하여 사도금산은 주둔군이 올 때까지는 당분간 폐쇄를 지시하였고, 6조에게 평야지대 관사와 창고의 수배를 지시했다.
이를 위하여 주변 지형을 잘 알고 있는 일본 병사 세 명과 통역을 위해서 특수효과 팀원 한 명과 이들을 호위할 저격조 두 명을 딸려 보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평야지대를 수색하던 6조에서 연락이 왔다.
마을에 있는 저장 창고에서 많은 양의 쌀과 잡곡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6조가 주변을 탐문한 결과 이 창고는 민간인의 구휼을 위해 저장하는 창고로 5동의 대형 창고가 연이어 있고 그 창고 대부분이 쌀과 잡곡으로 가득 차 있다는 보고였다.
6조는 또 구니나가평야(國仲平野)에서 수만 명은 충분히 자급자족할 정도로 쌀이 생산된다는 탐문 결과도 보고했다.
서울의 1.5배 넓이의 좌도도는 중앙에 넓은 구니나가평야가 있고, 섬 안에는 호수가, 다이사도산지(大佐渡山地)에서 흐르는 강이 있고 날씨가 좋고 강수량이 풍부해서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면적이 전면적의 40퍼센트에 달했다.
송훈 대위는 무엇보다 쌀 창고 발견에 기분이 좋았다.
상륙할 부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마치자 좌도도 점령의 하루가 지났다.
1790년 12월 7일 좌도도 오키 항.
대대병력과 장비가 하역되는 오키 항은 아침부터 왁자지껄하였다.
오키 항의 접안이 불가능한 마라도 함이 외항에 주둔하여 장비와 병사들을 바지선을 이용하여 상륙시키고 있었다.
먼저 상륙한 수송트럭은 이미 사도가성의 창고에서 금 등의 광물을 싣고서 부지런히 사도가성과 항구를 오가며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 양은 처음 생각한 것보다 많아서 열 대의 트럭이 세 번이나 왕복을 해서야 일이 끝이 났다.
마라도 함에 옮겨 실은 양은 금이 4톤, 은이 50톤, 구리가 50톤에 이르는 상당한 양이었다.
현대의 가격으로 보더라도 수천억에 달하는 금액이다.
장비와 부대가 들어오고 사도가성의 금 등이 마라도 함에 선적을 끝내자 마라도 함은 제주도로 귀항했다.
1여단 3대대장 박정기 대위는 송훈 대위의 환대를 받으며 좌도도에 상륙하였으며, 앞으로 일본 전초기지가 될 좌도도는 가온이 일본에 대한 작전을 벌이는 데 많은 이점을 제공할 것이다.
박정기 대위는 각 항구에 2대씩의 수륙양용장갑차와 1개소대 병력을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부대는 섬 장악에 나서기 시작했다.
가온 본부에서도 마라도 함이 화순 항에서 광물을 내리자 바로 가―구(K―9) 자주포를 해안 방어 진지 구축을 위해 파견시켰다.
1790년 12월 7일 14시 가온 본부 위국공 집무실.
좌도도에 주둔부대의 상륙이 완료되어 섬 장악에 나섰고, 마라도 함에 금 등의 선적을 완료하고 귀항한다는 보고를 받은 장준하는 인명 피해 없이 5일 만에 섬을 점령한 송훈 대위와 작전에 참여한 전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생각보다 많은 금과 은으로 가온은 살림에 여유를 가지게 됐다.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 조선의 상황으로 아무리 정조가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또 다른 빈곤을 초래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번 계획을 실행했다.
장준하는 연해주 등 해외로 가기 위해 개조를 마친 컨테이너선을 이용하여 중국의 쌀을 수입하기로 했다. 중국의 사정도 조선과 다르지 않으나 연해주와 호주에서 식량이 생산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청국은 해금령(海禁令)으로 모든 해안을 봉쇄하였기 때문에 조선을 빙자하여 이곳저곳에서 무리하게 쌀을 수입할 경우 조선에 외교적 부담을 줄 우려가 있어, 개항된 광저우에서 쌀을 수입하기로 하고 제주상단에 곡물 수입 대행을 의뢰했다.
다행히 광동어를 할 수 있는 양일현이라는 행수가 있어서 광저우에서의 쌀 수입을 의뢰했고, 광저우로 가는 해상에서 마라도 함의 쌀 매입에 필요한 은을 받기로 하고 1개 소대 병력을 호위로 컨테이너선에 동승시켜 바로 출항하라고 장준하가 지시를 했다.
광저웅에서의 거래는 목선으로 해야 하므로 제주항에 있던 판옥선 3척도 동행하기로 했다.
동중국해를 지나가는 먼 거리이므로 만일을 대비하여 구축함이 호위를 하기로 했다.
장준하는 최성용에게 지도군상황과 제주주민 교육상황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최성용이 들어와 보고를 시작했다.
“제주도는 지난 12월 1일을 기해 교육 준비에 들어가 지금 세 곳의 교육장소로 제주목과 정의현은 관아를 선정하여 이용하기로 하였고, 서귀포에는 임시로 군용막사를 이용하다가 목재와 벽돌이 들어오면 훈련소를 신축하기로 하고 12월 5일부터 교육에 들어갔습니다.
제주목사가 도내 유력양반들을 불러 상황을 설명을 하였으나 백성들과 섞여서 교육을 받는 문제에 반발이 심하여 절충을 했다고 합니다.
양반들 중 원하는 사람들은 따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되 거기에 필요한 물품은 자신들이 충당하기로 하였습니다.
만일 불이행 시에는 기군망상의 죄로 다스린다고 하고 3여단 병력들이 약간의 무력시위도 있었다고 합니다.
전 주민 80,000여 명 중 노약자나 환자를 제외한 75,000명이 일제히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교육은 교육장 문제로 한꺼번에 교육을 할 수 없어서 10세미만~18세까지 약 20,000명은 오전교육으로, 19세부터 40세까지 35,000명은 오후교육으로, 40세 이상 20,000명은 야간교육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교육 내용은 양반들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으며, 초기 3개월은 말하기, 쓰기를 비롯한 기초산수 등 초급 수준으로 교육할 계획입니다.
교육 내용은 위생교육, 한글, 산수, 국사, 군사 훈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문제는 문맹도 문맹이지만 위생개념이 전혀 없어 건강 상태가 엉망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3대 해충박멸(빈대, 벼룩, 이) 운동부터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작 단계이지만 왕명임을 알고 있는 양반들부터 참여를 하니, 일반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동참되어 주민의 참여도가 높습니다.
군사 훈련은 40세 미만만 시행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군사 훈련을 받는 40세 미만의 양반들이 초기에는 반발을 하였으나, 40세 이상은 실시하지 않는 것과, 왕명, 그리고 일반 백성에 지기 싫다는 마음으로 초기 반발이 많이 무마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가지 발생되는 문제점은 3개월간 기초 교육을 시행해 보고 개선하려 합니다.
그리고 지도군의 경우는 지금 주민 소개 정책이 거의 끝이 나고 있어 앞으로 20일 이내면 완료가 될 것이라는 보고입니다.
상당수 주민들이 고향을 등지는 것을 꺼려하던 차에 조정에서 일감을 주거나 일자리를 만들어 품삯을 준다고 하니 일부 주민만 빼고 거의 대부분의 주민들이 남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남아 있는 주민들은 약 3,000여 가구 15,000명 정도로 추산이 되며 섬 특성상 양반들도 별로 없고 있어도 위세가 미미하여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며칠 있다 지도군수로부터 연락이 오면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장준하는 최성용의 보고를 듣고 말했다.
지금 교육받는 제주도의 양반들에게 앞으로 군대를 갔다 오지 않으면 누구도 조정에 출사할 수 없으며, 군대는 복무 3년과, 5년간 예비군으로 1년에 1달간 전 후반기로 나눠 보름씩 2번만 받으면 모든 군역이 끝난다고 말하라고 했다.
그리고 군 미필자의 불이익과 여성들의 군 문제 등 실무 문제를 보완 연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시급한 원자재 수급 방안의 일환으로 정조와 협의한 대로 함경도에 중공업단지를 만들기로 하고 조성될 단지는 중공업단지에 제철소, 석탄화학, 석유화학 시멘트공장, 조선소 등 국가 기간산업을 건설하고 조성할 지역으로 지금의 청진 지역인 부령(富寧)으로 결정했다.
청진은 북한 시절 대단위 중공업단지가 있던 지역으로, 부근에 대량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무산철광(노천광)과 니켈이 나는 부윤광산이 있고 주변 탄광 지대의 무연탄과 갈탄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게다가 사할린에서 들여올 원유 등으로 공업단지 조성에 유리하고 지리적으로도 높은 산악 지형이라서 방어가 편리하고 지형을 이용해서 조금만 방비를 한다면 상당기간 외부에 노출 걱정을 덜 수 있다.
지금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조선의 여건으로 공단 조성은 준비부터 준공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제철소는 울릉도의 일본인을 활용하고, 조선소는 해군의 선박수리소의 직원을 활용한다곤 하였지만 기술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공업단지 조성은 교육과 건설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므로 상당한 시간을 두고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단지 조성에 필요한 재원 조달 등 여러 국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정조와 협의한 대로 조선 내의 업무를 보기 위해 별무사(別貿社)를 만들고, 타국과의 교역을 위해 가온무역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1790년 12월 8일 제주도 가온.
1주일간 가온 전 주민의 접수를 받은 ‘새 역사 기획단’에 참여할 결과가 나왔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발의와 토의를 거쳐 전 주민들을 총 10개 부문으로 나누어 모집을 했지만, 앞으로 2세대 가온을 이끌어갈 보물인 고3 학생들은 새로 설립하는 가온대학 등의 진학을 위해 미래 기획단에서 제외되었다.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지식은 어느 것 하나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많은 시간을 두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축적된 당시대 지식의 집합체로 가온에 있는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모든 학생들은 앞으로 가온을 넘어서 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 재목들이다.
가온의 주민들은 이 학생들에게 지금의 교육방식이 아닌 1인 1기의 전문화된 지식을 제공하고 전공이 몰리지만 않는다면 학생들 자신이 원하는 학문을 우선 전공시키기로 했다.
주민들 중 의외의 의견도 있었다.
그 의견은 학생들 중 학업에 관심이 없거나 소위 일진이라고 하여 어깨에 힘을 주던 학생들 중 아예 그 길로 나가고자 하는 생각이 있는 학생이 있으면 그것도 육성하자는 거였다.
최성용 중령은 그 제안의 의도가 궁금하고, 일면 타당성도 있어 보여 장준하에게 보고를 하였고 위국공은 지휘관회의 때 그 제안자를 모시기로 했다.
제안자가 회의에 참석을 하고 보니 제안을 한 사람은 의외로 현직 고등학교 체육교사였다.
체육교사의 말은 이랬다.
처음부터 폭력조직은 아니었지만 중국의 삼합회도 지금 막 결성되는 시대고 에도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일본의 야쿠자도 지금 어느 정도 세가 형성되는 시기라는 것이다.
가온이 앞으로 밖으로 나가면 꼭 명분 있는 일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겉으로만 어느 지역을 점령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듯이, 밝은 곳이 있으면 반드시 어두운 곳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지금 학생들 중 대부분의 학생들은 새로운 시대에 쉽게 적응이 될 것이지만, 그래도 일부 학생들은 적응되지 못하고 남게 된다는 설명이다.
적응하지 못하고 남게 되는 학생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공부보다는 무리를 지어서 놀거나 힘을 쓰는 것이 더 익숙한 생활을 해온 학생들이다.
시간여행을 왔다고 지금 무조건 새롭게 공부를 가르친다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도 따르고, 이 학생들에게 무리하게 공부를 시킨다면 잘못하면 평생 낙오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낙오된 학생은 당연히 가온의 강요된 정책을 비판할 것이고, 그렇다고 그 학생을 무조건 징치할 수는 없으니 사회문제가 될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차라리 이들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어 다시 공부를 하겠다는 학생들은 공부를 시키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선별하여 최소한 10년 정도의 시간을 갖고 철저하게 교육하자는 것이다.
국가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갖고, 가온의 주민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반드시 보호해야 한다는 철저한 국가관을 심어주는 세뇌(洗腦)에 가까운 정신교육을 하고, 육체적으로는 지옥 같은 훈련을 시켜 최강의 격투능력을 배양해 이들로 하여금 최소한 동양의 밤의 세계, 나아가 전 세계의 밤의 세계를 장악하게 하는 것이다.
구한말 일본과 같이 더러운 방법으로의 장악이 아닌 조직적이고 은밀하고 남이 봐도 감히 말을 할 수 없는 방법을 병행하여 이들을 육성하자는 것이다.
비록 하는 일은 어두운 곳에서 하는 더러운 일이 대부분이지만 앞으로 가온이 세상에 나가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시간여행 전과 같이 삼합회와 야쿠자가 지하에서 계속 커진다면 앞으로 가온의 행보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미리 할 말을 준비해온 듯 상당히 구체적인 부분까지 세세히 설명하는 체육교사의 말에 지휘관들은 그가 상당 기간 이 문제에 대하여 연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제안은 그 자리에서 채택되었다.
우선은 단 한 명도 낙오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도 있었지만 이전 시대의 조직폭력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통제는 앞으로 설립될 국정원에서 하기로 했고 체육교사도 관리 문제는 찬성을 했다.
체육교사는 자신이 맡은 학생선도 주임교사라는 직책 때문에 가온에 있는 모든 학교 학생들 중 이 조건에 맞는 학생들의 성향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안건을 건의한 체육교사는 이 일을 기화로 가온 본부와 상의하여 자신이 이 조직을 맡기로 하고 학교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그동안 파악한 자료를 바탕으로 1차로 고3 학생들과 직전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비밀을 전체로 개별면담에 들어갔다.
앞으로는 가온의 철저한 1인 1기의 교육으로 낙오자가 덜하겠지만 고3 학생들과 직전 졸업생들의 수는 50명에 달했으며 그 대상자 중 80퍼센트가 참여하기로 했다.
체육교사는 참여자들의 부모님들과 일일이 면담을 하여 가온 본부의 취지에 대해 설명을 했지만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처음에는 반대를 했다.
그동안은 속을 썩였을지는 몰라도 시간여행을 해온 지금은 조금만 노력하면 뭘 해도 1등이 될 수 있는데 자신의 아이들을 험하고 어려운 길을 걷게 하고 싶은 부모는 거의 없었다.
그 어느 부모가 정부의 시책이라고 하지만 자식이 폭력단체에 가입하기를 원하겠는가.
하지만 아이들 본인들은 달랐다.
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으며 이전 같으면 부모들이 안 된다는 말에 반항하고 마음대로 한다고 소리소리 질렀겠지만 이번에는 아주 달라졌다.
이들은 부모님들이 놀랄 정도로 진지했고 말로써 부모를 설득하려고 하였다.
사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체육교사가 ‘부모도 설득하지 못하면 조직원이 될 자격이 없다’는 말 때문이었다. 속이 뒤집히는 것을 참고 참으며 끝없이 설득을 했다.
졸업식이 있는 2월까지 2개월 동안 수십, 수백 번을 사정도 하고 설득도 하여 이들은 끝내 모든 부모님들의 동의를 얻었다.
자신들 스스로도 놀랐지만 설득을 당한 부모들도 그들의 이전과는 다른 지독할 정도의 끈질김에 더 놀랐다.
‘하나회’의 결성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울릉도로 가서 국정원 교육을 받기 시작해 10년간 말로는 설명 못할 정도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그 후로 해마다 가온을 포함한 제주에서 교육받은 조선 백성들 중 선별하여 매년 5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자천타천으로 들어와 훈련에 합류했다.
10년의 시간이 지난 후 이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들을 가르친 교관들도 그들의 능력을 인정할 정도가 되었다.
사표를 낸 체육교사는 그 후 사람들이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독신이었고 시간여행 당시 가족을 전부 두고 온 체육교사는 그 후 그 자신의 이름도 전부 버렸고 단지 하나회 회장으로만 존재했다.
위국공 장준하와 최성용 등 가온의 지휘부 10여 명 정도만이 그를 알고 있었으며 가온에서도 의식적으로 그 교사를 숨겨주었다.
그 교사는 10년 동안 다른 회원들과 똑같은 훈련을 받았고 이후 하나회의 회장으로 조직을 장악하여 가온이 손을 뻗은 모든 지역의 밤을 지배하게 된다.
개척 초기 어수선한 시기에 하나회가 장악한 지역의 치안은 오히려 훨씬 좋았다.
하나회가 장악한 지역에서는 잡범들이 아예 생겨나지 않았다.
개척 초기에 이들 하나회는 가온 주민을 철저히 보호해 주었고 그들 스스로가 일반 시민들과는 철저히 격리된 삶을 살았으며, 초기의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현지 주민들로 이루어진 경찰보다 가온 주민들에게 오히려 더 믿음을 주었다.
어디서나 필요악은 존재하는 것이고 이들이 없으면 반드시 각 지역마다 자생적으로 밤의 독버섯이 자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가온에서는 이들에게 불법적인 사업보다는 누군가는 해야 될 양성화된 수익 사업 모델을 만들어 주었고 그것이 유흥업과 도박업이다.
가온 본부에서도 하나회에게 조직 관리에 필요한 일정한 정도의 탈세는 눈감아 주었으며, 하나회도 가온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 정도를 넘지 않는 탈세로 가온과 하나회는 악어와 악어새가 됐다.
정예소수의 하나회는 한 명의 회원 밑에 수십, 수백 명의 조직원을 거느렸으며, 후일 이들의 힘이 너무 커지자 국정원이 의도적으로 한, 중, 일, 호주, 북미 등 5개 지역으로 강제 분리해 내보낸다.
하지만 하나회 회장만은 대대로 이들 분리된 조직의 정신적인 대부로 존경을 받는다.
이들을 제외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전부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10개 부분의 인력을 다시 각 부분으로 나누어 군인을 제외한 35,000명 가온 주민 중 학생, 노약자와 참여를 포기한 소수의 가정주부 등 10,000명의 인원을 제외한 25,000명이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표시하였고, 중공업부문 및 국가 기반산업 육성에 10,000명을 배치하는 것을 중심으로 15,000명을 자신들의 의사를 적극 반영하여 골고루 배정을 하였다.
각 부분에 배정된 가온 주민들도 외부에 파견될 인원을 제외하고 전원이 12개월 이상 전공에 필요한 재교육에 들어갔으며, 외부 파견 인원들도 현지에서 전공교육을 받기로 결정했다.
직접적인 사회 참가를 원하지 않은 가정주부들은 대개가 40대 후반으로 이 주부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일을 다시금 찾아볼 기회를 주기로 하였다.
그동안 배운 지식은 다시 확인하고 처음 배울 지식은 새롭게 익히기 위한 주민들 재교육으로 가온 전역이 배움터가 되었다.
주민들 교육을 위해 중문단지의 호텔 등 시설들이 적극 활용되었다.
교육을 받는 주민들은 대부분의 식사를 교육장에서 해결하였고 가온에서도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이것을 권장했다.
지금 주민들이 한 시간을 아끼면 앞으로 조선의 발걸음이 한 발 더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국공 등 가온 지휘부는 이들의 재교육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주민들 재교육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이루어졌다.
첫째, 농수축산업은 농협직원 및 제주도 농민들 중심으로 시간여행을 한 종자의 대량 배양과 농사법 개발, 대단위 영농 및 축산사업, 대정읍주변과 모슬포 항 주변의 어민들을 중심으로 어업과 어묵, 통조림 공장 등 농산물가공 공장을 건설한다.
둘째, 중공업은 군수단지 근무자들과 농공단지 근무 인원 및 함정정비 조선소 근무 인원을 공업의 전 분야와 대형 농기계 제작, 자동차, 기차 개발 업무에 참여시키기로 하고, 그 인원으로 기존의 인원에 추가하여 약 10,000만 명을 투입한다.
셋째, 경공업은 소비재 공업, 요업, 유리산업, 실생활에 필요한 식품공업을 육성한다.
넷째, 광업은 신개척지의 금은광 개발 자본을 축적하고, 석탄 및 지하자원을 개발한다.
다섯째, 상업은 조선에서는 별무사가 주도하고 외국과의 무역은 가온무역이 한다. 제지산업, 경공업, 군수산업 등을 순차적 개발하여 해외시장을 장악한다.
여섯째, 건설교통은 개척지 중심의 사업을 실시해 도로망, 철도, 댐, 주거개선, 조선 내부는 직접참여가 아닌 간접참여 방식으로 한다.
일곱째, 의료 및 제약업은 의약품 개발, 의료인력, 주민 위생 담당자를 양성하고 조선 본토는 정조에게 건의 하여 위생교육만이라도 실시한다.
여덟째, 교육은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그에 따른 인재를 양성하기로 했다.
앞으로 추가되는 사업은 그때 다시 지원을 받아 충원하여 실시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