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01)

터를 다지다

1790년 11월 16일 20시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

수원에서 하루를 더 쉬고 귀성길에 오른 정조는 3일 만에 도성에 도착했다.

호종한 대소신료와 병사들을 위무하고 침전에 든 정조가 혼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정조가 밖을 향하여 명했다.

“상선(尙膳), 있는가? 상선(尙膳)은 안으로 들라.”

상선이 들어오자 정조는 통신기를 내오게 했다.

그러자 정조가 통신기를 켜라고 했다.

통신기의 신호가 들어왔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정조가 마이크에 입을 대고 말했다.

“안에 누가 있는가?”

그러자 안에서 하성호 대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경호팀 하성호 대위입니다.”

가온에서 한번 해보았지만 정조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통신기에서 들리는 하대위의 말이 아직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내일 전라우수사에 보임된 호종군관 출신인 이현호 신임 전라 우수사가 임지로 출발할 것일세. 내 내일 역마를 내주어 쉬지 않고 가라고 하였으니 친위군은 준비하여 주시게. 그리고 지도군수도 호종군관인 유동혁을 군수로 보임하였으니 나주의 목포진(현재의 목포시)에서 지도군에 부임하기 위해 대기할 것이네. 그리고 장준하 수장에게는 고맙다 전하게.”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을 장준하 본부장께 보고드리겠습니다.”

왕은 하 대위에게 북한산성 주둔에 필요한 것이 있는가, 하고 묻자 하 대위가 식료품의 보급 문제를 말하자 상선에게 일러 조치해 주기로 했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통신기를 내려놓은 정조는 생각했다.

‘참으로 편한 기물이로다. 이 기물만 있으면 봉화와 역참이 필요 없고, 서신을 전하기 위해 인편의 왕래가 필요 없으니 얼마나 편리하겠나.’

통신기를 바라보고 생각에 젖은 정조의 주위에 밤은 하염없이 깊어만 갔다.

1790년 11월 17일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

정조는 독상(獨相)인 채제공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이 입시한 가운데 가온에서 합의한 지도군과 제주도에 관한 내용을 발표를 했다.

의례적인 약간의 반발은 있었으나 왜구의 침략을 대비하여 시행한다는 왕의 말에 별다른 이의 없이 수용되었다.

섬으로만 이루어진 지도군은 왕명으로 지금 군이 되었지만 조선 양반의 특성상 관리들이 유배지와 같은 섬 지역 부임을 꺼려하였고, 나주목에서도 섬 지역 치안 문제 등으로 조정에 대비책을 요구하는 등 항상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을 조정의 신료들은 알고 있었다. 말만 군이지 근무환경이 현보다 못한 지역이다.

제주도는 인조임금 이래 시행한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을 더하여 본토인들의 통행도 금하는 봉금령(封禁令)이었지만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다만 과거시험 기간에는 과거를 보기 위한 양반들과 그 호종하는 무리들의 본토 방문은 허용하기로 하며 양반의 편의를 봐준다고 하자 자신들의 기득권은 유지되었다는 생각에 신하들의 반대는 없었다.

조정의 권신들이 보기에 제주도와 지도군은 멀고 먼 유배지에 불과했다.

좌상인 채제공만이 제주도의 쌀농사의 어려움을 들어 백성들을 걱정하자 정조는 왕실 내탕금을 내어 구휼미를 구해 제주에 보내는 것으로 결말을 보았다.

이 일은 지체 없이 시행하라 이르고 제주도의 식량 등 교역을 위해서 나라에서 지정한 일정수의 제주상단만이 나주의 목포진에 거주하게 하고, 조정의 장계 등 육지와의 소통을 위하여 전라 우수영에서 전라우수사가 지명한 군관만이 제주목(濟州牧)에 파견하고 그들로만 본토와 교통하게 하는 등 철저한 봉금정책(封禁政策)의 시행을 명했다.

그리고 신하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앞으로 제주도로는 조정의 의사에 반하는 자들의 유배지로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고 말하였다.

정조는 앞으로 제주도로 유배되는 자들은 5년 이상 기한을 정해 유배형에 처할 것이고 중간에 절대 사면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여 가슴에서도 멀어지게 하였다.

지금까지도 제주도는 가장 먼 유배지였기 때문에 신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해의 울릉도도 지금까지의 봉금령을 더욱 강화하여 제주도와 같이 봉금령에 포함시켜 주민들의 내왕을 절대 금지시켰다.

정조시대의 울릉도는 조정에서 검찰사((檢察使)를 지속적으로 파견하여 유입인구를 소환하는 공도정책으로 인구의 유입을 막고 있어서 관의 눈을 피해 몰래 섬에 들어간 극소수의 인원만이 살고 있었다.

신하들이 돌아간 후 정조는 한 장의 극비 친필 교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 교지를 신임 전라우수사인 이현호에게 주며 말했다.

“이는 경이 직접 제주도에 가서 전하라. 시급을 다투는 일이므로 역마를 내줄 터이니 임지부임 인사만 마치고 바로 시행하라. 나주 목포진의 제주상단에 가면 친위군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도움을 받으라.”

“명심하겠나이다. 전하.”

이현호 신임 전라우수사는 정조의 지시를 받고 대궐을 나오자마자 전주로 말을 달렸다.

호종하던 군관이 낙오될 정도로 쉬지 않고 달려 3일 만에 전주에 도착하여 전라도 관찰사 정민철에게 부임 인사를 하고 관찰사의 연회 제의에 왕명을 시행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다고 이르고 선걸음에 말을 달려 당일 나주목(羅州牧)에 도착하여 나주목사에게 지도군 신설을 통보하고 섬 주민들에게 해안 봉쇄령(封鎖令)을 알렸다.

신설된 지도군의 섬 주민들이 내륙으로 나오거나 섬에 남을지를 선택하게 하고 육지로 들어오려는 주민들에게는 편의를 도와주면서 연말까지 모든 것을 이행하라는 어명을 나주목사에게 전하고 전라 우수영으로 달렸다.

하루 만에 해남의 전라 우수영에 도착한 이현호는 교지를 전하고 전라우수사 임무 교대식을 했다.

1790년 11월 21일 나주목 목포진 제주상단.

부임에 필요한 모든 인사를 마친 이현호 전라우수사는 제주도를 가기 위해 서울부터 대동해온 용호영 출신 군관 두 명을 대동하고 목포항 제주상단을 찾았다.

제주상단을 찾아 사람을 물으려 하자 상대방이 먼저 알아보고 접근했다.

“이현호 신임전라우수사님이시죠?”

“그렇소이다. 누구신지?”

“저는 수사님이 오시기를 기다린 가온의 친위군입니다.”

가온부대는 이미 정조의 호종군관들의 사진을 찍어 필요 부서에 배부해 있었다.

“아, 그렇소이까? 전하께서 제주도로 왕명을 전하는데 동행하라 명하시어 찾아뵈었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시죠.”

부두에는 친위군의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배에 수사 일행이 탑승을 하자 배는 바로 출발하였다.

잠시 항을 벗어나자 배가 속력을 내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시속 30노트)로 달리는 배에 탄 이현호 신임 전라우수사 일행은 그 빠른 속도에 정신이 없었다.

이현호 전라우수사는 이미 정조를 호종하며 여러 경험을 하였기에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지만 동행한 두 명의 군관은 겁이 나서 배의 난간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두 명의 군관은 배가 말보다 빨리 달리는 게 신기하고 겁이 나기도 했다.

얼마를 달리자 바다 중간에 멀리 섬 같은 물체가 떠 있었다. 차츰 다가가자 그것은 전일 봤던 쇠로 만들어진 배였다.

대기하고 있던 배는 충무공이순신 급 구축함이었다.

처음 그 배를 본 두 명의 군관은 산만 한 크기에 놀랐지만 그게 쇠로 만들어 졌다는 게 더 놀라웠다.

일행이 오르자 함장이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충무공이순신 함 함장 김기수 중령입니다.”

인사를 마치자 전함이 출발을 했다. 이현호 전라우수사 일행은 신기했다.

분명 돛도 없고 노로 젓지도 않는데 움직이는 배는 점점 속도를 높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배가 제주항에 도착했다.

제주항에서 멀리 배를 세우자 제주항에서 배가 나왔으며, 이 수사 일행이 그 배를 타고 제주항에 입항하였다.

제주항에 입항하여 제주목 관아로 이동한 이현호 전라우수사는 기다리고 있던 3여단 1대대장 최훈 대위와 장준하 본부장의 비서관인 최성용 중령을 만났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소이다.”

이미 안면이 있던 최성용 중령과 인사를 주고받던 이현호 전라우수사 두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목사관으로 들어갔다.

이미 목사관 마당에는 구영진 제주목사와 김천석 정의현령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은 무장이 해제되었지만 묶여 있지 않고 모두 서 있었다.

제주목사의 옆에는 장준하를 비롯한 가온의 지휘부 전원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 앞에 도착한 이현호 전라우수사 장준하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전하의 어명으로 신임된 전라우수사 이현호입니다. 주상전하의 어명을 받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 말에 장준하는 답했다.

“어서 오시오. 원로에 노고가 많소. 잘 오시었소.”

구영진 제주목사와 김천석 정의현령은 어리둥절했다. 아니, 조정의 관리가 어떻게 저들을 알고 있단 말인가.

궁금하기는 하였으나 수사의 방문 목적이 궁금하였다. 이윽고 인사를 끝내자 이현호 전라우수사 구영진 제주목사에게 다가갔다.

“제주목사 구영진과 정의현령 김천석은 어명을 받으라.”

이현호 전라우수사의 말에 제주목사 구영진과 정의현령 김천석과 그리고 모든 병졸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주목사 구영진과 정의현령 김천석 그리고 제주의 모든 관원과 백성들에게 과인의 어지를 전하노라.

지금 과인이 명하는 것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시행해야 할 것이며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그 죄를 기군망상의 죄로 다스릴 것이며 그 형벌을 인신의 최고의 형과 삭탈관직의 벌로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외관(外官)들은 지금부터 과인이 하는 말을 제주도의 모든 백성이 알 수 있게 하여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라.”

구영석은 무슨 명이신데 저리 엄히 벌한다 하시는가 하며 정신을 집중하였다.

“지금부터 제주도 일원에 봉금령(封禁令)을 내린다. 제주도 주민은 앞으로 그 누구도 제주를 떠날 수 없으며, 본토의 주민들도 제주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당관청의 허가를 득하여야 한다.

본토의 주재 관청은 전라우수영으로 하고 그 감독자는 전라우수사로 한다.

이때 친위군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일정 인원을 파견하면 전라우수사는 친위군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여야 한다. 현 제주목사와 정의현감은 오늘자로 다시 현직에 재임하며 왕명이 없는 한 절대 제주를 떠나서는 안 된다.

제주의 관원은 목사 이하 관원 전부는 친위군의 수장을 과인의 현신으로 생각하고 친위군의 지시에 따른다. 이들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경우 과인을 능멸하는 것으로 기군망상의 죄로 다스리겠다.

건륭(乾隆) 55년 11월 17일 조선(朝鮮) 국왕(國王).”

국왕의 봉금(封禁) 소식을 어명으로 전해들은 제주목사 구영진과 관원들은 어리둥절해 하였다. 기존의 제주도는 이미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으로 제주주민들의 본토 방문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봉금령까지 떨어져 이젠 본토 백성마저 이주를 금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명은 왕명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리고 친위군이라면 지금 이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현호 전라우수사는 제주목사 구영진에게 지금의 어명이 적힌 교지를 전하고 구영진과 김천석 각각에게 현직을 다시 재수한다는 사령장을 전했다.

단지 그동안 겸직하였던 제주병마수군절도사(濟州兵馬水軍節度使)의 직(職)은 거두고 병사의 관리를 친위군에게 이관한다는 게 이전과 다른 점이었다.

이현호 수사는 제주목사 구영진 등에게 왕명을 전하고 친위군을 돌아보았다.

“장준하와 가온부대는 어명을 받으라.”

장준하 등은 어리둥절하였다.

자신들에게 어명이라니 장준하는 이현호 수사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 수사는 장준하 등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주상전하께서 그대들에게도 별도의 교지를 내리셨습니다. 어명에 따르시지요.”

장준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생각에 자신들에게 손해는 아니라 생각하고 무릎을 꿇었고 장준하의 행동에 일행들은 당황하였지만 전원이 그대로 따랐다.

“친위군의 수장 장준하를 위국공(衛國公)에 봉(奉)한다. 이 직위는 조선의 모든 신료들보다 위에 있으며, 장차 보위를 이을 원자의 위의 위치에 둔다.”

엄청난 대우였다 조선에 언제 살아 있는 공작(公爵)이 있었던가. 가히 파격이었고 그 위치가 원자의 위에 있다니 이는 조선의 처음이었다.

이현호 전라우수사는 계속 교지를 읽어나갔다.

“위국공 이하 가온의 친위군과 관리의 보임은 전부 위국공에 위임하며 모두의 보임이 끝나면 그 지위를 과인에게 보고하라. 제주도의 통치를 위국공에게 일임하는 바이다.

제주목사와 현감 등 제주도의 모든 관료들과 군권, 과인의 직할영지인 지도군과 울릉도도 전부 위국공의 지휘 하에 둔다.

이곳의 모든 관원들과 백성들은 위국공의 말이 과인의 말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위국공은 부디 이곳을 잘 다스려 선정(善政)을 베풀기를 바라노라.

건륭(乾隆) 55년 11월 17일 조선(朝鮮) 국왕(國王) 이 산(李?).”

교지를 받고 자리에 일어난 장준하는 그 자리에서 이현호 전라우수사와 구영진 제주목사 김천석 정의현감 등 조선의 관료들에게서 축하인사를 받았다.

“감축드리옵니다. 위국공 합하(閤下).”

조선의 관료들이 장준하에게 합하의 존칭(尊稱)과 함께 인사를 했다.

장준하와 일행들은 제주목의 정리를 지시한 후 목사관으로 들어온 후 정조의 교지를 내려다보았다.

장준하는 원하지 않았지만 정조의 교지를 내려다보며 감회에 젖었다.

“어찌 되었든 제주도와 지도군 등을 장악할 명분은 충분히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합하.”

연장자인 장철호 박사가 모두를 대표하여 인사를 했다.

장준하는 합하라는 말이 어색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따질 게 아니었다. 장준하의 수긍의 표시가 있자 전부가 장준하에게 축하의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장 박사님 말씀같이 명분은 충분히 섰습니다. 이 점은 주상전하께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우선 전하의 말씀대로 여러분의 직제를 조선에 맞게 품계를 조정하겠습니다. 그것은 곧 조정하기로 하고 지금부터는 제주도 통치를 위해 나서야겠습니다. 내일 오전 제주도의 간부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구 목사와 김 현감도 참여 바랍니다.”

1790년 11월 21일 20시 제주도 군수지원본부 본부장실.

장준하가 한성의 정조에게 교신을 했다.

“전하, 강녕하십니까. 가온의 장준하입니다.”

“오. 위국공.”

하성호 대위가 북한산성에 주둔하여 있으면서 제주도와 통신을 위한 중계 안테나를 설치하여 놓았고 서해상에 배가 떠 있어 중계를 하여주었다.

“전하. 너무 과한 작위(爵位)를 내려주셨사옵니다.”

“아니오. 과인이 경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 하리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시오. 내 경을 위해 무엇을 아까워하겠소.”

장준하의 사의(謝意)와 정조의 축하인사가 몇 마디 오갔다.

“전하. 그럼 내려주신 작위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충심을 다하여 받들겠습니다.”

“고맙소. 나라를 위하여 애쓰는 경에게 내 무엇이 아까우리오.”

“전하.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지금 북한산성에 주둔해 있는 하성호 대위가 전하의 경호 문제 등으로 아무래도 장기간 주둔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용호영을 제주도가 아닌 북한산성에다 훈련소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전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 말에 정조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과인이 이번에 조정의 신하들에게 북한산성을 용호영의 훈련지로 삼는다는 전교를 하였는데 경이 마치 들은 듯이 말을 하는구려. 그렇게 하시오. 내 용호영 신 별장에게 지시하겠소.”

“그러시다면 신처선 별장을 하성호 대위에게 보내주시면 자세한 실무적인 문제를 협의 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온의 지휘관과 간부들의 품계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 문제는 전적으로 경에게 일임하겠소. 경이 알아서 하시오.”

정조의 말에 장준하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고 정조는 흔쾌히 그리하라고 했다.

정조의 말에 장준하는 사의를 표하였고 정조는 얼마 후 하성호 대위를 통하여 장준하가 말한 것을 자신이 직접 쓰고 어보(御寶)를 찍어 친필 교지를 장준하에게 보내왔다.

조선의 역대 국왕 중 세종대왕과 더불어 천재로 불리는 정조는 세종대왕과는 달리 자신의 목숨도 보장 못하는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정조는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조선을 뒤집는 것은 여반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준하에게 누구도 따르지 못할 지위를 주어 자신의 옆자리에 앉힌 것이다.

자신의 즉위 초기 홍국영(洪國榮)에게 조정의 전권을 주었던 경험이 있던 정조였기에 가능한 위국공의 봉작(封爵)이고 승부수였다.

정조는 그간에 익힌 탁월한 정치 감각으로 공을 장준하에게 건넸다.

1790년 11월 22일 제주목 목사관 내 회의실.

조선의 관료 두명이 참석한 지휘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제주도 확대 간부회의를 거행하겠습니다.”

“위국공의 봉작(封爵)을 받으신 장준하 본부장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먼저 위국공의 작위(爵位)를 받아 어깨가 무겁습니다. 이는 주상전하께서 우리 ‘친위군’을 신임하신 것으로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렇게 확대 간부회의를 연 까닭은 제주도의 현재의 식량수급 등 상황과 그동안 파악한 내용, 그리고 우리 가온의 현 상황에 대하여 회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김석태 부지사가 말을 했다.

“제주도 상황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11월 1일 제주도를 접수한 후 지금 20여 일이 지났지만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주민들이 잘 협조해 주어 기본적인 조사는 마칠 수 있었습니다. 최초 7만여 명으로 예상되었던 인구가 실사를 하니 81,200명입니다.

남성 대 여성비가 45 대 55로 여성이 많고 이는 제주도의 특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주 일주도로는 공병단의 장비 투입으로 비포장상태의 도로는 기존의 도로를 이용하여 전부 2차선으로 넓혔으며 주변정리만을 남겨놓고 있어서 아스팔트의 포장은 다음 달부터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주도의 인구 중 양반의 비율은 본토와는 다르게 적어서 약 10,000명입니다. 지금 신경식 국정원과장과 정철학 중령의 지휘로 성분조사에 나서고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제주가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고 개국 초기부터 ‘서북송탐(西北松耽)’이라 하여 100년간 출사를 금지하는 등, 주변 여건이 과거를 보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많아 과거로 관료가 되기가 상당히 어려웠고 이로 인해 주자학을 신봉하여 교화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양반들은 별로 없다는 보고입니다. 양반들도 충분하게 교육하면 어느 정도 교화가 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그리고 식량 사정은 제주목사와 정의현감이 말하겠습니다.”

김석태 부지사가 말을 하고 자리에 앉자 모두의 시선이 제주목사를 쳐다보았다. 조선의 관복을 입은 구영진 목사는 시선을 받자 얼굴을 붉히며 일어났다.

잠깐 목소리를 가다듬은 구목사가 말했다.

“음음, 제주도는 토지의 특성이 논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아주 약간 있기는 하나 거의 미미합니다. 그래서 식량을 본토에서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나주의 목포진에 나가 있는 제주상단도 하는 일의 거의 대부분이 제주도 산물을 가져가 팔아서 쌀과 잡곡을 구매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주관아와 정의현에 약 5,000석의 구휼미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구영진 목사가 말을 하고 자리에 앉자 이어 김석태 지사가 다시 일어나 말하였다.

“가온의 경우는 대정농협과 안덕, 한경면의 농협 창고에 2만 가마니 분량의 벼가 도정되지 않고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벼는 지금 조선의 벼와 달리 수많은 품종개량을 거친 벼로 조선의 벼에 비해 병해에 강한 품종이고 생산량이 50퍼센트 이상 많아서 종자로 사용하길 건의합니다.

지금 두 달 동안 가정에 있던 쌀과 가온의 매장에 있는 쌀이 거의 소진되어가고 있어 지금 농협창고에 보관된 벼를 도정해서 공급하기 직전입니다.

아직은 견딜 수 있지만 빨리 식량을 조달하여 안정을 기해야 합니다.

우선 기초 식량의 수급 문제 해결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제주상단의 행수를 구 목사가 부르셔서 쌀의 차질 없는 수급을 위해 당부의 말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필요할 경우 제주관아와 정의현의 구휼미라도 보급하시고 지사님은 가온의 물품 중 조선에서 수급이 가능한 물품을 선별하여 구영진 목사에게 협조를 구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장준하는 몇 가지 당부의 말을 하고 구 목사와 김 현감을 내보내어 주민들에게 조정의 봉금령(封禁令)을 최대한 빨리 주민들에게 알리라고 지시하였다.

그들이 나가자 장준하는 남아 있는 가온 간부들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정조에게 한 방 먹은 기분이군.”

“그래도 위국공을 봉작한 것은 정조가 큰 결단을 한 것입니다. 만일 조정의 신료들이 알았다면 거품 물고 넘어갈 사람이 꽤 되겠습니다.”

장준하의 말을 받으며 송기훈 사령관이 말했다.

그러자 이형구 상장이 말을 했다.

“그냥 말 안 들으면 깡그리 몰아서 총살시켜야 합니다. 그놈들이 지금 제 놈들 배부른 것만 알지 고생하는 백성들을 알겠습니까? 앞으로 정말 말 안 들으면 눈 딱 감고 실행해야 합니다. 인민들 피 빨아먹는 놈들은 그게 최고입니다.”

장준하는 이형구 상장의 말이 너무 과격하다고 주위를 주었지만 심정적으로는 더 공감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부터 지도군(신안군)과 울릉도에 파견 나갈 사람을 인선 바랍니다. 이는 11월말까지 선별하여 주시기 바라고 그리고 최 중령 저번 주민 전체 회의 때 나온 안건 중에 일본 좌도도(佐渡島)의 점령과 호주 점령에 대한 말이 있던데 설명해 보게.”

장준하의 말에 최성용 중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좌도도는 일본의 니가타 현 앞바다에 있는 섬이고 생긴 모양이 공(工)자 모양으로 생겼으며, 면적이 855㎢로 제주도의 약 반 정도 크기입니다. 현재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직할영지(直轄領地)입니다.

이곳에서 나는 금과 은의 양이 상당해서 막부재정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곳을 은밀히 점령을 하면 에도막부의 제정이 흔들려 문제가 발생됩니다. 이렇게 되어 에도막부(江戶幕府)의 힘이 약해지면 다이묘(大名)들이 힘이 자연히 커져 정국혼란을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고 차후 일본 본토 공략거점으로도 사용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리고 호주는 11척의 배와 736명의 죄수(남성 548명, 여성 188명)를 포함하여 총 1100명 인원으로 지금의 시드니인 포트잭슨(port Jackson)에 유형지를 세웠고 아서 필립 선장은 호주 초대 총독이 되어 있을 시기입니다.

포트 잭슨은 호주 최초의 식민지이고 원주민과 끝없는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은 이민자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아 크게 힘들이지 않고 접수할 수 있습니다.

현재 호주대륙은 100만여 명의 원주민(애버리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영국의 일방적 주장이며 정확한 수는 불명확하고 원주민은 신석기 시대와 같은 마제석기로 수렵이나 채취에 의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후일 영국 이주민들은 이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짐승으로 취급하여 대학살을 하는데 지금도 인간사냥이 자행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1790년은 아직 유럽각국이 호주를 잘 모르고 있어서 이민을 하기 전입니다. 정책을 취하시려면 빨리 하셔야 호주 원주민들의 대학살을 막을 수 있습니다.”

최성용의 말이 끝나자 송기훈 대양함대사령관이 말하였다.

“러시아의 동진과 북미 상황은 어떤가?”

“러시아는 청과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조약을 맺었으나 그동안 계속된 러시아의 동진으로 흑룡강 북부 지역에서 소규모 전투 및 국경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1725~1740년대까지 탐험을 하여 캄차카 반도까지 진출하였으나 연해주와 캄차카 반도는 아직 러시아의 영역이 아닙니다.

연해주는 청국도 흑룡강을 넘지 않아서 무주공산이고 캄차카반도는 1800년대를 넘겨야 러시아 영토로 편입이 됩니다.

북미 대륙은 아직 서부 지역은 거의 미개척지로 조금 시간이 있습니다.”

최성용 비서관과 송기훈 제독의 대화를 끝으로 설명이 끝이 났다.

장시간의 협의 끝에 우선 일본의 좌도도를 점령하여 일본을 흔들고, 호주를 점령하여 서양인을 몰아내고 조선의 영토로 만들기로 했다.

일본의 좌도도 점령은 정훈(政訓)이 참가하여 ‘유령작전’을 시행하기로 했고 호주는 지상군을 파견하여 상륙작전을 거행하기로 하였으며, 좌도도는 점령 후 1개 대대병력이 주둔을 하기로 했다.

살상(殺傷)은 최대한 억제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로 하였다.

제주도의 제주시 주변에는 세 곳의 대단위 수용시설을 짓기로 하였다.

이에 필요한 목재의 충당을 위하여 시베리아의 목재를 벌목하기로 하고 10만 톤급 대형 컨테이너선을 개조하여 크레인을 장착하기로 했다.

이 기회에 이형구 상장의 건의에 따라 1개 여단 병력이 상륙하여 러시아의 동진을 막고 시베리아를 차지하기로 했다.

넓은 시베리아 지역을 전부 차지하기는 점령은 간단하지만 점령 후의 관리 문제로 미리 국경선을 정했다.

그 국경선은 바이칼 호에서 발원하는 안가라 강과 몽골지방에서 발원하여 북극해로 들어가는 예니세이 강(길이 4130㎞ 시베리아 원주민인 에벤키족의 ‘요아네시 강’ 즉 큰 강의 러시아식 발음)을 경계로 하기로 했다.

아직 미개척지인 블라디보스토크(1850년대 발견)를 거점 지역으로 삼기로 하고 그 이름을 블라디보스토크가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인 데 반하여 ‘동쪽의 밝은 항구’라는 내용을 담은 ‘동명 항(東明港)’이라 명명하였다.

연해주로 가면서 1개 중대 병력과 공병부대를 울릉도에 상륙시켜서 도동 항을 개발하고, 무선통신 중계국과 헬리포트를 조성하기로 했다.

그동안 무선통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울릉도의 중계국설치정도라면 제주에서 연해주까지의 통신은 어느 정도 가능했다.

아직 시멘트가 개발되기 전이므로 주변의 암석을 이용하여 조성하기로 하고, 후일 콘크리트 공사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1개 대대 병력을 파견하여 현재 무주공산인 사할린(면적 78,000㎦)에 상륙하여 점령하기로 하고 가파도 유전의 탐사 팀을 파견하여 사할린 유전 지역을 개발하기로 했다.

사할린 지역은 북부 지역의 해상유전 지대는 탐사된 것만 예상 매장량이 2007년 기준으로 140억 배럴과 남부 지역의 가스지대 예상 매장량 1조 5,000억 ㎥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매장량을 자랑한다.

내륙 지역은 2006년 3월 기준 하루 24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 중이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검은 보물섬’으로 불리는 곳이다.

2007년 기준 남한의 일일 원유 수입량 242만 배럴과 비교하면 엄청난 매장량을 자랑하며 원주민은 아이누 족 등이 약간 거주하고 있었다.

가온은 원주민들 그들의 문화를 최대한 보존하여 주며 동화 정책을 펴기로 했다.

시베리아의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기로 하고 5여단 병력을 10만 톤급 민간 컨테이너선 ‘개척호’에 승선하여 수송하기로 했다.

호위를 위하여 구축함인 충무공 이순신 함과 해경의 순시선 2척과 LST함(고준봉급)에 장갑차 등 장비를 실어 보내기로 하였고 개척단에 참여할 부대를 편성했다.

단장은 5여단장 장도현 소령으로 임명하였으며 민간인은 사할린 유전지대 개발팀 30명과 시베리아 벌목장 인부들 감독자를 가온주민 중 지원을 받았다.

힘든 일이지만 의외로 많은 수가 지원하여 개별심사를 거쳐 선정했다.

이들은 벌목도 감독하지만 러시아 포로들을 감독하는 임무도 동시에 부여되었다.

두 번째 원정단인 좌도 섬 점령 작전 ‘유령작전’ 부대를 편성했다.

이 부대는 1790년이라는 시대에 정조에게도 성공한 특수영상과 확성기 그리고 저격부대를 통한 공포심을 유발하여 좌도 섬을 유령의 섬으로 만드는 ‘유령작전’을 위한 부대다.

군수단지 지원본부의 영상과 정훈, 전산병들로 이루어진 특수효과 팀과 공포심을 유발하는 저격조를 중심으로 200여 명의 부대를 구성하여 잠수함 손원일 함과 안중근 함으로 수송하기로 했다.

침투가 완료되면 광무황제 함을 동해에 대기시켜 헬기 및 해리어기 비행으로 공포심 유발하는 등이 ‘유령작전’이다.

호주 원정단은 7여단이 여단장 이은성 소령의 지휘로 파견 가기로 결정되었다.

수송은 김영훈 소장의 지휘로 기동함대가 하며, 육상전투 및 수송을 위하여 1차로 장갑차 20대, 수송트럭 20대, 굴삭기 등 자원 채굴 장비 20여 대와 헬기 7대 등을 마라도 함과 동행할 LST함에 적재하여 수송하기로 했다.

지하자원 탐사를 위하여 민간기술자 10명과 군 장병 중 자원탐사 관련전공자 20명 등 호주탐사 팀 30명을 구성하여 그 단장에 이수성 중위를 임명했다.

모든 원정단의 인적 장비 구성을 마쳤고 이제는 출발만이 남아 있었다.

제1원정단(연해주 원정단) 중 사할린 및 연해주 원정단은 계절 관계로 내년 봄에 출발하기로 하고 그동안 원정에 필요한 여러 훈련을 하기로 했다.

제1원정단 중 울릉도 팀과 좌도 섬 팀은 12월 1일 출발하기로 하고, 제2원정단은 시간여행 후 최초로 8,000㎞에 달하는 장기 원정의 준비를 철저히 했다.

GPS에 의한 항해가 불가능하였으므로, 슈퍼컴퓨터를 뒤져 태평양과 인도양의 해도를 구하여 항해를 하기로 했다.

그동안 GPS에 의한 항해에서 일일이 바다의 모든 상황과 일기를 관측하며 운항하여야 하므로 함정의 평균 속도는 시속 25노트(45㎞)였지만 약 1개월간의 항해기간을 예상하여 항로를 점검하며 항해하기로 하고 각종 준비를 하니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기동함대는 원정단을 내려놓고는 남태평양의 바다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서양 세력 청소 작전을 시행하기로 했다.

지금의 태평양의 섬들은 1630~40년대 네덜란드인 타스만을 비롯하여 제임스 쿡 선장이 1768년 태평양에서의 금성 관측 이래 3차에 걸친 10여 년의 탐사를 하는 등 여러 차례의 탐사로 유럽에 소개되어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이 서양의 식민지가 되거나 되기 직전이었다.

모든 준비를 위해서는 본토에서의 쌀 수급 등으로 보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여 12월 15일 제2 원정단이 출발하기로 했다.

원정단 문제 등이 결정이 되자 위국공 장준하는 이현호 전라우수사를 불렀다.

장준하는 이현호에게 지도군수 유동혁과의 업무에 대하여 지시를 했다.

장준하가 이들 조선 관리들을 불러 지시를 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고 이들 두 명의 관리도 장준하의 지시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유동혁 군수가 지도군 현청으로 예정되어 있는 지도 섬으로 들어갈 때 약 100여 명의 병력을 지원하여, 지금 나주목사가 시행하는 어명의 이행을 도와 최대한 빨리 끝내라고 했다.

만일 섬에 남을 사람은 조정에서 일을 시켜 호구를 책임져 주겠다고 백성들에게 알리라고 지시했다.

장준하의 지시를 받은 이현호는 유동혁을 기다리기 위해 바로 목포로 돌아갔다.

장준하는 최성용에게 친위군 중 지도군에 주둔할 병력의 대기를 지시했다.

지도군에 들어갈 인원은 군 병력은 1여단 2대대 병력이고 지휘자는 대대장 김회정 대위이다. 지도군은 500여 명의 민간인이 들어간다.

그 인원은 지도군 일대 천일염전 조성을 위한 인원으로, 농기계와 중장비도 일부가 들어가기로 했다.

조선 시대의 소금 생산은 소금가마를 이용하여 바닷물을 끓이는 것인데 그 이름이 자염(煮鹽)이다.

[조선 시대 소금(자염煮鹽) 제조법]

1. ‘염벗터’(‘함수’에 불을 지펴 소금을 만드는 장소)를 만든다.

염벗터에는 가마솥을 걸고, 버굿이라는 간수를 모으는 웅덩이를 만들고, 바람을 막기 위해 염벗터 주위에 ‘나래’를 두른다.

2. 갯벌에 지름 8~9m의 구덩이를 파며 이를 ‘통자락’이라 한다. 통자락은 솥뚜껑 형태로 만들어져서 가운데로 물이 고이게 만든다.

3. 통자락의 중간에 물이 어느 정도 증발하여 진하게 된 소금물인 ‘함수’를 모으는 통을 사각형 모양으로 구명을 만드는데 이를 ‘간통’이라 하고 주변에 흙이 들어가지 않게 짚 등으로 덮는다.

이렇게 통자락을 파놓으면 커다란 솥뚜껑에 사각형의 짚이 박힌 것 같다.

4. 통자락의 갯벌 흙을 말리는 작업을 소의 힘을 이용하여 하루 2~3회 써레질을 하여 말린다. 이때 흙에 있는 다량의 무기질이 소금에 포함된다. 이렇게 써레질을 하면서 함수가 간통에 잘 흘러내리도록 작업을 한다.

5. 써레질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흙을 잘게 부수는 작업을 ‘덩이질’이라 한다.

6. 간통 안에 들어온 함토(덩이질을 하여 잘 말린 흙)를 통자락 주변으로 계속 밀어 올리는데 이를 나래질이라 한다.

이러한 작업을 7~8일간 계속하며 이때 가장 많은 노동력이 들어간다.

7. 간통은 밀물 때도 안으로 바닷물이 잘 들어가지 못하도록 이엉을 덮고 진흙으로 단단하게 마무리한다.

8. 통자락 주변에 나지막한 둑을 쌓아 썰물 때도 통자락에 바닷물이 오래 잠기도록 한다.

9. 위와 같은 작업을 사리(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클 때)까지 하며 함토에 농축된 염분이 간통 안으로 스며들면 이때 함수의 염도가 13~15퍼센트가 된다.

10. 사리가 지나 조금(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작은 때)이 되면 간통의 염수를 퍼내어 염벗터의 버굿으로 함수를 옮긴다.

버굿은 바닥에 땅을 파고 바닥을 단단하게 다진 후 나무로 사방을 에워싸고, 주위를 짚으로 덮어서 만든다.

11. 염벗터의 가마솥을 소나무 등의 장작으로 불을 땐다.

12. 버굿의 함수를 퍼 가마솥에 붓고 함수를 끓인다.

13. 함수가 끓기 시작하면 결정이 생기고 이때 불을 조절하여 뜸을 들인다.

14. 뜸을 들이며 생긴 소금을 수차에 걸쳐 퍼내어 말린다.

천일염은 굵을수록 상품이나 자염은 맛소금같이 곱고 색이 백색일수록 상품이다.

자염을 만드는 기술자들은 철저하게 분업화되었으며, 벗임자(염벗터의 제염기구를 관리하는 담당), 간쟁이(간통의 함수를 염벗에 옮기는 담당), 염한이(소금 생산을 위한 함토의 제작 함수 조정, 땔나무 조달, 함수 끓이는 담당)와 막일꾼 등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 일한 삯은 소금으로 받았다.

이렇게 많은 공정을 거쳐 만든 자염은 그 맛이 달고 높은 영양가를 자랑하나 너무 많은 제작비용과 막대한 땔감이 소요되어 그 가격이 엄청났다.

특히나 땔감으로 인해 주위의 산이 민둥산이 돼 여름철 수해로 곤욕을 치렀다.

조선 시대 소금가마는 거의 왕실 종친부에서 종친들이나 공신들에게 분배하였고, 종친들은 그것을 염상에게 위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세금도 없었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친 자염은 그 힘든 생산 과정으로 양도 적게 나왔지만 종사하는 양민과 노비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자염(거의 종친과 세력자의 가마)은 주로 전남 지역에서 생산되었고(나주 인근) 다음이 경기 충남 순이었으며 자염의 가격은 쌀 가격의 1/2 수준이었고 날씨에 의해 생산량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서 가격 폭등을 반복했다.

조선 시대 때는 나라에서 구황염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천일염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07년 인천 주안염전이 최초이며 1940년대는 신안군 지역에도 염전을 시작하여 2010년의 경우 전체 생산량의 65퍼센트가 신안군에서 생산되고 있다.

천일염은

1. 바닷물을 모으는 저수지

2. 제1증발지(염도 6~8도)

3. 함수지(염도 25도 내외)

4. 결정지(27도부터 결정 생김)

5. 채염지

6. 소금 창고(간수를 뺀 후 유통―바로 먹으면 쓰다)의 순서로 생산된다.

지도군에 들어갈 가온의 주민과 군은 지도군 주민들의 본토로의 소개(疏開) 및 군내 큰 섬으로의 정착이 끝나면 출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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