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시간
2013년 5월 어느 날. 북한(北韓) 평양시(平壤市) 주석궁(主席宮).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國防委員長)이 오랜 지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유고 시 후계자인 김정은이 정국을 장악할 때까지 후견인으로 뒤를 잇기로 되어 있던 국방위원회(國防委員會) 부위원장(副委員長) 장성택.
그러나 그가 장례식장으로 가는 도중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사망하면서 북한은 엄청난 내부적인 혼란에 휩싸인다.
아직까지 김정일의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은으로의 권력 승계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북한은 일시적으로 지도자 부재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과 동시에 북한 군부와 지도층은 이 기회에 남북한 간 동등한 조건에서 합의에 의한 통일을 이룩하자는 통일파와, 현 체제를 유지하며 후계자로 거론되던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을 옹립하고 군부의 원로들로 이루어진 고문단을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가면서 현 체제를 고수하자고 하는 체제유지파로 분열되었다.
북한 정국을 자신들이 이끌어 가려는 치열한 사상 투쟁과 엄청난 힘겨루기로 북한 군부와 정국은 양 계파로 분할되고 말았다.
젊고 진보적인 철학을 가진 통일파(統一派)는 체제유지파(體制有志派)에 비해 계급 및 나이는 어리나 평양방위사령관 등 각 군단장을 비롯한 군부의 중요한 직위에 있는 소장 세력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동안 경제 실정으로 북한의 주민들이 어렵게 살고 있기에 현 체제를 유지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 상태에서 주민들이 폭동이라도 일어난다면 엄청난 유혈 충돌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였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라도 통일을 통하여 경제 문제를 해소하려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인원은 적지만 나이가 많고 계급이 높고 김정일 위원장의 주변에서 그동안 최고의 기득권을 누려왔던 체제유지파는 호위총국과 국방위원회를 기반으로 그동안 쌓아온 자신들의 정국장악력을 계속 유지해 기득권을 이어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계속된 경제정책의 실패와 중국의 개방으로 인한 현대화, 남한의 발전상에 관한 소식, 개성공단의 소식 등으로 이미 외부세상을 접하고 있던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은 남한과의 통일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자 체제 유지를 원하는 원로보수파들은 다급한 마음에 중국당국과 북경비밀 회담을 거쳐 체제 유지를 위해 중국에게 백두산의 할양, 나진 선봉지역 중국 무역특구지역 100년간 조차(租借) 및 주둔군의 모든 경비 부담을 전제로 중국군의 북한 지역 주둔 협상을 맺으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군부 내 소장파(통일파)들은 외세에 의한 국권 침탈이라는 명분으로, 평양 수도방위사령관 을 비롯한 군단장급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만수당의사당 접수 때 호위총국과 상당한 무력 충돌도 있었지만 신속한 작전 전개로 쿠데타는 소장파의 승리로 끝이 났다.
군부실세들인 소장파들은 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원로 보수파들 전원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賣國)에 준하는 형벌로 전원 총살형에 처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였던 김정은은 스위스로의 망명을 주선하여 주었다.
소장파들은 쿠데타로 인하여 북한주민들 중 상당수의 인민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예상과는 달리 주민들 전부가 군부 쿠데타를 열렬히 지지하며 별다른 소요사태를 일으키지 않았다.
이에 힘입어 북한의 정국은 소장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북한의 체제유지파와 북한 주둔 문제로 협상을 벌였던 중국은 북한의 쿠데타에 반발하여 자국의 군대 10만의 병력을 압록강 인근 단동지역에 집결하여 압록강을 넘어오겠다며 소장파를 위협하였다.
중국은 체제유지파와 벌였던 북경 비밀 회담의 이행을 촉구하면서 쿠데타 세력과 대치상태에 이르러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2013년 9월 중순, 북한 전역.
지난 몇 개월간 북한 정국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고 쿠데타 세력들은 임시 혁명정부를 구성하여 북한주민들을 안정시켜 나갔다.
하지만 압록강 조, 중 국경에는 수십만의 양국군이 준전시 상태로 계속 대치하고 있었다.
중국은 북한압박의 수단으로 조, 중 국경을 폐쇄하고 무단월경자를 공개 총살형에 처하기까지 하면서 북한으로 넘어가는 원유 등 모든 물자 차단과 양국 간 국경무역을 금지하면서 북한을 압박한다.
이렇게 되자 북한은 극심한 생필품 품귀현상으로 아사자가 속출할 지경에 이르러 폭동이 일어날 조짐을 보였다. 이에 정국을 장악한 쿠데타 세력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국면을 타개할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를 맞는다.
군소장파들 대부분으로 이루어진 북한의 임시혁명정부는 정국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비밀리에 특사를 한국으로 파견하였고, 남한정부와 극비협상 끝에 통일을 위한 협상을 이끌어내었다.
북한의 사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한국은 북한의 통일제의 및 긴급한 구호물자 제공요구를 받아 유사 이래 최고로 신속한 조치를 취한다.
남북한정부는 통일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협상을 하게 된다.
그 협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체 시작
첫째 : 통일을 위한 북한 주민 전체 국민투표를 30일 이내 실시한다.
둘째 : 통일 후 정국의 불안정을 야기할 수 있는 북한주민들의 주거이전의 자유를 향후 10년간 제한한다.
(향후 정국의 안정 및 북한 주민의 교육이 빨리 이루어진다면 그 시기는 조절하여 앞당길 수 있다.)
셋째 : 남한에서 올라가는 구호물자를 신속히 나누기 위한 조직을 1주일 이내 갖춘다. 이때 유엔과 남한의 NGO들이 대거 참여한다.
넷째 : 북한의 기존 군사시설 및 군수시설에 타국인의 접근을 전면 차단한다.
(군부 동요를 막고 어수선한 시기에 불순분자에 의한 정보유출 차단)
다섯째 : 향후 10년간은 북한지역에 현 북한 군사 정부와 남한의 행정조직을 혼합한 군정을 실시하고 그 후 남북한 동등한 자격으로 국민투표에 의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다.
여섯째 : 북한군 일반병사 중 전역을 원하는 자는 전역시킨다. 전역한 병사는 북한의 주민들과는 달리 남한의 중소기업에 배치하여 남한의 인력난을 해소하고 외국인들로 구성된 인력시장을 선순환으로 재편한다.
<―서체 끝
남북한은 위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 조항만을 채결하고 통일에 합의를 하게 되었고 다른 세부사항은 추후 협의하여 결정하기로 하였다.
남북한 대등한 입장에서의 통일이 아닌 북한의 위기 상황에 따른 흡수통일 형식의 통일이었지만, 남북한 지도자들은 위기상황 돌파에 최선을 다하였다.
남한의 신속한 구호물자 공급 및 유엔의 평화 봉사단 활동 등 전 세계적인 구호의 손길이 모여들자 북한의 식량 사정은 급격한 안정을 이루게 된다.
준비가 되지 않은 통일은 여러 혼란을 가져왔으나 분단 후 70년간 통일을 염원하던 남북한 주민들은 잠시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견뎠다.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통일 후 극심한 혼란 없이 빠른 속도로 정국의 안정이 돌아왔다.
특히 외국에 나가 있던 제조업 중 상당 부분과 남한의 인력중심 산업들이 북한지역으로 이전되기 시작하자, 이는 자연스러운 주민화합과 통일 시너지 효과를 보게 되어 통일 비용을 상당부분 절감하고 주민 통합을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북한 주민 투표는 99.95퍼센트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일이 결정되자 북한에 대하여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던 중국도 더 이상의 명분이 없었다.
이때 남한의 대통령이 나서서 중국과 협상을 하였고 실리에 밝은 중국답게 상당 부분의 경제적인 양보를 받아내고 조, 중간의 대치상태를 풀었다.
남북한은 드디어 2014년 1월 1일을 기해 역사적인 통일을 하게 된다.
2014년 1월 1일 판문점(板門店) 통일(統一) 행사장(行事場).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널문리(분단이전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어룡리)의 판문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상으로 유엔 공동경비구역(JSA)이 된 이래 우리 땅이지만 우리 땅이 아니었던 이곳에서 통일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지구의 마지막 남은 분단국의 통일을 취재하기 위해 전 세계 5,000명의 취재진과 100여 개국의 국가원수, 150여 개국의 내외 귀빈, 남북한 2만 명씩 4만 명의 국내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지구촌 마지막 통일 행사가 열렸다.
남한의 장성호 대통령과 북한 임시정부 수반인 전 평양방위사령관 오일철 수반이 나란히 입장을 하자 4만의 축하인파는 전원 기립하여 박수로 맞이하였다.
수많은 행사가 일정대로 진행되고 축사 등이 오가고 마지막으로 도로에 그어졌던 노란 선의 남북경계선을 참석한 귀빈들이 교차통행하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멀리 있는 도로장비가 도로면의 노란페인트를 지우기 시작하자 시청하고 있던 남북한 모든 주민들이 환호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주일간의 축하행사 끝에 모든 국민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지금부터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서로 조금씩 힘을 나누며 고통을 분담할 때이다. 국민들은 모여서 통일에 대하여 한마디 할 때마다, 삼삼오오 모여 술 한잔할 때마다, 축사 중 장성호 대통령의 마지막 말을 안주 삼고는 하였다.
“…국민 여러분. 다른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두 번 다시 우리 후손들에게, 힘이 없어 굴복당하고, 힘이 없어 외세에 휘둘리고, 힘이 없어 다른 나라의 침략이나 받는, 부끄러운 조상은 절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니,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저와 국민 여러분을 믿습니다. 반드시 하겠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자신의 나라를 전 세계에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 나갑시다.”
그 말은 국민들에게 한 말이기도 하였지만 대통령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하였다.
중국과의 관계가 정리되자 남북한 간 전쟁을 대비한 지상군 위주인 200만 명의 군 병력을 유지할 필요성이 낮아지게 되었다.
2014년 통일정부는 통일 당시 계획대로 군 전력 재배치 사업의 일환으로 해군을 대양해군으로 육성하고, 특수전 및 상륙전을 통합한 새로운 개념의 통합특수군단을 운영하기로 하고, 특수전 사령부를 대양함대 모항이 있는 제주도 화순 항에 두어 신속한 작전전개를 용이하게 하였다.
통일정부는 군 발전계획의 일환으로 주변국들의 우려에도 항공모함을 기함으로 하는 대양함대와 통일 후 바다방어 전력으로 기동전단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당시 국내에는 2007년 건조한 14,000톤급 상륙수송함인 독도함이 있었을 뿐이었고 1996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군 전력 증강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고자 하였던 항모 보유계획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자꾸 연기 되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통일과 더불어 군 전력 재배치 사업에 맞물려 해군을 대양함대로 육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통일 당시 북한에는 구소련 출신 핵관련 연구진이 무려 200명이나 비밀리에 20년간 연구를 하고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구소련시절 핵추진엔진 개발 경력이 있었다.
대양함대 운용에 유용한 핵추진엔진을 개발할 인력이 준비되자 대양함대 개발 사업은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통일 당시 장성호 대통령은 남는 군 인력 중 북한군의 일반병사들 중 50만 명을 전역시켜 남한의 중소기업에 취업시켜 인력난을 해소하게 하였고 군 노후장비를 퇴역시키면서 유휴인력을 재배치하는 등 군 편성을 재편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군 인력 및 편성 재배치하면서 남는 국방비 재원을 대양함대 사업에 투자하게 되자 무리한 예산을 운용하지 않고도 기존의 군사력 증강사업과 맞물려 빠른 속도로 대양함대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2010년대의 미국은 자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계속 불안한 모습을 보여 전 세계는 경제회복이 더뎌지며 상당기간 불황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미군이 세계의 군을 자처하였으나 이 군 병력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또한 자국 내 불황에 따른 엄청난 재정적자로 반전여론이 드세게 일어나고, 계속하여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당선되며 그동안의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국방외교의 방향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고 장비 및 기술을 판매, 지원하는 방식으로 선회되었다.
그러자 미국의 군수산업은 막대한 영향을 받게 되고, 군수산업의 불황으로 이어지자 그 여파는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쳐 불황이 깊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때 통일과 맞물려 한국이 대양해군을 지향하며 2016년부터 항모 개발을 준비하면서 주변여건 조성에 박차를 가하자, 미국은 자신들의 편의에 의해 한국에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중고 항공모함의 판매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판매하고자 하는 항모는 만재배수 81,000톤 기준배수 60,000톤의 키티호크 급 정규 항공모함이기는 하나 1968년 취역하여 당시 퇴역을 압두고 있는 항공모함이었다.
통일은 되었지만 우리나라의 군 편제상 아직까지는 미국의 압력은 거부할 수 없는 협박의 수준이었고 미국의 로비도 전 방위적이었다.
수많은 협상을 거친 끝에 항공모함과 항모운항에 필요한 운용체계만을 국내에 일부 도입,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대양해군에 필요한 항모를 인수하기로 하고 신형 제작과 맞먹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항모를 인수한다.
국제사회가 계급이 깡패고 힘이 우선이라는 말이 그 대로 입증되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동안 한국에 판매되었던 몇 단계 다운된 옵션이 아니고, 유출이 금지된 기밀사항을 제외한 기존 미군 항모 운용체계를 그대로 인수받게 된 것이다.
남북통일과 미국의 세계군사전략 변경과 일본의 군사강국으로의 발전 우려 등으로, 군수물자 판매에 있어 한국의 지위가 일본보다 앞선 나토에 준한 위치로 격상이 된 덕분이다.
강매에 가까운 미국의 전 방위 압력에 2018년 구매를 결정하고 항모에 탑재된 장비의 정비를 위한 인력과 항모 운용에 필요한 인력을 미국에 파견하여 1년간 운용 및 정비에 필요한 교육을 거쳐 2020년 항모를 인수한다.
인수 당시 항모 운용에 필요한 병력 3,000명, 정비인력 2,000명 등 5,000명의 인력이 미국 대서양함대의 모항인 버지니아의 노포크에서 1년간 항모의 운용 및 정비교육을 받았다.
인수에 필요한 인력은 통일로 인하여 해군의 병력이 2배로 늘어남에 따라 인력운용이 용이했던 것이 그나마 큰 다행이었다.
모든 비용은 한국 부담이었지만 해군 특성상 장기복무자가 많은 군편제와 통일에 따른 군 통합으로 남북출신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시너지 효과를 낳아서, 높은 수준의 항모 운용 능력을 최단기간에 습득한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미국의 항공모함을 인수하게 된 해군은 그 함 명을 ‘광무황제’ 함이라 명명한다.
2020년 한국에 들어온 광무황제 함은 1년여의 기간 동안 제주도 화순 항에서 6년 이상 무충전 운항이 가능한 핵추진엔진으로 교체하고, 그동안 개발된 국산 설비를 장착하는 내부 개조를 거쳐 2022년부터 2년간의 항모 작전 계획에 따른 함대 운용 훈련을 실시하던 중 창군 행사를 위해 화순 항에 입항해 있었다.
항모에 탑재하는 항공기의 기종은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부분의 성능을 대폭 개선한 영국산 최신형 해리어기로 최근에야 결정이 되어서, 항모 위에는 1차로 들여온 영국제 신형 해리어기 8기만이 탑재되어 있어 약간은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여러 함정들도 속속 제작되어 실전 배치되어 2023년 여름이 가기 전에 전부 실전 배치되었다.
2010년 천안함 사태를 군 전력증강의 계기로 삼은 당시 정부에서는 군 전력증강 사업의 일환으로 해군전력 강화에 역점을 두었고 많은 토의 끝에 2012년 말 함선을 일괄 발주를 한다.
전략함인 독도함 급의 상륙수송함을 헬기 전용항모로 사용 가능하도록 성능을 개선하여 2척(마라도 함, 백령도 함)을 추가건조한다.
이지스구축함인 세종대왕 함(7,600톤)급을 2척을 추가건조하고, 구축함인 충무공이순신 함(4,500톤)급 함정을 3척을 더 건조한다.
그리고 현대전에서 기능이 축소된 상륙전용 고준봉급 LST함을 차기전차상륙함(LST―Ⅱ) 계획에 따라 성능에 스텔스 기능을 부여하고 엔진의 성능을 개선하고 한국형 고속상륙정으로 50노트(90㎞) 이상을 낼 수 있는 솔개II(LSF―2)의 탑재가 가능하게 구조를 개선하여 8척을 신규 건조하고, 손원일 급 잠수함도 3척 신규 건조하게 된다.
한국형 고속상륙정 솔개II(LSF―2)도 이에 따라 8척이 추가로 건조되었다.
한국형 고속상륙정 솔개II(LSF―2)는 배수량이 155톤이고 크기가 27.9m×14.6m이고 최고시속 50노트(90㎞), 승무원 5명, 수송하중 55톤으로, 150명의 병력 또는 전차 1대와 24명의 병력의 수송이 가능한 고속상륙정이다.
2012년 계약단계를 거쳐 2013년 상반기 방위사업청과 국방과학연구소등 관련기관 및 해당연구 인력배정 등을 협의하던 중 남북통일을 맞이한다.
2014년 1월 통일 후 장성호 대통령은 전임대통령이 2011년 결정한 제주도 화순 항의 군사기지를 확대하기로 하고, 국방부장관과 남북통합군지휘부와 회의를 거쳐 제주도 화순을 대양함대의 모항으로 최종 결정하고 한국 최초의 대양함대를 구성하기로 결정하였다.
2014년 1월 장성호 대통령은 군 최고위급인사들과 국내 대표적인 군수업체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였고 거기서 협의를 거쳐 대양해군의 모항으로 개발을 시작한 제주도 화순 항일원에 해군전용 군수산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하였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삼성중공업, 한진중공업, 두산중공업, 항공우주산업 등 국내 유수의 해군 관련업체와 협의를 거쳐 이전할 수 있는 시설들을 전부 이전하여 군수단지화 하였다.
그동안 장소를 물색하던 제2원자력연구원도 이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화순에 설립하게 되었으며 국방과학연구소도 이에 따라 필요한 부서가 전부 옮겨왔다.
그러나 함선의 제조만큼은 여러 문제로 기존과 같이 각 회사에서 제작하기로 하였으나, 나머지 부분은 해군관련 부분을 화순 군수산업단지로 이전했다.
이 사이에 화순단지로 이전되는 해군관련 군수산업이 합종연횡(合從連衡)되어 재편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국내 유수의 기업들과 국가의 공동투자로 군수산업단지가 만들어졌고, 국내 해양관련 최고기업의 인재들과 국방과학연구소 인력 중 남북한 해군연구팀과 함께 그동안 북한에서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20년간 극비리에 핵개발관련 연구를 하던 구소련 출신 과학자 200명과 북한출신과학자 100명도 제2원자력연구원에 합류시키기 위해 비밀리 입국시켜 화순에 입주한다.
통일 후 성숙해진 분위기에 맞춰 민, 관, 군이 합심하여 군수산업 육성을 위한 R&D 공동연구 등 새로운 집약된 형태의 군수산업육성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2012년 건조계획에 의해 건조되는 함선 중 강습상륙함인 독도함 급(배수량 14000톤 만재톤수 18800톤)인 마라도 함과 백령도 함은 헬기 전용 항모로도 전용이 가능하도록 성능을 업그레이드하여 건조시켜 2021년 진수를 마치고 2년간의 시험 운용기간을 거쳐 실전 배치했다.
2000년대 초까지 개발하다 중단되었던 핵추진 한국형 스마트 원자로 사업을 구소련과학자들과 합동으로 연구 개발하여 여러 형의 원자로를 개발하게 된다.
남한은 이미 2012년 핵추진엔진 개발에 성공하였고 잠수함용 원자로 제작을 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소련과학자들의 합류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있었다.
소련과학자들이 그동안 연구하였던 것은 대포동미사일 같은 핵무기도 있었지만 이 기술과 연계하여 핵추진엔진 개발에도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통일 후 확인해 보니 그동안 엄청난 문제가 된 북한의 핵은 방어용으로 사용하려고 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핵추진엔진은 외화 획득을 위해 수출을 하려고 개발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소련과학자들과 북한의 과학자 100명은 그에 따라 20년간 개발되고 준비된 핵추진엔진의 주요부품들이 거의 엔진 20여 개를 당장에라도 조립할 수 있을 정도가 제작되어 있었다.
북한의 핵추진엔진 개발은 공교롭게도 러시아의 OKBM사에서 기술이전을 받았으며 한국도 이 회사에 기술이전을 받아 대형과 소형을 설계 개발해놓은 상태였다.
제2원자력연구원은 미국의 원자로와 같이 한 번 충전으로 20년 이상 운행할 수는 고준위원자로보다 6년마다 재충전하는 방식의 개발이 쉬운 저준위 원자로개발을 결정하여 2015년 한국형 핵추진방식의 엔진 운용체계 개발에 성공하였다.
핵추진엔진의 탑재는 항모 광무황제 함과 독도함, 마라도 함, 백령도 함과 이지스 구축함 급 함정을 전부 핵추진엔진으로 교체 신규 장착하였고, 잠수함 또한 214급 잠수함 엔진을 교체 신규 장착했다.
소련과 북한과학자들의 참여로 저준위 중소형 핵추진엔진 개발에 성공한 제2원자력연구원은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LST함과 군수 지원함 등 장거리 원해용 대형 함을 전부 핵추진엔진으로 교체를 검토 중에 있었다.
이렇게 함정의 엔진을 교체하는 것은 북한의 우라늄광산 덕분이었다.
통일 후 남북한 정부는 그동안 무성한 말이 있었던 북한의 우라늄광산에 대한 대대적인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북한의 우라늄 광산은 황해북도 평산과 평안남도 순천에 있고, 정련공장은 황해북도 평산과 박천에 한 곳씩 있었다.
남북한 광산기술자와 지질학자들의 확인결과 우라늄광산의 매장량이 가채(可採) 매장량만 세계 총 매장량에 육박하는 400만 톤이고 총 매장량은 세계 총 매장량의 5배가 넘는 2,600만 톤으로 확인되었다.
이 매장량은 이미 일제 때 일본군에 의해 매장량이 확인된 사실을 입증하는 일제시대(日帝時代) 문건이 북한 극비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었다.
북한은 통일 전인 2012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연다고 주장했는데, 세계 최대의 매장량을 가진 우라늄광산으로 자원 자급화를 이루고 그것의 공을 김정일의 후계자인 김정은의 공으로 돌릴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은 핵 기술과 장거리 미사일을 통해 체제 안보의 완성을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화순 항은 10년간의 개발을 거쳐 10만 톤급 1선석 5만 톤급 3선석과 함선수리소와 대형크레인 등 여러 설비를 갖추어 군항으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구비하여, 바야흐로 대양함대의 모항 및 한국 해양 군수산업의 메카로 부상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동안 30여 년간의 대륙붕탐사에서 수익성 있는 광구를 개발하지 못하자 세계메이저급 석유회사가 모두 철수한 지 10년 만에 호주의 석유탐사 전문회사인 우드사이드(WOODSIDE)사가 6―1광구를 2009년부터 다시탐사를 시작하였다.
우드사이드(WOODSIDE)사는 6―1광구를 탐사를 하다가 다시 2010년 재협정을 맺어 한국의 석유공사와 공동으로 6광구(제주도 부근 광구)를 탐사하던 중 2015년 제주도 화순 항 앞바다인 가파도 와 마라도 사이 해상에서 유전을 발견하게 된다.
발견된 유전의 가체매장량 조사를 하자 아쉽게도 소형유전으로 제주도민과 화순 항의 군수산업에 20년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성분은 최상인 양질의 유전이었다.
가파도 유전은 2016년부터 개발을 하여 2018년부터 원유를 생산하게 된다.
이에 따라 가파도 주변은 유전개발과 동시에 송악산 아래 해상에 원유 정제 시설을 갖추게 되었고 송악산 절벽을 뚫어 대규모 저장시설을 건설한다.
통일 후 처음에는 화순 항의 대형 군항개발에 반대하던 일부 지역주민들이 그동안 정부의 꾸준한 홍보, 외부인구 유입에 따른 소비 촉진 등에 의한 경제발전, 화순 군항의 관광자원화에 따른 관광객 증대효과로 지역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정부의 말과 기대효과를 생각하여 대형 군항 개발을 찬성한다.
이에 따라 화순 항 및 그 주변 군수 단지는 세계 최초의 친환경 단지를 지향한 설계로 대부분의 공장 시설이 지하에 건설되었고, 지상에는 연구동만 있고 단지 주변 일대를 친환경적으로 개발하여서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화순 일대를 아름다운 군항으로 건설하였다.
2023년 9월 25일 오전 10시 제주도 화순 지원본부 10층 본부장실.
본부장실에서 화순 항과 군수단지를 내려다보던 장준하 본부장은 지나간 10년을 생각하며 여러 생각이 교차되어 감개가 무량하였다.
장준하 본부장은 현역해군대장으로 그동안 10년 가까이 소장 시절부터 화순에서 지원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는 군편제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소관업무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장준하가 본부장직을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민관 합동업무가 많아서 전역을 하고 근무를 하고도 싶었으나 소속된 지휘관들이 대부분 현역이어서 그자신도 계속 현역복무를 하고 있었다.
2014년부터 시작된 화순 항만 개발과 군수산업단지 조성 사업은 장준하의 손으로 시작되어 하나하나 철저한 시공과 기술력으로 이룩한 작품으로 10년이 된 지금의 화순은 장준하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군수 공장은 지하에 들어갔고 특히 화학제품의 경우 소음과 폭발 위험 등으로 지하 100m에 대규모 시설을 건설하였고 핵추진엔진 개발을 하는 연구원시설은 지하 150m에 설치되었으며, 폭발이나 외부 침입 등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특수 고강도 콘크리트로 완벽히 사방을 차단하여 문제가 발생되더라도 피해가 동일 시설물에만 그치도록 완벽을 기하였다.
장준하 본부장이 내려다보고 있는 군수단지의 전경은 마치 일반 연구단지와 같이 넓은 녹지에 쾌적한 환경이 조성되어서 보기만 해도 시원한 전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동안 화순 일대는 군수산업단지의 개발과 특수전단사령부로 인하여 인구도 꾸준히 늘어났다.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대정읍과 안덕면 주변을 개발하여 주거단지로 조성하였고, 계속적인 인구증가로 민간인과 군무원, 군인가족 등이 3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군 병력도 화순 항의 해군과 대정읍의 모슬포부근의 특수군단사령부 인원 3만 명과 민간인이 약 4만 명의 인원이 늘어나 총 7만 명의 인원이 거주하는 신시가지와 군수산업단지가 대정읍과 화순 항 주변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군수시설의 설치와 외부 인력의 급증으로 전기 공급에 문제가 되던 전력상황은 화순 항 부근에 있던 남 제주 화력발전소를 증설 기존의 10MW급2기에 불과한 시설을 30MW급 2기를 증설하여 80MW급으로 확장하였다. 30MW 1기만 증설하여도 충분한 것을 후일 확장에 대비하여 대폭 증설되었다.
갑작스런 통일 이후 요동치던 정국에서도 의식 있는 지도자들이 국가의 100년을 내다본 용기 있는 결단이 얼마나 세상이 바뀌게 하는지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된 주변을 내려다보던 장준하는 가슴속에서 차 올라오는 뜨거운 감동을 그대로 느끼며 서 있었다.
똑똑.
상념에 잠겨 있던 장준하는 노크소리에 깨어나 들어오라는 대답을 하였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낮 익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특수군단 사령관 이형구 상장, 해군대양함대 사령관 송기호 중장, 특수기동함대 사령관 김영훈 소장, 제주비행단장 우종철 소장을 비롯한 군 지휘관들과 국방과학연구소 제주소장 장철호 박사, 함대탑재장비 연구소장 이호 박사, 제2원자력연구원장 백기소 박사 등 주요 지휘관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십니다.”
제일 연장자인 장철호 박사가 웃으며 장준하에게 말하였다.
“아, 예. 어서 오십시오.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밑에 무슨 좋은 볼거리가 있는가 봅니다.”
“예. 화순 항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장준하 본부장이 가리키는 방향은 군수산업단지가 조성된 화순 항 쪽이었다.
화순 항 부두의 광장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고 군단 보유 장비인 K1A1 탱크 와 KAAV7A1 수륙양용장갑차 K―9 자주포 K―10포탄 보급차가 수백 대 도열해 있었다.
지금 작전나간 전함정이 돌아와 항구에 정박한다면, 대양함대의 기함인 항모 광무황제 함, 특수기동함대 기함인 독도 함 급 함정인 마라도 함, 이지스구축함인 세종대왕 함 급 함정들과 충무공 이순신 함 급 구축함 등 50여 척의 모든 함정들이 정박되어 있다면 엄청난 장관이 연출될 것이다.
장준하가 그것을 내려다보며 말하였다.
“참으로 보기 좋은 장관입니다. 우리가 원하던 대양함대 건설에 일조를 하게 된 것이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바다에서는 우리나라를 얕보지 못할 겁니다.”
장준하 본부장의 말을 듣고 있던 참석자들은 잔잔한 감동으로 화순 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장준하가 말했다.
“하하, 제가 회의에 앞서 제 감정에 치우쳐 여러분들을 어지럽게 한 것 같습니다. 자리에 앉읍시다.”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장준하 본부장은 이형구 상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상장, 행사 준비는 잘돼가고 있소?”
통일 후 장성들의 호칭을 준장을 없애고 북한과 같은 호칭으로 소장, 중장, 상장, 대장의 순서로 변경하였고 상장은 통일 전 중장이다.
“1주일 후로 다가온 10월 1일 행사에 맞춰 준비를 하고 있고, 지금은 3군이 서로의 조화를 맞추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문제가 없는데 대양함대 일부 함정과 같이 작전에 참여한 15,000명의 병력과 특수전에 대비한 장비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 걱정입니다.”
이형구 상장은 고위 장성급으로는 드물게 북한군 출신으로 군에서 북한 특수군 출신의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2021년부터 특수군단사령관에 취임하여 복합군 체제로 이루어진 특수군단을 훌륭하게 통솔하여 역대 특수군단장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장군이다.
통일이 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강한 북한식 악센트가 남아 있었다.
지금 특수군단에 필요한 전 장비를 교체하느라 차량과 일반화기를 제외한 특수전 장비를 전부 반납하고 재보급을 기다리던 중이다.
화순에서는 국군의 날을 맞이하여 대통령과 국내외 귀빈들을 모셔다가 대한민국 건군 이래 이래 처음으로 한곳에서 해상사열, 육상사열, 항공사열, 등 3군 사열을 합동으로 하게 되었다.
“그동안 일기가 좋지 않아 출발이 계속 연기되던 장비가 오늘 창원을 출발한다고 하니 금일 저녁이면 도착하겠고 작전 나간 함대와 작전병력과 함정은 내일 중 귀항한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시게.”
장준하 본부장은 이형구 상장에게 말을 하고 다시 우종철 비행단장에게 말했다.
“우 장군. 우 장군은 제주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장병들 문제는 없소?”
특수군단 사령부는 비행단을 창설하기 위해 기존의 제주공항을 사용하려 하였으나 국제비행장의 여건 때문에 불가능하여, 일제시대(日帝時代)에 건설되었던 알뜨르 비행장을 재개발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구 비행장 주변이 관광지가 되어 전부 개발이 어려워 비행장 구역을 송악산 주변으로 한정하고 최소한의 면적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특수군단이 창단할 비행단은 헬기 비행단이었고 병력수송 등 수송에 필요한 수송기의 기지로만 활용하기로 하고 특수군사령부 부근인 송악산 밑으로 부지를 선정하고 공사를 하기 시작했다.
비행장의 이름도 알뜨르 비행장이 아니라 송악산 비행장으로 정했다.
비행장 건설을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공기에 쫓겨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으나, 특수군단 사령부의 공병단의 지원을 받아 완공을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예. 그동안 비행장 건립 때문에 문제가 많았으나 작년부터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마무리 공사 중에 있습니다. 비행단은 전부 이전해 왔으나 항공정비단 숙소 문제가 조금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막사를 사용하고 있으나 그동안의 숙소 공사가 진척을 보여 금년 말까지는 전부 마칠 수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흠, 그래요. 그래도 장병들의 사기를 위해 장병 복지에 만전을 기해주고 다시 한번 더 신경써주시오.”
“예,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현장 지휘를 하여 점검하겠습니다.”
장준하는 고개를 돌려 해군선임인 대양함대 사령관 송기호 중장을 보며말했다.
“송 제독, 통합 함대 작전계획운용에는 무리가 없소?”
“예, 본부장님. 대양함대와 특수군단의 통합작전은 우리군 최초의 대양함대작전으로 모든 장병들의 높은 자부심으로 뭉쳐 있고, 모든 계획을 완벽히 수행하고 지금 입항해 있고 나머지 함정과 15,000명의 병력도 내일 중으로 입항을 합니다.”
송기호 사령관의 보고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장준하는 송기호에게 다시 말했다.
“송 제독, 각 함대에 지시하여 전 장병들에게 이번 행사의 중요함을 주지시켜 주시고 정훈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써주시오. 그리고 백기소 박사님.”
“예, 본부장님.”
“지금까지 우리 해군함정이 이지스구축함까지 핵추진엔진을 탑재되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경북함(2350톤)급인 호위함까지는 탑재를 하고 싶은 게 마음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장준하의 말에 백기소 박사가 말했다.
“예, 현재 우리의 기술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에 필요한 모든 부품도 통일 전 북한에서 넘어온 것까지 합치면 20기 정도 제작할 수량이 입고되어 있는 상태입니다만 호위함까지 탑재는 효율성 문제가 있으니 재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교체를 추진하고 있는 원거리 작전수행에 필요한 고준봉급 LST함의 핵추진엔진 탑재를 마무리하고 나서 기타 대형 장비 함들을 먼저 탑재시킨 후 호위함 급은 주변 여건을 고려하여 탑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급한 사항이 아니므로 시간을 두고 충분히 더 연구하여 좋은 결과를 도출해봅시다.”
통일 후 북한에서 확인된 우라늄광산으로 통일한국은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전력을 다했다.
이를 통하여 원유 수입에 엄청나게 들어가는 외화를 줄여나갔고, 남은 재원을 통일 비용에 충당하였다.
이러한 기회에 군도 발 빠르게 대처해 그동안 여러 문제 등으로 중단되었던 한국형 핵추진엔진의 개발, 일명 스마트 원자로 사업도 다시 추진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세계 최초로 3,000톤급 미만의 함정에도 장착 가능한 소형 스마트 핵추진엔진을 개발하여서 대양함대작전 시 1년 이상 장기간 작전도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는 세계 전체매장량의 몇 배나 많은 매장량을 자랑하는 우라늄광산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하늘이 주신 혜택인 것이다.
지금은 LST함의 핵추진엔진의 교체를 추진 중에 있었다.
고준봉급 LST함은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스텔스기능을 대폭보강하고 엔진의 성능을 개선하고 한국형 고속상륙정으로 50노트(90㎞) 이상을 낼 수 있는 솔개II(LSF―2)를 탑재될 수 있도록 개조하였으며 방어시설도 대폭 확충했다.
“하하, 오늘은 회의를 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노고를 칭찬하는 자리 같습니다.”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백기소 박사가 말했다.
모두의 얼굴에는 감추려 해도 감출 수없는 기쁨이 가득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고개를 들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던 참석자들은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그 웃음은 그간 해방 후 주변국들의 견제와 제반 경제사정으로 만들지 못했던 대양해군의 꿈을 이룬 감회를 큰 웃음으로 날려 보냈다.
회의를 보좌하던 참모들도 방 안에 들어와 있던 비서관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훈훈하게 진행되던 회의 도중에 하늘을 쳐다보던 장준하의 비서관인 최성용 중령이 말했다.
“어? 저게 뭐지?”
최성용 비서관의 말에 모두 하늘을 쳐다보았다.
높은 하늘 위에서 무언지 모를 손톱만 한 흰 빛이 갑자기 비치기 시작했다.
장준하 본부장은 비서에게 지시했다.
“최 비서, 관제소에 확인해봐. 저게 무언지.”
최성용 중령은 즉시 관제소에 통화를 하여 하늘에 있는 미확인 물체의 확인을 요구해 답변을 받았다.
“본부장님, 무기 종류는 아니고 대기권 밖에서 날아온 것으로 추측은 되나 현 장비로는 확인이 불가하여 분석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확인이 되는 대로 보고하겠다고 합니다.”
‘음, 저게 도대체 무엇일까?’
장준하 본부장은 궁금함으로 그 빛을 쳐다보았다.
그 빛은 처음에는 손톱만 하였으나 1분도 되지 않아 갑자기 커다란 흰색 타원으로 커지며 갑자기 온 주변을 덮쳐버렸다.
너무 순식간에 ‘확’ 하는 느낌이 온 주변을 덮치자 장준하 본부장은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