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이곳은 12강호 중 한 명인 사펠-자가의 마왕성 안.
“으으윽…!”
왕좌에 앉아 있는 사펠-자가는 고통스러워하면서 왼쪽 얼굴에 커다란 수건을 갖다 대고 있었다. 하얀 수건이 순식간에 검은 피로 축축이 물드는 것을 보니, 꽤 상처가 심한 듯해 보였다.
밑에 서 있던 부하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주인님. 일단 치료부터 받으시는 것이…!”
“시끄러!!”
하지만 돌아오는 건 분노의 외침이었다.
“이딴 상처는 가만히 있어도 금방 나아! 지금 중요한 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저 텐자흔을 멸망시키는 일이다!”
고래고래 외치는 사펠-자가의 남은 오른쪽 눈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한 붉은 안광이 폭사되고 있었다.
“정보 본부장! 분명 지금 디하브가 텐자흔 세력을 공격했다고 보고했겠다!”
“네, 주인님.”
“정말 사실이냐! 거짓이면 지금 당장 네놈의 목부터 베어버릴 것이다!”
“방금 또 보고가 들어왔는데, 이미 텐자흔의 국경선 쪽 부대를 점령한 후 계속해서 마왕성 쪽으로 직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아!”
사펠-자가가 모두를 돌아보며 외쳤다.
“전군을 텐자흔의 국경선 쪽으로 집결시켜라! 과거 시절 기억 못 하고 나대고 있는 저 시건방진 텐자흔에게 내 손으로 직접 본때를 보여줄 것이다!”
“넷!”
최상위 귀족들은 일제히 대답한 후 전쟁 준비를 위해 빠르게 흩어졌다.
그렇게, 4대 패왕인 디하브 외에도 또 한 명의 마왕이 텐자흔 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 * *
이곳은 또 다른 마왕성 안.
리사크가 지배하고 있는 건물의 대복도였다.
타바츠를 비롯해 모든 최상위 귀족들이 모여서 긴급 대회의를 나누고 있는 상황. 하지만 가장 중요한 마왕, 리사크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 이유를 타바츠가 말하기 시작했다.
“마왕님께서 치명상을 입으셨다. 텐자흔 마왕성에서 탈출하는 도중, 르기에가 쏜 마기 미사일이 뒤통수를 제대로 가격했다.”
“…….”
“현재 마왕님께서는 생사의 경계에서 힘겹게 사투를 벌이고 계시다. 당분간 절대 안정이 필요하므로, 마왕님의 침실에 나를 제외한 그 누구의 방문도 당분간 금지하겠다.”
타바츠의 말에 같은 최상위 귀족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애초에 평상시 리사크의 침실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던 이는 타바츠 한 명뿐이었으니까.
“그리고, 현재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당분간 임시로 마왕님의 권한을 대리 수행할 이를 한 명 뽑아야 한다.”
“……!”
순간 모두의 눈이 커졌다. 올게 왔구나!
타바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겠다. 내가 마왕님의 권한을 임시로 받았으면 한다. 지금까지 마왕님의 영지의 모든 대소사를 담당했었기 때문에, 마왕님이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안정적인 영지 운영을 유지할 자신이 있다.”
“…….”
“여기 서 있는 당신들이 모두 영지의 임시 통치권을 원한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영지 운영에 익숙한 경험자가 마왕님의 권한을 물려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전쟁 통에 휩쓸려 영지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
“그래도 내가 대신 마왕님의 업무를 대신하고 싶다, 하는 이는 말해라.”
“…….”
나머지 최상위 귀족들은 서로의 눈치를 볼 뿐, 아무도 반발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본인이 하겠다고 나서기엔 그동안 타바츠가 밤낮 없이 일하면서 영지민 모두에게 쌓아놓은 신뢰도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타바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모두 내가 임시 통치를 맡는 것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다.”
“…….”
“좋아, 그러면 바로 텐자흔에 관한 일부터 처리하도록 하지.”
타바츠는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비어 있는 옆의 왕좌에 앉았다. 이후 모두에게 입을 여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원래 마왕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정보 본부장.”
“네.”
“현재 텐자흔 쪽 상황을 모두에게 얘기하도록.”
“네. 현재 4대 패왕 중 한 명인 디하브와 12강호 중 사펠-자가, 쏘호란, 가즈피의 세력이 텐자흔 세력에전쟁을 선포한 상태입니다. 영토가 서로 맞닿아 있지 않은 다른 세력들도 차원의 틈을 이용해 텐자흔 세력을 공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추가로 전쟁을 벌일 유력 후보는?”
“일단 4대 패왕 중 카훌과 위고스 쪽에서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스파이의 제보가 들어왔으며, 12강호 중에는 델로, 팡위, 하롸스, 말그라카휘 쪽이 대놓고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보고를 들은 타바츠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리했다.
“이 정도 움직임이면 단순히 텐자흔의 멸망에서 끝나지 않을 거다. 분명 병력이 비어 있는 틈을 타서 다른 세력의 등 뒤를 치는 세력도 있을 거야.”
“…….”
“바르긴.”
최상위 귀족 중 한 명인 바르긴이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타바츠가 피식 웃었다.
“사적인 자리면 몰라도 이런 공식 자리에서는 임시 마왕으로 대접을 해줘야지, 바르긴.”
“…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하는 바르긴에게 타바츠는 지시했다.
“캉베와 펠로슈브 쪽에 연락해서, 늦어도 내일 안까지 동맹 협상 자리를 만들어. 이 전쟁 통에 우리가 휩쓸려 나가기 전에, 재빨리 셋이 연합을 해서 뭉쳐야 앞으로의 풍파에 버틸 수 있으니까.”
“알겠다… 아니, 알겠습니다. 위치는 어디로 할까요?”
“어디긴.”
타바츠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세 영지 국경선이 유일하게 겹치는 곳은 델센킬 산, 한 곳밖에 없잖아.”
델센킬 산.
맨 처음 로한이 이 행성으로 차원 이동했을 때 발을 디뎠던 그 장소였다.
* * *
쾅!
“주인님!”
카훌의 집무실 문이 부서져라 열리면서, 정보 본부장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그래서 한창 전쟁 관련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카훌의 집중력이 깨져버렸다.
평소라면 엄청난 불경죄지만,
“무슨 일이야?”
카훌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본부장이 이렇게 절차를 전부 무시하고 자신에게 오는 경우는 정말 몇 년에 한 번도 보기 힘든 경우기 때문이다.
본부장이 다급하게 보고했다.
“지금 요르바 세력이 위고스 영지 쪽 국경선을 넘어갔다고 합니다!”
“……!”
과연, 절차를 전부 무시할 만한 내용이었다. 평소 잘 놀라는 경우가 없던 카훌의 두 눈이 눈에 띄게 커졌으니 말이다.
“공격한 게 아니라 넘어갔다고?”
“네! 지금 벌써 마왕성 쪽으로 10구역 이상 진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텐자흔 국경선 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던 위고스 쪽 병력이 다급히 회군 중이라는 스파이들의 보고입니다!”
이어진 보고를 들은 카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4대 패왕 세력들을 이번 기회에 눌러 버리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던 카훌이었는데, 때마침 위고스와 요르바 둘이 전쟁을 시작했다? 이건 진짜 하늘에서 내려준 절호의 기회다.
“지금 당장 디하브 국경선 쪽 워프진을 가동시켜라! 친위대들 모두 지금 당장 2분 안에 워프진 쪽으로 집결시켜!”
“넷!”
카훌은 대답한 본부장보다 더 빨리 집무실 문 쪽으로 향했다.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이다. 지금 전 병력을 집결해서 디하브를 쳐야, 그들의 군대가 되돌아오기 전에 더 많은 구역의 영토를 점령할 수가 있다.
이곳은 위고스 영지 내.
평소라면 아무도 없을 평화로운 평지 위에, 엄청난 숫자의 병력들이 동서로 나뉘어서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동쪽에 있는 유난히 데르툴 마법사들이 많이 보이는 부대는 위고스의 병력들이었고, 살아 있는 병사보다 시체들이 더 많이 서 있는 서쪽 부대는 바로 요르바의 부대였다.
그 부대들의 중앙에는 두 명의 마왕이 서로를 마주 본 채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네가 말한 대로 여기까지 왔다, 위고스.”
두개골 모자를 쓴 서늘한 인상의 여마왕, 요르바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좀 많이 놀랐어. 네가 정말 약속한 말을 지킬 줄이야.”
“난 마법사다. 그 누구보다 말에 대한 책임이 막중한 존재이니라.”
“그래도 이곳까지 정말 병력이 하나도 없을 줄은 몰랐지. 만약 내가 변심해서 그대로 마왕성까지 밀고 들어갔다면 어쩌려고 그랬지?”
“왜냐면 넌 그러지 못할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의 위고스가, 그렇게 쉽게 마왕성까지 점령당하게 계획을 짰을 것 같은가? 이 구역에서 더 전진하는 순간 네년의 병력들은 매복병들과 마법진에 갇혀 전멸당했을 것이다.”
“호호호…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곧 위고스가 본론을 꺼냈다.
“방금 전 카훌 쪽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카훌 놈이 디하브를 쳤다고 한다.”
“아, 그건 나도 들었어.”
“그렇다면 더 설득이 쉽겠군. 나의 제안을 따르겠는가?”
“그게 가능하다고 봐?”
요르바가 피식 웃으면서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내가 부리는 수많은 시체들과, 네가 지휘하는 저 마법사들이 함께 뭉쳐서 싸운다는 게 가능한 그림이야? 내 머릿속엔 도무지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데.”
“뭉칠 필요는 없다. 난 나대로, 너는 너대로 따로 카훌의 영지를 공격하면 된다.”
“아하… 동맹이 아닌 불가침조약이라는 건가?”
“그래. 어차피 목적은 저 콧대 높은 카훌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거니까.”
위고스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늘 저 카훌의 비열한 계략에 당하고 살았다. 그놈의 계략에 내가 잃은 구역만 해도 50개가 넘어. 너도 과거에 이간질에 당해 30개가 넘는 구역을 투할 놈에게 빼앗기지 않았던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는 그만 얘기하지?”
“지금이 유일하게 복수할 수 있는 타이밍이다. 우리 둘이 양동 작전을 펼치면 제아무리 카훌이라도 힘에 부칠 수밖에 없지.”
“흐음….”
“지금 대답해라. 내 제안에 따를 것인지, 아니면 우리 두 세력 간에 모든 걸 건 전쟁을 시작하든지.”
위고스의 말에 요르바는 잠깐 고민하더니 질문을 했다.
“당연히, 내가 점령한 영토는 내가 다 먹는 거겠지?”
“물론이다.”
그 대답에 요르바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대답했다.
“좋아.”
요르바의 대답에 위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둘의 불가침조약 및 반-카훌 연합 계약이 성사되었다.
4대 패왕이라 불리는 이들 중 두 세력이 하나의 공통된 적을 두고 이런 연합을 맺는 경우는, 데르툴 행성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럼 돌아가겠다. 가는 길에 행여나 기습할 생각 하지 말도록. 네놈의 영지에 살아 있는 데르툴보다 죽은 시체가 더 많이 걸어 다니는 꼴 보기 싫다면.”
“네년이 아무 대책도 없이 여기까지 왔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다. 네년이나 도중에 마음이 바뀌지 않길 바라지.”
“호호호….”
섬뜩하게 웃는 것을 끝으로 요르바는 몸을 돌렸다. 이후 그녀는 병력들과 함께 그대로 자신의 영지 쪽으로 회군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위고스 역시 군대를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이후 요르바의 군대가 완벽하게 자신의 영지까지 되돌아갈 때까지 그들은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