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셋의 붉은 안광을 받고 있으면서도, 카훌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들 잘 지냈나? 위고스. 그리고 요르바.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게 얼마 만인가? 20년이 넘었지, 아마?”
“정확히 28년 9개월이다.”
대답하는 이는 여기서 가장 늙어 보이는 데르툴족, 위고스였다.
그 말을 해골로 만든 모자를 쓴 마왕, 요르바가 받았다.
“그 날짜를 기억하다니 깐깐한 건 여전하군, 위고스.”
“대마법사로서 기억력이 좋을 뿐이다.”
“안 물어봤는데. 그나저나 그렇게 오랜만에 보는데도 별로 반갑지 않은 건 왜일까?”
빈정대는 말투로 물어보는 요르바의 말을 받은 건 디하브였다.
“흥! 시체를 이용해서 동족들을 잡아먹는 년을 좋아할 데르툴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호호호… 말조심해, 디하브. 그러다 당장 내일 네가 내 엉덩이 밑에서 똥오줌 받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 전에 네년의 그 역겨운 해골바가지 모자부터 내 주먹에 박살이 날 거다, 요르바! 네년의 머리와 함께!”
서로 노려보며 도발하는 디하브와 요르바. 둘의 엄청나게 강한 안광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평범한 데르툴족이 껴 있으면 바로 불타 사라져 버릴 것처럼 강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훌이 껴들었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서로 으르렁대는 건 여전하군. 이곳은 파티장이다. 데르툴 행성을 대표하는 마왕으로서 체면을 차리도록.”
“그러는 놈이 30분이 넘는 시간을 늦게 오나?”
“그렇게 말하는 위고스, 자네도 제시간에 도착하진 않았을 텐데?”
“여전히 뻔뻔하군, 카훌. 사과해도 모자랄 판국에.”
“사과는 텐자흔에게 해야지, 너한테 할 일은 없다.”
결국 카훌과 위고스, 둘도 대화를 나누는 도중 점점 서로 노려보는 안광이 강렬해져 갔다.
약 30년 만에 만나자마자 서로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관계. 아마 이곳이 파티장이 아니었다면 벌써 사달이 벌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로한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역시 경쟁자는 죽여야 직성이 풀린다는 데르툴족답군.’
행성 전체를 4분할로 나눠 가졌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서로를 잡아먹고 최고가 되려고 늘 벼르는 존재. 이곳은 원초적인 약육강식의 세계인 데르툴 행성이다.
‘심지어 이 네 명만 이러는 것도 아니야.’
로한의 시선이 이번에는 4대 패왕 너머로 향했다.
미리 세팅되어 있는 수많은 테이블들마다, 따로따로 뭉쳐서 모여 있는 마왕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12강호들이었다.
그들 역시 4대 패왕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재수 없는 새끼들!’
‘이런 놈들과 한 시간이 넘게 같은 공간에 있어야 되다니!’
‘어떻게, 지금이라도 몰래 한 놈만 슥삭 목을 베어버릴까?’
‘쏘호란, 저 새끼는 왜 날 노려보고 있어? 진짜 뒤지고 싶나?’
‘혹시나 따로 뭉치는 놈이 있는 건 아니겠지…?’
최소 5미터 이상의 간격을 유지한 채로 서로를 노려보면서 계속 경계하고 주시하는 12강호 마왕들.
차이점이 있다면, 대놓고 중앙에서 언성을 높이고 있는 4대 패왕들과는 달리 그들은 입을 다문 채로 눈빛으로만 감정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행성 내에서 꽤 잘나가는 편에 속하는 그들이라 할지라도 4대 패왕 앞에서는 한낱 새끼 호랑이에 불과할 뿐이니까.
그들을 돌아보던 로한의 시선이 곧 한 테이블로 고정되었다.
‘응? 뭐지? 설마 저들끼리 뭉치는 건가?’
다른 테이블보다 유난히 많은 숫자의 데르툴족이 몰려있는 구석진 장소.
거기에는 로한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리사크, 타바츠 등의 일행이 서 있었는데, 낯선 이들도 섞여 있었다. 저들은 분명, 정보부 특급 비밀문서 파일의 초상화 그림을 통해 봤던 마왕 캉베와 펠로슈브였다.
평소에 절대로 뭉칠 일이 없다는 마왕 세 명이 지금 한 테이블에 모여 있는 것이다.
“보이십니까? 저들의 기운들이?”
대화를 주선하고 있는 건 타바츠였다. 그는 4대 패왕과 12강호들을 눈빛으로 가리키면서 캉베, 펠로슈브를 계속해서 설득 중이었다.
“정말 분하지만, 저들 개개인의 힘은 우리 같은 소규모 영지를 가진 마왕들은 상대하기 매우 힘듭니다. 사실 이 말을 하면 두 마왕분들께서 매우 불편해하실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바로 옆 테이블에 서 있는 랑타마리가 마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얼마나 강합니까?”
“…….”
“으음….”
캉베와 펠로슈브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섣불리 반박을 하질 못했다. 이곳이 그들만 있는 장소였다면 분명 감정부터 튀어나와서 버럭 화를 뿜어냈겠지만, 그러기엔 직접 체감되는 12강호 등 마왕들의 기운이 너무 강했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 셋이 뭉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장담하건대, 12강호 정도의 마왕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텐자흔 세력도 기습적으로 몰아낼 수 있습니다!”
“에이, 그래도 텐자흔은 좀….”
“그래. 르기에도 있는데….”
“물론 대놓고 전면전을 하면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습을 한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어떤 데르툴족이 마왕 셋이서 연합을 맺는다고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
“흠….”
캉베와 펠로슈브는 점점 타바츠의 설득에 넘어가고 있었다. 확실히 데르툴족의 성향상, 마왕들이 셋 이상 연합을 맺었던 경우는 역사를 통틀어도 두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드물었다.
물론, 튀어나오는 한 세력을 다시 제압하기 위해 주변 세력들이 자발적으로 일제히 쳐들어가는 반군 목적의 단발적인 연합은 자주 있었지만 지금 타바츠가 얘기하는 연합은 먼 미래까지 생각하는 장기적인 플랜이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시고 파티가 끝난 후 돌아가시면 될 수 있는 한 곧바로 제 주인님께 답장을 주십시오. 연합의 시기는 최대한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알겠네.”
“생각해보지.”
“감사합니다, 마왕님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후 물러나는 타바츠.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캉베와 펠로슈브가 한마디씩 했다.
“누가 마왕인지 모르겠군.”
“생각해보니, 저런 중요한 내용은 리사크가 해야 할 말 아닌가?”
“뭐, 타바츠가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
“큭큭… 그랬지.”
어느새 리사크의 곁에 돌아가 입에 발린 소리로 그의 기분을 열심히 띄워주고 있는 타바츠를 둘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리사크를 잘 알고 있는 둘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리사크 세력의 실세는 사실 타바츠라는 것을.
지금만 봐도 그렇다. 휘하 부하들이 모든 보고를 리사크가 아니라, 타바츠한테 우선적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였다.
“장내 여러분! 텐자흔 마왕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번 주인공, 텐자흔 마왕이 르기에의 안내를 받으면서 오만한 표정으로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걸 보며 캉베는 조용히 한마디 했다.
“또 한 명의 진짜 실세가 나타났군.”
“큭.”
펠로슈브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실 리사크와 타바츠의 관계보다, 텐자흔과 르기에의 관계가 데르툴 행성 내에서는 더 유명하다. 둘의 관계를 자세히 모르는 외부인들도, 르기에가 들어온 이후부터 텐자흔 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정도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텐자흔은 거들먹거리는 모습으로 모두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내 탄신일 잔치에 와주신 귀빈 여러분들께 모두 감사하단 말부터 먼저 전하겠소! 특히 4대 패왕과 12 강호라 불리는 귀한 마왕분들께 특히 감사하오! 이분들이 제 마왕성에 모두 모일 줄을 그 누가 예상했겠소이까? 하하하!”
크게 웃는 텐자흔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 못 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천대받고 무시받는 보잘것없는 마왕이었던 그가, 4대 패왕을 비롯한 모두가 생일잔치에 참석할 정도로 위치가 급상승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하지만 정작 카훌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네가 아니라 네 옆의 놈을 보기 위해 모두 모인 것이다, 이 꼭두각시 놈아.’
실제로 4대 패왕들은 모두 텐자흔이 아닌 옆의 미소 짓고 있는 르기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훌은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시나, 텐자흔보다 훨씬 강하군. 르기에.’
최강자인 그는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마기는 텐자흔이 많을지 몰라도, 르기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훨씬 정제되고 압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마 둘이 붙으면 십중팔구는 르기에가 압도적으로 승리할 것이리라.
역시, 한때 5대 패왕이었던 투할이 괜히 가장 아꼈던 부하가 아니었다.
‘분명 캉베 등 세 떨거지들 영토를 협상하자는 의견도 저놈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겠지.’
카훌의 머릿속엔, 며칠 전 사절에게서 받았던 초대장의 끝에 적혀 있는 문구가 다시금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기존 투할 세력을 나눠 먹은 마왕들과 관련해 긴히 나눌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꼭 파티에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이건 아마 자신을 포함한 4대 패왕들의 초대장에만 적혀 있는 내용일 것이 분명하다. 텐자흔 세력이 자신들보다 약한 12강호들과 협상을 할 이유가 없을 테니.
‘아마 세 마왕의 영토를 나눠 갖는 것으로 협상하겠지. 당분간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말이야.’
평소 같았으면 이런 제안에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고작 저 떨거지들 영토로 기뻐할 만큼 카훌의 세력은 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파티에 참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상황이 바뀌었다.
‘진을 정벌하기 전까지는 당분간 전쟁은 피해야 한다.’
지금 카훌 세력의 대부분의 병력이 진 대륙 정벌에 투입되어 있는 상태. 그래서 지금 카훌도 불가침조약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아마 다른 4대 패왕들도 카훌과 마찬가지의 상황이기 때문에 르기에의 제안을 수락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걸 알고 있기에 카훌처럼 모두 파티에 참석했을 테고 말이다.
‘역시, 머리가 좋은 놈이야.’
카훌은 르기에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적국의 상황을 이용해서 협상할 줄 아는 놈. 머리 나쁜 텐자흔은 평생 상상도 못할 계책이다. 어떻게 텐자흔은 저렇게 똑똑하고 강한 르기에를 밑에 두게 되었을까? 그 사실이 아직도 궁금한 카훌이었다.
“…자, 이제 파티를 시작하겠소!”
그때, 막 연설을 마친 텐자흔이 큰 목소리로 파티의 시작을 알렸다. 카훌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뭐라 떠들어대긴 한 모양인데, 하나도 듣지 못했다. 뭐, 들어봤자 별 중요한 내용도 아니겠지만.
곧 로한이 주방 쪽을 향해 빠르게 손짓을 했고, 대기하고 있던 서빙 담당 직원들이 일제히 고급 음식들이 담긴 접시들을 들고 파티장으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진짜 파티의 시작이다.’
로한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씨익 웃었다.
아마 여기 있는 마왕들과 로한이 생각하는 파티는 많이, 정말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