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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는 사이보그-187화 (187/200)

제187화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의 운명은 언제나 참혹하고, 그 광경은 차원을 가리지 않는다.

그나마 전시국제법이라는 민간인 보호 절차가 존재하는 지구도, 2차 대전 당시 2백만 명이 넘는 독일 여성들이 끔찍한 짓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힘이 전부인 데르툴족들의 운명은 어떻겠는가?

일단 멸망한 영지의 데르툴족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즉결 처형을 당하든, 아니면 공식 절차를 통해 오래 살아남든 간에 결국 소멸이라는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똑같다.

마기를 흡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정복군들에게 이런 좋은 ‘재료’들을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생명도 모두 죽이는 마당에, 남은 재물들은? 당연히 모두 정복군의 것이다.

‘지금쯤 다들 조금이라도 더 털어 먹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이겠군.’

아까 대충 최상위 귀족 놈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봤는데, 마왕성을 나서는 순간 가장 재물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을 건물 쪽으로 바로 방향을 바꾸더라. 마탑, 은행, 최상위 귀족들의 대저택… 뭐 이런 곳들 말이다.

당분간 이 마왕성 주변은 누가 더 많이 약탈하느냐의 눈치 싸움이 이어질 것이다. 이곳의 재물이 모두 없어질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단 한 곳.

어떤 최상위 귀족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개인적으로 손을 댈 수 없는 곳이 한 곳 있다.

바로 마왕성이다.

마왕성의 모든 재물은 기본적으로 정복군의 우두머리, 즉 텐자흔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텐자흔의 물품들에 몰래 손을 뻗었다가 걸리는 자는 지위를 막론하고 모두 즉결 소멸이다.

그렇다면, 이 마왕성의 물자를 모두 텐자흔에게 옮기는 작업을 담당하는 부서가 어디일까?

한 곳은 아니고 여러 곳이 있다. 총사령관인 르기에, 마왕 직속 친위대 등등….

‘정보부도 그중 한 곳이라 정말 다행이야.’

로한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킬라단 마왕성의 금고 안. 역시 마왕 아니랄까 봐 금고 규모도 달랐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소형 냉장고 정도 크기의 금고가 아니라 아예 거대한 방 한 칸을 금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휘황찬란한 금은보화들과 마정석 등 고가 물품들이 로한의 시야를 꽉 채우고 있었다.

“다 챙겨라.”

“넷.”

로한의 한마디에, 그의 뒤에 서 있던 휘하 정보부 직원들이 일제히 대답한 후 마정석을 이용해 차원의 틈을 열었다.

틈이 벌어지면서 생성된 텐자흔 마왕성 소유 공식 아공간 안에, 정보부 직원들을 일제히 금고 내 물품을 담기 시작했다.

로한은 서서 그들을 감시하다가, 이내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최고급 마정석들이 쌓여 있는 장소였다.

그곳에 쭈그려 앉은 로한은, 몰래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이것은 안쪽에 아공간 마법 룬어가 새겨져 있는 고급 아티팩트였다.

‘이럴 때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 가야지.’

로한은 몰래 주머니에 마정석 등의 물품을 집어넣으면서 주변 눈치를 살폈다.

바로 옆 직원을 바라보니, 그 역시 몰래 눈치를 보면서 개인 아공간 주머니에 비싼 보석들을 빠르게 챙기는 모습이 보였다.

로한은 피식 웃으면서 애써 외면해 주었다.

‘다들 저러고 있으면 나도 크게 눈치 안 봐도 되겠군.’

솔직히 여기 정보부 직원들이 모두 물품들 몇 개씩 챙겨간다고 해도 티도 안 날 만큼 금고 안의 물품들은 많았다. 그리고 전쟁 직후 저 정도 개인 약탈은 이해해주는 게 정복군 수장으로서의 일반적인 융통성 아니겠는가?

‘물론 나와 너희들의 목적은 많이 다르지만 말이지.’

직원들 모두는 전리품을 목적으로 챙기고 있지만 로한은 달랐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곧 있을 ‘혼돈’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한 것뿐이다. 그래서 지금 그가 몰래 챙기고 있는 물품들은 비싼 고가의 재화가 아닌, 마정석 등 무기로 제작이 가능한 재료들뿐이었다.

몇 시간 뒤.

로한은 다시 텐자흔 마왕성으로 귀환한 후, 대복도 중앙에 부복한 상태로 무릎 꿇고 있었다.

텐자흔 역시 간만에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 로한의 어깨에 검을 댄 채로 서 있었다.

“이번 킬라단 영지 정복에 큰 전공을 세운 콘록에게, 최상위급 귀족의 지위를 내리노라. 더불어 현재 정보 본부장의 직위에서 비서실장으로 승진시키겠노라.”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하며 텐자흔은 로한의 양쪽 어깨에 화려한 의전용 마검을 갖다 대었다.

이것으로 모든 절차는 끝이 났다.

“일어서라.”

텐자흔의 말에 로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빨리 최상위 귀족으로 올라선 놈은 태어나서 처음이군. 앞으로 정말 기대가 커! 나를 위해 더 많은 활약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겠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텐자흔은 든든하다는 표정으로 로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곧 로한은 옆에 서 있던 르기에와도 악수를 나누었다.

“축하하네. 이제 나와 같은 최상위 귀족이 되었군. 마왕님을 제외하면 자네가 고개를 숙여야 되는 존재는 이 영지 안에 없다는 소리야.”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주인님께 보고할 때는 서서 보고해도 괜찮네. 다른 최상위 귀족들과도 말 편하게 놔도 되지만, 그래도 선배 대우는 해주도록 하게. 바로 반말하는 놈을 건방지게 생각하는 꼰대 놈들이 생각보다 많거든.”

“하하하…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마치자, 텐자흔이 르기에에게 물어왔다.

“그러면 콘록은 다시 킬라단 영지 쪽으로 돌아가나? 나머지 최상위 귀족 놈들도 그쪽 영지 정리하느라 아직 남아 있잖아?”

“아닙니다. 콘록은 여기 남아서 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중요한 임무?”

“네. 안 그래도 지금 설명드리려고 했습니다.”

르기에가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말씀드릴 보고는, 우리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또 다른 영지에 대한 소식입니다.”

“다른 영지? 캉베나 리사크를 말하는 건가?”

“아뇨. 4대 패왕 쪽 얘기입니다.”

“!”

텐자흔의 눈빛이 순간 진지해졌다.

4대 패왕이라면, 최근 며칠 동안 그들이 주시했던 전 투할 영토를 나눠 먹은 네 개의 소규모 영지랑은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다.

르기에가 말을 이었다.

“방금 국경선 쪽에서 들려온 보고로는 인접해 있는 4대 패왕의 국경선 쪽 병력들이 이전보다 한층 늘어났다는 소식입니다.”

“4대 패왕 전부?”

“네.”

“허어… 그러면 매우 위험한 것 아닌가? 지금 저 잔챙이 세력을 잡아먹으려고 등을 돌리다가 칼에 맞을 수도 있잖아?”

“다행히도 보고에 의하면 병력을 충원하기는 했지만 당장 쳐들어올 정도의 규모까지는 또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단순히 우리를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처럼 보입니다.”

“견제?”

르기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세력을 늘리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확실히, 우리가 소규모 영지 네 곳을 모두 흡수하면 그땐 4대 패왕도 부럽지 않은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게 될 테니까요.”

“흠… 그러면 어떡해야 좋단 말인가? 이대로 멈추면 캉베 등 세력이 뭉쳐서 우리를 견제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애초에 마왕들끼리 연합을 맺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않습니까?”

“하지만 최근 투할과 아스모데의 경우도 있지 않았는가?”

“그건 둘이 어릴 적부터 매우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특수 케이스라고 판단됩니다.”

“흠….”

“하지만 마왕님의 걱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준비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어떻게 말인가?”

르기에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면 주인님의 탄신일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한 파티를 그때 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파티에 4대 패왕을 특별히 초대하는 겁니다.”

“4대 패왕… 그들이 여길 올까?”

“아마 올 것입니다. 지금 주인님의 입지는 작년과는 차원이 다르니까요. 아마 현재 주인님이 어느 정도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분명 방문할 것이리라 예측합니다. 그때 친목을 도모하면서 이런 조건을 거십시오. 남은 캉베, 리사크, 펠로슈브 영지를 우리 5명이 나눠서 지배하자고 말입니다.”

“남은 세 영지를 나눠 갖자고?! 그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물론 실제로는 우리가 다 먹을 겁니다. 말로만 그렇게 약속하시면 됩니다.”

“말로만? 그게 가능하리라 보는가? 4대 패왕 놈들이 얼마나 욕심이 많은 놈들인지 자네도 알지 않나?”

“저도 압니다. 하지만 당장 4대 패왕 모두 현재 병력을 끌고 침략해 올 여건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 타 차원 정복 작업에 돌입한 것은 너무도 유명하지 않습니까? 안에 심어놓은 스파이들도 한결같이 같은 말을 하고 있고 말입니다.”

“음….”

“캉베 등 세력을 흡수할 타이밍만 적절히 잡으면 됩니다. 4대 패왕이 차마 대비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모든 힘을 흡수하게 되면, 그땐 4대 패왕들도 어쩔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주인님께서는 보유하게 됩니다.”

생각에 잠긴 텐자흔을 향해 르기에는 일단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일단은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일 뿐,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주인님의 의견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합니다. 다만, 4대 패왕을 파티에 초대하는 건 필수입니다. 그들 모두가 파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이 대륙 내에서 주인님의 위치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게 됩니다.”

“음… 그렇겠군.”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허락만 하신다면, 파티 관련 준비는 제가 다 알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난 자네의 의견을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지.”

텐자흔은 왕좌에서 일어난 뒤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르기에는 말없이 계속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어차피 내 의견에 따를 놈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잠깐 한 그는, 이내 다시 몸을 돌려 로한을 향해 지시를 했다.

“비서실장으로서의 첫 임무를 내리지. 지금 즉시 4대 패왕 영지로 보낼 사절을 자네 손으로 뽑도록 해라. 혹시나 타 영지에서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으니, 충성심이 강한 상위 귀족 이상으로 엄격하게 선별하도록.”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이며 대답한 로한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직접 사절을 뽑으면 내 계획을 진행하기 훨씬 수월해지겠군.’

지금까지는 그의 위치상,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행동하긴 힘들었었다.

하지만 최상위 귀족에다가 텐자흔의 최측근인 비서실장의 자리에 오른 지금부터는, 이전 리사크 마왕성에 보냈던 쪽지에 적어놓은 ‘도발 작전’ 등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 * *

잠시 후.

비서실장이 되어서 이번에 드디어 배정받게 된 개인 집무실으로 들어선 로한은, 우선 도청 장치 등이 있는지부터 시스템을 통해 확인해 보았다.

[…검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어떠한 탐지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좋군.”

다행히 이곳도 안심할 수 있는 장소였다.

로한은 편한 마음으로 책상 앞 고급 가죽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댄 뒤, 속으로 지금 해야 할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혼란’에 필요한 정보부터 정리해보자.’

작전명 ‘혼란’.

텐자흔 세력은 물론, 더 나아가 데르툴 행성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회심의 작전을, 로한은 이번 파티 때 실행하려고 계획 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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