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콘록 혼자서 4대 패왕을 혼자 다 도발하겠다는 뜻인가, 이거?”
“그렇게 보입니다.”
“어떻게?”
묻는 리사크의 얼굴에는 불신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아무리 콘록이 지금 정보 본부장 위치까지 올라왔다 하더라도 4대 패왕을 혼자서 도발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이건 당장 르기에가 스파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행동이라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타바츠도 이번엔 리사크의 의견에 동의했다.
어떤 제정신 아닌 상관이 데르툴 행성에서 가장 강하다는 4대 세력을 죄다 도발하는 지시를 내리겠는가? 아마 이런 의견을 제시하자마자 바로 미친 데르툴족 취급을 받을 것이다.
이건 르기에가 아니라 마왕인 텐자흔이 스파이라 하더라도 부하들의 결사반대를 받을 의견이다.
“물론 정보부라는 부서 특성상 비밀 공작원들을 개인 의도대로 움직이는 건 가능하지만, 문제는 정보부를 완전히 휘어잡고 있다는 르기에의 존재 때문에 콘록 혼자서 마음대로 지시를 내리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믿고 실행하자고?”
“못 할 건 또 없지 않습니까?”
타바츠가 뭐 어떠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콘록이 차후에 어떤 계획을 보내오든 간에 4대 패왕과 텐자흔 사이에 이간질을 하는 건 지금 상황에서는 필수라고 봅니다. 지금 4대 패왕들이 텐자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텐자흔 세력의 확장세가 행성 전체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이런 보고를 듣고 그냥 한 귀로 흘릴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음….”
“정보를 뿌릴 때, 현재 킬라단 영지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구체적인 정보를 넣어주면 더욱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정보의 신빙성이 훨씬 더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타바츠는 설명에 쐐기를 박았다.
“4대 패왕이 어떤 식으로든 텐자흔을 견제해야 주인님께서 주변 마왕들을 흡수하기 더더욱 편해집니다. 당장 우리의 본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지. 맞아.”
다시금 자신의 본 목적인 캉베, 킬라단, 펠로슈브 영지의 흡수를 떠올린 리사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4대 패왕 쪽에 지금 말한 대로 소문을 쫙 내게. 그건 자네에게 맡겨도 되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주인님.”
“그리고 나중에 콘록이 그 ‘도발 작전’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보내오면 반드시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게.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보면 뭐 할 건데? 어차피 내가 하자는 대로 할 거면서.’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타바츠의 모습이었다.
* * *
데르툴 행성에는 20년 전부터 ‘5대 패왕’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이 행성 내에서 가장 강하고, 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는 5명의 마왕을 일컫는 단어였다.
‘명가의 혈통’ 카훌.
‘광폭’의 디하브.
‘한계를 뛰어넘은 마법사’ 위고스.
‘망자의 여왕’ 요르바.
‘투신’ 투할.
이 5명을 일컬어 5대 패왕이라 칭했고, 행성 내 데르툴족 중 그 누구도 이 5명이 대륙 최강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최근 투할 세력이 소멸당하면서 5대 패왕은 4대 패왕이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최근에 급상승하기 시작한 텐자흔 세력을 새로운 5대 패왕의 자리에 넣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의견이 더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현재 텐자흔까지 포함된 5개의 영지를 데르툴족들은 ‘4패 1강’이라는 단어로 부르고 있다.
이곳은 4대 패왕 중 가장 넓은 영지와 많은 데르툴족 병사를 보유하고 있는 카훌.
‘카인의 맹세’를 기억하는가? 그 카인이 바로 이 카훌 영지의 선조다.
3천 년 전 카인이 세운 이 영지는 지금껏 수많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카훌의 지배하에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데르툴 행성의 모든 영지 중 가장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영지. 그래서 카훌을 칭할 때 보통 ‘명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로 흔히 부른다.
“나의 주인이시여.”
그 카훌의 앞에, 한 거대한 데르툴족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예를 갖추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료.
카훌 세력의 2인자이자 총사령관인 그는 ‘금강’이라는 칭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생채기조차 낼 수 없는, 데르툴족 역사상 가장 튼튼하고 질긴 피부를 보유한 그를 가장 잘 표현하는 별명이었다.
화려한 왕좌에 앉아 있던 카훌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방금 정보부에서 받은 정보입니다.”
료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문서를 내밀었고, 카훌은 바로 받아서 읽어보았다.
곧 그는 피식 웃었다.
“세계 정복? 우리를 공격할 예정이라고? 큭…!”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그가 료한테 물었다.
“텐자흔 세력이 킬라단을 침범했다는 문서 내용은 사실인가?”
“킬라단 쪽 스파이들에게 확인한 결과, 사실이라고 합니다. 현재 총 40구역 정도를 빼앗았으며, 여전히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흐름이면 적어도 마왕성 근처까지는 무조건 진군할 수 있으며, 심할 경우에는 마왕성도 점령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료의 보고를 들은 카훌은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세계 정복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기존 투할 영지를 차지한 잔챙이들을 흡수하려는 건 확실해 보이는군. 이 정보, 어디가 출처인지 확인해봤나?”
“확인해 봤는데, 아주 높은 확률로 리사크 쪽에서 흘린 정보로 추측됩니다.”
“역시.”
카훌은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딱 봐도 우리보고 텐자흔을 견제해 달라는 의도로 뿌린 정보군. 지금 흐름만 보면 곧 리사크 세력이 텐자흔에게 흡수될 날도 머지않았다는 걸 본인들도 느끼고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그 눈치 빠른 타바츠라면 더더욱 체감하고 있겠지.”
완벽하게 리사크의 의도를 꿰뚫어 본 카훌.
하지만 그는 킬라단처럼 아예 정보를 무시하는 선택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텐자흔 놈들을 더 내버려 두긴 좀 그렇군. 요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너무 나대고 있어.”
카훌 입장에서는 어차피 급속도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저 텐자흔의 버릇을 한번 제대로 잡아놓긴 해야 했었다.
내가 먹지 않으면 먹히는 약육강식의 데르툴족 세계에서 계속 경쟁자가 강해지는 걸 지켜만 볼 정도로 카훌은 무르지 않다.
“현재 텐자흔 내에 우리 스파이들이 몇 명이나 있지?”
“총 34명이며, 상위 귀족은 3명입니다.”
“전원에게 지시를 내려라. 텐자흔의 진짜 목적이 뭔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알아와. 단, 절대 정체를 들키지 않는 선에서 움직이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텐자흔 국경선 쪽에 병사들도 좀 보강하고.”
“얼마나 보강하길 원하십니까?”
료의 물음에 카훌은 바로 대답했다.
“많이는 말고, 텐자흔 세력이 쳐들어왔을 때 우리가 대비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정도로만 충원하도록.”
“현재 텐자흔 세력의 전력을 생각해보면 예비 보충 병력을 대부분 국경선에 보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진행 중인 ‘진’ 대륙 정벌에 당분간은 추가 병력을 보낼 수 없게 됩니다.”
“어쩔 수 없어.”
카훌은 대답을 이었다.
“국경선 너머의 세력을 만약 텐자흔 혼자 통솔하고 있었다면 국경선에 지금 규모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해. 그 단순하고 멍청한 텐자흔이 우두머리라면 설사 4대 패왕 병력 모두를 갖고 있어도 전혀 무섭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텐자흔 세력을 움직이고 있는 이는 르기에야, 르기에!”
“…….”
“이전에 내가 불가침조약 계약을 위해 투할의 마왕성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지. 그때 르기에를 봤었다. 그 천하의 투할이 옆에 있는데도 혼자서 주체적으로 모든 부하들을 통솔하면서 작전을 첨언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었지. 그때 첫인상에서 나는 느꼈다. 저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왕이 될 것이라고. 투할의 곁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이 데르툴 행성 전체를 뒤흔들만한 재목이라고.”
“…….”
“결국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어. 마왕이 아닌 텐자흔의 밑에서 활동하는 게 예상외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똑똑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자신의 목표를 빨리 이루기 위해서는 그 멍청한 텐자흔 밑에서 전권을 쥐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조용히 듣고만 있는 료를 향해 카훌은 말을 이었다.
“만약 텐자흔 세력의 목표가 정말로 세계 정복이라면 반드시 르기에는 나를 포함한 4대 패왕 세력을 점령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공작을 펼칠 것이다. 그 공작 중에는 우리가 미처 간파할 수 없는 예상치 못한 신박한 작전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 공작 한두 개에 휘둘리는 순간 가장 위험해지는 건 국경선 쪽 병력이야. 설사 그런 상황이 현실이 되더라도 충분히 우리가 전력을 추스르고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 만큼의 병력은 배치해 둬야 해. 무슨 소리인지 이해됐나?”
“이해했습니다, 주인님.”
“그럼 가보도록. 병력 배치는 알아서 하고.”
곧 공손히 허리를 숙인 후 뒤로 물러나는 료.
홀로 남은 카훌은 생각에 잠겼다.
‘타바츠, 그놈의 머리를 생각해보면 아마 나를 포함한 4대 패왕 놈들한테 전부 다 이 자료를 뿌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셋, 디하브, 위고스, 요르바가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대충 예상되었다.
‘아마 높은 확률로 나와 비슷한 대처를 하겠지. 셋 다 지금 다른 차원 정복하느라 정신없는 상황일 테니까.’
일단 4대 패왕 세력이 아직까지도 텐자흔 세력을 내버려 두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넷 다 현재 다른 차원 정복 작업 중이기 때문이다.
카훌 역시 ‘진’ 대륙을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의 상황이고, 나머지 셋 역시 아직 한창이라 마무리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으로 안다. 그래서 다들 병력을 텐자흔 쪽으로 보낼 여력이 거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느 한 세력이 먼저 대놓고 견제를 하기 시작한 순간 지금까지 팽팽했던 4대 패왕 세력 간의 균형에 금이 가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이 데르툴 행성 전체가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패왕 놈들 모두 국경선 쪽에 병력을 충원하는 것만으로도 텐자흔 세력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눈치 빠른 르기에라면 그 순간 4대 패왕이 모두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당분간 대놓고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만으로도 리사크 등의 네 세력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모른다. 은밀하게 4대 패왕 세력을 어떤 식으로 견제할지, 혹은 이간질을 할지. 역사적으로도 대규모 세계 대전은 아주 사소한 분쟁에서부터 시작한 적이 많았다.
‘빨리 진 대륙 정벌을 완료해야겠군. 왠지 느낌이 안 좋아.’
텐자흔이든 다른 세력이든 간에 왠지 곧 큰 도화선이 당겨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카훌의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