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르기에와 면담을 마친 로한은 일찍 마왕성을 나왔다. 오늘 부상 여파도 있고, 막 작전을 끝내고 돌아온 터라 르기에가 일찍 퇴근을 시켜준 것이다.
마왕성 바로 옆에 마련된 거처로 돌아온 로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머릿속에서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시 장치 탐지 시스템’을 활성화합니다.]
[현재 공간 내부에 몰래카메라 및 도청 등의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지 검사 중입니다….]
[검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어떠한 탐지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항상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의무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텐자흔 쪽에서 언제 또 몰래 도청 등의 감시 장치를 설치해 놨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오늘도 없었고, 로한은 안도하면서 군화를 벗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후… 자, 다시 정리해보자.”
로한은 편하게 고급 소파에 드러누워서, 다시 한번 오늘 르기에에게 얻은 정보를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 르기에는 텐자흔 세력을 이용해 엘도르, 지구를 침범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2. 텐자흔의 능력으로 인해 엘도르, 지구의 한참 전 과거로 차원 이동을 해 침범하면, 두 차원 모두 절대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당장 현실에서도 두 차원 모두 운 좋게 간신히 막아냈는데, 과거로 돌아간다면 막아낼 재간이 없겠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100% 확률로 필패다. 그러므로 무조건 막아야 한다.
로한은 계속 속으로 정리를 이어갔다.
3. 텐자흔의 두 차원 공격 시기는 기존 투할 세력을 넷으로 나눠 가진 리사크, 캉베, 킬라단, 펠로슈브의 영지를 흡수한 이후다.
4. 그 전에 막아야 하므로, 절대 네 세력을 흡수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5. 텐자흔의 야욕을 견제함과 동시에, 르기에의 계획을 최대한 차질이 생기게 망가뜨려야 한다. 그래서 계획 실행 날짜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이득이다.
이렇게 정리를 마친 로한은 생각했다.
‘흠… 일단, 당장 내일 있을 킬라단과의 전쟁부터 손을 쓰는 게 답이겠군.’
우선 킬라단이 쉽게 점령당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방해해서 최대한 타격을 덜 입게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로한은 이번 전쟁 때 의심을 받을 행동을 해선 안 된다.
‘르기에의 계획을 망가뜨리려면 무조건 텐자흔의 신임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최대한 그들과 가까이 붙을 수 있고, 동시에 방해 작전을 성공시키기 쉬울 테니까.’
여기까지 생각한 로한은 고민에 빠졌다.
내일 있을 텐자흔의 침략을 방해하면서도 정작 핵심 멤버로 있는 로한 본인은 활약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이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하지만, 그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다른 이도 아닌 로한이다. 데르툴족을 상대로 한 전투 및 전략 경험이 그 누구보다도 풍부한 베테랑 말이다.
‘이럴 때 지구에서 수많은 스파이 임무를 경험했던 게 도움이 되는군.’
과거의 기억을 다시 꺼내서 되짚기 시작한 로한은 곧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후 텍스트 파일로 깔끔하게 정리해서 저장한 그는 근처에 몰래 숨겨놓았던 마정석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마기를 불어넣어 전원을 켠 뒤, 연결이 되었다는 신호가 들려오자마자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텍스트 파일에 적어놓은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여기는 ‘콘록’이다. 텐자흔은 기존 리사크 세력을 공격할 계획을 취소. 내일 킬라단 세력을 공격하기로 수정했다. 문제는, 현재 르기에의 계획에 따르면 리사크를 점령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지금부터 오늘 입수한 르기에의 진짜 목적에 대해 알려주겠다. 르기에는 텐자흔 세력을 이용해….”
한참을 통신기에 얘기하던 로한은, 텍스트 파일에 적은 문장을 다 읽고 나서야 통신기의 전원을 다시 껐다.
‘이제 첩보 연락처에서 이 내용을 그대로 리사크 마왕성에 전하겠지.’
속으로 생각하는 로한은 계속 오른손에 쥐고 있는 통신기를 다시 집어넣지 않았다. 보통 이렇게 보고를 하면,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바로 통신기로 답변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텐자흔 마왕성 근처의 비밀 지하 공간에 위치한 리사크 세력 첩보 연락처. 일명 ‘레오.’
로한의 통신을 받은 직원이 곧바로 해당 내용을 프린트해서 부대장에게 넘겨주었다.
내용을 모두 읽은 부대장은,
“특급 기밀이니, 긴급 연락망을 통해 지금 바로 마왕성으로 보내.”
“넷.”
“그리고 너는, 미리 하달받았던 내용부터 먼저 콘록에게 보내고.”
이어 지시를 받은 옆의 직원이 되물어 왔다.
“본래는 마왕성에서 답변이 왔을 때 같이 보내는 게 맞지 않습니까? 두 번 연달아 통신하면 들킬 가능성이….”
“지금은 두 번이 아니라 한 번도 위험해.”
콘록으로 위장한 로그한을 제외한 나머지 셋이 모두 정체를 들킨 지금, 텐자흔 마왕성 내의 감시망은 그 어느 때보다 삼엄한 상황이다.
“마왕성에서 올 답변은 정말 급한 게 아니면 킬라단 쪽 국경선 근처에서 따로 받도록 얘기해 놨으니까 걱정 말고 보내.”
“넷.”
그렇게 둘이 각기 다른 쪽으로 정보를 수신하고 있을 때, 부대장은 나머지 부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나머지는 돌아오는 새벽까지 철수 준비를 마치도록 한다.”
“넷.”
얼마나 감시가 삼엄하면, 지금까지 한 번도 들키기 않고 잘 유지되어 왔던 이 비밀 장소를 떠나려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최대한 마왕성과 먼 곳으로 이동해서 다시 자리를 잡으려는 것이 부대장의 계획이었다.
그때였다.
콰앙!
“……!”
근처에서 들려오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이건 분명, 그들이 숨어 있는 이 지하 건물 입구의 문을 부수는 소리였다!
동시에 들려오는 다수의 데르툴족의 발소리에 부대원들의 얼굴빛이 모두 변했다.
“…들켰다.”
부대장이 낙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필 재수도 없게 도망치기 딱 하루 전에 위치가 발각될 줄이야.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이제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모두 ‘소각’ 작전에 돌입한다.”
부대장이 모두를 돌아보며 지시했고, 그 말을 들은 대원들의 두 눈동자는 크게 떨렸다.
‘소각’ 작전을 실행하는 순간, 여기 있는 이들 역시 더 이상 두 발로 서 있지 못하게 된다는 걸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스파이로 지원한 그들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곧 비장한 표정으로 바뀐 부대원 모두는, ‘소각’ 작전을 완료하기 위해 각자 맡은 임무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콰앙!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왔다! 스파이들아!”
“당장 나와라!”
그 와중에 점점 문이 부서지는 소리, 외치는 목소리도 점점 가까워져 갔다. 몇 분만 지나면 바로 이 비밀 공간 안까지 들어올 기세였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바로 코앞까지 가까워졌을 그때.
“‘소각’ 작전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부대원 중 한 명이 부대장을 향해 마지막 보고를 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부대장은 마지막으로 부대원들의 얼굴을 일일이 한 번씩 다 바라본 뒤, 벽 한쪽의 비밀 공간의 문을 열고 안에 설치되어 있던 빨간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비밀 기지 내부에 설치되어 있던 마법진이 가동했고,
콰아아앙!
곧 공간 전체가 강력한 폭발에 뒤덮였다.
* * *
잠시 후.
늦은 밤, 숙소에서 쉬고 있던 로한은 급히 다시 마왕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군용차에서 내리자마자 뛰듯이 마왕성 내 정보부 사무실로 들어온 로한.
“빨리 와!”
오자마자 르기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에게 외쳤다.
경례 후 로한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방금 전, 마왕님의 직속 친위대가 마왕성 옆 72구역에 숨어 있던 리사크 세력 쪽 스파이 부대를 급습했다.”
“……!”
로한은 속으로 놀랐다.
72구역이라면, 아까 전 그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레오’ 첩보 부대가 있는 위치 아닌가?
“아쉽게도 급습과 동시에 모두 자결을 선택하는 바람에 아무도 생포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좌표 두 곳을 획득할 수 있었다.”
르기에는 로한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두 곳이 어디일 것 같나, 본부장?”
차가운 그의 말투를 들은 로한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한 곳은 리사크 영지 내가 확실합니다. 여기서 받은 정보를 리사크 쪽에 보내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다른 한 곳은?”
“72구역이라면 마왕성과 붙어 있는 구역. 즉, 마왕성 내부의 첩자와 통신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로한의 대답을 들은 르기에는 그의 두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
긴장감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곧 르기에의 입이 열렸다.
“정확하군. 어떻게 알았지? 마치 직접 첩보를 받은 당사자처럼 말이야.”
누가 봐도 의심하는 듯한 그 말에, 로한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총사령관님의 가르침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내가 뭘 가르쳤는데?”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시야를 좁게 보지 말고 넓게 보라고 말입니다. 그 가르침대로 넓고 깊게 생각한 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말을 들은 르기에는 한참을 침묵했다.
숨 막히는 분위기가 잠시 이어졌지만, 그것은 르기에가 미소를 지으면서 일순간 풀어져 버렸다.
“정말 대단하군. 그저 지나가듯 한 말도 놓치지 않고 되새김질을 하다니.”
“감사합니다.”
르기에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자네 말대로, 좌표 하나는 리사크의 마왕성 쪽으로 확인되었고, 두 번째 좌표는 마왕성 내 간부 숙소 5동으로 확인되었어. 5동에 누가 거주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나?”
“5동이면, 주인님의 경호 부대원들이 묵는 곳 아닙니까?”
“그래. 그래서 지금 친위대가 5동 숙소 안에 있던 전원을 긴급 체포해서 지하 감옥에 가둬놨어. 지금부터 자네는 직원들과 함께 그들을 심문해서 누가 스파이인지 알아내도록. 내일 킬라단을 치기 전까지 찾아내야 해.”
“넷.”
곧 로한은 남은 정보부 직원들을 이끌고 지하 감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하는 로한이었다.
‘‘레오’ 부대가 마지막 ‘소각’ 작전을 성공시켰나 보군.’
역시 스파이인 로한은,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소각 작전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았었다. 소각 작전을 크게 세 개로 나누면,
1. 가지고 있던 모든 정보를 파기시킨다.
2. 교란 통신 작전을 펼쳐, 평소 자주 정보를 주고받던 타 스파이가 최대한 의심받지 않도록 만든다.
3. 생포당하지 않도록 전원 자결한다.
이렇게 정리할 수가 있다.
‘레오’ 부대는 자결 직전, 간부 숙소 5동에 일부러 통신 연락을 시도해, 지금처럼 르기에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도록 만든 것이다.
덕분에 애꿎은 경호 부대원들이 개고생을 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로한은 더 의심을 안 받게 되었다.
‘그나저나, 내 제안을 타바츠가 그대로 잘 따라주려나?’
만약 리사크 마왕성 측이 로한의 제안대로 따라준다면, 르기에의 계획을 방해하는 게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안 따라준다면, 앞으로 로한의 앞길은 험난할 수밖에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