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지금까지 로한이 이곳 정보부에서 받아본 정보들은 1등급 이하의 것들이었다. 마왕의 최측근만이 공유한다는 ‘특급’ 정보는 아직 받아보지 못했다.
그걸 지금 르기에가 말해주려는 것이다.
“지금부터 말하는 정보는 주인님과 나를 포함, 사령관급의 최상위 귀족들만 알고 있는 극비 중의 극비다. 당연히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정보이며, 발설하는 즉시 소멸될 수 있다는 점 알아두도록. 알겠나?”
“넷.”
르기에는 곧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줘야 할까…. 그래, 이래야 이해하기 편하겠군.”
머릿속으로 정리를 마친 듯한 그가 입을 열었다.
“일단 내일, 텐자흔의 주력 부대는 킬라단 영지를 향해 진군할 예정이야.”
“킬라단…. 리사크가 아니군요.”
“그러려고 했는데, 이번에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어. 폭파 공작 이후 리사크 세력 쪽에서 병력 대부분을 우리 쪽 국경선으로 배치하는 중이라고 하더군.”
“아….”
“문제는, 이 정보를 마지막으로 국경선 쪽 스파이들이 대부분 잡혀갔어. 공통점은 모두 다 이번에 폭파 공작을 도와줬던 애들이라는 점이지.”
로한을 쳐다보는 르기에의 시선이 갑자기 날카롭게 변했다.
“이건 텐자흔 내부에서 정보를 보내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하지. 잡혀간 이들 면면을 살펴보면 폭파 공작 이후 정보를 보낸 것이 확실한데…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가 질문해오는 순간, 집무실 내에 갑자기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부드러웠던 르기에의 주변 기운이 갑자기 냉랭해진 탓이었다.
하지만 로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잡혀간 이들 중에 이중 스파이가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이중 스파이?”
“네. 제 부하였던 사후바 같은 놈들처럼 말입니다. 카인의 맹세를 받지 않았던 중급 이하의 스파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파이를 다시 회유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어.”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후바 등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요.”
로한의 대답이 끝난 후, 잠시 침묵이 감도는 집무실 안.
하지만 이내 르기에가 미소와 함께 분위기를 풀면서, 주변에 팽팽했던 긴장감도 일순간 사라졌다.
“나랑 생각이 똑같군. 역시 내 안목은 잘못되지 않았어. 자네는 정보부에 딱 어울리는 적임자야.”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더 배워야 할 게 많아.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나무 대신 숲을 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지게. 그래야 내 밑에서 오래 머물 수 있을 거야.”
“넷.”
로한은 르기에의 의미심장한 말에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최대한 빨리 정보를 캐내고 돌아가야겠다. 밑에서 일하기 힘든 스타일이야.’
지금 르기에는 또 그의 정체를 의심한 게 아니었다. 단지, 로한이 자신의 원하는 수준의 답변을 할 수 있는지 테스트해본 것뿐이었다.
문제는 저런 상황이 매번 발생할 테고, 그러면 스트레스는 기본으로 딸려온다. 지구에서도 가장 강한 멘탈을 가진 사이보그로 정평이 나 있는 로한이지만 별로 그런 상황을 오래 겪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대부분의 스파이가 잡혀갔고 남은 스파이들 역시 의심받지 않기 위해 당분간은 첩보 활동을 못 하는 상황이야. 그 정도로 리사크 마왕성 쪽이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지금 공격하는 건 오히려 손해를 볼 가능성이 더 높아.”
“그래서 다른 세력을 공격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리사크를 반드시 공격할 것이라는 걸 모두가 눈치챈 이 시점에 말입니다.”
“그렇지. 예상대로 이미 다들 방심하고 있더군. 보게.”
르기에는 옆의 서류를 로한에게 내밀었다.
서류를 읽기 시작한 그를 향해 다시 말해오는 르기에.
“오늘 킬라단 쪽 국경선에 잠입한 스파이들이 보내온 정보를 정리한 문서다. 대부분의 병력이 펠로슈브 쪽으로 이동해서 거의 텅텅 빈 수준이라고 적혀 있지.”
“음… 이게 사실이라면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할 수 있겠군요.”
“단순히 점령으로 끝나면 안 돼. 킬라단의 전력이 다시 회군하기 전까지 최소 마왕성 근처까지 진군해야 해. 지지부진하는 순간 다른 세력들이 결집하고 말 테니까.”
다행히 지금까지 얻은 정보에 의하면, 전력을 집중하면 마왕성 근처까지는 수월하게 점령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대부분의 핵심 전력을 이번에 대부분 투입할 예정이다.
“자네도 나랑 같이 출전할 준비를 해야 할걸세.”
“알겠습니다.”
로한은 바로 대답했다.
“그런데 총사령관님.”
이후 그는 이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어보았다.
“도대체 이 많은 스파이들을 어떻게 심어놓으신 겁니까? 솔직히, 폭파 공작 당시 8구역 전부 상급 귀족 스파이가 한 명 이상씩 파견되었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랐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상급 귀족 스파이는 10명이 채 안 될 정도로 굉장히 희귀하지 않습니까?”
르기에는 블랙커피를 입에 가져가면서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동안은 ‘특급’ 기밀이라 말하지 않았었는데, 자네에게는 말해도 되겠지.”
“감사합니다.”
“주인님의 능력을 이용한 것일세.”
텐자흔의 능력이라면, 과거로 돌리는 힘을 얘기하는 것이다.
“주인님은 원하는 모든 걸 과거로 돌릴 수 있지. 시간도 마찬가지야.”
“시간도… 말입니까?”
“물론. 자네가 물어본 스파이들도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사용했기에 가능했지.”
놀란 로한에게 르기에는 설명을 이었다.
“미리 정찰을 통해 우리 영지와 맞닿은 국경선 쪽의 모든 상황을 미리 파악해놓은 뒤, 마왕님의 능력을 이용해 시간을 하루 전으로 되돌렸었지. 그다음 경계가 가장 취약했던 곳으로 땅굴을 파는 거지.”
“아! 그런 식으로…!”
“그래. 국경선 근처 거리면 하루 만에 충분히 팔 수 있으니까. 자네도 이 방법을 이용해 잠입했던 걸세. 그전까지는 아마 몰랐을 거야.”
“정말 전혀 몰랐습니다.”
감탄하는 연기를 하는 로한.
이후 그는 바로 떠오른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마왕님의 능력을 이용해 전쟁을 벌이면 더 쉽게 정복이 가능하겠군요. 가장 적들이 방심하고 있는 대치 구간을, 시간을 돌려서 급습하면 훨씬 편하지 않습니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 하지만 문제는 주인님의 마기일세. 시간을 하루 전으로 되돌리려면 마왕님께서 보유한 거의 모든 마기를 사용해야 하거든.”
“아…!”
“자네도 알겠지만, 전쟁 때는 최상위 귀족 이상의 핵심 멤버들의 전력이 제일 중요해.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마왕끼리의 대결 결과에 따라 승패가 결정 나는 경우가 많아. 그런 마왕님이 모든 마기를 사용한 상황에 전쟁을 일으키면 십중팔구는 패배하겠지.”
“그래서 이번에는 힘을 아끼고 계신 거군요.”
“그 이유도 있고. 이전에 시간을 하루 돌렸을 때의 마기를 아직 회복하지 못한 이유도 있어.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지.”
로한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르기에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르기에는 다시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셔 입을 축인 후 말을 이었다.
“다른 차원의 정복을 위한 준비 때문일세.”
“차원 정복…!”
“그래. 지금 전쟁을 일으켜 타 영지를 빠르게 흡수하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야. 마왕님이 포탈을 연 뒤, 당분간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도 다른 차원을 수월하게 정복할 수 있을 만큼의 강대한 전력을 얻기 위함이야.”
르기에의 말을 듣고 있는 로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이게 본 목적이었군.’
어쩐지 데르툴 행성 내 다른 세력들이 모두 경계할 정도로 급속도로 세력을 늘리는 게 이상하다 싶더라니, 역시 타 차원 점령을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그런데, 포탈을 열고 나서 마왕이 힘을 못 사용한다고?’
로한은 유난히 거슬렸던 그 한 문장에 대한 질문을 했다.
“마왕님이 당분간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차원 이동 포탈에 마왕님의 고유 능력을 사용하기 위함이네.”
“포탈에…?”
“정복하려는 다른 차원의 시점을 과거로 돌리는 능력이지.”
“!”
놀라 눈이 동그래진 로한을 향해 르기에는 말을 계속 이었다.
“주인님의 말씀으로는 가장 난도가 높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도 높다고 하더군. 그만큼 체내의 마기를 많이 사용해서 이후 한동안 누워서 생활해야 할 정도로 후유증도 심하고.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쉽고 수월하게 다른 차원을 정복할 수 있겠지.”
말을 듣던 로한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과거로 이동해서 행성을 쉽게 정복하려면, 해당 대륙에 대해서 사전에 정말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설마?’
로한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바로 물어보았다.
“혹시 그 행성이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까?”
르기에는 바로 대답해 주었다.
“엘도르, 그리고 지구.”
“!!”
순간 로한의 두 눈동자가 크게 떨렸지만, 막 커피를 입에 가져가던 르기에는 그걸 보지 못했다.
다시 찻잔을 내려놓은 그는 말을 이었다.
“자네도 소문으로 얼핏 들어서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전에 섬겼던 투할이, 엘도르와 지구라는 두 차원의 연합군에 의해 당했다는 걸.”
“…….”
“내가 텐자흔 님의 밑에 들어간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엘도르, 그리고 지구. 두 곳의 차원에 복수하기 위해서지.”
말을 잇는 르기에의 두 눈동자에 불길이 점점 솟아오르는 것을, 로한은 확인할 수 있었다.
“난 그 누구보다 엘도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데르툴이다. 그리고 지구에 대한 정보는, 운이 좋게도 샤훌리트 세력을 흡수하면서 얻게 되었지. 고맙게도 침략을 앞둔 시점이라서 사전 조사가 아주 잘되어 있더군. 굳이 더 우리가 조사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어.”
“…….”
“이런 상황에서, 이전 투할 세력보다 훨씬 더 강해진 주인님의 세력이 시간을 과거로 돌려서 침략한다? 장담하지. 두 차원 중 어느 한 곳도 절대 오래 버티지 못해.”
대답이 없는 로한에게 계속 설명하는 르기에의 미소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이 계획의 준비는 내가 텐자흔 님 밑에 들어갈 때부터 시작되었어. 이제 실행될 날도 머지않았다. 마왕님의 마기도 많이 회복된 상태고, 이제 남은 건 근처에 있는 눈엣가시 같은 네 개의 마왕 세력을 흡수하는 것뿐이야.”
“…….”
“이제 자네도 깨달았을 거야. 하루라도 빨리 주변 세력을 흡수하면, 주인님의 계획의 실행 날짜가 더 빨라진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자네도 내일 있을 전투에 전력을 다하게. 내가 아닌, 주인님을 위해서 말이야.”
“넷.”
겉으로는 힘차게 대답한 로한.
하지만 속은 이미 덜컥 내려앉은 상태였다.
‘설마했는데, 이 새끼… 자신의 복수를 위해 텐자흔 세력 전체를 이용하고 있었을 줄이야!’
말로는 텐자흔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로한이 듣기에는 르기에 본인을 위한 원대한 계획일 뿐이었다. 문제는 이런 그의 계획을 텐자흔이 맹목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분위기라는 거다.
사실상 작전에 대한 전권을 현재 르기에가 지휘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건 무조건 실행이 되기 전에 막아야 하겠군.’
로한은 바로 마음을 먹었다.
몰래 엘도르로 돌아가서 구원 병력을 데리고 오든, 아니면 혼자 해결하든 간에 최소한 계획 실행 날짜가 무조건 늦춰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완전히 망가뜨리면 더더욱 좋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