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로한은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총사령관님.”
“그래요…?”
르기에는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이상하군. 그런데 왜 낯익은 느낌이 나는 거죠?”
“같은 내 부하라서 그런 거 아니겠나?”
대답은 뒤에 앉은 텐자흔이 대신했다.
“행여나 다른 세력의 스파이라는 의심은 할 필요가 없어. 그랬으면 내가 벌써 눈치챘을 테니까. 난 내 부하들을 스파이로 보낼 때 반드시 ‘카인의 맹세’를 시키고 보내거든.”
“맹세를 말입니까?”
“그래. 지금 눈앞의 네 명의 몸에선 계약을 통해 묶여 있는 뇌핵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느껴져. 만약 스파이라면 전혀 느껴지지 않았을 그 기운이 말이지.”
텐자흔의 설명을 듣고 있던 로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콘록의 내핵을 가져오길 잘했군.’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몇 시간 전 뇌핵을 챙기는 순간적인 판단을 한 자신을 엄청나게 칭찬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알겠습니다.”
곧 르기에가 대답과 함께 로한의 곁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일단 위기는 넘겼다.
“안 그래도 잘 왔어. 자네와 상의할 일이 막 생겨났는데 말이지.”
텐자흔이 왼쪽 옆의 최상위 귀족에게 손짓을 했고, 그는 들고 있던 서류를 바로 르기에에게 내밀었다.
“콘록이 가져온 리사크 세력의 정보야. 그걸 잘 정리해서 나에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리고 이놈들의 공을 치하해야 하는데, 어느 수준이 좋겠는가? 의견을 한번 내보게.”
르기에는 바로 의견을 꺼냈다.
“역시, 최고의 포상은 승진 아니겠습니까?”
“승진이라…. 어느 수준까지 말인가?”
“제가 투할 밑에 있을 때도 무사히 살아 돌아온 상급 귀족 스파이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때문에 당시에도 귀환한 스파이들은 최소 2계급 이상의 특진을 시켰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그렇게 포상을 내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위험한 스파이 임무에 자원하는 이들이 더 많아질 테니 말입니다.”
“흠… 일리 있는 말이군. 그런데, 비어 있는 상위 직급이 있나?”
“네, 주인님.”
르기에는 콘록을 바라보며 의견을 이었다.
“저는 이들을 참모본부에 배정했으면 합니다.”
“호오~ 그렇다면 자네 바로 직속 아닌가?”
“그렇습니다. 마침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텐자흔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그 정도면 이놈들에겐 정말 과분한 포상이로군. 큭큭큭….”
소리 죽여 웃는 텐자흔. 그 와중에도 르기에는 부복한 로한의 정수리 쪽으로 계속해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받고 있는 로한은,
‘예상했던 결과 중 가장 좋은 결과다.’
라고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르기에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면서 최대한 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게 로한의 바람이었는데, 무려 직속 부하로 배정이 된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지만, 한 가지 불안한 점도 생겨났다.
‘더더욱 행동거지를 조심해야겠어. 조금만 삐끗해도 바로 정체를 들킬지도 모른다.’
속으로 생각하는 로한은, 지금 르기에의 시선이 자신의 정수리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아직도 자신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다는 증거다.
거기에 현재 르기에는 어지간한 마왕급 마기를 보유한 존재…. 이런 놈의 밑에서 몰래 정보를 수집하는 스파이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아닐까?
* * *
참모본부는 무려 마왕성 내부에 사무실이 있었다.
위치는 마왕의 침실 바로 옆이었다. 사실상 마왕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귀족들이 모여 있는 부서라는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위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르기에는 로한 등을 데리고 바로 참모본부로 향하지 않았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마왕성 깊은 지하였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서 르기에는 설명했다.
“참모본부는 주인님과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곳이며, 동시에 가장 극비의 정보를 주고받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일하려면 그 누구보다 주인님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야 한다.”
말이 끝나는 타이밍에 일행들은 계단 끝에 도달했고, 동시에 정면의 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일제히 경례와 함께 문을 열었다.
문 안쪽에는 수많은 철창들이 보였다. 딱 봐도 감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르기에는 말을 이었다.
“당연히, 절대로 다른 세력과 연관되어 있는 이는 들어올 수 없는 부서지. 그래서 너희들은 한 가지 테스트를 더 거쳐야만 한다.”
“……!”
“물론, 카인의 멩세까지 한 너희들의 정체를 의심하는 건 아니야. 단지 참모본부의 일원이 되기 위한 필수 절차일 뿐이니, 이해 바란다.”
살짝 눈동자가 흔들리는 일행들을 향해 르기에는 미소와 함께 그리 말했다. 이후 그는 옆에 서 있던 감옥 내 병사에게 눈짓을 했다.
병사는 익숙하게 한 감옥으로 향한 뒤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문 안쪽으로 르기에는 일행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안에는 네 명의 포로가 꽁꽁 묶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흐리멍덩한 걸 보니 이미 마법으로 세뇌된 지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모두 리사크 세력의 병사들이다. 스파이도 있고, 국경선 근처에서 공작을 펼치면서 생포해 온 놈들도 있지.”
“…….”
“최근에, 리사크의 마왕성에서 스파이를 대거 파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모두 ‘카인의 맹세’까지 했다고 하더군.”
“!”
또 한번 일행들의 눈이 흔들렸다.
몇몇 최상위 귀족만 알고 있는 이 극비 정보를 어떻게 르기에가 알고 있단 말인가!
텐자흔 세력의 엄청난 정보력에 일행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그때.
“이걸 하나씩 받아라.”
르기에는 일행들 모두에게 검을 하나씩 건넸다. 특이하게 검신이 온통 새까만 색의 알 수 없는 금속으로 제작된, 찌르는 공격에 특화된 레이피어 형태의 검이었다.
“처형 때 사용하는 검이다. 뭔지 알고 있겠지?”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한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 검은 뇌핵을 단번에 꿰뚫을 수 있게 디자인된 검이었다. 검은 금속의 검신은 마기를 더 빨리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어, 조금만 마기를 불어넣어도 꿰뚫은 뇌핵을 단번에 폭파시킬 수 있다.
“지금부터 너희는 이 검을 이용해 이 포로들을 한 명씩 소멸시킬 것이다.”
“!”
“만약 너희가 스파이가 아니라면 이들을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맞다면, 카인의 맹세로 인해 검을 찌르는 즉시 너희 머릿속 뇌핵도 파괴되겠지.”
설명을 듣는 일행들의 두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흔들렸다.
르기에는 짙은 미소와 함께 로한을 먼저 바라보았다.
“먼저 해라.”
“예.”
로한은 망설임 없이 정면의 포로를 향해 다가갔다.
검신 끝을 포로의 이마 정중앙에 겨누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걸 죽이면 기존의 뇌핵은 파괴되겠군. 하지만 상관없지.’
어차피 ‘카인의 맹세’를 전이시켰던 뇌핵은 이런 상황에서 사용하기 위한 소모품일 뿐이었다. 그리고 정작 콘록의 뇌핵은 아직 멀쩡한 상태로 남아 있으니 더더욱 문제될 것이 없다.
로한은 곧바로 힘껏 레이피어를 포로의 이마에 꽂아 넣었다.
푹! 소리와 함께 검이 박힌 것을 확인한 로한은 바로 마기를 불어넣었고,
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포로의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이후 검을 거둔 로한은 르기에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뒤로 물러났다. 로한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그를 바라보던 르기에는,
“다음.”
옆의 사후바를 향해 한마디 했다.
“…….”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어쩔 수 없이 검을 든 채로 포로를 향해 다가가는 사후바.
최대한 떨리는 티를 안 내기 위해 억제하고 있었지만, 레이피어를 쥔 손아귀가 축축해질 정도로 땀이 흘러나오는 현상은 어떻게 제어가 불가능했다.
‘어떡해야 하지? 이대로 찌르면 죽고, 그렇다고 반항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에 빠진 사후바의 머릿속은 거의 패닉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찌르면 죽고, 그렇다고 기습 공격을 펼친다고 해도 저 강한 마기를 뿜어내는 르기에를 이길 수도 없는 상황.
그때였다.
[그냥 찔러.]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마치 고막에 바로 속삭이듯 들려왔다.
이건… 분명 콘록의 목소리다. 그렇다면 로그한이 말하고 있는 건가?
[저놈들, 리사크 세력 소속이 아니야. 그래서 나도 찔렀는데 멀쩡했던 거야.]
‘……!’
[여기서 다른 행동을 하면 르기에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거야. 날 믿고 그냥 찔러버려.]
전음 시스템을 이용해 계속해서 설명한 로한.
이렇게 장담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까 전 포로를 죽였을 때, 체내에 보관된 기존 뇌핵이 터지지 않고 멀쩡했던 것이다.
왜 멀쩡했을까?
이유는 딱 하나다. 르기에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 리사크 세력이 아닌 다른 영지의 포로들을 데려다 놓은 것이다.
‘분명 나머지 셋도 똑같을 거야.’
로한의 그 예상은 적중했다.
퍽!
사후바의 레이피어에 의해 또 한 명의 포로의 머리가 파괴되었다. 하지만, 사후바는 아무런 이상 없이 멀쩡했던 것이다.
‘후우…!’
속으로 크게 안도하면서도,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사후바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로한에게 눈짓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나머지 둘도 똑같았다.
로한이 전음 시스템으로 안심시킨 차자, 하즈쿠슨은 사후바와 마찬가지로 행동했고, 둘 다 역시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마지막 타자인 하즈쿠슨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수고했다.”
르기에가 미소와 함께 그리 말했다.
“테스트에 합격한 너희들은 참모본부의 정식 일원이 되었다.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일행들은 안도의 감정이 담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콘록.”
르기에가 로한을 돌아보며 불렀다.
“넷!”
“너를 정보 본부장으로 임명한다.”
“감사합니다!”
정보 본부장이라면, 한국에서 중장, 최소 소장급에 달하는 위치다.
콘록이 기존에 소령급 위치였던 걸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특급 승진을 한 것이다.
“나머지 셋은 콘록의 직속 부하로 임명하겠다. 위험한 스파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한 것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파격적으로 승진시킨 것이니, 모두 앞으로 더더욱 충성을 바쳐 주인님을 섬기도록 하라. 알겠는가?”
“넷!”
“따라와라.”
르기에는 일행들을 데리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행들을 모두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온 르기에는 옆의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었다.
“받아라.”
로한에게 그것을 넘겨준 르기에는 말을 이었다.
“우리 영지 내 특급 기밀이 그 서류 안에 모두 담겨 있다. 오늘 안에 모든 내용을 숙지하도록.”
“넷!”
크게 대답한 로한의 시선이 절로 손에 든 서류 뭉치로 향했다.
‘드디어 이곳에 온 본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게 얻고 싶었던 르기에가 속한 이곳 영지에 대한 핵심 정보가, 지금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