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아바는 섬나라다.
수도인 방타리카를 포함,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와릉바랏 섬을 제외하고도 100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많은 섬에 모두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고, 5% 정도는 무인도다.
그중 가장 최남단에 위치한 무인도, 뭄바 섬.
평상시 해군들이 가끔 정찰을 위해 들르는 것 외에는 일이 없는 이 조용한 무인도에, 오늘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마법진 설치가 모두 끝났습니다.”
엘-카시안이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돌아와 말했다.
로한이 섬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에는 없던 마법진의 기운이 지금은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정말 강한 마법진이군요.”
“딘 님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용언 마법도 섞였으니, 설사 마족이 역으로 넘어온다 하더라도 최소 한 시간 이상은 끄떡없이 막아낼 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너도 고맙다.”
엘-카시안과 뒤따라 다가오는 딘에게도 인사하는 로한.
딘이 물었다.
“죽으러 갈 놈한테 이런 묫자리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내가 널 봐서라도 반드시 살아 돌아오고 만다.”
“유언장은 안 썼냐? 원한다면 내가 영구 보관 마법 걸어줄게.”
아예 죽으러 가는 사람 취급하는 딘을 로한은 한참을 째려본 뒤,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아린, 윌리엄, 에텔드리다 등 연합군의 핵심 멤버들이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로한은 아린에게 부탁했다.
“이제 갈 시간이야. 포탈 열어줘.”
아린은 고개를 끄덕인 후, 네모난 문틀 모양으로 세워진 정제된 마법석 건축물 앞으로 걸어가 두 손을 앞에 내밀었다.
곧, 그녀의 두 손에서 점점 푸른색의 마나가 뿜어져 나가 포탈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그 마나가 문틀 모양을 가득 뒤덮고, 이내 검은색으로 완전히 변한 뒤에야 아린은 손을 떼었다.
이전, 유키펠을 심문하면서 얻은 데르툴 행성 쪽 좌표로 향하는 포탈이었다.
로한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한마디를 남긴 후 로한은 포탈 안으로 모습을 감췄고, 동시에 포탈은 소멸되었다. 혹시 모를 역침입을 대비해, 일부러 한 명이 들어갈 정도로만 약하게 생성해둔 탓이었다.
“가셨군요.”
에텔드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뭔가 허탈하면서, 약간의 침울한 감정마저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무사히 돌아오시겠죠?”
걱정스러운 물음을 하는 그녀의 시선이 절로 옆의 아린에게로 향했다. 아린은 그녀와는 반대로, 평상시와 같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두 마왕들도 어쩌지 못했던 오빠예요. 오빠를 믿으세요.”
“그래요….”
에텔드리다의 시선이 다시 로한이 사라진 포탈 쪽으로 향했다.
그러는 그녀의 두 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로 꼭 쥔 상태였다. 평상시 테아이엘 여신의 이름을 대신해서 남에게 축복을 빌어주던 그 자세와 똑같았다.
‘제발 무사히 돌아오기를….’
속으로 기도하면서 그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기존 투할의 영지였던 곳은, 이제 네 개의 마왕 세력이 나눠서 가져간 상태다.
사이좋게 나눠 가진 건 아니다. 투할의 마왕성이 사라지자마자 서로 앞다투어 부하들을 보내서 한 뼘의 땅이라도 더 가져가기 위해 발악을 해댔으니까. 그 과정 속에서 타 세력 간의 국지전이 여러 번 펼쳐졌었다.
현재는 정확히 동서남북 방향으로 한쪽씩 땅을 나눠가진 상태. 더 이상의 전투 없이 약간의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며, 서로가 서로의 땅을 침범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 마왕 세력들의 핵심 요충지는 어디일까?
바로 기존 투할 영지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던 작은 산, 델센킬이다. 이곳은 무려 네 개의 마왕 세력의 국경선이 교차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곳보다 많은 병력이 몰려 있는 이곳의 산 정상은 그 누구의 영토도 아닌 공지(空地)다. 이곳에 어떤 한 세력이라도 발을 딛는 순간, 지켜보던 나머지 세력들이 벌 떼같이 달려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하나같이 좀 떨어진 산등성이에 국경선을 세운 뒤, 혹시나 누가 정상을 차지하지 않을까 24시간 내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다.
“…응?”
북쪽, 캉베 영지의 국경선 쪽에 서 있던 최상위급 귀족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에 힘을 주었다.
델센킬 산 정상 부근에, 무언가 변화가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차원의 틈이었다.
“델센킬 정상에 차원의 틈이 생겼다!”
그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차원의 틈이 생겼다? 그것은, 어떤 다른 세력이 저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병력들을 차원 이동시키는 것이 분명했다.
“당장 모든 병력을 소집해라! 정상으로 올라간다!”
곧 긴급 소집을 알리는 종소리가 사방에서 크게 울려 퍼졌고, 임시 보초 건물 안에 있던 병력 전원이 순식간에 국경선으로 집합했다.
이후, 지휘관인 상급 귀족의 명을 따라 일제히 정상 위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도달한 캉베 세력.
동시에, 병사들의 보고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남쪽에 킬라단 병력이다!”
“서쪽에 리사크 세력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동쪽에도 펠로슈브 놈들이…!”
캉베 세력 쪽 지휘관인 최상위급 귀족 한 명이 산 정상 전체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이 산 주위에 주둔하던 네 마왕의 세력 전체가 정상에 올라온 모습이었다.
이들 역시, 정상에 생긴 차원의 틈을 보자마자 병력을 끌고 정상까지 빠르게 달려왔던 것이다.
캉베 쪽 지휘관이 크게 외쳤다.
“누가 이곳에 차원의 틈을 열었는가! 당장 자백해라!”
그러자 다른 세력 쪽 지휘관들도 크게 외치는 모습이었다.
“리사크, 네놈들이 열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 목소리가 큰 걸 보니 킬라단, 네놈들의 짓이구나!”
“흥! 이건 캉베 놈들 짓이 분명하다! 이 정상 쪽과 국경선이 가장 가깝지 않은가!”
“뭐?! 감히 펠로슈브, 네놈들이 우리를 의심해?!”
“의심하면 어쩔 텐가! 한번 붙어보든가!”
“둘 다 닥쳐라! 둘 다 우리 킬라단 세력의 발톱 때만큼도 안 되는 놈들이!”
“뭐라?! 너 지금 뭐라 했어?!”
“발톱의 때만큼도 안 된다고 했다! 왜?”
“이, 이 새끼들이 진짜!”
그렇게 이어지는 도발로 인해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지휘관들.
동시에 세력 간의 분위기도 굉장히 험악해졌지만, 누구 하나 먼저 쉽사리 덤벼드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여기서 전투가 펼쳐지면, 그나마 소강상태에 빠졌던 네 세력 간의 피 튀기는 혈전이 또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로 간의 멸망전으로까지 번질 수도 있는 중대한 결정을 마왕도 아닌 한낱 부하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비록 지휘관인 그들이 마왕 바로 밑에 위치한 최상위 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끝없이 으르렁대기만 할 뿐, 결국 발톱을 먼저 드러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사이, 정상 중앙에 생겨났던 차원의 틈은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 갔다.
‘…다행이군.’
그 시각, 차원의 틈을 만든 주인공인 로한은 델센킬 산 서쪽에 위치한 한 마왕 영지의 건물 구석에 숨어서 정상 위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는 그는 아직 데르툴족으로 변신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동시에 은신 시스템을 활성화한 상태였다.
차원의 틈을 열고 이곳에 발을 디디자마자 은신 시스템을 활성화한 그는, 재빨리 높이 뛰어올라 바로 이곳까지 무사히 착지를 한 후 모두의 눈을 피해 숨어 있는 상태였다.
‘만약 최상위급 이상 귀족이 근처에 있었으면 들켰을 수도 있었을 텐데 죄다 저 위로 몰려가 버렸군.’
현재 은신 시스템으로 인해 겉으로도 아예 보이지 않고, 에너지원 대부분도 동결 상태로 만들어 최대한 겉으로 흘러나오지 않게끔 감춰둔 상황이긴 하지만 최상위급 귀족 정도만 되어도 이 정도 은신은 금방 발견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이 좋았고, 로한은 무사히 안으로 잠입할 수 있게 되었다.
‘자, 이제 변신을 하고….’
로한은 은신을 풂과 동시에 팔찌 내의 시스템을 활성화시켰다. 곧 아무것도 없던 건물 구석에 다른 하급 데르툴족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 상태로 그는 바로 데르툴족을 만나러 움직이지 않았다.
‘일단 이곳 세력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로한이 알고 있는 지식은 고작 투할과 샤훌리트 세력에 관한 것뿐이다. 나머지 마왕 세력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보를 모아야 할까? 그건 간단하다.
‘…마침 오는군.’
타이밍 좋게, 로한이 서 있던 골목으로 한 명의 하급 데르툴족이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품에서 시가 같은 커다란 담배를 문 모습을 보니 몰래 흡연을 하기 위해 이곳으로 숨어 들어온 듯했다.
곧 그와 로한은 눈을 마주쳤고,
“안녕.”
로한은 반갑게 인사했다.
그 모습에 상대방 데르툴족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뭔데 나한테 아는 척을….”
푹!
“컥!”
말도 다 못 마친 채 로한의 손에 뇌핵이 뚫려 온몸이 굳어버린 데르툴족.
로한은 빠르게 그를 끌고 깊숙한 건물 구석으로 사라졌다.
약 3분 뒤.
한층 더 강해진 마기를 흘리고 있는 하급 데르툴족, 로한이 당당하게 대로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 지나가던 하급 데르툴족 정찰병 둘이 로한의 모습을 발견했고,
“…응?”
그중 한 명이 걸음을 멈추고 로한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놈인데… 이름이 뭐냐?”
“로그한.”
“로그한…?”
곧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누군지 알아?”
“나도 처음 듣는다.”
“수상한데… 어디 소속이냐?”
재차 질문에 로한은 술술 대답했다. 아까 전 잡았던 데르툴족을 흡수하기 전에 나르커즈 약물을 통해 몇 가지 정보를 획득한 상태라서 거칠 게 없었다.
“로스룸 귀족님이 이끄시는 11사단 3중대 4소대 돌격병이다. 입대한 지 얼마 안 된 신병이야.”
“그래…?”
정찰병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는 정보는 틀리지 않는데, 그래도 왠지 모르게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마침 우리도 4중대로 가는 길이니, 가서 물어보면 알겠지.”
“아, 그렇겠군. 따라와라.”
곧 로한을 이끌고 바로 앞에 보이는 4중대 건물로 향하는 정찰병들.
뒤따르던 로한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러면 위험한데….’
4중대에 들어가는 순간, 안에 있던 데르툴족들은 로한이 누군지 모른다 대답할 것이고, 그 순간 조용한 잠입은 실패하게 된다.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리는 로한.
그때였다.
땡땡땡땡땡!
갑자기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동시에 저 멀리에서 또 다른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캉베 놈들이 우리를 공격했다! 모두 전방 부대를 지원하러 출발한다!”
그 말에 일제히 마기를 끌어 올리면서 국경선 쪽으로 달려가는 주변의 데르툴족들. 로한을 데리고 이동하던 정찰병 둘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한도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면서 속으로 안도했다.
‘휴, 일단 위기는 모면했군.’
일단 4중대에 들어가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문제다.
당장 전투를 펼쳐야 할 텐데, 이건 어떻게 연기를 해야 좋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