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죠, 지금?”
“귀 쪽 마이크 고장 안 났으면 제대로 들은 거 맞아.”
“…거길 어떻게 가려고요?”
아린이 진짜 궁금한 표정으로 로한에게 물어왔다.
“가자마자 데르툴 행성에 사는 마족 전체가 오빠 한 명한테 달려들 게 뻔하잖아요? 아무리 오빠라 해도 너무 위험해요. 만약 오빠가 다시 엘도르로 도망친다 하더라도 뒤따라서 쫓아올 수도 있고요. 그러면….”
“알아, 나도.”
로한이 아린의 말을 끊었다.
그라고 왜 위험성을 모르겠는가. 데르툴과 완전히 다른 자신이 그 행성에 발을 디딘 순간, 거기 사는 모든 마족들을 자극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도 다 계획이 있었다.
“잠깐 와봐.”
로한은 아린을 데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지금부터 보여줄 것은 보안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 공간에 둘만 남은 뒤에야 로한은 입을 열었다.
“이거 봐봐.”
아린의 시선이 로한이 들어 올린 오른쪽 팔목으로 향했다.
그녀도 처음 보는 최첨단 전자 팔찌가 그 팔목에 차여 있었다.
“뭐예요?”
“이번에 에드먼이 새로 발명한 건데, 이걸 작동시키면 데르툴족으로 변신할 수 있어. 볼래?”
로한은 바로 에너지원을 이용해 팔찌를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검은 점막 같은 것이 팔찌에서 뿜어져 나와 로한의 온몸을 감쌌다.
점막은 순식간에 익숙한 체형의 생명체로 바뀌었다. 데르툴족 먹이 사슬의 가장 최하위에 위치한 하급 데르툴족의 모습으로 말이다.
“우와!”
“어때?”
“진짜 똑같은데요?”
현재 휴머노이드들 중에서 가장 마족을 많이 목격한 편인 아린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눈앞의 로한의 모습은 진짜 하급 데르툴족과 똑같았다.
그래도 아린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외형만 똑같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치. 체내에서 마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진짜 데르툴족의 완성이니까.”
온몸이 100% 마기로 이루어진 종족, 데르툴이 은은하게 뿜어내는 그 기분 나쁜 찐득찐득한 느낌의 마기. 그걸 갖추지 않으면 제대로 데르툴족으로 변장했다고 할 수 없다.
그 마기를 구현해내는 방법도 로한은 알고 있었다.
“이 팔찌는 마기 흡수 시스템도 갖추고 있어. 하급 데르툴족 몇 명의 마기를 흡수시키면, 기존 데르툴족처럼 은은하게 그 마기를 뿜어내는 게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아, 그래서 아까 마족 포로의 위치를 물어봤던 거예요?”
“그거야.”
제일 좋은 방법은 포로로 잡혀 있는 하급 데르툴족 몇 명이 희생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차피 마족이라 그들이 소멸당하든 말든 불쌍하지도 않고 말이다.
“마기까지 흡수해서 완벽하게 변장을 마치면, 데르툴 행성에 잠깐 들러서 정찰 좀 하고 오려고. 혹시 알아? 운 좋으면 르기에의 소식도 들을 수 있을지.”
“음….”
듣기에는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하지만 말한 대로 100%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아쉽게도 그렇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전쟁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위험한 임무가 정찰 아니던가. 심지어 적진 한복판인 데르툴 행성으로의 정찰이라니. 어떤 변수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
“걱정 마. 별일 없을 거야.”
로한이 아린의 마음을 읽고는 달랬다.
“그리고 어차피 데르툴 행성을 치려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어. 그럴 바에야 가장 도망칠 확률이 높은 능력자를 정찰병으로 보내는 편이 낫지.”
“그냥 무인 로봇 같은 걸 대신 보내는 게….”
“그러면 실패하겠지.”
“…하.”
아린도 더는 반대를 못 했다. 마왕들이 득실거리는 데르툴 행성에 한낱 무인 로봇 같은 걸 보내봤자 바로 발각당하겠지.
“그리고, 지금 미리 데르툴 행성의 전력을 알아놔야 향후 공격 계획을 수정할 수 있어. 만약 내 생각보다 전력이 약하다면 엘도르 대륙 연합군만으로 공격하면 되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구와의 군사적 동맹 관계가 필수거든.”
“하지만 이번에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는 데는 실패했어요.”
아까 전 아린이 말했던 대로, 이번 지구와 엘도르 차원 간의 회의에서는 ‘재건 협력’ 계약만 공식적으로 체결했다.
반면, 로한이 원했던 군사적 동맹 관계는 여전히 두 차원 간의 의견 차이가 컸다. 엘도르와는 달리 지구 측은 여전히 전쟁을 바라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번 1차 회의 때 군사적 동맹 계약은 체결되지 않았고, 이후 지구에서 열릴 2차 회의 때 다시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 사실상 결렬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 정찰이 더 중요해. 만약 2차 회의 때 반드시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어야 할 정도로 데르툴들의 세력이 강하다면, 회의 전에 무슨 수라도 쓸 수 있을 테니까.”
“설마, 이전에 말했던 그 계획을 진행하려고요?”
“어쩔 수 없지.”
아린은 혀를 내둘렀다.
“오빠도 진짜 독하네요.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동맹 관계를 밀어붙이려고 하다니….”
“앞으로 두 차원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 작전은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어.”
“하긴, 그게 오빠답긴 하네요.”
아린은 새삼 지구 시절 로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와 방태산을 비롯해, 모두가 반대했던 위험한 작전을 기어코 밀어붙여서 성공시키던 로한.
대단한 건, 작전 성공 확률이 무려 100%였다는 점이다.
당시 로한의 뛰어난 감과 엄청난 추진력, 그리고 그 작전을 기어코 해내는 전투 능력이 아니었더라면, 지구는 아직도 샤훌리트 군단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빠가 알아서 하세요. 어차피 제가 말려도 안 들을 거잖아요? 뭐, 이번에도 무조건 성공할 테니까 믿고 지켜볼게요.”
“큭큭큭. 잘 지켜봐. 재밌을 거야.”
“나 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아린은 어느새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이제 이안 만나러 가봐야겠다.”
입을 연 로한의 모습이 다시 변했다. 데르툴족의 모습에서 다시 원래 인간형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로한은 바로 이안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스크린 각막 위에 아로엘 영지 지도를 띄웠다.
“…아, 마침 성 안으로 들어왔네.”
아로엘 본성 남쪽 성문 쪽에서 푸른 점으로 반짝이고 있는 ‘이안’이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이안이 소지하고 있는 휴대용 미니 통신기기 그의 위치를 로한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 * *
그 시각, 내성 밖으로 나온 박태호 피디를 필두로 한 촬영 팀은 아로엘 본성 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야, 여긴 그냥 지구 같은데?”
“사람들이 입은 중세 시대 느낌 나는 옷만 아니면 진짜 몇십 년 전 지구라 해도 믿겠어.”
카메라 앞에서 쉬지 않고 계속 입을 놀리면서 주변을 돌아보는 왕호동과 진동엽.
지구 못지않게 평평하게 잘 깔린 아스팔트 대로와 휴대용 건설 로봇을 이용해 지은 수많은 5층 이상의 최신식 건물들을 보면 둘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김재석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확실히 지구랑은 다르네요. 분위기나 그런 것이….”
“당연하죠. 지금 옆에 엘프 지나간 거 봤어요?”
“저거 봐! 뭔 몬스터를 애완동물로 데리고 다니잖아!”
그들이 멘트를 날리면, 카메라맨들은 바로 그들이 말한 이종족이나 바쿠 등 마기를 제거한 포탈 몬스터들을 앵글 안에 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떠들던 MC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다.
“이제 또 다른 게스트를 섭외해야 되는데 말이죠. 원래는 이분을 초대하려고 했어요.”
“누구요.”
“저기 보이십니까?”
김재석이 가리킨 곳에는 굉장히 드넓은 마당을 보유한 커다란 저택이 한 채 있었다. 마당 위에 설치되어 있는 시소, 그네, 정글짐 등이 유난히 일행들의 눈에 띄었다.
진동엽이 저택의 정문 입구에 쓰인 문구를 읽었다.
“사라 보육원?”
“맞습니다. 이곳이, 지금 엘도르 대륙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보육원이라고 해요. 여기 살고 있는 아이들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뭐… 많아야 50명?”
“설마 100명 넘는 건 아니죠?”
김재석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자그마치 500명이래요, 500명!”
“히익…!”
“그러면 그냥 학교 아냐?!”
놀란 둘을 향해 김재석은 설명을 이었다.
“이 거대한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는 사라 님을 원래 인터뷰하려고 했어요. 어떻게 그 많은 아이들을 모두 키울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보육원 하나로 남작의 지위까지 올라갔는지….”
“잠깐. 설마 이 보육원 때문에 귀족이 되었다는 소리예요?”
“그러니까요! 놀랍지 않습니까?”
“와….”
“정말 어떤 분이지 궁금하시죠? 그런데, 사라 님은 지금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신전으로 향했다고 해요. 그래서 조금 이따가 우리가 신전을 직접 가든지, 아니면 다른 분을 먼저 인터뷰하면서 기다리든지 하도록 할 예정입니다. 두 분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음….”
“글쎄요. 마땅히 인터뷰할 사람이 있긴 한가요?”
진동엽의 질문에 김재석이 슬쩍 박태호 피디를 바라보았고, 박태호 피디는 고개를 저었다.
이후의 게스트가 아직 섭외가 안 되었다는 대답이었다.
김재석은 빠르게 머리를 굴린 뒤, 진행을 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신전까지 직접 가죠. 가다가 인터뷰가 가능하신 분이 있으면 하고요.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응? 뭐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던 왕호동이 전방을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남쪽 성문 쪽에서, 구름 같은 군중들을 몰고 다니는 한 사내의 모습이 촬영 팀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꺄아악!”
“이안 오빠아악!”
“사랑해요!”
“오빠 나 죽어어어!”
군중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들이었다. 그들의 중심에서 고급스러운 백마를 타고 걸어가고 있는 이안은 환한 미소와 함께 연신 손을 흔들어댔다.
“하하하! 이놈의 인기를 어찌할까, 정말! 저도 여러분들을 사랑해요!”
동시에 쉴 새 없이 날리는 손가락 하트에 윙크까지. 로한 등이 봤으면 표정이 썩어갈 만한 행동이었지만 여기 몰려 있는 여성들은 그저 좋아 죽을 뿐이다.
이안의 행동 하나하나에 점점 비명이 커져가는 모습을 본 김재석이 바로 MC들에게 물었다.
“저분 인터뷰 한번 해볼까요?”
“그럴까요? 딱 봐도 스타성이 돋보이시네요.”
“어서 가보죠.”
베테랑인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저렇게 인기를 만끽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무조건 인터뷰에 응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예감은 적중했다.
몇 분 뒤, 그들은 수많은 군중들이 원형으로 둘러싼 가운데 의자에 앉아 ‘김 퀴즈 온 더 블럭’의 새로운 게스트, 이안과 인터뷰를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자기소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그럼요, 그럼요.”
이안은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현재 엘도르 대륙 최고의 정령사! 무려 세 명의 정령왕을 소환 가능한! 신마대전의 영웅 중 한 명이자 천하의 로한 ‘형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우! 아린 님의 미래 반려자가 될 사람! 칼슈타인 가문의 막내아들인 이안 칼슈타인입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들! 하하하!”
곧 관중들이 우레와 같은 환호를 보냈고, 이안은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어 그들의 환호에 보답했다.
그가 다시 자리에 앉자마자 왕호동이 한 가지를 바로 지적했다.
“아니 근데, 지금 아린 님의 미래의 반려자가 될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나요?”
“그럼요!”
“네?”
MC들의 눈이 커졌다.
김재석이 놀란 표정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여기 성주인 아린 님과 결혼할 예정이신가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