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이곳은 대한민국 공영 방송국 KBC.
모든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하고 송출하는 장소인 주조정실은 그 어느 때보다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준비는?”
부사장이 옆의 본부장에게 물었다.
다시 말하지만 부사장이다. 평소에는 진짜 높아야 본부장 정도가 주조정실에서 책임자 역할을 도맡는데, 오늘만큼은 특별히 부사장이 직접 등장해서 지휘 중이었다.
본부장 역시 현재 KBC에서 가장 짬이 높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지만, 이번에는 2인자의 자리에서 깍듯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끝났습니다.”
“리허설은?”
“세 번이나 진행했습니다. 영상, 음향, 조명 모두 완벽한 상태입니다.”
“혹시 모르니까 한 번 더 체크하라고 해!”
“안 그래도 담당 PD가 마지막으로 체크 중입니다.”
본부장의 대답에도 부사장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후… 오늘은 절대 실수 있으면 안 돼! 알지? 지금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방송 시작도 전에 시청률이 50%를 넘겼답니다.”
“뭐?! 아, 아냐. 당연히 그러겠지.”
크게 놀랐다가 바로 수긍하는 부사장.
그는 다시금 전방의 모니터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각기 다른 각도로 스튜디오의 내부 모습을 송출하고 있었지만, 화면 안에 담겨 있는 인물은 모두 같았다.
금발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잘생긴 미남자는 바로 로한이었다.
“온에어 30초 전입니다!”
옆의 직원의 외침에 부사장은 한껏 더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부담감’이라는 세 글자가 그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제발 무사히 끝나라, 제발. 대통령님께서도 이 방송을 생방송으로 보는 중이다. 제발….”
한국 대통령뿐이랴? 미국, 러시아, 유럽 가릴 것 없이 모든 나라의 주요 인사들이 지금 전부 이 방송을 라이브로 시청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상 현 지구의 20억 인구가 전부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그래도 20억밖에 안 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데르툴족과 전쟁하기 전에는 지구의 인구가 공식적으로 80억을 넘겼었으니까.
곧 시간은 흘러, 방송 시작 시간이 되었다.
“스탠바이, 큐!”
옆의 본부장의 외침과 함께, 모니터 위 ON AIR 글씨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 순간, 대한민국 TV 채널 및 인터넷 라이브 스트리밍 채널 등등 모든 화면에서 연설 테이블 뒤에 서 있는 로한의 모습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전 대한민국 사이보그 제1부대장, 로한입니다.”
꾸벅 인사를 한 로한은 술술 미리 작성한 연설문을 읽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서 테이블 위에 프린트된 문서도 놓여 있었고, 카메라 양쪽의 거대한 프롬프터 화면에 연설문 내용을 띄워놓기도 했다. 방송국 측에서 준비한 것들이었다.
물론, 로한 입장에서는 전부 필요 없었다. 메모리 속에 저장된 문서 파일을 머릿속으로 읽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먼저 제 신분과 과거를 속인 점, 그리고 여러분들께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샤훌리트와의 전투 때 전사했다고 속인 후 제 고향으로 돌아간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후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로한.
그러자 너튜브 라이브 채팅이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뭘 사과하냐]
[그럴 수도 있지]
[사실대로 말했으면 더 혼란스러워졌을걸?]
[ㄹㅇㅋㅋ]
대부분은 다 이해한다는 반응이었다.
사실, 데르툴족의 침입에 지구 전체가 몸살을 앓았던 직후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고 발표했다? 지구인 입장에서는 당연히 로한과 엘도르 대륙을 좋게 봤을 리가 없다.
그렇게 민심이 안 좋아졌다면 어쩌면 신마대전 때 이렇게 모든 국가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이렇게 모두를 속였음에도 불구하고 제 대륙의 곤란한 사정을 저 하나만 믿고 발 벗고 나서 도와준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말을 이은 후 로한은 또 한 번 허리를 숙였다.
이번에도 채팅 반응은 비슷했다.
[에이 뭐 그 정도 가지고]
[로한이 전쟁 때 해준 게 얼만데]
[로한 아니었으면 우리 이렇게 편하게 누워서 채팅도 못 쳤음]
[ㄹㅇㅋㅋ]
괜히 로한이 최강의 사이보그 전사이자 최고의 영웅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그만큼 그 혼자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일일이 다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아서 24시간 내내 그 업적을 찬미해도 모자랄 정도다.
“우선, 저의 정체를 여러분들께 상세히 설명하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제 이름은 로한. 본명이며, 엘도르 대륙이라는 차원의 작은 나라, 테르디아의 헤민이라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가족으로는 어머니가 계시며….”
이후 자신이 살아온 과정, 지구로 넘어온 계기, 이후 다시 귀환한 후 신마대전이 일어날 때까지의 일들을 요약해서 말하는 로한.
처음 들었으면 엄청나게 충격받을 만한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이전에 강동혁에게 한 번 들었던 이야기라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지루해하지 않으며 흥미진진하게 계속 들어줄 정도?
이 이야기는 자그마치 30분이 넘게 걸렸다. 요약한다고 했는데도 스토리가 그만큼 길었던 탓이다.
“…이제 엘도르 대륙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드디어 주제를 전환하는 로한.
“엘도르 대륙은 여러분들이 흔히 생각하시는 판타지 세계와 거의 똑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전체적인 문명의 발전은 한국의 중세 시대와 흡사할 정도로 느리지만, 반면 지구에는 없는 마법과 정령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자, 이리 오시죠.”
로한이 옆쪽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그러자, 잘생긴 미청년 둘이 다가와 그의 양옆에 섰다.
로한은 둘의 소개를 했다.
“오른쪽에 있는 분은 드래곤족의 로드, 딘입니다. 영화에서 봤던 거대한 드래곤 아시죠? 그것과 많이 비슷합니다. 그리고 왼쪽은 엘프족의 장로, 엘-카시안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라이브 채팅창은 난리가 났다.
[드래곤?]
[진짜 드래곤과 엘프가 있다고?]
[엘프는 맞네 귀가 똑같이 생겼잖아]
[드래곤 맞아? 그냥 사람이랑 똑같은데?]
2배는 더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채팅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한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었다.
“사실 여기서 드래곤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그러면 여기 스튜디오가 무너져 버립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바깥에서 한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바로 보여주지. 잘 봐라!”
“잠깐, 잠깐! 하하하! 장난치지 마시고요….”
화들짝 놀라며 딘을 말린 로한은, 속으로는 이를 악문 목소리를 전음으로 보냈다.
‘내가 방송 중에는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
[내가 가만히 있으라면 있어야 하냐?]
‘이 새끼가 진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최대한 진정시키려 노력하는 로한. 그런 그를 슬쩍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딘의 모습. 딱 봐도 자기를 골려 먹으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로한은 아예 그에게서 등을 돌려 엘-카시안만 바라보았다.
“대신에 정령하고 마법을 국민 여러분들께 한번 보여드리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다행히 엘-카시안은 로한의 의도대로 행동해 주었다.
우선 아주 기초적인 원소 마법 몇 개를 보여주었다. 화염구 몇 개를 생성해서 저글링을 한다거나, 아이스 스노우 마법을 아주 소량의 마나로 캐스팅해서 스튜디오 전체에 가루눈을 흩뿌린다거나, 창 모양의 번개를 만든다거나 등등.
[오]
[와]
[개신기하다 ㄷㄷ]
[저거 마법 맞음? 그래픽 아님?]
감탄사로 가득한 채팅방의 반응이 가장 빨라진 것은, 엘-카시안이 정령을 소환했을 때였다.
빛의 중급 정령, 잭 오 랜턴과 어둠의 중급 정령, 셰이드를 동시에 소환하자,
“와아!”
“저게 뭐야?”
“유령같이 생겼는데?”
잔뜩 긴장한 채로 지켜보던 주조정실의 부사장 등도 놀라 감탄사를 터뜨릴 정도였다.
카메라맨들도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잭 오 랜턴과 셰이드의 모습을 최대한 카메라에 잘 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로한이 입을 열었다.
“자, 지금까지 엘프들의 족장이신 엘-카시안 님께서 마법과 정령을 간단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 두 분 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나도 하나 보여주지. 드래곤만 사용할 수 있는 헬 파이어 마법을….”
“자자! 빨리 들어가세요~!”
다급하게 외치면서 강제로 딘을 옆으로 밀어버리는 로한. 밀려나면서 낄낄대는 딘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로한은 이내 다시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크흠, 흠. 저는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부터가 이번 연설문의 핵심 내용이었다. 로한이 이 자리에 선 이유기도 하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번에 지구의 대다수 국가가 아무 조건 없이 제 대륙을 지원해준 것에 대해 정말 고마운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륙의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엘-카시안과 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지구에서 시기적절하게 원군이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엘도르는 거의 마족에게 점령당하기 직전이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제 고향 대륙은 마족들을 거의 다 물리쳤고, 이제 평화를 되찾기 직전의 상황까지 왔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잊고 그냥 넘길 수 있겠습니까? 저희 엘도르의 모든 생명체는 지구인들에게 반드시 은혜를 갚고 싶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로한은 잠시 뜸을 들였다.
“지구와 엘도르 대륙 간의 긴밀한 관계가 우선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번에 로한이 준비한 연설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지구, 그리고 엘도르는 모두 데르툴족의 침략에 홍역을 앓았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데르툴족의 위협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멸망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그들은 다시금 우리를 침략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지구와 엘도르 대륙이 서로 힘을 합친다면, 둘의 장점을 서로 공유하고 흡수해서 이전보다 더 발전하고 강성해진다면, 데르툴족이 침략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데르툴족을 먼저 침략해야 한다.
이 생각은 로한이 엘도르 대륙의 첫 마족, 말파스를 만났을 때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계속 데르툴족의 침입을 두려워해야만 하는가? 그럴 바에야, 이번엔 우리가 먼저 선수 쳐서 그들의 고향을 공격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만약 그럴 거라면 이왕에는 여러 차원이 힘을 뭉쳐서 연합을 맺어 공격하는 게 더 안전하고, 확실하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지구의 모든 정상들에게 요청합니다.”
로한은 중앙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데르툴족의 멸망을 위해, 지구와 엘도르 간의 동맹 협정을 맺기를 원합니다.”
그의 제안은 방송을 통해 전 세계의 모든 국가에 전달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