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본래 데르툴 행성 내 투할의 영지는 크고, 넓었었다.
행성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한 마왕이었기에 따르는 휘하 부하들도 강했고, 숫자들도 많았었다. 괜히 마왕급 실력자인 르기에를 부하로 두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투할의 영지는….
“황량하군.”
주변을 돌아본 카르스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전 같으면 이곳에 발을 디디자마자 수많은 하급 데르툴족들이 일제히 자신들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마왕성이 있던 자리도 빼앗겼다.”
나퓰라의 말대로, 기존 투할의 마왕성이 있던 자리를 그새 다른 세력이 장악해서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투할의 나머지 영토도 마찬가지였다.
단 몇 개월 만에, 그 드높은 위상을 자랑하던 투할의 세력이 데르툴 행성 내에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죠. 오래 서 있다가 포위 공격을 당하기 딱 좋겠군요.”
르기에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기존 투할의 영토를 차지한 타 세력의 국경선 쪽 데르툴족들이 경계하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분명 저들은 르기에 등을 발견하자마자 상위 귀족들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다. 아마 조금만 더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면, 타 세력의 최상위 귀족들이 몰려와 그들을 공격하려 들 것이 분명하다. 그들 입장에서는 마왕을 잃은 부하들만큼 만만한 존재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한 줌의 마기로 흡수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들 흩어져서, 지구에 대해 알고 있는 마왕을 찾아보십시오. 그들을 포섭할 수 있으면 더더욱 좋고요. 일단 제 밑의 부하 신분이라고 말한다면, 바로 당신들을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알겠다.”
르기에의 말을 들은 일행들은 곧 각자 차원의 틈을 열고 순간 이동을 했다.
홀로 남은 르기에 역시 차원의 틈을 열었다.
“그럼, 첫 번째 마왕을 만나러 가볼까?”
혼잣말이 끝남과 동시에 르기에의 신형이 서 있던 곳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르기에는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어느 마왕성 안에 들어와 있었다.
사치스럽고 호화롭기 그지 없는 성의 내부. 그중에서도 가장 값비싸 보이는 왕좌에 한 명의 중년이 앉아 있었다.
입고 있는 복장에서부터 고급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남성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 투할 밑에 있던 르기에라고?”
“그렇습니다, 텐자흔 님.”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르기에를, 양옆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수많은 최상위 귀족들이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흥미롭게 지켜보는 이는 이들의 마왕, 텐자흔이었다.
“소문으로는 어지간한 마왕급 실력자라고 들었는데…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감사합니다.”
“이번에 마왕이 되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만, 사실 큰 의미는 없습니다.”
“무슨 뜻이지?”
“어차피 텐자흔 님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텐자흔이 턱을 쓰다듬었다.
“내 밑으로 들어온다라….”
이후 잠시 생각해보는 텐자흔.
하지만 이리저리 재봐도 전혀 나쁠 건 없었다. 지금 느껴지는 눈앞의 르기에의 경지라면, 합류하는 그 순간 텐자흔의 전력을 급상승시켜 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당장 옆에 서 있는 자신의 최상위 귀족 부하들을 전부 모아도 저 르기에 한 명을 당해낼 수 있을까? 십중팔구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 정도로 르기에는 강하다.
하지만 무턱대고 받을 수는 없었다.
“왜 내 밑으로 들어오려 하지? 투할의 밑에 있었으면 이제 나 정도로는 성에 안 찰 텐데?”
지금 텐자흔의 전력은 투할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마왕의 자존심이고 뭐고 다 떠나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르기에 본인도 텐자흔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굳이 밑으로 들어올 이유가 있을까? 보통 데르툴족이라면 이럴 땐 차라리 고생하더라도 변방에서 혼자 독립하는 걸 선택하는 편이다.
그런데 굳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텐자흔의 판단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르기에는 그 꿍꿍이를 텐자흔에게 털어놓았다.
“제 전 주인이 소멸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알지. 그걸 모르는 이가 지금 이 행성에 어딨나?”
“하지만 어떻게 소멸되었는지는 모르실 거라 생각합니다.”
“호오~ 그걸 털어놓겠다는 건가?”
“네. 저를 포함한 투할 군단은 단 한 번도 엘도르 대륙의 연합군을 이기지 못 했습니다.”
텐자흔의 눈이 커졌다.
“한 번도?”
“네.”
“호오~ 천하의 투할 군단이?”
텐자흔이 놀랄 만한 것이, 지금껏 데르툴의 마왕이 타 차원의 대륙을 상대로 전패로 쫓겨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보통 쳐들어가면 어떤 마왕 세력이든지 한 번도 지지 않고 압도적으로 정복할 확률이 90% 이상이다. 설사 아쉽게 점령에 실패하더라도 거의 정복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게 일반적이고 말이다.
“전쟁뿐만 아니라 개개인 전투도 이긴 이가 없었고, 계략은 세우는 족족 모두 간파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굴욕감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 고향 땅도 아닌 타 대륙의 인간들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수치심. 그것을 씻어내지 않는 한 저는 편히 두 눈을 감고 잠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점이 뭐지?”
“저는 복수를 원합니다.”
르기에는 ‘복수’라는 단어에 꽤 힘을 주었다.
“저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긴 엘도르 대륙의 모든 생명체를 내 발 밑에 꿇리는 것을 원합니다. 그것만 이룰 수 있다면, 전 당신의 밑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설사 가장 말단 병사로 들어가라 명하신다 하더라도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호오~”
텐자흔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저 르기에의 두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 저건 연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존심 강한 데르툴족이라면 저런 반응은 당연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내가 왜 엘도르 대륙을 정복해야 하지? 대비되지 않은 다른 차원의 대륙을 치는 것이 훨씬 성공 확률이 높을 텐데?”
텐자흔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엘도르 대륙은 벌써 두 번이나 데르툴족을 막아내었다. 그만큼 내성이 생겼다는 소리다.
심지어 두 번째 침략을 막아낸 지 며칠 지나지도 않은 상태. 그렇다면 지금 엘도르 대륙은 그 어느 차원의 존재들보다 데르툴족에 대한 경각심을 크게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르기에는 미리 생각해놓은 듯 바로 대답했다.
“첫 번째는 저입니다. 저는 엘도르 대륙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데르툴이며, 동시에 이 대륙을 정복할 수 있는 아주 자세한 계획도 미리 세워놓은 상태입니다. 이 계획을 들으시면 아마 마왕님께서도 솔깃하시리라 장담합니다.”
“호오~”
“그리고 저를 포함한 휘하 세 명의 최상위 귀족의 전력 또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저희 넷의 합류는 텐자흔 님의 전력을 크게 상승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르기에.”
텐자흔이 그의 말을 바로잡았다.
“자네의 합류가 도움이 될 뿐이야. 나머지 셋은 나한테는 필요 없어.”
솔직한 텐자흔의 말.
자신과 비슷한 경지의 르기에는 현재 그의 부하들 중에서도 대체가 불가능한 수준의 전력이지만, 나머지 셋은 아니다.
그리고 괜히 주인 잃은 잡다한 놈들을 받았다가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되레 전력이 약해졌던 과거 마왕들의 전례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지금 복도에 정렬해 서 있는 충성도 높은 최상위 귀족들만 데리고 가는 게 훨씬 낫다.
“마왕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저는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호오~ 나를 위해 나머지 셋을 버리겠다는 소린가?”
“물론입니다.”
르기에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셋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이제 두 번째 이유를 말씀드리죠.”
다시 본론으로 주제를 전환하는 그.
“바로 텐자흔 님만의 특별한 능력입니다. 마왕님께서는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계십니다. 데르툴은 물론, 모든 차원을 통틀어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능력자이시죠.”
“흠.”
“제가 미리 세워둔 엘도르 대륙 정복 계획에는, 텐자흔 님의 그 시간 조절 능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만 있으면 안정적이고 쉽게 정복이 가능합니다.”
“그래?”
텐자흔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그 계획이 뭔지 궁금해지는군.”
“일단 마지막 이유까지 설명한 뒤 말씀드리겠습니다. 세 번째는, 지구입니다.”
“지구?”
이해하지 못한 텐자흔에게 르기에는 설명을 이었다.
“이번에 투할 군단이 정복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지구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엘도르 대륙을 지원해줬기 때문입니다.”
“잠깐만. 그러면 더더욱 엘도르 대륙을 정복하기 힘들지 않나? 두 차원의 세력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르기에는 고개를 저었다.
“무작정 침략한다면 그렇겠지만, 제 계획에 따라 움직이시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제 계획만 따라주신다면, 한 차원씩 차례대로 안정적이고 확실하게 정복이 가능합니다. 즉, 텐자흔 님께서는 이번 한 번의 침략으로 동시에 두 개의 차원을 정복하시는 겁니다.”
“호오~”
“지금부터 그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르기에는 잠시 뜸을 들였다. 텐자흔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데르툴들의 시선이 그의 입에 몰렸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우선, 이 행성에서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직접 말인가?”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르기에의 입에는 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이곳은 또 다른 마왕성.
성내 대복도에서는 텐자흔 쪽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왕좌에 앉아 있는 마왕. 그리고 대복도 양쪽에 정렬해서 서 있는 최상위 귀족들의 모습까지 전부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중앙에 있는 카르스트였다.
르기에와는 달리 그는 전신이 완전 결박당한 상태로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큭… 푸하하하!”
곧 마왕이 크게 웃었다.
“정말 황당하고 어이가 없군.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외침을 잇는 마왕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카르스트를 노려보는 그의 얼굴에는 분노만이 가득했다.
“르기에가 마왕으로 등극했고, 그 밑으로 네가 들어간 것도 모자라, 새로 독립하는 것도 아닌 자신들을 받아줄 새로운 마왕을 찾고 있다고? 그 허무맹랑한 소리를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그렇습니다.”
“푸핫! 그래, 이유나 들어보자. 합당한 이유를 대지 않으면 넌 지금 이 자리에서 소멸될 것이다!”
마왕의 호통이 끝나자마자 카르스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구.”
“……!”
단 한 단어에 마왕의 눈썹이 꿈틀했다.
“투할 군단이 엘도르 대륙 정벌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지구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지원군을 다수 보냈기 때문입니다.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대신, 그 어느 차원보다 발달된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행성….”
카르스트가 고개를 들어 마왕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정복하려는 그 지구 말입니다, 샤훌리트 님.”
그의 시선 속에서 마왕, 샤훌리트는 놀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