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박나성의 다급한 보고는,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던 로한의 두 눈을 순간 흔들리게끔 만들었다.
‘마왕이라고?’
정말 예상치 못한 놀라운 보고였지만 의심을 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마왕성 내부에서 갑자기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마기를 느낀 것이다.
이 마기는 눈앞의 투할과 견주어도 별로 밀리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마기를 느끼자마자 로한의 온몸이 경고의 신호를 보내 올 정도로 말이다. 이 정도는 마왕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로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최후의 카드가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인가?’
그의 입장에서 이제 최상위 귀족이 몇 명이 더 늘어나든, 그건 상관이 없다. 지구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던 그의 베테랑 대원들 아닌가? 그 경험 속에 다수의 최상위 귀족과의 전투도 꽤 많이 담겨 있다.
그때.
“마왕성 ‘심장’의 봉인을 열었군.”
싸우던 투할이 입을 열었다. 그도 마왕성 지하의 기운을 느꼈나 보다.
기습 팀이 발견한 정팔면체의 마석은, 마왕성의 핵심부인 심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심장이 제거되면 사람은 죽는다. 마왕성도 마찬가지다.
그런 심장을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투할이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심장의 첫 보호 장치가 깨지면, 죽은 자의 시체를 거둬 만들어낸 환영으로 마석을 지키게끔 설계해 놓았다.
다보, 라디치, 페른이 그러했고, 지금 기습 팀과 싸우고 있는 마왕의 환영 역시 마찬가지다.
“드레하츠. 내 영지의 전대 마왕이다. 내가 그를 죽이기 전까지 데르툴족 최강의 마왕 중 하나였지.”
“……!”
“그때 그의 전력은, 지금의 너랑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헛소리하네.”
로한이 대답하거나 말거나, 그는 자신의 말을 이었다.
“당연히, 심장 근처의 사이보그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환영으로 남아 있는 망자들은 살아 있을 적과 비교해서 80% 정도 되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전성기 시절의 드레하츠보다는 확연히 전력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마왕은 마왕이다. 심지어 무력만큼은 한때 최고였던 드레하츠라면, 심장실 안에 있는 사이보그 떨거지 따위는 쉽게 제거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투할의 말을 받은 로한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강화된 두 주먹을 휘두르며 치열한 공방전을 다시 시작하는 둘.
그러는 와중에도 로한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박나성의 다급한 통신이 들려오고 있었다.
[다시 말한다! 마왕의 환영과 전투 중이며, 고전 중이다! 지원군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렇게 박나성이 연신 다급하게 지원군을 요청했던 적이 있었던가?
과거 지구에서의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지금 힘든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로한은 바로 아린에게 통신했다.
[아린, 지원군이 필요해. 가능한 한 에이스들로 선별해서 보내줘. 급해!]
[알겠어요, 오빠.]
아린의 대답은 바로 들려왔다.
대답한 아린은 현재 최종 방어선 성벽 위에 서 있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성벽 밖의 상황만 확인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
콰과과광!
“캬아악!”
“끄르륵…!”
그때, 오른쪽 옆 성벽 앞에서 거대한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비명과 함께 수많은 데르마, 언데드 등이 쓰러질 그때.
등 뒤에서 강동혁의 연이은 외침이 들려왔다.
“계속해서 사격하라!”
그의 외침에 연이어 에너지원 빔 및 미사일을 쏘아대는 장갑차들. 탱크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기계에서는 계속 쉴 새 없이 화력이 뿜어져 나왔고, 그것을 조종하는 병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에너지원을 계속해서 충전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화력 덕에 성벽 위 헌터들은 안정감을 되찾았다.
성벽에 아예 적들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또 무인 실드 생성기 등으로 인해 생존 수단이 하나 더 갖춰지니, 헌터들 입장에서는 죽음의 공포를 잊고 안심하고 슈팅 게임을 하듯이 마나 건을 연사할 수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아린은 이내 판단했다.
‘이 정도면 내가 없어도 되겠어.’
현재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르기에 등 최상위 귀족들은 모두 아르베니아와 노르토반 두 곳으로 이동한 상태. 아무래도 전력이 상대적으로 강해 보이는 테르디아보다, 비교적 약한 두 나라를 우선적으로 점령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였다.
덕분에 테르디아는 훨씬 안전해졌다. 현재 연합국 중 가장 전력이 강하다는 아로엘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지원군으로 합류해야지. 상황이 위험해 보이는 것 같으니….’
일단, 이 대륙으로 차원 이동해 온 이후 로한의 입에서 지원군이라는 단어를 직접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구에서도 정말 힘든 상황이 아니면 지원군을 요청하는 법이 없던 로한이었다. 그만큼 본인 및 부대원들의 화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정말 힘든 상황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맞았다.
[아로엘에 있는 아린입니다.]
그녀는 곧바로 통신을 통해, 각국에 퍼져 있는 연합군의 주요 멤버들 전체에게 메세지를 전달했다.
[현재 로한 님이 마왕들과의 전투 중 긴급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상황에 여유가 있으신 분들은 조속히 아로엘로 차원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아린이 한 번 더 반복해서 통신하는 동안, 그녀의 바로 뒤쪽에서 거대한 워프 마법진이 생성되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린의 말을 들은 딘이 미리 마왕성과 연결될 마법진을 그려놓은 것이다.
“크아아아!!”
또다시 아스모데의 듣기 힘든 괴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녀의 수많은 입에서 강력한 마기 빔이 뿜어져 나왔다.
역시 전력을 다해 피하거나 막아내는 대원들. 하지만,
퍼어엉!
“큭…!”
그중 한 명인 백상훈이 이번엔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정타를 얻어맞고 말았다.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으며 최대한 뒤로 멀찌감치 멀어지는 그. 팔이 축 늘어져 덜렁거리는 걸 보니, 이제 저 팔은 전투 불능 상태가 된 것 같았다.
평소에 근접 전투를 즐겨 하는 백상훈인데, 한 팔을 사용하지 못한다? 전력도 당연히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는 소리다.
그래서 방태산이 지시했다.
“백상훈은 후방에 물러서서 지원 사격만 해.”
“…죄송합니다.”
백상훈이 이를 깨물며 더 멀찌감치 뒤로 물러섰다.
방태산은 남은 멤버들을 더 독려했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서 싸워! 여기서 질 거면 지구에서 벌써 죽었어! 알잖아!”
“사이보그라 젖 먹던 힘은 안 남아 있는데 말입니다?”
“농담 따먹기 할 힘은 있나 보네?”
“하핫.”
김현진이 웃으면서 다시금 두 손을 모아 에너지 빔을 날렸다. 방태산과 옆의 이병국, 그리고 황정근도 마찬가지로 원거리 공격을 했다.
하지만 소용 없었다.
아스모데는 그 수많은 손을 휘둘러서 모든 공격을 쳐내듯 막아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다시금 마기 빔을 뿜어내었다.
공격과 방어, 두 동작을 동시에 완벽하게 수행하는 모습이었다.
방태산은 날아오는 빔들을 무시하지 못하고 다시금 피해내었다.
‘이러면 못 이기는데….’
실드 시스템을 극도로 활성화하면서 고민에 빠진 방태산.
다섯 명일 때도 저 괴물한테 고전하고 있었는데, 백상훈이 중상을 입은 지금에는 더더욱 승산이 없어 보였다.
확실한 회심의 일격이 없으면, 이대로 계속 방어만 하다가 결국 지쳐 쓰러질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일격을 날릴지 감도 안 잡혔다.
‘쉽사리 자폭 공격을 감행할 수도 없고… 흠.’
최후의 방법인 신체 자폭 공격이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이건 한 번 사용하면 끝나는 일회용이다. 혹시나 사용했는데 빗나가거나, 혹은 큰 타격을 주지 못하면 그땐 승산이 0%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폭 공격은 지구에 있을 때도 정말 확실한 승기가 보일 때에만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런 상황이 아니다.
‘어찌한다… 응?’
그때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
자연스레 고개가 하늘로 들어 올려졌고,
“오!”
바로 입에서 반가움 가득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하늘 위에 그려져 있는 거대한 워프 마법진. 아까 전, 방태산 등이 이용했던 그것과 완벽히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워프진으로부터 아래로 떨어져 내려오고 있는 수많은 인영들. 마족이 아닌 걸 보면, 그들을 돕기 위해 온 지원군인 것이 확실했다.
‘전부 이 대륙 사람들인가?’
일단 방태산에겐 전부 다 낯선 얼굴인 것으로 보아, 지구인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한 명은 굉장히 낯이 익었다.
가장 먼저 워프진에서 등장한 인영은 곧바로 아스모데를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폭탄이 떨어지듯이 육탄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 인영은 아린이었다.
퍼어어엉!
거대한 폭발이 아스모데의 신체에서 터졌지만,
“하!”
그녀는 멀쩡한 모습으로 코웃음을 치며 다시금 수많은 입에서 마기 빔을 뿜어내었다.
다수의 빔이 한 명에게 집중되었지만, 곧바로 소환한 실드에 모조리 막히고 만 모습이었다.
방태산이 물었다.
“너까지 온 거냐, 아린?”
아린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일 그때였다.
“아~하하하! 이 몸이 등장하셨도다!”
거만한 웃음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화염으로 뒤덮인 거대한 새.
불의 정령왕, 피닉스의 등 위에 서 있는 금발의 어린 미남자.
이안이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외침을 이었다.
“정령왕들이여! 저 징그럽게 생긴 괴물을 당장…!”
[위험하다!]
“와악?!”
갑자기 피닉스가 급하게 공중에서 몸을 트는 바람에 이안은 꼴사납게 피닉스의 날개를 부여잡고 대롱대롱 매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나마 그게 다행이었다. 피닉스가 몸을 안 틀었으면, 일제히 날아온 마기 빔에 이안의 신체가 오체분시될 뻔했으니까.
“바, 방금 뭐야?!”
[또 날아온다!]
“뭐?! 우, 우아아악!!”
연이어 아스모데 쪽에서 날아오는 마기 빔들에 이안은 비명을 질러댔다.
그때였다.
“하아압!”
기합 소리와 함께, 거대한 신성 방어막이 이안의 바로 앞에 쳐졌다.
연이은 폭음이 방어막 위에서 터졌지만, 다행히 방어막은 깨지지 않고 이안을 완벽하게 지켜내었다.
그 모습에 이안이 휘둥그레 눈을 뜰 그때.
“정신 차리십시오.”
왠지 모르게 싸늘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공중에 떠 있는 신관 복장의 젊은 미남자, 밀리오가 그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또 겉멋만 잔뜩 부리다가 아린 님에게 누가 될 뻔하지 않았습니까.”
“무, 무, 무슨 소립니까! 지금 아린 님에게 향할 공격을 전부 다 제가 받은 거 못 봤습니까!”
“공격을 막은 건 저입니다만.”
“흥! 폰티펙스님 없었어도 나 혼자 피할 수 있었어요!”
꼬박꼬박 대답하는 이안의 목소리도 왠지 모르게 까칠했다.
둘의 마주 보는 시선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을 그때.
아린의 목소리가 둘의 귓가에 동시에 들려왔다.
“밀리오 님, 그리고 이안 님.”
“네.”
“네?”
둘은 180도 바뀐 환한 얼굴로 동시에 아린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우리는 지하실로 이동해 오빠의 부대원들을 돕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알겠습니다.”
“물론이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아린의 뒤를 따라가는 밀리오와 이안.
셋은 아스모데를 내버려 두고는, 바로 지하실의 박나성 등을 돕기 위해 계속해서 마왕성 쪽으로 낙하하는 모습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