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공작님.]
그때 그의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미니 통신기를 통해 들려오는 것이었다.
[여기는 아로엘입니다. 들리십니까?]
“들린다.”
[5분 후 미리 말씀드린 지원 공격이 있을 예정입니다.]
“알겠다.”
통신을 마친 윌리엄은 바로 또 한 번 크게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로 인해 생성된 커다란 푸른 반월 모양의 검기가 전방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서걱.
“아악!”
“끄륵…!”
막 성벽을 뛰어 넘어오려던 데르툴족 몇 명이 그 검기에 신체 한 곳 이상이 절단되어 버렸다. 그들이 성벽 위로 착지하려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때, 윌리엄은 그쪽을 보지도 않고 이미 오른쪽 성벽 쪽으로 또 다른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의 신체 주변에서 생성된 10개가량의 무형검들이 빠른 속도로 그쪽의 마족을 향해 날아간 것이다.
역시, 무형검에 관통당해 다시 성벽 바깥으로 추락하는 마족들의 모습.
‘와…!’
‘역시 테르디아의 검!’
근처의 헌터들이 순간 마나 건 발사를 잊고 감탄할 정도로 윌리엄의 힘은 대단했다.
현재 서쪽 대륙에서 유일하게 불멸자 경지에 도달한 윌리엄은, 이렇게 수많은 하급 데르툴족을 혼자서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였다.
‘왼쪽은 괜찮나?’
윌리엄은 반대편 성벽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있는 이곳이야 안전하겠지만, 국경선을 이루는 성벽의 길이는 그 혼자서 절대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로 길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그가 없는 쪽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때였다.
휘이이이잉~!
그가 바라보던 왼쪽 성벽 바로 앞에 갑자기 거대한 화염 회오리 폭풍이 생성되었다.
“키에에에!”
“캬아악!”
“아악…!”
회오리 폭풍에 휩쓸린 적군들은 하나같이 비명과 함께 연소되거나 살점이 뜯겨 나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데르툴족조차 그 범위 안에서는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좋았어! 하나 더 왼쪽에 만들어!”
그때 성벽 위에서 들려오는 젊은 청년의 목소리.
바로 윌리엄의 막내아들, 이안 칼슈타인의 것이었다.
그의 명령에 불의 정령왕 피닉스와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은 다시 한번 서로의 마법을 한곳에 같이 시전해서 융합시켰다.
그리고, 또 하나의 거대한 화염 폭풍이 왼쪽 성벽 앞에 생성되어 적군을 휩쓸기 시작했다.
“마족들 많이 쓰러졌다! 지금이야, 오리에드!”
[반말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거대한 황색 피부의 거인, 땅의 정령왕 오리에드가 버럭 외쳤다. 그러면서도 몸은 솔직한 게, 곧이곧대로 이안의 명령에 따라 들고 있던 거대한 망치를 성벽 앞 땅을 향해 내리꽂는 모습이었다.
우르르릉!
동시에 성벽 앞 땅이 연신 갈라지면서 쓰러진 적군을 땅속으로 삼켜버렸다. 이제 저들은 두 번 다시 햇빛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하하! 다들 보았지! 내 정령들의 힘을!”
이안은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로 거만하게 웃어댔다. 아로엘의 주요 관리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한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겠지만, 이안의 위력을 처음 겪어보는 이곳 병사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경외로운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자, 다들 더 힘을 내라! 나와 함께하는 이상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다!”
“와아아아!”
그리고 이 상황에서는 저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발휘되고 있었다. 힘겨워하는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걸 보면 말이다.
“테르디아를 위하여!”
“와아아!”
“엘도르 대륙을 위하여!”
“와아아!”
“아린 님을 위하여!”
“…네?”
물론 사심을 드러내면 당연히 반응이 좋을 리가 없다.
“…크흠! 저, 저기 또 적군이 성벽에 몰려온다! 어서 공격해!”
[…….]
[…….]
정령왕들은 한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옆 성벽 위에 융합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윌리엄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쟁 통이라 워낙 시끄러워서 이안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안의 외침을 전부 들었다면 절대 지금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는 못했겠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못 들었다.
‘몰라보게 성장했구나, 이안.’
지금 윌리엄이 보고 있는 이안의 모습은, 무려 3명의 정령왕을 소환해서 적군을 압도적으로 휩쓰는 동시에 아군들의 사기도 꾸준히 상승시켜 주고 있는, 그야말로 리더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불과 몇 달 전 매사에 의욕 없이 매일 음주가무만 즐기던 이안을 생각해보면 정말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이안은 칼슈타인 가문의 애물단지에서 벗어나, 클리프와 함께 당당히 가문을 대표하는 혈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오히려 유명세를 생각해보면 최근에는 클리프보다 더 잘나가는 편이다.
‘전쟁이 끝나면 로한에게 큰 보답을 해줘야겠어.’
물론, 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에 말이다. 신마대전에서 패배하는 순간 연합군들은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저 간악한 놈들은 천 년 전에도 자신이 점령한 도시의 인간은 단 한 명도 멀쩡히 살려둔 적이 없었다.
그때였다.
저 북쪽 멀리에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점점 커져오는 그 소리에 윌리엄은 고개를 돌렸다.
“…폭격기군.”
그들이 있는 쪽 머리 위로 빠르게 날아오고 있는 것은, 에드먼이 개인적으로 소유했던 무인 폭격기들이었다.
10대 정도의 폭격기는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일제히 폭탄을 떨구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광!
곧 쑥대밭이 되어가는 성벽 앞.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윌리엄은 목에 마나를 가득 싣고 외쳤다.
“전원 2차 방어벽으로 후퇴한다!”
폭격에 적군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이용해 모두가 뒤쪽의 워프진 쪽으로 달려 나갔다. 윌리엄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몇 개의 무형검을 적군에게 날린 뒤에야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아직까지 한 명의 고위 마족도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마족 중 그의 공격을 단 한 번도 막아낸 이가 없었다. 즉, 다 잔챙이라는 거다.
강한 마족이 아르베니아에도 없었고, 테르디아의 국경선 중심부인 이곳에도 없다. 노르토반도 고작 카르스트 딱 한 명만 등장한 상태.
그렇다면 나머지는 다 어디 있을까?
아로엘의 동쪽 국경선.
콰앙!
“아악!”
“빨리 후퇴해!”
이미 성벽 위로 올라온 수많은 마족 부대들의 모습과, 일제히 뒤로 도망치고 있는 헌터들의 모습이 동시에 보였다.
그리고, 도망치는 헌터들의 등을 향해 계속해서 날아오고 있는 수많은 마기 미사일들.
콰앙!
“우악?!”
한 명의 헌터가 정확하게 미사일을 맞고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그는 멀쩡한 자신의 상태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등 뒤에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한 명의 거대한 남성.
라가스였다.
“그만 쳐다보고 빨리 뛰어!”
“아, 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다시 도망치는 남성.
라가스는 마기 미사일을 막아낸 거대한 망치를 어깨에 멘 채로 전방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킁. 이 자식들, 여기로 다 몰려왔구만.”
이미 성벽을 넘어서 자신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수많은 데르툴족들.
숫자는 대략 500명 가까이 되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2배 이상이나 많은 숫자였다.
이것도 문제인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콰아앙!
“이크!”
바로 옆에서 터지는 폭발음에 라가스는 움찔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정확히 그가 있던 자리에 박살 난 건물 벽의 잔해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라가스는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 참, 정신없구먼.”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다양한 색깔의 미사일들. 저게 전부 다 고위 마족들과 드래곤들이 만들어낸 미사일이 아니라 단순한 폭죽이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캬캬캬캬! 한꺼번에 죽이기 쉽게 다 모여 있구나!”
광소하면서 연신 마기 미사일을 날리고 있는 저 여성형 데르툴족의 이름은 나퓰라. 로터스를 장악했었던 최상위 마족이었다.
그 옆에서 같이 싸우고 있는 마족들 역시 다보 티디아니, 보코르 등 모두 최소 최상위 이상의 데르툴족이었다.
서쪽 대륙에 잠입했었던 투할 휘하의 핵심 전력들이, 모두 아로엘의 국경선에 배치된 것이다.
“이번엔 반드시 너희 모두 죽여주겠다!”
블루 드래곤, 오딘이 마주 외치면서 계속 썬더볼트 마법을 날렸다. 그 곁에는 칸, 본, 제스 등 드래곤족 대부분이 모여서 마족들과 치열한 전투를 펼치는 중이었다.
양쪽 다 숫자도 똑같고, 힘도 비등비등한 상황. 그래서 어느 한 쪽이 우세를 점하기 힘들어 보였다.
올려다보던 라가스가 중얼거렸다.
“미리 눈치채지 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구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로엘에 최상위 마족들이 전부 몰려오고 있다고 로한이 긴급 연락을 했었다. 그래서 모든 드래곤족을 포함, 원래 윌리엄 쪽을 도우러 가려 했던 라가스 역시 여기로 위치를 바꾼 것이다.
근데 진짜 오길 잘했다. 저 하늘 위의 최상위 마족들은 제쳐두고, 지금 눈앞에 달려오고 있는 저 새까만 하급 마족들을 상대하려면 라가스 정도의 고위 헌터들은 필수였다.
“안 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
“위험합니다!”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한 라가스를 향해 몸을 날리는 한 남성.
콰아앙!
거의 동시에 그가 서 있던 자리가 크게 폭발했다. 강력한 마기 미사일이 적중한 것이다.
가까스로 라가스의 목숨을 살린 밀리오가 재빨리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우리 둘 빼고 모두가 이동했습니다. 우리도 바로 가시죠.”
“아, 알았어. 킁. 고마우이!”
바로 뒤쪽의 워프존으로 달려가는 둘.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한 마족이 있었다.
“그냥 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죠.”
데르툴족 본신의 모습으로 변했어도 여전히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는 르기에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들어 둘의 등을 향해 미사일을 쏘려고 했다.
거대한 마기 미사일은 다시 발사되었고,
퍼엉!
중간에 누군가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이런.”
아쉬운 표정으로 자신을 막아낸 이를 쳐다보는 르기에.
“당신 때문에 버러지 둘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책임을 지셔야겠죠?”
말을 마친 르기에의 미소가 한껏 짙어졌다. 동시에 그의 온몸에서 마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바로 앞에는 온몸이 에너지원 본연의 모습으로 일렁거리고 있는 반투명한 여성형 존재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하이퍼 최종 모드로 변신한 아린이었다.
“…….”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온몸의 에너지원을 최대한으로 활성화시켰다.
그러는 그녀의 머릿속에 스쳐가는 방금 전 로한의 한마디.
[저놈은 지구의 샤훌리트보다 강하다. 전력을 다해야 해!]
아린은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버텨야 해. 내가 지면 전세가 확 기울어버려.’
지금 최상위 데르툴 귀족들과 드래곤들이 백중세인 상태. 그중 가장 강한 둘이 지금 대치하고 있는 아린과 르기에였다.
둘 중 한 명이 패배하는 순간 전력은 확 기울어져 버릴 것이다. 특히 이미 모든 병력들이 2차 방어선까지 후퇴한 아린 쪽은 지금도 열세라고 보는 것이 맞다.
‘오빠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 안전하게 버틸 수가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그때.
“흐아아!”
르기에가 온몸에 마기를 휘감은 채로 전력을 다해 아린을 향해 날아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양 손바닥에 머금고 있던 마기 덩어리를 아린에게 뻗어 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