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여기는 아르베니아.
서쪽 대륙 중 가장 긴 국경선을 오스크만과 대고 있는 만큼, 막아야 하는 마족 부대의 숫자도 많았다.
하지만 아르베니아가 어디인가? 마족에게 가장 천적과도 같은 나라 아닌가?
“적들을 모조리 심판하라!”
“반드시 이 성벽을 사수해야 한다!”
성벽 위로 기어오르는 수많은 마족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아르베니아의 병력들.
그들의 무기에는 하나같이 모두 신성력이 감돌고 있었다.
그걸로 한 대 맞을 때마다,
“키에에엑!”
“끼아악!”
데르마 등 마족 부대는 하나같이 괴로운 괴성을 내지르며 추락했다. 바닥에 떨어진 뒤에도 계속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이었다.
마기의 천적과도 같은 신성력의 힘이었다.
“마나 건을 가진 자는 계속해서 쏴라!”
“한시도 멈추지 마라!”
일부 마나 건을 지급받은 고위 등급 헌터들이 발사하는 미사일도 100%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탄이었다. 그래서 노르토반의 헌터들이 쏘는 그것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피해를 적군에게 입히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레이스 성당에서 파견 나온 주교급 신관들의 활약이 엄청났다.
“테아이엘 여신의 이름으로….”
“모조리 정화하리라!”
그들이 집중해서 사용하는 강력한 신성 마법은, 다수의 적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 뿐만 아니라 아군들의 상처와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효과도 있었다.
그래서 아르베니아는 한 시간도 못 버티고 밀린 노르토반과는 달리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아주 안정적으로 국경선 쪽 성벽을 지켜내는 중이었다.
“성녀님.”
제1성기사단장, 헨리가 성벽 중앙에 서 있는 에텔드리다에게 다가왔다.
“말씀하세요.”
“현재 어디에도 마족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방은 물론, 혹시나 모를 후방 기습을 생각해서 국경선 뒤쪽도 살펴보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헨리의 말에 에텔드리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방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찾아보세요. 마족이 안 나타날 리가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머릿속에, 아까 전 로한을 만났을 때 맨 처음 들었던 말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마왕 투할이 고향의 모든 부하들을 이끌고 서쪽 대륙을 칠 거라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각 나라의 주요 핵심 전력들은 잔챙이들에 헛된 힘 쓰지 마시고, 마족들과의 싸움에 대비해 힘을 아껴 놓으라고 전하세요. 잔챙이를 아무리 많이 잡아도 마족을 못 이기면 이 전쟁은 패배합니다. 명심하세요.”
실제로 힌스테딘, 유키펠의 힘을 상대해본 경험이 있는 에텔드리다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큰 경각심을 가진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녀는 로한의 말대로 단 한 번도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마족과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과연 그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 로한 님도 없고, 피롤린도 지금 없는데….’
에텔드리다의 표정은 아까 전부터 계속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게 로한이 보내준 그의 부하들이었는데, 그들은 지금 아르베니아 남쪽에 갑작스럽게 생긴 대형 포탈을 막기 위해 전원 투입된 상태다.
즉, 지금은 그녀가 이 국경선에서 가장 강하다는 소리다.
‘테아이엘 여신이시여, 저에게 아르베니아를 지킬 힘을 주소서….’
오늘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던 주문을 또다시 외우는 그녀.
그때였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마기!
에텔드리다의 고개가 자연스레 하늘로 향했고,
“……!”
동시에 그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맑은 하늘 위에 갑자기 생겨난 검은 점이, 급격한 속도로 커져가는 것이 아닌가?
저건 분명 포탈이었다.
“하늘에 포탈이에요!”
그녀의 외침에 주변 신관들이 모두 하늘을 쳐다볼 그때.
팽창을 멈춘 포탈에서 곧 수많은 데르툴족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데르툴족이었다.
“마, 마족이다!”
“하늘에서 마족이 떨어진다!”
당황한 신관들의 외침에 국경선 병사들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이러면 하늘을 막아야 하나? 아니, 계속 국경선을 사수하라는 게 명령이었는데?
모두가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할 그때.
“모두 제자리를 지키세요!”
에텔드리다의 신성력이 가득 실린 외침이 모두의 정신을 바로잡아 주었다.
“주교급 신관들을 제외한 모두는 성벽을 사수하세요! 주교급 신관들은 나와 함께 마족을 막을 준비를 하세요!”
이어진 외침에 그제야 병사들의 혼란이 가라앉았다. 다시 모두가 성벽을 사수하는 동안, 주교급 신관들만 신성력 사용을 멈춘 후 에텔드리다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었다.
그러는 동안, 에텔드리다는 지금까지 아껴놓았던 신성력을 전력을 다해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아압!”
기합과 함께 그녀가 두 손을 하늘로 뻗자, 거대한 신성력 실드가 생성되어 순식간에 커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커지던 그것은 곧 국경선 전체를 뒤덮을 정도가 되었다.
옆의 성기사단장, 헨리가 그 모습에 감탄했다.
‘어느새 이 정도까지 성장하셨구나!’
최근 들어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하루하루 신성력이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일 정도긴 했지만, 이 정도로 강해졌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타고난 신체, 어린 나이, 계속된 치열한 전투 경험은 어느새 그녀를 대륙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신성력을 가진 존재로 성장시킨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최고라 하더라도 그녀는 단 한 명뿐이다.
쏟아지는 데르툴족의 숫자는 백 명이 넘어가고 있었고 말이다.
펑! 펑펑! 퍼엉!
데르툴족이 떨어지면서 발사한 마기탄들이 일제히 실드를 때리기 시작했다. 1초에 백 개가 넘는 숫자가 말이다.
그 충격은 고스란히 에텔드리다한테 전달되었고,
“크흑…!”
그녀의 입에서 바로 신음 소리가 배어 나왔다. 충격이 꽤 큰지, 입가에 얇은 핏줄기가 흘러내릴 정도였다.
“성녀님이 위험하다!”
“모두 힘을 보태라!”
근처의 주교급 신관들도 부랴부랴 신성력을 뿜어내어 실드를 강화시켰다. 실드는 더더욱 두꺼워졌고, 그로 인해 에텔드리다가 느끼는 충격도 훨씬 줄어들게 되었다.
헨리가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괜찮으십니까?”
“전 괜찮아요. 그보다 어서 전원 후퇴시키세요! 실드가 깨지기 전에 전원 2차 방어벽으로 후퇴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전원 후퇴! 후퇴하라!”
헨리의 외침에 곧 성벽 위의 모두가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모두가 성벽 뒤 워프진으로 이동했고 이제 남은 것은 에텔드리다와 주교급 신관들뿐이었다.
모두 안전하게 대피한 것을 확인한 그녀가 주변 모두에게 외쳤다.
“우리도 어서 후퇴해요!”
“지금은 안 됩니다! 신성력을 푸는 순간 워프진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족들에게 포위당하고 말 겁니다!”
신관 한 명이 부정적으로 외쳤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계속된 마족들의 공격으로 신성력 실드도 위태위태한 상황인데 이걸 풀고 저 먼 워프진까지 도망친다? 절대 불가능하다.
곧 대답이 들려왔다.
“내가 막아주마!”
들려온 장소는 지상이 아닌, 하늘 위였다.
모두의 고개가 들어 올려질 그때, 갑자기 하늘 전체가 화염으로 가득 뒤덮였다.
퍼어어엉!
“크악!”
“으아악!”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실드 마법을 때려대던 데르툴족 일부가 화염에 온몸이 불타오르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곧 폭발 여파가 사라진 후, 일행들 모두는 폭발을 일으킨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딘 님!”
“지금 도망쳐라.”
거대한 골드 드래곤, 딘이 짧게 말했다.
그 말에 에텔드리다는 모두를 이끌고 워프진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후퇴하던 그때, 딘이 다른 누군가에게 또 지시를 내렸다.
“모두 후퇴하는 동안 우리가 방어를 맡는다.”
“네.”
대답한 이는 엘-카시안이었다. 그러는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엘프들이 각자의 정령을 소환한 채 워프진 주위를 든든히 지키고 있었다.
곧 성벽을 넘어온 마족 군단들이 워프진 쪽을 향해 돌격해 왔고, 이내 수많은 정령들이 그들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엘-카시안의 두 정령,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나와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기분 나쁜 놈들투성이군!]
[니가 왜 기분 나빠해? 너랑 똑같은 기운 뿜어내고 있는데.]
[내 정제된 마기랑 저런 탁한 마기를 가진 놈들이랑 비교하지 마라!]
티격태격하면서도 꾸준히 융합 마나 공격을 시전하는 둘의 모습. 수많은 강력한 정령들에 의해 마족 군단들은 에텔드리다 등이 안전하게 후퇴할 때까지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했다.
데르툴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할지라도, 마왕도 아닌 이런 하급 데르툴족들을 상대로 고전할 딘이 아니었다.
콰아아앙!
“캬아악!”
그가 강력한 대인 화염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최소 몇 명의 데르툴족이 온몸이 불타오르면서 쓰러져갔다.
하지만 끝이 없었다. 아직도 포탈에서 쏟아져 나오는 데르툴족의 숫자는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딘은 생각했다.
‘왜 잔챙이들만 있는 거지?’
얼마 전 해돋이 작전 때 봤었던 그 강력한 최상위 귀족은 온데간데없고, 비교조차 안 될 만큼 약한 하급 데르툴족만 가득했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설마 다른 나라로 다 몰려갔나? 아니면, 또다시 포탈을 타고 방어선 후방에 나타날 생각인가?’
딘의 두 가지 가정은 어떤 것이 현실이 된다 하더라도 위험하다. 한 나라로 다 몰려갔다면 그 나라는 가장 쉽게 국경선이 뚫릴 것이고, 후방에 나타난다면 또다시 연합군의 병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테르디아의 영지, 빌
한 달 전에 로한이 엘-카시안을 만나기 위해 들렀던 그 영지다.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이 영지는 역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전투를 펼치는 중이었다.
“공작님! 오른쪽에 마족들이 몰려옵니다!”
시모어의 외침에 중앙에 서 있던 윌리엄이 고개를 돌렸다.
다수의 데르툴족이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오른쪽 성벽 위에 착지하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윌리엄이 빛과 같은 속도로 그쪽으로 달려 나갔다.
촤아악!
“끄아악!”
“커헉…!”
그의 크게 휘두른 횡검술 한 방에 성벽 위에 착지했던 데르툴족 다수가 큰 상처를 입으며 피를 내뿜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근처의 헌터들이 일제히 마나 건을 연사했다. 연이은 공격에 피해가 누적된 데르툴족들은 대부분 다시 성벽 밑으로 추락했고, 한 명은 바닥에 쓰러져 소멸되기 시작했다.
“절대 물러서지 마라!”
다시 한번 크게 외치는 윌리엄.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곧 후퇴 명령을 내려야겠군.’
주변을 둘러보니, 점점 성벽을 방어하는 게 위태로워져 가고 있었다. 자신과 친아들 클리프 및 시모어, 헤이즈 등 A급 이상 고위 헌터들이 필사적으로 마족들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적들의 숫자는 베고 베고 계속 베어내도 너무 많았다.
그나마 유키펠, 힌스테딘 같은 최상위 마족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에 없다면 다른 곳이 위험하다는 소리와도 같다.’
최상위 마족이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리가 없는 만큼, 분명 연합군 측 국경선 어디에든 나타나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을 것이다.
단지, 그곳이 지금 이 빌 영지가 아닐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