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오스크만 제국의 황성, 도미티아누.
드넓은 성내 모든 것이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이 성은 연무장조차 화려했다. 온통 하얀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벽면에는 당장이라도 살아서 움직일 듯한 생동감 넘치는 아름다운 조각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대리석 표면을 뒤덮고 있는 것은 강력한 실드 마법이었다. 조각상의 눈, 혹은 몬스터의 발톱 등으로 군데군데 박혀 있는 비싼 마나석이 내뿜고 있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드넓은 연무장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전 세계에 딱 한 명뿐이다. 바로 오스크만의 황제다.
지금, 그 오스크만의 황제가 연무장 중앙에 앉아 마기 수련법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는 투할.
그러는 그의 피부는 끊임없이 주변에 흐르는 마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벌써 네 시간째, 단 한 번의 움직임도 없이 계속 말이다.
잠시 후.
투할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동시에, 그의 붉은 동공에서 이전보다 훨씬 강한 안광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었다.
“…좋군.”
마기 수련법을 마친 투할의 한마디였다.
체내에서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는 강대한 마기를 만끽하면서,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천천히 황좌 쪽으로 걸어가는 투할. 그동안 마주친 신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 모든 데르툴들은 서쪽 국경선으로 보내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도미티아누 황성은 정말 드넓었다. 그는 한참을 걸어서야 황좌가 있는 대복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여전사라는 단어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건장한 한 여성이 있었다.
“준비가 끝났나 보군.”
아스모데가 투할을 보자마자 그리 말했다.
“이제야 고향에서 만났을 때 그 태산 같았던 투할이 보이는군. 그전까지는 한낱 드래곤 따위한테도 고전하는, 속이 텅텅 빈 껍데기 같았는데 말이야.”
아스모데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투할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황좌까지 걸어가 천천히 앉았다.
그런 뒤에야 투할은 입을 열었다.
“준비는 끝났나?”
“물론.”
아스모데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확실히, 이 성 안에 있으니까 마기 회복이 잘되더군. 다른 대륙으로 넘어와서 한 달 만에 고향에서의 몸 상태를 만들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도미티아누 황성은, 실제로 투할이 대륙 정벌을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장소였다.
어느 정도냐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값비싼 데르툴 마정석을 모두 이 황성을 위해 사용했을 정도였다.
그 결과, 이 황성 전체를 고향인 데르툴 행성과 똑같은 환경으로 만들 수 있었다. 전 우주에서 가장 마기가 넘쳐나는 장소로 말이다.
“하긴, 이 정도 아지트는 꾸며놔야 안전하게 대륙을 정복할 수 있겠지. 생각보다 준비를 잘해 놨다는 게 느껴지는군. 역시, 무력만큼이나 치밀한 마왕, 투할다운 준비성이야.”
“내일 새벽 3시 45분.”
투할이 아스모데의 말을 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때 전쟁을 시작한다. 너는 한 시간 전인 2시 45분에 모든 포탈을 개방하라.”
“드디어 시작이군.”
아스모데가 씨익 웃으며 붉은 안광을 빛냈다.
그녀는 누구보다 폭력, 살인, 전투를 좋아하는 악 그 자체의 종족, 데르툴 중에서도 최강의 마기를 지닌 마왕이다. 지금까지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당장이라도 끓어오르는 피를 분출하고 싶어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음?”
그때 아스모데의 시선이 전방으로 향했다.
갑자기 차원이 일그러지더니, 한 말끔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아스모데가 물었다.
“왜 사람 모습을 하고 있지, 르기에?”
“정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르기에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정찰이 끝났으면 여기에선 본모습으로 돌아와라.”
“죄송합니다만, 잠시 보고한 후 바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투할이 이 성에서는 본모습으로 변하라고 지시했던 걸로 아는데?”
“정찰 임무 중에는 특별히 변장을 유지해도 된다고 따로 허락하셨습니다.”
계속되는 르기에의 대답에 아스모데의 안광이 점점 거세졌다.
“한 마디를 지지 않는군, 르기에. 내가 마왕이라는 사실을 잊었나?”
“제가 따르는 마왕님은 오직 투할 님뿐입니다.”
르기에는 지지 않고 대답하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서로의 안광이 부딪치면서, 순간 대복도 전체가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로 변했다.
“그만.”
하지만 투할의 한마디에 팽팽함은 바로 끊어졌다.
“대륙 점령이 끝날 때까지 동족끼리의 쓸데없는 싸움은 금지다. 계약한 대로, 이 대륙에서는 내 지시를 따라라, 아스모데.”
그 말에 아스모데는 사나운 눈빛으로 한참을 투할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둘이 동맹 계약을 했을 때 조건 중 하나. 바로 엘도르 대륙 내에서는 무조건 투할의 지시를 따른다는 것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바로 소멸돼 버리는 ‘카인의 맹세’와 함께한 계약이기 때문에, 아스모데도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보고해라.”
투할의 말에 르기에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갈 공국이 완전히 점령당했습니다.”
그 말에 투할의 눈썹이 꿈틀했다.
질문은 그의 입이 아닌, 옆의 아스모데의 입에서 나왔다.
“벌써? 사갈 정도면 일주일 이상 버틸 정도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예상했었습니다.”
“그런데?”
“드래곤족과 이종족 연합군이 단번에 힘을 모아 사갈을 공략했다고 합니다. 특히, 처음 보는 최신식 비행 물체에서 떨어지는 폭탄들의 화력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비행 물체라니?”
“아마도 로한이 있는 아로엘 영지의 또 다른 발명품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허.”
아스모데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로한이라는 놈과 엮여 있으면 항상 재밌는 소식만 들려오는군. 이 대륙에 넘어온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가장 많이 들은 이름이 로한이야. 그러고 보니, 너를 소멸 직전 상태까지 몰고 갔던 놈도 로한 아니었나?”
“…….”
아스모데의 도발에 르기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입가의 미소가 조금, 아주 조금 짙어졌을 뿐이다.
“언데드 마법진은?”
그때 투할이 르기에에게 물어왔다.
“그것 역시 거의 다 제거되었습니다. 상황을 보니, 내일 전쟁 시작 전까지 서쪽 대륙의 모든 병력들이 국경선에 집결하는 것이 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면 변수 하나가 사라지는 건데.”
아스모데의 말에 투할도 속으로 동의했다.
언데드 마법진과 사갈 공국은 최소한 신마대전 시작 전까지 안 없어지고 남아서, 계속 서쪽 대륙의 병력 집결을 막았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또 다른 무기인, 아스모데의 포탈 능력이 있지 않은가?
“포탈을 여는 시기를 더 앞당긴다.”
투할이 아스모데에게 지시했다.
“자정에 정확히 포탈을 열어라. 4시간 정도면 충분히 연합군의 집결을 분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투할은 이어 르기에를 돌아보았다.
“넌 돌아가서 계속 전황을 확인해라.”
“알겠습니다.”
“부하들의 상태는?”
“모두 최고의 컨디션입니다. 현재 각자 지정받은 국경선 쪽 부대 내에서 전투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았다.”
그것으로 투할은 입을 다물었다. 르기에는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차원의 틈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완전히 차원의 틈이 닫히기 전.
르기에의 두 눈의 안광이 아스모데에게 향하는 것을, 그녀는 확인할 수 있었다.
“하! 시건방진 새끼.”
아스모데는 기가 차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대륙 정벌이 끝나면 저 새끼는 내가 따로 손 좀 봐야겠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네놈의 부하와 따로 대련하는 것은 계약과 상관없겠지?”
“…….”
“지가 마왕인 줄 알고 나대는 놈에게, 진짜 마왕의 힘을 뼛속 깊숙이 박아줘야겠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 주인님!
갑자기 눈앞에 마기 거울이 떠오르더니, 여성형 데르툴족의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 드러났다.
로터스에 잠입했었던 마족, 나퓰라였다.
- 큰일입니다, 주인님!
“뭔가?”
투할이 묻던 그때.
- 콰아아앙!
갑자기 거대한 폭발음이 마기 거울 안에서 들려왔다.
* * *
10분 전.
아로엘 성의 대회의실 안.
대형 스크린에서,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인공위성 Edmon-900005입니다.]
[지시에 따라, 목표 지점으로 폭격 지점을 설정합니다.]
[X : 2,097, Y : 72, Z : 3,541의 좌표로 폭격 지점을 설정하였습니다.]
[내부의 에너지원을 폭격용 레이저로 전환합니다.]
[전환 완료. 발포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좋아, 좋아! 이제 준비 다 끝났다!”
한참 동안 스크린 위 키보드를 두 손으로 두들기고 있던 에드먼이 입을 열었다.
“인공위성 다섯 대 모두 발사 준비 끝났어! 이제 이 버튼 하나만 누르면, 여기 국경선 전체가 쑥대밭이 될 거야! 킥킥킥킥!”
에드먼이 손가락으로 오스크만의 서쪽 국경선을 가리키고 사악하게 웃었다.
“어때? 당장이라도 이 새까만 점들이 전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엉?”
“그건 보고 싶긴 하네.”
지켜보던 로한이 대답했다.
“지구에서 봤던 인공위성 폭격보다는 훨씬 강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
에드먼이 빽 역정을 냈다.
“이번에 쏜 최첨단 인공위성에 비하면 지구 것들은 죄다 구닥다리 수준이야! 알아?! 성능이 몇 배 이상 차이가 난다고! 특히 폭격할 때 공격력을 비교해보면…!”
“이 버튼 누르면 되는 거지?”
“야! 설명 끝까지 듣고 눌러!”
에드먼이 소리 지르거나 말거나, 로한은 스크린 한쪽에 있는 발사 버튼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버튼을 누르면서 로한은 대답했다.
“설명 듣는 것보다, 스크린으로 지켜보는 게 백배 더 정확하잖아?”
“그거야 그렇지. 암.”
그 말에 의외로 빠르게 인정하는 에드먼이었다.
오스크만 제국의 서북쪽 국경선.
수많은 데르마들, 시체들과 포탈 몬스터들 및 개조된 키메라들이 잔뜩 모여 있는 대규모 부대가 있었다.
적게 봐도 만 마리 이상의 병력이 집결되어 있는 이곳은, 과거 사갈 공국을 점령했었던 카르스트가 지휘관으로 발령받은 장소였다.
“흠….”
막 마기 수련법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온 카르스트가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해 보았다.
사갈 공국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해진 마기량. 하지만 그는 아직도 만족이 되지 않았다.
‘약간 모자라군. 몇 놈만 더 잡아먹어 볼까.’
카르스트가 전방에 모여 있는 병력들로 향했다. 워낙 숫자가 많으니, 저기서 몇백 명만 자신의 마기로 흡수한다 해도 딱히 전력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결국 흡수하는 쪽으로 마음의 선택지를 옮기던 그때.
“……!”
갑자기 그의 고개가 하늘로 홱 들어 올려졌다.
하늘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기운!
곧 그것을 그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마나로 똘똘 뭉쳐진 거대한 푸른 덩어리가, 엄청난 속도로 자신의 부대 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기를 느낀 그는 최대한으로 마기를 끌어 올려 방어막을 생성했다.
그와 동시에,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부대 전체를 집어삼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