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사이보그-119화 (119/200)

제119화

그렇다면, 고든을 돕겠다고 선언한 르기에는 지금 어디 있을까?

왕성 주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까운 고든 저택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멀리 떨어진, 그의 비밀 아지트에 있었다.

[르기에! 르기에, 어디 있느냐! 빨리 나를 도와다오! 어서!]

고든의 다급한 부름을 듣고 있는 르기에는, 아주 여유로운 모습으로 소파에 기댄 채로 레드 와인이 담긴 잔을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그동안 머릿속에는 계속 고든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를 배신한 것이냐! 내가 위기에 빠지면 바로 도와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후후후….”

르기에는 나지막이 웃었다.

“아직도 나한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군요… 음?”

혼잣말을 하던 르기에는, 갑자기 자신의 몸속 한 편에 연결되어 있던 고든과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그와 계약했던 하수인이 죽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런, 이런. 결국 소멸당할 때까지 진실을 깨닫지 못했군요, 고든 공작.”

르기에에게 있어, 고든이란 그저 이용당하다 버려질 체스의 말 같은 존재였다. 룩이나 퀸 같은 중요한 말도 아니고, 기껏해야 비숍 혹은 나이트 정도의 흔한 말 정도?

그렇게 버려질 패를 르기에가 왜 도와줘야 하는가?

‘왕성에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만으로도 당신은 할 일을 다 했습니다. 고생했습니다, 고든.’

그래도 고든은 영광일 것이다. 무려 르기에에게 이렇게 속으로 격려의 말까지 받다니 말이다.

‘자, 고든의 희생으로 얻은 이 시간을 잘 이용해야겠지.’

왕성에 고든 등을 투입한 계략은 르기에가 꾸민 짓이었다.

고든이 필리프, 윌리엄 등에게 열등감 및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일부러 왕성을 장악하라고 지시를 내렸고, 고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왕성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이로 인해, 르기에는 차후 이어질 ‘천지개벽’ 작전의 준비 시간을 충분히 벌게 되었다.

‘그러면 슬슬… 음?’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려던 르기에는, 갑자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눈이 커졌다.

“……!”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로한이,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로한이 입을 열었다.

“네가 르기에냐?”

그 질문을 들을 때까지 놀란 눈을 뜨고 있던 르기에는, 곧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항상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그 특유의 평상시 표정으로 돌아온 것이다.

“맞습니다. 어떻게 여기를 알고 왔죠?”

르기에의 질문에 로한은 솔직히 대답했다.

“유키펠이 술술 털어놓더군.”

* * *

‘천지개벽’ 작전과 ‘해돋이’ 작전이 동시에 시작되기 한 시간 전. 로한은 밀리오의 긴급 연락을 받았다.

- 유키펠이 드디어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로한은 만사를 제쳐두고 벨타디아의 대신전 지하로 이동했다. 데르툴족과 데르마들이 갇혀 있는 그 특별 수용소 말이다.

이후 30분 동안 둘은 궁금한 점을 모두 유키펠에게 물어보았고, 한 달 반 만에 나르커즈에 굴복한 유키펠은 모든 정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모두 정리한 것 같군요.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밀리오는 들은 정보를 문서로 작성한 뒤 옆의 로한에게 넘겨주었다.

로한은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유키펠이 자백한 마족 관련 정보>

- 나는 마왕, 투할 님의 직속 최상위 귀족, 유키펠이다.

- 투할의 정체는 현재 오스크만 제국의 황제인 벤슈타인이다.

- 투할은 이미 오스크만 제국을 완전히 자신의 데르마들로 장악한 상태다.

- 서쪽 대륙에 잠입해 있는 데르툴족들은 모두 투할의 직속 귀족들이다.

- 말파스는 이들 중 가장 낮은 직급인 하급 귀족이었다. 힘은 물론, 머리도 멍청해서 당시 모두들 실패할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 모든 주인님의 수하들은 이미 서쪽 대륙의 핵심 자리에 앉아 있으며, 투할의 지시가 떨어지면 한날한시에 왕성을 장악하기 위해 데르마들을 비밀리에 몰래 육성하고 있다.

- 이 중 이미 왕성의 장악이 끝난 나라는 사갈 공국이며, 아르베니아는 성녀를 제외한 모든 신관을 데르마로 바꾼 상태다.

- 투할은 제2차 신마대전을 준비 중이다.

“음… 제가 들은 것과 전부 일치하는군요.”

문서를 중간까지 읽은 로한이 입을 열었다. 자신 역시 유키펠의 자백을 듣는 내내 그 말을 머릿속 텍스트 파일로 꾸준히 작성했었는데, 그 내용과 지금 문서 내용이 전부 일치했다.

“예상했던 내용이긴 하군요.”

“그래서 더더욱 심각합니다. 진짜 제2차 신마대전을 준비 중이었다니….”

로한의 말에 대답하는 밀리오의 표정은 심각함 그 자체였다. 이전부터 로한에게 마족들이 어떻게 움직일 것이라고 많이 들었었지만, 실제로 자백을 받았을 때 느껴지는 심각성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스모데라는 여성 마왕에 대한 정보도 없군요.”

안 그래도 아스모데에 대한 질문도 했었다. 하지만 몇 번을 물어봐도 유키펠은 아스모데에 대해서는 정말 모른다는 대답만 반복할 뿐이었었다.

이러면 이렇게밖에 예측할 수 없다.

“아스모데의 합류를 투할이 다른 부하들에게 비밀로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유키펠이 잡힌 이후에 합류했거나요. 나르커즈 약물에 중독되었는데 거짓 자백을 할 일은 없으니 말입니다.”

“음….”

“일단 아스모데는 나중에 생각하죠. 다행히 그녀는 현재 오스크만 제국에 있는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서쪽 대륙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해돋이’ 작전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네. 다행히 유키펠이 마족 명단을 다 토해내서 훨씬 편해지긴 했습니다.”

말을 마친 로한은 계속해서 문서를 읽어갔다.

- 유키펠이 밝힌 서쪽 대륙에 잠입한 마족들의 정체

노르토반 설국 : 황제 페른

로터스 용병 국가 : 왕비 나퓰라.

섬나라 아바 : 해군 총사령관 다보 티디아니.

사갈 공국 : 공왕 카르스트, 총사령관 라디치

사막 국가 이즈미트 : 무녀장 보코르.

테르디아 소국 : 고든 공작, 르기에.

읽던 도중 밀리오가 말해왔다.

“로한 님이 말씀하신 그 이종족 연합군의 스파이? 그들의 정보력이 꽤 괜찮은 모양입니다. 얼마 전 받아보았던 그 명단과 지금 들은 명단이 거의 일치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단 한 명이 의외입니다.”

로한의 시선이 문서의 제일 끝으로 향했다.

르기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제가 알고 있는 관리들 중에는 이런 이름이 없습니다. 혹시 신관들 중에 르기에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있습니까?”

“저도 들은 바 없습니다.”

“흠… 만약 주요 관리로 변장한 게 아니면, 고든을 정면에 내세우고 뒤에서 몰래 일을 꾸미고 있다는 소린데….”

만약 지금 로한의 예측이 맞다면, 고든보다 이 르기에를 더 경계해야 한다.

적은 이미 로한을 포함한 테르디아의 주요 핵심 헌터들의 힘을 잘 알고 있지만, 지금 로한은 그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으니까.

잠시 생각하던 로한은 결심했다.

“아무래도 르기에, 이놈은 제가 직접 상대해야겠습니다.”

“로한 님이 직접요?”

“이놈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니까요.”

최악 중의 최악의 경우를 항상 생각하라.

만약 이 르기에라는 자가 로한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한 데르툴족이면, 괜히 애매한 실력의 아군을 보냈다간 죽거나 생포되어서 연합군의 전력만 손실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아예 현재 연합군에서 가장 강한 전력인 로한이 직접 르기에를 상대한다면, 혹시 모르는 변수를 최대한으로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

“제가 없어도 지금 구성해놓은 연합군 병력과 드래곤족 개개인의 힘이라면, ‘해돋이’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은 낮긴 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저도 최대한 빨리 르기에를 제압하고 아군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르기에 이자는 어디 있을까요?”

“지금 물어보면 알 수 있겠죠.”

로한은 다시금 유키펠을 향해 다가갔다.

“야, 유키펠. 르기에 어디 있는지 알지?”

“모… 모른…다…. 으…으으…. 알고… 있… 아… 아니야…!”

대답이 오락가락하는 유키펠의 모습. 그새 나르커즈 약물 효과가 좀 풀렸는지, 또다시 이성이 굴복당하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버텨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로한은 여유로웠다.

“조금만 더 투약해 볼까요?”

또 나르커즈를 투약하면, 이렇게 남아 있는 이성조차도 날려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밀리오에게 받은 약물 한 병을 다시금 유키펠의 뇌핵에 투약한 로한. 그는 최면 효과가 완전히 퍼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린 뒤에야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한다. 르기에 위치 알지?”

“알…고… 있…다….”

결국, 또다시 완전히 굴복한 유키펠을 향해 로한은 질문을 이었다.

“어딘지 말해.”

* * *

“이런.”

르기에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꼭 신중치 못한 동족들이 일을 그르치려 하는군요. 말단 귀족 주제에 방심하고 날뛰다가 생포당한 말파스도 그렇고, 본인이 진짜 최상위 귀족인 줄 알고 나대던 유키펠도 그렇고요.”

“최상위 귀족이 아니었다고?”

“아닙니다. 그는 하나 비어 있던 최상위 귀족 자리를 운 좋게 차지했을 뿐, 실력은 다른 상위 귀족보다도 약하죠. 진짜 최상위 귀족은 다른 차원의 힘을 보여줍니다.”

르기에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힌스테딘과 싸워봤으니 잘 알 텐데요? 최상위와 상위 귀족 간의 차이를요.”

그 말에 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두 배 이상 차이가 났지.”

로한이 유키펠을 상대할 때는 하이퍼 모드 레벨 1이었고, 힌스테딘과 싸울 때는 날개가 달린 하이퍼 모드 레벨 2였다.

사이보그의 하이퍼 모드 레벨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전투력이 말도 안 되게 늘어나는 걸 생각해보면, 유키펠과 힌스테딘의 힘의 차이도 그 정도의 차이일 것이다.

“그런데, 너도 최상위 귀족인가?”

이번엔 로한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건 왜 물으시죠?”

“너에게 느껴지는 마기가 힌스테딘이랑은 또 달라서.”

“호오… 역시 바로 파악하셨군요. 역시 대천사의 현신인 로한 님다우십니다.”

짙은 미소로 대답한 르기에.

동시에 그의 신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데르툴족으로 돌아가는 과정이었다.

변신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어떤 마족보다도 빠른 속도의 변신이라, 중간에 로한이 기습할 생각조차도 못 할 정도였다.

‘변신 속도가 빠를 만하군. 그만큼 강해.’

로한은 알고 있다. 훨씬 강한 데르툴족일수록, 변신하는 시간도 훨씬 빠르다는 것을.

단적인 예로 지구에서 맞붙었던 마왕, 샤훌리트의 변신 속도는 다른 데르툴족과 비교하면 거의 세발자전거와 F1 레이싱 카 정도의 차이를 보여줬었다.

문제는, 지금 눈앞의 르기에라는 놈의 변신 속도가 그 샤훌리트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느껴지는 기운 또한 샤훌리트와 비슷하다.’

갑자기 샤훌리트와 싸울 때가 떠올랐다. 로한이 전신을 부위별 자폭 공격으로 이용한 뒤에야 간신히 이길 수 있었던 당시 기억이 말이다.

“제 소개를 다시 하죠.”

데르툴족으로 완전히 변신한 르기에가 입을 열었다.

“최강의 마왕, 투할 님을 가장 오랫동안 보필했던 충직한 부하이자, 그의 오른팔로 불리고 있는 르기에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로한 공작님.”

정중히 허리까지 숙이며 예의를 갖추는 르기에. 하지만 로한을 바라보는 그의 붉은 동공은 살기로 가득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