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마족이 된 고든이 달려오는 속도는 너무도 빨랐다. 멀쩡한 상태였던 케이도 저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지 못했었다.
당연히, 지금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는 더더욱 저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번에 죽을 수도 있다.’
케이는 직감했다. 저 마기로 똘똘 뭉쳐진 강력한 주먹 한 방이면 자신은 즉사할 거라는 사실을.
하지만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
‘주인님이 목숨을 걸고 국왕을 지키라고 하셨다.’
애초에 주인님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휴머노이드에게 있어서 주인의 말은 법이고 생명이었다. 그에게는 로한의 말이 그랬다.
하지만 어떻게 지킨단 말인가?
아니,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나를 희생하는 것.’
마음을 단단히 먹은 케이는 달려오는 고든을 향해 왼팔을 내밀었다.
동시에 들려오는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
[왼팔의 에너지원을 자극시켜 폭발합니다.]
그리고, 고든의 주먹이 닿기 전에 왼팔은 폭발했다.
콰앙!
“크아악!”
고든이 처음으로 비명과 함께 뒤로 비틀비틀 물러섰다. 폭발에 휩쓸린 상체의 피부에 전체적으로 구멍이 송송 나 있는 걸 보니, 고든 역시 큰 타격을 받은 듯했다.
“이 새끼 뭐야?!”
고든은 왼팔이 날아간 케이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이렇게 자폭이 가능한 종족은 데르툴족뿐이라고 르기에가 설명했었는데?
곧 그의 머리가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설마, 이 새끼도 로한과 같은 종족?’
르기에가 보여준 정보에 의하면, 케이는 로한이 파견 보낸 스파이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놈도 로한과 같이 특이한 신체를 가진 존재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흐흐흐, 하지만 그 정도 폭발력으로는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득의의 웃음소리를 내는 고든의 피부는 어느새 완벽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이 정도 화력이면, 고든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맞아도 상관없었다. 머릿속에 심은 말파스의 뇌핵만 안 다친다면 말이다.
“어디 계속 자폭해 보아라! 다음엔 오른팔을 터뜨릴 테고, 그 다음은 왼쪽 다리냐? 하! 사지를 다 터뜨려도 이제 3번밖에 공격할 기회가 없겠구나!”
“…….”
“흐하하하!”
기분 좋게 웃으며 다시 달려들려고 하는 고든.
하지만, 그는 다리를 멈추고 고개를 뒤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왕궁 입구 쪽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 때문이었다.
‘이건…!’
고든의 눈빛이 살짝 흔들릴 때, 케이 역시 고든과 마찬가지로 왕성 입구에서 다가오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윌리엄 공작의 기운이다!’
이 야수와도 같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보유한 자는 테르디아에서 윌리엄 한 명밖에 없다.
케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빠르게 가까워져 오는 윌리엄의 기운을 가늠해 보건대, 한 2~3분 정도만 더 버티면 이곳에 도착할 것 같았다. 3분 정도면, 자폭을 이용해서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시간이다.
반면 고든의 표정은 초조해졌다.
“젠장!”
벌써 월리엄의 병력이 원군으로 도착하다니!
지금 테르디아에서 로한 다음으로 강하다고 알려진 윌리엄이 이곳에 합류하면, 필리프를 제거한다는 그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다급하게 마기를 끌어 올렸다.
“죽어라!”
고든은 두 손에 모은 마기를 필리프와 그의 가족들 쪽으로 내민 후 빔처럼 발사했다. 하지만 케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에너지원을 최대한으로 오른손에 집중시킨 뒤 그 빔을 막아내었다.
“윽!”
물론, 완벽하게 막아내진 못했다. 빔에 맞은 오른팔이 빠른 속도로 녹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케이는 어차피 이 오른팔을 버릴 예정이었다.
[오른팔 전체를 유도탄으로 변형합니다.]
[유도탄으로 변형된 오른팔을 어깨에서 분리합니다.]
[목표물을 향해 유도탄을 발사합니다.]
유도탄 모양으로 변신한 그의 오른팔이, 바로 어깨에서 분리되어 고든에게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콰앙!
“크악!”
또다시 굉음과 함께, 고든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밖에서 데르마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윌리엄 등의 귀에도 들려왔다.
윌리엄은 바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확인했고,
‘폐하의 침실 쪽!’
동시에 굉장히 다급해졌다.
그는 로한이 준, 렐리기륨으로 제작한 최첨단 투 핸드 소드에 마나를 급격히 몰아넣은 후, 크게 횡으로 휘둘렀다.
촤촤촤촥!
“끄륵…!”
“끄에엑!”
사정 범위 안에 있던 8명가량의 데르마들이 허리가 절단되어 바닥에서 꿈틀댔다.
한꺼번에 눈앞의 적이 쓰러지면서 활로를 확보한 윌리엄은 외쳤다.
“먼저 가겠다!”
이후 대답도 듣지 않고 전속력으로 침실 쪽으로 몸을 날렸다. 어찌나 급했는지, 문을 이용하지도 않고 벽에 몸통 박치기를 해서 강제로 뚫어낸 후 침실로 들어서는 모습이었다.
안에 들어온 그는 바로 참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수많은 왕실 기사단의 시체들. 그리고 그들을 죽인 범인인 듯한, 고든의 얼굴 형상을 띠고 있는 한 명의 마족. 그의 손에 멱살이 잡혀 있는, 몸통만 남은 한 기사의 모습.
그리고….
‘폐하!’
구석에 박혀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필리프 외 왕족들의 모습. 다행히, 셋 중 아무도 다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망할!”
반면, 윌리엄을 본 고든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들고 있던 케이의 몸통을 집어던진 후, 바로 필리프 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윌리엄이 더 빨랐다. 그는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고든을 향해 검으로 찌르기 공격을 해왔다.
그 위세가 너무도 강렬하여, 고든은 어쩔 수 없이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푹!
“……!”
고든의 눈이 커졌다.
윌리엄의 검이, 방어 자세를 취한 자신의 팔뚝에 깊숙이 박힌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윌리엄은 그 상태로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촥!
“악!”
고든은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거의 2/3가량 베어져서 덜렁거리고 있는 왼 팔뚝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을 고든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 하찮은 인간 따위가…!”
르기에가 분명 그랬었다. 드래곤족과 로한을 제외하면 이제 대륙에서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천하의 윌리엄도 지금의 완성된 자신보다는 한 수 아래라고 장담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
하지만 오래 놀랄 시간도 없었다. 윌리엄이 다시 마나를 끌어 올린 상태로 자신을 향해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아직 왼 팔뚝이 다 아물지 않은 상태의 고든은, 어쩔 수 없이 그의 공격을 피해내거나 막아내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촥!
“윽?!”
서걱!
“악!”
윌리엄의 공격이 계속해서 고든의 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피하려고 하면 훨씬 더 빠른 움직임으로 공격을 성공시켰고, 방어 자세를 취하면 자신의 단단한 피부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공격력으로 피부를 베어냈다.
그 결과,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고든의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어버렸다. 말 그대로 압도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고든은 현실을 계속해서 부정했다.
이게 아니었다. 그가 예상했던 미래는, 자신이 압도적으로 윌리엄을 몰아붙인 후 그의 목을 베어내고 승리를 만끽하는 장면이었다.
지금과는 완전히 반대의 양상으로 흘러가야 한단 말이다!
자연스럽게 르기에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분명 윌리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최고의 힘을 준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서걱!
“끄아악!”
그 어느 때보다 큰 비명을 지르는 고든. 동시에 왼쪽으로 몸의 중심이 무너져 버리는 모습이었다. 윌리엄의 검이 그의 왼쪽 발목을 절단해버린 것이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는 고든을 향해,
“이 현실이 믿기지 않나 보군.”
이렇게 윌리엄이 말을 해왔다. 지금 고든의 표정만 봐도 그가 얼마나 충격에 빠져 있는지, 그리고 왜 충격에 빠져 있는지 윌리엄은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나도 한 달 전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하나의 벽을 더 넘은 상태다.”
지난 한 달간, 로한에게 자극을 받은 윌리엄은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서 계속 독하게 벽면 수련을 이어갔다. 그 결과, 그는 일주일 전에 드디어 또 하나의 벽을 넘어섰다.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각성자 단계에서 벽을 넘으면 검강을 사용할 수 있는 초월자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벽을 하나 더 넘으면 불멸자라는 단계에 도달한다.
자신의 체내 마나 외에도, 외부의 마나까지 자유자재로 조종이 가능한 경지. 이 수준이 되면 드디어 타 차원의 존재에게도 상처를 줄 수가 있다. 지금 고든을 압도하고 있는 윌리엄처럼 말이다.
윌리엄은 지금 그 불멸자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힘이다. 막아보아라.”
윌리엄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든의 몸 주위에 돌아다니던 마나가 갑자기 불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변한 그것들은 모두 검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윌리엄의 의지만으로 만들어진 무영의 검이, 20개가 넘게 생성되어 고든을 완벽히 포위한 채로 점점 거리를 좁혀가는 모습이었다.
“……!!”
고든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검 하나하나에 실려 있는 엄청난 기운을 느낀 것이다. 지금 그의 몸 상태라면, 저 검 하나도 막아내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런데 무려 20개나?
본능적으로 그는 느꼈다. 저걸 다 맞으면 죽는다!
“이익…!”
고든은 몸속의 모든 마기를 짜내어 방어막을 펼쳤다.
하지만 완벽한 무영의 검이 접근하는 걸 막아낼 순 없었다. 아주 천천히, 1cm씩 무영의 검은 점점 고든의 피부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고든은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기감을 느꼈다. 특히, 자신의 뇌핵으로 다가오고 있는 정수리 쪽의 무영 검이 가장 위협적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는다!
“레이먼드! 레이먼드 어디 있느냐! 당장 데르마들을 이끌고 나를 도와라!”
고든이 다급하게 외쳤을 그때, 화답이라도 하듯이 침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하지만 들어온 건 아쉽게도 레이먼드가 아니었다.
“데르마들은 모두 정리했습니다, 아버님.”
윌리엄에게 보고하는 그는 장남, 클리프였다.
그를 본 윌리엄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클리프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전투 직전과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일주일 전의 그가 뿜어내던 기운과 비슷했다.
“S급이 되었구나.”
“네, 아버님.”
클리프가 상기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끝없는 벽면 수련에도 다가갈 수 없었던 초월자 최강의 경지, S등급을 지금 데르마들과의 전투를 통해 드디어 도달한 것이다. 이로써, 테르디아는 5명의 S급 헌터를 보유한 초유의 국가가 되었다.
“너는 혹시 모르니 국왕 폐하를 모셔라.”
“네.”
곧 클리프는 필리프 및 왕족들을 데리고 침실을 나섰다. 하지만 무영 검에 포위된 고든은 그들이 침실을 떠날 때까지 어떠한 견제도 불가능했다.
지금, 고든은 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게 더 중요했다.
“르기에! 르기에, 어디 있느냐! 빨리 나를 도와다오! 어서!”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을 르기에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치고, 그것도 모자라 속으로도 불러보았다. 하지만 르기에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답장도 없었다.
“이, 이 자식! 설마 나를 배신한 것이냐! 내가 위기에 빠지면 바로 도와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고든이 버럭 외치던 그때.
드디어 무영 검이 그의 피부에 닿기 시작했다. 특히, 정수리에 무영 검의 촉감이 느껴진 그 순간, 고든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 안 돼!”
푸푸푸푸푹!
마족의 힘을 빌려서라도 윌리엄을 꺾고 싶었던 고든.
하지만 마족이 되어서도 그는 윌리엄이라는 산을 넘지 못하고, 결국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는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