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투할이 계획한 회심의 ‘천지개벽’ 2차 작전은 맨 처음에는 성공하나 싶었다.
그러나 정말 타이밍 좋게 ‘해돋이’ 작전이 거의 동시에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국가가 ‘천지개벽’ 작전 성공 직전에서 고배를 마시기 시작했다. 지금 노르토반의 상황처럼 말이다.
하지만 굳이 ‘천지개벽’의 2차 작전을 할 필요가 없는 국가도 있었다. 이미 왕실을 완전히 장악한 사갈 공국 같은 곳 말이다.
“크아아아!”
“캬아악!”
이곳은 사갈 공국의 왕성, 트라피타.
거의 몬스터 같은 괴성을 지르면서 전방의 무리를 향해 달려드는 수많은 병사들이 있었다.
카르스트의 데르마들이었다.
이성을 잃은 채로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공격해 오는 모습을 보니, 모두 버서커 모드로 변한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하앗!”
전방의 무리 중앙에서 한 여성의 기합이 터지면서, 동시에 크고 두꺼운 신성력 보호막이 무리 전체를 감쌌다.
데르마들은 그 보호막을 뚫으려고 온갖 공격을 다 퍼부었지만, 보호막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대륙에서 가장 신성력이 강한 존재인 성녀, 에텔드리다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원 공격하세요!”
“하아압!”
“테아이엘 여신의 이름으로!”
에텔드리다의 지시에 주변의 성기사들이 신성력을 잔뜩 끌어 올린 채로 데르마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촥! 촤촤촥!
“끄에엑!”
“끄륵…!”
죽어가면서 내는 신음 역시 몬스터들과 똑같은 데르마들. 이번 성기사들의 합공에 한 번에 20명 가까이의 데르마들이 사망했다.
이것이 마기와 가장 상극의 능력인 신성력을 보유한, 서쪽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라 불리는 아르베니아 성기사단의 힘이었다.
“우측에 또 몰려옵니다!”
한 성기사의 외침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또 100명 가까이 되는 데르마들이, 버서커 모드로 변해서 전광석화처럼 일행들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끝도 없구나.”
에텔드리다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처치한 데르마 숫자만 해도 천 명이 넘어간다. 하지만 아직도 몰려드는 사갈 데르마들의 숫자는 끝이 없었다.
‘사갈 공국 전체가 데르마일 수도 있다는 로한 님의 말이 사실이었어.’
안 그래도 로한이 사전에 이렇게 경고했기 때문에, 일부러 이곳에 아르베니아의 최고 핵심 전력들만 워프해서 데려왔다.
여기 있는 병력들은 무려 성녀 에텔드리다와, 그녀를 가장 가까이서 지키는 그레이스 성당 직속 호위 성기사단들이다.
‘칸 님께서 승기를 잡아주셔야 하는데….’
에텔드리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하늘에는, 두 명의 거대한 마족과 한 마리의 거대한 그린 드래곤이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하늘의 전투 양상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설마 사갈 공국도 마족이 둘일 줄이야.’
스파이들이 마족과 관련된 인물로 의심했던 멤버, 공왕 카르스트와 총사령관 라디치. 이 둘이 알고 보니 전부 마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린 드래곤인 카르무르파르, 줄여서 칸은 지금 2 대 1로 엄청나게 고전 중이었다.
퍼퍼펑!
“큭…!”
자신의 신체를 때리는 연이은 합공에 칸은 조금씩 피해가 누적되어 가고 있었다.
이미 몸 전체에 피멍이 안 든 곳이 없었으며, 입가에는 내상으로 인해 굵은 피가 한 줄기 흐르고 있었다.
“하찮군.”
데르툴족으로 돌아온 최상위 귀족, 카르스트가 입을 열었다.
“드래곤 로드인 딘 정도의 위력을 예상해서 살짝 긴장했었는데, 딘과 비교하면 턱도 없는 실력이군. 이 정도면 라디치가 없었어도 1대1로 이겼겠어.”
“헛소리! 캬아아아!”
칸은 크게 입을 벌려 그린 드래곤의 주특기 공격인 맹독 브레스를 발사했다. 강력한 독이 순식간에 두 마족의 주위를 감쌌다.
일단 라디치는 마기를 끌어 올려 방어에 집중했지만, 카르스트는 아니었다.
“안 통한다.”
그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독 구름을 대놓고 무시하며 칸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는 그의 양손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가 집중되어 있었다.
“!”
칸의 두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 회심의 맹독 브레스 공격까지 통하지 않을 줄이야!
이렇게 직진으로 날아오면, 방어 마법을 캐스팅하기도 전에 저놈의 공격을 허용하고 만다.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지금까지 중 가장 큰 위기를 느끼던 그때.
“……!”
칸과 카르스트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저 밑에 아르베니아 일행들이 있는 쪽에서, 갑자기 어마어마한 기운이 빛의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카르스트조차 경시하지 못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래서 그는 칸을 공격하던 두 팔을 겹쳐서 그쪽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퍼엉!
“윽.”
폭발음과 함께 뒤로 멀찍이 물러서는 카르스트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방어한 두 팔뚝에 뼈까지 보일 정도로 커다란 상처가 생긴 걸 보면, 그리고 칸이 지금껏 저 정도 상처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지금 공격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가 있었다.
카르스트는 바로 상대방을 확인했다.
“아린…!”
로한의 동생, 아린. 그녀가 이전에 힌스테딘을 상대하던 로한처럼 똑같이 날개 달린 모습으로 변신한 채 그의 눈앞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린이 칸에게 말했다.
“고전한다는 말을 듣고 지원하러 왔어요.”
“흥! 누가 고전하고 있다는 것이냐!”
칸은 드래곤 특유의 알량한 자존심을 끝까지 내세우며 코웃음을 쳤다. 아린은 굳이 그의 발언을 신경 쓰지 않았다.
“라디치를 맡으세요. 제가 카르스트를 맡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후, 바로 카르스트를 향해 날아가는 아린. 칸 역시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곧바로 맹독 구체를 주변에 소환해서 빠른 속도로 라디치를 향해 발사했다.
이제 2 대 1에서 2 대 2로 동수가 되어버린 상황. 그로 인해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특히, 카르스트가 아린한테 고전하는 게 정말 컸다.
솩.
“큭…!”
아린의 손등에서 뻗어져 나온 광선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카르스트 몸에 꼭 하나의 커다란 검상이 생겨났다.
그녀의 비행 속도, 공격 속도, 그리고 광선검의 위력 모두 카르스트보다 수준이 최소 한 단계 이상은 높았다.
서걱.
“크윽…!”
또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한 카르스트의 얼굴이 처음으로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잘린 오른손이 힘없이 지상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카르스트가 아린을 향해 안광을 쏘아냈다.
“네놈도 로한과 똑같은 종족이었군.”
예상은 했었다. 말파스를 아린 혼자서 때려잡았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일반적인 인간의 실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의문을 품었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이런 상황이 닥칠 거라는 예상도 미리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이미 나의 영역이다!”
그가 외친 순간.
지상에서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던 아르베니아 성기사단과 데르마들이 밟고 있는 지면에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갑자기, 왕성 전체의 바닥이 마기로 만들어진 검은 웅덩이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발밑에 느껴지는 마기에 크게 놀란 에텔드리다는,
“하아압!”
그 어느 때보다 전력을 다해 신성력 방어막을 시전했다. 모든 내력을 끌어모은 그 방어막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두꺼웠다. 마기로 이뤄진 웅덩이가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말이다.
하지만 보호막 밖의 데르마들은 아니었다.
“키에엑?!”
“캬아악!”
그들은 자신들의 두 다리가 갑자기 웅덩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황에 당황했다.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진 것처럼, 데르마들은 순식간에 저항도 못 하고 웅덩이 안에 전신이 빠져버렸다.
모든 데르마들을 삼킨 웅덩이는, 곧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드득! 드득!
“……!”
줄어드는 웅덩이 안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리에 에텔드리다는 경악했다. 이건 분명, 데르마들의 신체가 한꺼번에 부서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웅덩이가 워프진 정도 되는 크기까지 줄어든 뒤에야 그쳤다. 이후, 그것은 검은 덩어리처럼 변한 뒤 저절로 공중으로 떠올라 카르스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카르스트는 그 덩어리를 온몸으로 흡수했다.
“흐아아아…!”
동시에 그는 희열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데르마들을 제물로 삼아 얻은 마기로 인해, 순식간에 자신의 내력이 몇 배 이상 강해진 것을 느낀 것이다.
그는 사악하게 미소를 지으며 아린을 노려보았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의 나는, 설사 주인님과 맞붙더라도 이길 수 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아린의 기운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던 하늘이, 한순간에 카르스트가 내뿜는 마기에 다시 잠식당해 버렸으니까.
하늘을 뒤덮은 검은 마기를 본 에텔드리다는,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부들거리는 두 손으로 충격으로 물든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신의 힘을 위해 수많은 데르마들의 목숨을 이런 식으로 단번에 앗아가다니!
“이 자식이…!”
오죽하면 칸마저 머리끝까지 분노하는 바람에 그 거대한 신체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반면, 가장 가까이 있는 아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했다.
“원래 당신들, 데르툴은 이런 종족이었죠.”
아린이 크게 충격받지 않은 이유는, 지구에 있을 때 로한과 함께 드물지 않게 목격했던 장면이라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 대해 분노의 감정이 안 끓어오르는 건 아니다.
“절대로 살려 보내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아린은, 역시 체내의 에너지원을 극도로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기에 잠식되어 있던 하늘이 다시 아린의 기운으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렇게 절반 정도 마기가 사라졌을 때.
“크아아아!”
카르스트는 괴성과 함께 아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몇 배는 더 빠른 엄청난 속도로 말이다.
* * *
그 시각.
테르디아의 왕성은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큭큭큭! 생각보다 잘 버티는군그래!”
고든이 전방을 바라보면서 비웃고 있었다.
이곳은 국왕 필리프의 침실.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하고 정갈해야 할 이 공간이, 지금은 핏물과 시체들로 인해 처참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역시 로한, 그놈의 스파이는 뭐가 달라도 달라.”
말하는 고든의 앞에는, 유일하게 서 있는 왕실 기사 한 명이 있었다. 바로 케이였다.
그를 제외한 왕실 기사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케이의 상태 역시 그리 좋지 않았다. 온몸이 크고 작은 상처로 인해 피투성이였고, 심지어 왼쪽 눈은 터져 버리기까지 했다.
반면, 앞에 서 있는 고든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상태였다. 마족으로 변한 그의 힘은, 케이를 포함한 왕성 기사단을 모두 압살할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그만두게, 고든!”
그때 케이의 뒤쪽에서 들려오는 외침이 있었다. 바로 국왕 필리프였다.
왕비 크리스티나와 조셉 왕세자와 함께 구석에 박혀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가, 고든을 향해 외침을 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가? 자네는 그 누구보다 나를 따르던 충직한 관리 아니었던가!”
“그런 인간이 나한테 평생 푹 쉬라는 소리를 했어?!”
고든이 분노에 받친 목소리로 버럭 외쳤다.
“그런 인간이 이제 나는 필요 없다고 했냔 말이다! 평생을 당신에게 충성을 바쳐온 나한테 네놈이! 다른 사람도 아닌 네놈이 어찌 그런 소리를 내뱉을 수 있냔 말이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필리프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저런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국왕의 자리를 걸고 맹세코 말이다.
하지만 당시 환각 마법으로 본 장면을 아직도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고든에게는, 저런 모습마저 시치미를 떼는 가증스러운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다.
“넌 내 평생을 단 한마디로 부정해 버렸다! 넌 그 대가를 치러야 해!”
고든은 외치면서 케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케이 뒤편에 서 있는 필리프를 향해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