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테르디아의 왕성 건물에는 밤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사무실이 하나 있다.
테르디아 관직 중 가장 바쁜 부서. 24시간 항시 대기 모드로 일해야 하는 부서. 하지만 워낙 표면적으로 나서지 않아서, 이들이 이렇게 바쁜 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부서.
바로 대륙 내외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부서, 정보부였다.
탁. 타타탁. 탁.
현재 새벽 1시. 이 늦은 시각에도 여전히 정보부에서는 타자기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주인공은 마른 체형에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남성의 책상 앞에 세워진 명패에는 ‘정보부장 질렌 백작’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하프 엘프이자, 테르디아의 유일한 이종족 스파이라는 정체를 숨기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 그가 적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 오늘 저녁, 레이먼드가 휘하 왕성 관리 몇 명을 모아 지하실에서 비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 지하실에 들어간 관리들은 모두 저희가 마족의 하수인으로 의심한 인물들입니다. 예상컨대, 안에서 무언가 작당 모의를 펼친 것이 아닌가 의심됩니다.
바로 엘-카시안에게 보낼 문서였다.
조용한 정보부실 내에서 질렌이 타자기를 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 그리고, 모의를 마치고 지하실에서 나온 관리 중 한 명이 바로 왕성 바깥으로 빠져나갔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L’ 님이 심어놓은 첩자 ‘KKK’에 따르면, 그는 바로 고든 공작가 방향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 종합해보면, 고든가에서 레이먼드에게 앞으로 왕성에서 꾸밀 모종의 작전을 내리고, 레이먼드가 휘하 하수인들을 모아 지시를 내린 후 그 결과를 다시 고든가에 전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최대한 빨리 ‘해돋이’ 작전을 시작하여, 저들의 계략이 실행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여기까지 작성한 질렌은 타이핑을 멈추고 문서를 뽑아 들었다.
잉크가 잘 마르도록 문서를 책상 위에 잠시 올려놓은 질렌은 기지개를 힘차게 켰다.
“읏차… 이게 마지막 보고겠군.”
어차피 곧 해돋이 작전이 시작되면, 그 역시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정체를 공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지금까지 해왔던 스파이 활동은 자연스럽게 종료된다.
질렌 입장에서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이제 더 이상 목숨 걸고 스파이 짓을 안 해도 되는 건가?’
정체를 들키지 않고 10년 넘게 첩자 생활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일단 들키는 순간 왕성 감옥에 갇혀 모진 고초를 받을 것이 뻔하고, 최후도 그리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할지라도 ‘스파이’라는 존재를 좋아하는 정부가 어디 있겠는가? 이종족 연합군의 첩자라는 정체를 믿어줄지도 의문이고 말이다.
그래서 절대 들키지 않기 위해 매 순간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는데, 이게 정말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다. 안 그래도 질렌의 긴 머리에 숨겨져 있는 원형 탈모가 최근 들어 두 개로 늘어난 상태다.
‘…아니, 스파이 짓을 계속하는 게 나을지도. ‘해돋이’ 작전이 실패하면 그 순간 내 목숨부터 날아가지 않을까?’
질렌은 자신의 몸속 마나를 한번 체크해 보았다.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엘프 특유의 마법에 특화된 마나가 몸속에서 맹렬히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질렌, 그는 현재 최소 B급 이상의 헌터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고강한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한 국가에 단독 스파이로 파견 나가려면 이 정도의 실력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도 이번 작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질렌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잉크가 다 마른 문서를 예쁘게 잘 접어서 봉투 안에 넣었다.
이제 이걸 그의 집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비밀 워프진을 통해 전달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작전은 언제 시작할까? 늦어도 내일 전까지는 실행해야 할 텐데.’
속으로 생각하며 정보부 건물을 나서는 질렌. 아직 그에게도 언제 작전이 시작될지는 전달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정보부 문을 조용히 열었고,
“……!”
동시에 발걸음이 굳어버렸다.
문 앞에, 너무나 익숙한 초로의 노인이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었던 것이다.
“고, 고든 공작님?”
내일 출근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고든 공작이, 왜 이 늦은 시각에 정보부 건물 앞에 서 있단 말인가?
고든은 오히려 자신을 향해 되물었다.
“왜 말을 더듬나?”
“아, 그게… 이 시각에 갑자기 나타나셔서 놀라서 그랬습니다. 내일 오전에 출근하시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래? 진짜야?”
“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질렌의 물음에 고든이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왕성 안에서 언제 어디를 돌아다니든 자네와 무슨 상관인가? 설마 내가 궁내부장관인 걸 잊었나?”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질렌은 바로 사과했다. 하긴, 궁내부장관인 고든은 왕성에서 국왕인 필리프 다음가는 권력을 쥐고 있다.
화분 하나, 액자 하나도 그의 명령이 없으면 복도에 둘 수 없을 정도로 왕성 내에서의 그의 말은 절대적이다.
“방금 전까지 뭘 작성했나?”
“네?”
“열심히 타자기 치는 소리 다 들었네. 그거 때문에 궁금해서 와본 거고. 뭔데?”
공격적인 고든의 말투에도 질렌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둘러댔다.
“폐하께 전달할 일급비밀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이리 줘보게. 내가 직접 폐하께 전달할 테니.”
“일급비밀 문서는 제가 직접 폐하께 전달해야 합니다. 국법상 그러하오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법을 들먹이며 고든의 의도를 원천 차단하는 질렌.
그 말에 고든이 안광을 빛냈다.
“그 이유로 나한테 안 주는 게 아니겠지.”
“네? 무슨….”
푹!
“컥…!”
순간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질렌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고든의 손이, 그의 복부를 관통해 등을 뚫고 튀어나온 것이다.
그 상태로 고든은 크게 외쳤다.
“너의 주인에게 보낼 첩자질로 얻은 정보니까 못 주는 거겠지! 이 스파이 새끼야!”
“……!”
“설마 네놈만 우리를 감시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느냐! 우리 역시 네놈들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느냐!”
질렌의 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설마 마족의 하수인들이 자신의 정체까지 눈치채고 있을 줄이야!
“방심한 대가를 치러라!”
곧 고든의 온몸에서 폭발적으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고든의 외형 또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얼마 전 유키펠이라는 마족에게서 보았었던 그 모습과 너무도 똑같았다.
질렌은 경악했다.
고든이 마족이었다니!
‘이, 이걸 어떻게든 엘-카시안 님께 전해야…!’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었다.
촤악!
고든의 오른 손가락의 손톱이, 그대로 질렌의 목을 베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후 축 늘어진 질렌의 몸뚱어리. 그의 주머니 쪽으로 고든은 손을 집어넣은 뒤, 질렌이 방금 작성한 보고서를 빼 든 후 펴서 읽기 시작했다.
모두 읽은 고든은 코웃음을 쳤다.
“흥! 우리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일을 벌이겠다? 하지만 늦었다! 이미 우리의 작전은 시작되었으니까!”
고든은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나타난 레이먼드 외 수많은 왕성 관리들이, 부복한 상태로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 벨타디아를 접수해라!”
“네!”
곧 왕성 관리… 아니, 고든의 하수인들은 빠르게 왕성 사방으로 퍼져 달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든은 질렌의 시체를 바닥에 내던지면서 혼잣말을 했다.
“그래. 케이, 그 새끼를 찾아야겠군.”
곧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이곳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바닥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질렌의 처참한 시체 한 구뿐이었다.
* * *
‘천지개벽’ 2단계 작전이 가장 먼저 시작된 나라는 테르디아였다.
고든 공작을 필두로 한 데르마들이 왕성을 장악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던 그때,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테르디아 다음으로 천지개벽 작전이 시작된 곳은 북쪽의 설원 국가, 노르토반이었다.
콰앙!
노르토반의 왕성 내에서 또 굉음이 들리며 한쪽 벽이 부서져 내렸다.
이미 사방에 멀쩡한 집기나 벽이 하나도 없는 왕성 복도에는 두 명의 남성이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한 명은 마가체프. 노르토반의 총사령관이며 한 명은 엘-줄리안. 노르토반의 재상이자 이종족 연합군의 스파이기도 하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불투명한 푸른 피부를 가진 거대한 인간 여성형 정령이 한 명 서 있었다.
[하앗!]
그녀가 다시 한번 기합과 함께 한 손을 휘둘렀고, 동시에 거대한 폭포 물줄기가 마가체프 쪽으로 뿜어져 나갔다.
하지만 마가체프는 그 물줄기를 방어할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온몸으로 맞는 모습이었다. 그 공격이 전혀 타격이 없다는 듯, 되레 마기로 가득한 대검을 정령을 향해 휘둘렀다.
반월 모양의 마기가 물줄기를 가르면서 정령에게 날아갔고,
[하윽!]
마기에 맞은 정령은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마기로 인해 허리가 절반 이상 베인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윽…!”
동시에, 뒤에 서 있던 엘-줄리안 역시 신음을 질렀다. 정령이 입은 고통이 소환자인 그의 내력에도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흐흐흐, 소용없다! 엘-줄리안!”
마가체프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외쳤다.
“네가 예상외로 강하다는 건 인정하마! 설마 물의 정령왕인 나이아드를 소환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를 상대하려면, 최소 정령왕 세 명 정도는 소환해야 할 것이다!”
마가체프는 외치면서 다시 한번 대검을 휘둘렀다. 반월 모양의 마기가 이번에는 엘-줄리안 쪽으로 정확히 날아갔다.
[위험해!]
나이아드가 외치면서 전력을 다해 물의 보호막을 펼쳤다. 하지만, 반월의 마기는 보호막을 절단 낸 뒤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 쪽을 절반 이상 베어내었다.
[꺄악!]
“커헉! 쿨럭…!”
이번엔 충격이 매우 심했는지, 엘-줄리안은 피까지 토해내는 모습이었다.
마가체프가 그런 둘을 조롱했다.
“눈물겨운 장면이구만. 둘이 사귀기라도 하나? 하하하!”
[큭… 이 자식이!]
“포기해라, 연놈들아. 이미 노르토반은 끝났어. 내가 너희 둘을 상대하는 사이, 내 주인님인 페른 님께서 벌써 왕성을 전부 장악하셨다.”
“……!”
엘-줄리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잠시 잊고 있었다. 마족으로 의심되는 자는 마가체프 한 명이 아니라, 황제인 페른도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어떻게든 마가체프를 빨리 물리치고 페른까지 막으러 달려갔어야 했는데, 정작 마가체프 한 명조차 상대하기 버거운 상황이다.
“자, 마지막이다!”
마가체프는 호기롭게 외치며 다시 검에 마기를 불어넣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양의 마기가 검 위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곧 크게 횡으로 검을 휘두르려던 마가체프.
그때였다.
콰아앙!
왕성 한쪽에서 갑자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마가체프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왕좌 쪽에서…?’
분명 방금 전까지 자신의 주인님인 페른이 데르마들을 모아놓고 작전을 지시하던 그 장소였다. 저기서 왜 폭발이?
“……!”
곧 마가체프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왕좌 쪽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무려, 주인님의 마기를 뒤덮고도 남을 만큼 강력한 기운!
그때, 엘-줄리안의 반가운 외침이 들려왔다.
“왔구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