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집무실은 갑자기 고요해졌다.
이후 질식할 것만 같은 숨 막히는 침묵이 한참을 이어졌다.
먼저 이 침묵을 깬 이는 딘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자신의 정체를 인정하는 대답에, 벤슈타인은 대답했다.
“천 년 전, 이 대륙을 정복하려 했던 게르스델이 이런 말을 했지. 마왕과 견줄 만큼 강하고, 태양같이 뜨거운 마나를 보유한 황금빛 안구의 남성을 조심하라. 그가 이 대륙의 최강자인 드래곤 로드다.”
그는 딘의 황금빛 안구를 정확히 바라보며 대답을 이었다.
“신마대전 이후 너희 드래곤족은 우리 행성에서도 유명해졌다. 데르툴 행성의 타 대륙 정벌을 최초로 실패하게 만든 존재가 누구일까? 항상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허.”
듣고 있던 딘이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말을 들어보면, 자신이 데르툴족이라고 대놓고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아주 대놓고 정체를 드러내는군. 마족이라는 놈들은 원래 몸에 간이라는 게 없나?”
“…….”
“그렇게까지 말했으니 이번엔 내가 물어보지. 서쪽 대륙 전체에 마족을 흩뿌린 마왕이 너냐?”
딘은 물으면서 벤슈타인의 두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벤슈타인은 그 눈빛을 편안히 받으면서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다. 내 본명은 투할. 이 대륙을 정복하기 위해 계획을 세운 지 10년째다. 그리고, 오늘 너를 만나면서 계획은 완성되었다.”
“무슨 소리냐?”
“네가 내 손에 죽으면, 나를 방해할 가장 큰 걸림돌이 사라지게 될 테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딘의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오만하구나!”
동시에 그의 온몸에서 폭발적으로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강렬한 마나는 순식간에 벤슈타인의 마나를 뒤덮고, 더 나아가 왕성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
이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왕성 전체를 쩌렁 쩌렁 울릴 정도로 컸다.
“천 년 전 마왕 놈과 똑같은 소리를 지껄이다니. 네가 고향에서는 최고의 권력자일지는 몰라도, 이 엘도르에서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나는 대륙 최강의 종족,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존재, 드래곤 로드다!”
외침과 동시에 딘의 신체 바로 앞에서 화염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드래곤 플레임 버스터’라는 이름의 마법으로, 인간들 사이에서는 9클래스의 최강 화염 마법 중 하나로 꼽히는 기술이다.
불길은 투할의 전신을 뒤덮고도 모자라, 뒤편과 양쪽 옆벽까지 순식간에 녹여버렸다.
하지만 정작 불길이 멈춘 뒤에도 투할의 몸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알고 있다.”
버텨낸 투할이 입을 열었다.
“이 대륙에서는 내가 본신의 힘을 모두 꺼낼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 왕성 주변에서는 가능하다.”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투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몇 배는 더 강해졌다. 왕성을 뒤덮고 있던 딘의 뜨거운 기운이 다시금 투할에게 역전당했다.
동시에, 그의 몸이 빠른 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바로 데르툴족 본연의 모습으로 말이다.
“……!”
딘의 눈빛에 이채가 여렸다.
마왕 본연의 모습으로 변신한 투할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 이것은, 천 년 전 그와 1대1로 최후의 결전을 펼쳤던 마왕, 게르스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마왕의 진짜 힘인가!’
당시 죽어가던 게르스델이 그랬었다. ‘고향에서 붙었으면… 넌… 상대도 되지 못했다…!’라고. 그때는 헛소리라 치부하고 넘어갔었는데, 이제 보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정말 이 왕성 안에서는 최대의 힘을 꺼낼 수 있는 모양이군.’
기분 나쁜 마기가 왕성 전체를 뒤덮고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는 딘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동시에 딘의 몸이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폴리모프를 풀고 본체로 돌아가는 과정이었다.
그가 완전히 변신을 마쳤을 때, 왕성의 천장은 이미 박살 난 상태였다. 그의 거대한 신체의 팽창을 버텨내질 못한 것이다.
“지금의 나는 천 년 전보다도 훨씬 강하다!”
딘의 외침이 도미티아누폴리스 전체를 뒤흔들었다. 동시에, 그의 신체 주변에서 생성된 수백 개의 화염구들이 일제히 투할을 향해 날아갔다.
투할이 그 화염구를 마기로 만든 실드로 방어해 내면서 공중의 딘을 향해 날아가는 것으로, 둘의 전투는 시작되었다.
쾅! 콰앙! 퍼엉!
흡사 신들이 전쟁을 벌인다면 이런 모습일까?
어지간한 마을 하나를 날려버릴 만한 거대한 폭발들이 공중에서 계속 터져 나왔다. 딘의 화염 마법과 투할의 마기 덩어리의 충돌이 만들어낸 장면이었다.
끊임없이 서로에게 공격을 퍼붓는 둘. 동시에 상대방의 마법은 실드나 텔레포트 등으로 피해내는 모습도 계속해서 나왔다.
거대한 마왕의 신체가 눈부신 속도로 움직이고, 거대한 드래곤 신체가 텔레포트로 인해 여기 저기 순간이동 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들의 끝을 모르던 전투 양상은 곧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퍼퍼펑!
“음…!”
어느 순간부터, 투할이 방어만 할뿐 공격할 생각을 하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백중세에서 열세로 돌입한 것이다.
이런 최강자들끼리의 싸움은 한번 이렇게 기세가 기울면 다시 역전하기가 매우 힘들다. 상대방이 절대 역전의 발판을 안 만들어줄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이제 알겠느냐! 이 대륙에서 너는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다!”
딘은 크게 외치면서 계속 화염구를 투할에게 날렸다. 1초에 100개 이상씩 생성되는 화염구가 투할 단 한 명에게 집중되니, 제아무리 천하의 마왕이라 할지라도 방어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열세인 와중에 투할은 되레 평온한 표정으로 대꾸까지 하고 있었다.
“역시, 혼자만의 힘으로는 힘들군. 하지만 둘이 합공하면 어떨까?”
말이 끝난 순간.
‘……!’
갑자기 딘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마기! 천하의 드래곤 로드인 그가 정말 오랜만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강한 기운이었다.
딘은 화염구 공격도 멈추면서 재빨리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했다.
하지만 늦었다.
푹!
“컥…!”
목이 관통당하는 충격에 딘은 피를 내뿜었다. 이후 텔레포트 마법이 시전되면서, 그는 최대한 먼 장소로 도망칠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을 공격한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온몸이 근육질로 뒤덮인 거대한 데르툴족 여전사가, 방금 전 딘을 공격한 듯한 긴 검은 창을 쥔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다른 데르툴족 마왕, 아스모데였다.
“저게 드래곤이라는 거군. 별거 아닌 거 같은데?”
그녀의 이죽이는 목소리는 지금 딘의 귀에 들려오지도 않았다.
저 여성형 데르툴족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투할의 그것과 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즉, 마왕이 둘이다!
‘마왕이 한 명이 아니었다고?’
이건 아예 예상조차 못한 변수였다.
그가 천 년 전 데르툴족을 심문해 얻은 정보로는, 한 대륙을 정벌하러 넘어오는 마왕은 무조건 한 명뿐이라고 들었다. 왜냐하면 마왕끼리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아서, 같이 오면 반드시 둘이 서로를 잡기 위해 싸우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마왕이 두 명 이상이라는 건 아예 배제하고 있었는데…!
“방심은 금물이다, 아스모데.”
“안다.”
투할의 경고에 아스모데는 창을 고쳐 잡았다. 이후, 둘은 동시에 딘을 향해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딘의 일방적인 열세였다.
마족 한 명도 간신히 우세를 점한 상황이었는데 한 명이 더 추가되었고, 심지어 목이 관통당하는 큰 부상까지 입은 상황. 이러면 딘에게 승산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촤악!
“크윽!”
그래서 전투가 이어질 때마다 딘의 몸에 큰 상처만 계속해서 늘어갔다.
아스모데만의 검은 날붙이가 달린 긴 창은, 거대한 딘에게도 한 번에 중상을 입힐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고 강력했다.
“자,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해볼까?”
아스모데가 광기 서린 얼굴로 다시 한번 창을 고쳐 잡고 날아갔다. 그의 반대편에서는 투할이 날아가고 있었다.
딘은 바로 피하기 위해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했지만, 그 속도가 이전과는 많이 느려졌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다량의 피 때문에 행동 자체가 굼떠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그는 마법을 캐스팅하지 못했다.
‘안 돼!’
딘은 순간적으로 생명의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 내가 죽는다고? 천하의 드래곤 로드인 내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저 둘의 합공을 피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워프진 마법을 시전하세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동시에, 그의 양옆을 스쳐 날아온 두 명의 인영이 각각 투할, 아스모데 앞을 가로막았다.
깡!
“큭…!”
퍼엉!
“흐윽!”
막자마자 신음과 함께 뒤로 크게 물러서는 두 남녀.
딘은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로한의 똘마니들?’
바로 로한이 오스크만 제국에 파견 보낸 두 명의 생체 휴머노이드, 엔벨과 에슬라였다.
둘은 어제 밤, 왕성에 들어간 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도울 수 있게 항시 왕성 밖에서 대기하라는 로한의 지시를 받고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딘의 전투를 지켜보던 그들은 딘이 큰 위기에 빠지자 어쩔 수 없이 나선 것이다.
“이것들은 뭐야?”
아스모데의 물음에 투할이 대답했다.
“로한과 같은 종족이다.”
그의 시선은 엔벨과 에슬라의 등 뒤에 돋아나 있는 두 날개에 고정되어 있었다. 예전에 로한이 힌스테딘을 잡을 때 저런 외형이었다는 사실을 지금 모르는 대륙 내 존재는 없다.
“그래? 그러면 죽여선 안 되겠군.”
아스모데는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창을 고쳐 잡았다. 로한, 그 신기한 놈과 같은 종족이면 반드시 잡아서 연구해야 한다.
두 마왕은 거의 동시에 각각의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빠르게 다가오는 둘을 지켜보던 엔벨과 에슬라는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했다.
‘못 막는다!’
‘이건 못 막아!’
그들은 로한이나 아린처럼 100% 최첨단 기계로 신체가 제작된 존재가 아니다. 기존 시체를 이용해 제작된 존재니만큼, 당연히 아린처럼 강력한 능력을 보유하진 않았다.
실제로 유키펠, 힌스테딘 같은 최상위 귀족을 상대로도 버거울 수준인데, 심지어 마왕을 어떻게 막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단 한 번 막아낼 극단적인 방법은 있었다.
엔벨과 에슬라는 짧게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둘 다 날아오는 마왕들에게 왼팔을 뻗었다.
두 마왕의 공격이 그들의 몸에 닿기 전.
콰앙!
둘의 왼팔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
“뭐야?!”
얼마나 강했으면, 두 마왕이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곧 둘은 확인할 수 있었다.
왼팔이 날아간 엔벨과 에슬라가 뒤로 멀찌감치 도망치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자폭 공격을 했어?”
아스모데는 살짝 놀랐다. 데르툴족이나 사용할 법한 부위별 자폭 공격이 가능한 또 다른 종족이 있다고?
그때, 딘의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완성됐다!”
투할과 아스모데의 시선이 그제야 딘으로 향했다. 그리고, 딘의 주위에 완성된 워프진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모습을 둘은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엔벨과 에슬라가 딘의 곁에 도달한 것도 말이다.
“이런!”
의도를 깨달은 아스모데가 전력을 다해 들고 있던 창을 그들에게 집어던졌다.
하지만 창이 딘의 신체에 닿기 직전에, 워프진 마법이 시전되며 셋은 두 마왕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서 창은 멈추지 않고 계속 하늘을 날아갔다.
“쳇! 놓쳐버렸군.”
아스모데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그러는 그녀의 손에는, 날아갔던 그녀의 창이 어느새 다시 쥐어져 있었다.
엔벨과 에슬라의 예상치 못한 자폭 공격에 의해, 딘을 여기서 잡고 말겠다는 1차 계획이 실패해버린 것이다.
“이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 아냐?”
“아니, 문제없다.”
그녀의 질문에 투할은 대답했다.
“딘에게 중상을 입힌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당분간 딘은 더 이상 이 대륙을 돕지 못할 것이다.”
제아무리 최강의 종족인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저 정도로 큰 상처를 수많이 입었으면 당연히 당분간 가만히 누워 있어야만 한다.
그것만으로 이 엘도르 대륙은 당분간 큰 전력을 잃게 된 셈이다.
투할이 선언했다.
“바로 ‘천지개벽’ 작전을 실행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