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그렇게 유키펠 등을 둘러보고 난 후 로한은 대신전에서 나와 다시 마탑의 워프존으로 향했다.
그곳까지 배웅을 온 밀리오가 물었다.
“바로 아로엘로 돌아가십니까?”
“아뇨. 잠깐 얘기할 게 있어서 엘프 마을에 들렀다 가야 합니다.”
“아, 이안 님에게 정령술을 가르쳐 줬다던….”
“네.”
로한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엘-카시안과 로한의 사이를 그저 정령술을 가르쳐주는 친한 존재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항상 여신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빌고 있습니다. 아시죠?”
“하하하. 밀리오 님은 이제 뭐 하십니까?”
“가서 또 일해야죠. 아시잖습니까? 저 요즘 바쁜 거요.”
밀리오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 테르디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미 교황이 밀리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만큼 요즘 밀리오가 더 교황 같은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어쩔 수 없다. 왕실과 전권을 장악한 윌리엄 파가 대놓고 밀어주는 인물이기도 하고, 최근 로한과 함께 여러 전투에서 함께 한 활약상이 소문나면서 대륙의 다른 국가에서도 스테파노 대신 밀리오를 더 만나길 원하고, 더 초청하길 원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밀리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교황 자리가 교체될 수 있는 상황. 단지, 그가 한사코 교황 자리만큼은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자리가 유지될 뿐이다.
“아무리 바빠도 영지 놀러 오실 시간도 없습니까? 저도 이렇게 자주 오는데요. 얼굴 너무 자주 안 비치면 제 영지의 ‘누구’의 마음속에서도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황해하면서 밀리오는 주변 기사들과 마법사의 눈치를 봤다. 행여나 저 누구가 아린이라는 걸 다른 사람이 눈치채면 어쩌나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로한은 그 모습에 실실 웃었다.
“오늘 일이 그렇게 급하지 않으시면 지금 잠깐 성에 방문하시죠?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그 ‘누구’도 저녁에는 쉬는 편이거든요.”
“그, 그래도 말도 없이 갑자기 방문하면 거부감을 느낄까 봐….”
극도로 눈치를 보는 밀리오. 로한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숙맥도 저런 숙맥이 없다니까.
그래서 작전을 바꿨다. 설득에서 도발로 말이다.
“뭐, 그러시면 어쩔 수 없죠. 그러면 이안이랑 시간을 보내겠네요.”
“……!”
“요즘 이안이 영지 내에서 입지가 커지다 보니, 업무 얘기를 핑계로 만나자고 해도 ‘누구’도 거절을 잘 못 하거든요. 심지어 오늘은 업무도 없으니, 대놓고 저택에 방문해서 작업을 걸지도…?”
흘리듯 말한 로한은 밀리오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확인했다.
밀리오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스파크가 튀는 것을.
속으로 씨익 웃은 로한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갑니다~!”
곧 워프진이 환해졌고, 로한은 밀리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밀리오는 서 있던 자리에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왕실 기사단이 먼저 몸을 돌렸다.
“같이 돌아가시겠습니까, 폰티펙스님?”
“…아니, 먼저 가세요.”
곧 마음을 정한 밀리오는 고개를 젓더니, 워프진을 담당하던 마법사에게 말했다.
“워프진을 이용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좌표대로 찍어주세요.”
곧 밀리오는 아로엘 쪽 워프진 좌표를 불렀다. 에텔드리다가 이용했던 그 대저택 지하의 비밀 워프진 좌표를 말이다.
갑자기 아린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아직 집무실에 쌓여 있는 수많은 서류마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게끔 만든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워프진을 타자마자 로한을 반기는 엘-카시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엘프 마을 내의 워프진은 아예 광장 중앙에 있었다. 대놓고 노출된 장소라서, 고개를 돌리면 바로 주변 환경을 확인이 가능했다.
“오늘도 좀 늦었네요. 일이 좀 많다 보니 항상 이 시간에만 오게 되는군요.”
어둑어둑한 주변을 바라보며 로한이 미안한 표정을 짓자, 엘-카시안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프는 어두운 날의 달빛을 좋아하는 종족입니다. 보세요. 아직도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요.”
안 그래도, 저 드높은 나무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다니고 있는 엘프 아이들의 모습을 로한은 바라보는 중이었다.
곧 그는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나석 램프를 잘 사용하고 계시군요.”
왜 늦은 저녁인데도 시야로 생명수 전체를 확인 가능한 이유를 이제 깨달은 것이다. 생명수 곳곳마다 매달려 있는 마나석 램프 때문이었다.
“엘프들은 마나석을 그 누구보다 좋아합니다. 당신이 선물한 저 마나석 램프는, 우리들에게 단순히 밝은 것 이상의 효과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다들 마나 친화도가 늘었으며, 그로 인해 생명도 최소 50년 이상 늘어났습니다.”
“…천 년을 사는데 거기서 또 늘어났다고요?”
“좋은 소식이죠. 오래 사는 걸 싫어하는 생명체가 있나요? 자, 어서 들어가시죠.”
엘-카시안은 로한을 자신의 집으로 인도했다.
촌장 집의 중앙 그루터기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둘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단, 오늘까지 들어온 정보를 모두 합산해서 만든 마족으로 의심되는 명단입니다.”
엘-카시안이 문서 한 장을 내밀었고, 로한은 받아서 바로 읽어보았다.
- 엘도르 서쪽 대륙의 마족 의심자
노르토반 설국 : 황제 페른, 총사령관 마가체프.
로터스 용병 국가 : 신임 황제 케빈 디아스, 왕비 나퓰라.
섬나라 아바 : 해군 총사령관 다보 티디아니.
사갈 공국 : 공왕 카르스트, 총사령관 라디치, 피와 모래 암살단 전원.
사막 국가 이즈미트 : 무녀장 보코르.
테르디아 소국 : 레이먼드 남작과 그의 직속 관리들.
“이게 최종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읽고 있는 로한에게 엘-카시안이 말해왔다.
“저희 이종족 스파이들과 당신이 보낸 스파이들의 정보를 취합한 결과, 이들은 99% 이상 마족과 관련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기서 명단이 늘어나면 더 늘어났지, 이들은 제외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최악이군요.”
로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멤버 하나하나가 모두 각 국가에서 핵심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들밖에 없지 않은가.
그나마 서쪽에서 제일 큰 국가인 아르베니아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여긴 아예 핵심 신관들이 전부 몰살을 당해버려서 완전히 물갈이가 된 게 컸다.
로한의 시선이 제일 마지막, 테르디아로 이동했다.
“레이먼드의 직속 관리들…. 전부 왕실 내에서 일하는 이들이군요.”
“그렇습니다.”
“고든은 명단에 없군요.”
엘-카시안이 대답했다.
“저도 의심됩니다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한 달 넘게 저택 안에 박혀 있으니 증거를 딸 방법도 없고요. 심지어 강제로 수색하려던 방법도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강제 수색 방법은 로한의 아이디어였다. 케이를 통해 몰래 저택 안에 숨어들어 정보를 캐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택 입구 근처에서 케이는 더 들어가지 못했다. 고든 공작가의 경계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해진 것이다.
케이의 증언으로는, 저택 곳곳에 설치된 각종 마나석 감지석 등이 워낙 품질 좋은 고가의 제품이라, S급 헌터도 쉽사리 숨어들 수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그래서 더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 갑자기 경계가 그렇게 심해졌을까? 하지만 결국 증거를 얻어내는 데 실패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3일 내에 고든이 다시 출근을 한다고 합니다. 그때 만나 보면 알겠죠. 저라면 바로 마기를 품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이 가능하니까요.”
“우리에겐 좋은 소식이군요.”
“네. 이번에도 출근 소식이 없었으면 다음번에 왕성에 갔을 때 윌리엄 공과 함께 공식적으로 고든 공작가에 방문하려고 했었습니다. 그것마저 거부하면 제가 직접 몰래 잠입할까 생각도 했었죠.”
“부디 별일 없기를 바랍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누구보다, 필리프에게 그렇게 평생 충성을 바쳤던 고든이 마족에게 넘어갔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은 또 없을 것이다.
누구보다 국왕 필리프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을 테니까.
“서쪽 대륙 정보는 이쯤이면 됐고… 딘은 소식이 없었습니까?”
로한의 이 질문은, 그가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엘-카시안은 다행히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줬다.
“다행히 방금 전 연락이 왔습니다. 여기 전문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뻔하죠, 뭐. 저한테 연락을 하겠습니까?”
로한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한 달이 지나가는 동안, 로한은 딘에게 단 한 번도 정보를 받아내질 못했다.
단 한 번도! 그래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엘-카시안에게 정보를 받는 귀찮음을 감수해야만 했다.
굳이 딘이 엘-카시안에게만 연락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게 대박이었다.
“무려 귀.찮.기 때문에 연락을 못 하신다는데 어떡합니까? 두 명한테 동시에 연락하기 귀.찮.다는 대~단한 이유 때문에!”
“하하하… 딘 님이 원래 좀 장난을 잘 치십니다. 이해를….”
“이해는 무슨. 지들한테 장난치면 ‘감히!’를 외치면서 성 하나 날려버리는 게 일상인 놈들인데요. 나도 한번 감히! 외치면서 도마뱀족 한 명 또 묵사발로 만들어봐?”
“그, 고정하시고 이것 좀 읽으십시오.”
엘-카시안은 다급히 두 번째 문서를 로한에게 내밀었다.
오늘 왕성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왕성 전체가 마기 특유의 음습함으로 가득하다. 관리, 병사, 기사들 모두 마기에 감염된 상태라는 것이 단번에 느껴졌다.
황제인 벤슈타인은 없었다. 한 달째 자리를 비우는 중이라더라. 죄다 벤슈타인이라는 놈에게 목숨을 바칠 정도로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걸 보니, 이놈이 마족 본체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빠르면 내일 돌아온다고 하니, 상태만 대충 확인한 후 바로 산맥으로 돌아가겠다. 늦어도 3일 안에 귀환할 것이다.
PS - 로한에게 여기 투입한 똘마니들 빨리 귀환하라고 해라. 한 달째 왕성 안에 발도 못 들인 덜떨어진 놈들을 뭔 자신감으로 스파이로 보냈냐는 말도 꼭 전하고.
“…….”
마지막 PS까지 다 읽은 로한은 순간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려는 걸 꾹 참았다. 아, 사이보그라 힘줄은 없구나.
로한은 최대한 끓어오르는 심정을 목소리에 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말했다.
“제. 스파이들이. 능력이 안 돼서. 잠입을 못 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신입 기사나 관리를 아예 안 뽑는데 어떻게 왕성에 들어갑니까?”
“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건 그저 딘 님의 개인 의견일 뿐이니, 너무 괘념치 마시고….”
“압니다. 7천 년을 독신으로 살다 보니 미쳐버려서 히스테리만 늘어버린 망할 도마뱀 새끼 혼자만의 의견일 뿐이죠.”
“…….”
엘-카시안은 입을 다물고는 시선을 돌렸다. ‘난 지금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로한은 한숨과 함께 냉정을 되찾았다.
“후… 아무튼, 3일 뒤에 귀환하면 그때 본격적으로 작전을 시작하면 되겠군요.”
엘-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딘 님이 돌아와서 드래곤족을 움직이는 게 가능해지면, 바로 ‘해돋이’ 작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해돋이 작전. 간단하게 ‘서쪽 대륙의 모든 마족 소탕 작전’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 작전을 위해 엘-카시안과 로한 등은 지금까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엄청난 공을 들였다.
“제가 보기에 딱 한 가지 변수만 제외한다면, 현재 이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어떤 변수죠?”
로한이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