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그녀가 로한에게 다가오며 그의 농을 받았다.
“3일이면 오랜만 아니에요? 전 그렇게 느껴졌는데.”
“흠? 요즘 안 바쁜가 봅니다? 저처럼 바쁘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텐데 말이죠.”
“어머? 대륙에서 아르베니아의 성녀한테 한가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공작님밖에 없을 거예요!”
“그만큼 특별하다는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어휴, 진짜 능글맞기는….”
눈을 흘기는 에텔드리다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로한.
로한의 저런 모습이야 친해지면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에텔드리다의 얼굴에서 저런 다양한 감정을 보이게끔 만드는 존재는 단연코 지금 대륙에서 로한 한 명일 것이다.
그만큼 둘이 많이 친해졌다는 증거다.
“오늘은 좀 일찍 오셨군요.”
“일요일이잖아요. 요즘 신관들이 맡은 일에 능숙해져서 저도 이제 일요일은 좀 시간이 남네요.”
“3일 전에도 일요일이었나요?”
“본인도 오라고 해놓고선…. 그, 설마, 이렇게 제가 자주 오는 게 불편한 건 아니죠?”
갑자기 진심으로 걱정되는 얼굴로 묻는 에텔드리다. 그 표정 속에는, 왠지 모르는 두려운 감정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로한은 느낄 수 있었다.
로한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자주 오라고 이렇게 비밀리에 워프진도 만들었잖아요?”
“휴! 다행이네요.”
다시 표정이 밝아지는 에텔드리다였다.
“일단 올라가요. 지하에서 오래 대화 나누는 거 저 안 좋아해요.”
“동감입니다.”
로한은 대답하며 그녀와 함께 구석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로 올라간 뒤, 작동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곧 빠른 속도로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앗.”
작동하자마자 에텔드리다가 움찔하며 두 손으로 로한을 붙잡았다. 그로 인해 둘은 자연스럽게 붙어 있게 되었다.
로한이 물었다.
“아직도 엘리베이터에 적응을 못 하시는군요.”
“말했잖아요, 저 고소공포증 있다고요.”
대답하면서도 로한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에텔드리다.
로한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에텔드리다 정도 되는 경지의 존재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하지만 그냥 그는 웃어 넘겼다. 지금 이런 장면을 연출하는 것도 그녀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연기가 얼마나 어색했는지, 내가 직접 다가가서 자세를 잡아줬어야 했지.’
그래도 2주 전 처음 할 때보다는 많이 자연스러워지긴 했다. 긴장한 나머지 목각 인형처럼 두 팔다리를 움직이면서, 새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어따 둬야 할지 모르던 그때보다는 말이다.
역시 사람은 경험을 해야 뭐든 자연스러워진다.
‘Made in 구르카 연구소’ 글씨가 적혀 있는 엘리베이터는 그렇게 한참 동안 둘을 태우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대저택 내부로 이어져있는 지상에 도착한 둘은 바로 집무실에서 차를 한 잔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에텔드리다가 떠들고, 로한이 맞장구쳐 주는 대화 형식의 반복이었다.
“이제 그레이스 성당도 어느 정도 기틀이 다시 잡히기 시작했어요. 주교급 추기경들이 업무에 적응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면 성녀님에게 가는 서류 양도 많이 줄었겠군요.”
“그러니까 이렇게 놀러 나올 여유도 생기죠. 어휴, 지난 3주 동안의 행보는 생각하기도 싫어요. 그땐 밤마다 서류한테 깔려 죽는 악몽을 꿨다니까요….”
“하하하… 고생했어요.”
“앗. 고마워요.”
로한의 부드러운 칭찬에 에텔드리다는 대답하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기분이 좋았나 보다.
“이렇게 자리 잡기까지 피를린의 존재가 엄청 큰 도움이 됐어요.”
피를린. 로한이 아르베니아에 보낸 생체 휴머노이드의 이름이다.
“진짜 피를린마저 없었으면 전 정말 일에 치여 쓰러졌을지도 몰라요. 잡다한 일을 피를린이 모두 처리해줘서 망정이지… 어휴.”
“피를린은 여전한가요?”
“그럼요! 지금도 그레이스 성당에서 제일 일 잘하는 신관이에요. 저 말고 다른 추기경들도 피를린한테 얼마나 많이 의지하는지 몰라요.”
“다행이네요. 믿고 보낸 보람이 있어요.”
“다시 한번 피를린을 보내줘서 고마워요, 공작님. 진짜 너무 대단한 인재예요. 이제 아르베니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수준이라니까요?”
“그러니 앞으로 저한테 잘하세요. 열받으면 확 다시 소환시킵니다?”
“제발… 나 또 서류만 보며 밤새기 싫어요….”
서로 농담도 나누면서 화기애애하게 한참을 떠들던 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살짝 열리고, 아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린 님.”
“대화 중에 죄송하지만, 말씀하신 시간이 다 돼서요.”
아린이 손가락으로 벽의 시계를 가리켰다. 어느새 2시간 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이제 가봐야겠네요.”
아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텔드리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추기경들에게 이곳에 몰래 온 걸 들통날 수도 있다.
“오늘도 제 얘기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업무로 쌓인 스트레스 많이 풀고 가요.”
“늘 말씀드리지만, 부담 갖지 마시고 언제라도 찾아오세요. 저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로한의 대답에 에텔드리다는 발그레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행복한 시기가 계속 되었으면 좋겠어요.”
많은 뜻이 담겨져 있는 그녀의 조용한 한마디. 현재 한 달간 마족의 소식 없이 평온한 대륙의 상태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둘만의 비밀스러운 오붓한 이런 만남에 대한 뜻일 수도 있다.
로한은 굳이 그녀의 말을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
“가는 길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로한은 옆 책장의 비밀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천천히 책장이 열리며 비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의 중앙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작동하기 위해 로한이 걸어가던 그때, 아린이 조용히 에텔드리다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성녀님.”
“네?”
“이거.”
얼떨결에 아린이 내민 걸 받게 된 그녀. 액체가 담겨 있는 작은 통이었는데, 은은한 풀잎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빠가 좋아하는 향이 담긴 보디로션이에요. 씻은 뒤 잠들기 전에 매일 온몸에 바르고 주무세요. 매일 사용하시면 다음에 올 때쯤에는 효과가 있을 거예요.”
“아… 고마워요.”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에텔드리다에게 아린은 윙크한 뒤 뒤로 물러섰다.
곧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이동했다. 10분 뒤, 에텔드리다를 배웅한 로한은 혼자서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안에서 간단한 서류 업무를 보고 있는 아린에게 핀잔을 줬다.
“아무리 그래도 보디로션은 너무 대놓고 작업 걸라는 뜻 아냐?”
“밀리오 님한테 수시로 연애 코치하던 사람이 누군데요?”
“사이보그거든?”
“언제는 사이보그도 인간이라면서요?”
“…요즘 한마디를 안 지네.”
“쿡쿡.”
툴툴대며 소파에 앉는 로한의 모습에 아린은 피식 웃어버렸다.
“근데 오빠.”
“응?”
“에텔드리다 님은 어때요?”
“어떻다니… 뭐, 여자로서?”
“네. 오빠는 지구에서도 어떤 여자를 봐도 아무런 감정이 안 생긴다고 했잖아요. 마음에 드는 사람의 유무를 떠나서, 신체 구조상의 문제 때문에요.”
아린의 말에 로한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의 가슴 쪽으로 내려갔다.
인간의 심장이 아닌, 레기스트륨을 무한으로 생성하는 원자로 심장을 보유한 신체.
때문에 전투 시에는 그 어떤 생명체보다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평상시에는 일반 생명체보다 감정을 훨씬 느끼기 어려운 몸.
특히 연애 쪽에서 큰 페널티를 가진다. 온몸의 감정이 본능적으로 반응해야 가능한 게 연애인데, 사이보그의 신체로는 그게 너무 힘들다.
그래서 지구 시절 최고의 인기인이었던 로한도 어떤 여자도 사귀지 못했다.
최고의 사이보그 전사라는 위치 때문에 조심스러워서 못 사귄 게 아니라, 누구를 만나도 사귀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겨서 안 사귄 거다.
“글쎄… 진짜 잘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어머니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그 강렬한 따뜻함에 비교하면 거의 감정이 없다시피 해.”
“역시, 신체 구조 때문일까요?”
“그렇다기엔 어머니를 생각하면 또 아니고.”
처음 이 대륙에 떨어져서 어머니를 다시 구해냈을 때, 순간 감정이 올라와 울컥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걸 생각해 보면 이 신체가 아예 감정이 제거된 상태는 아니다.
“넌 어때? 난 휴머노이드의 감정이 궁금해지는데.”
“저요? 저도 딱히 연애하고 싶다는 감정이 드는 사람은 없는데….”
“밀리오는?”
“음… 아니에요.”
“이안은?”
“선 넘지 말아줄래요?”
“…연애 감정은 몰라도 혐오 감정은 확실하구나.”
“오빠도 이안을 매부로 둔다고 생각해 봐요.”
“아, 미안.”
로한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이안이 아린과 결혼했다는 상상을 하자마자 분노가 확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언젠가 연애를 할 수는 있겠죠?”
“억지로라면야 지금도 가능하지. 하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과 한다면… 모르겠다.”
“…….”
둘은 살짝 씁쓸한 표정으로 변했다.
과연 둘이 정녕 마음에 드는 연인과 화려한 결혼식을 치르는 그런 날이 올까?
둘 다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굉장히 힘들 것이고, 심지어 오래 걸릴 것이라 둘 다 예감하는 중이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곧 로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처럼 시간이 날 때 왕성에 잊지 말고 다녀와야지.”
“공작이라는 자리는 참 바빠요. 그쵸?”
“그러게.”
최근 테르디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면서부터, 로한은 아로엘 말고도 왕성에서도 해야 할 업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윌리엄처럼 나라의 대소사에 그의 의견이 반드시 필요해진 것이다.
해서 오늘처럼 빈 시간이 생기는 공휴일에는 쉬지도 못하고 왕성을 들락날락해야만 했다.
“그럼 갔다 올게. 늦게 올 거 같으니 기다리진 마.”
“다녀와요.”
아린의 인사를 받으며 로한은 대저택을 나왔다. 마탑에 있는 공식 워프존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웬만한 공직 관리들은 특별히 급한 일이 없으면 일요일에 쉬는 편이다. 하지만 왕실, 특히 국가를 다스리는 왕은 일요일이라고 쉴 수는 없다.
오늘도 필리프 국왕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전국에서 날아온 결제가 필요한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는 도중 문밖에서 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윌리엄 공작이옵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윌리엄 공작이 깍듯한 목례와 함께 집무실 안으로 성큼 성큼 걸어 들어왔다.
현재 윌리엄 역시, 휴일이라고 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어서 오게, 윌리엄. 로한은 안 왔나?”
“방금 마탑의 워프존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렇군…. 저기, 윌리엄.”
필리프가 은근한 목소리로 윌리엄에게 물었다.
“요즘, 로한 공작이 너무 위험해 보이지 않는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윌리엄도 살짝 놀라 되물었다.
필리프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요즘, 로한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