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잠시 후.
“흠.”
투할의 요구를 모두 들은 아스모데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얼마나 준비해야 하는지 가늠해보는 중이었다.
정리는 금방 끝났다.
“생각보다 대규모 작전이긴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준비과정이 필요해. 포탈에 필요한 재료도 모아야 하고, 또 마기도 오랫동안 비축해놔야 하고 말이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적어도 한 달 이상.”
이번엔 투할이 생각에 잠겼다. 한 달이라는 공백 기간 동안 그의 부하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을까?
곧 그는 판단을 내렸다.
“좋다.”
“근데, 이 정도 규모면 좀 대가를 많이 받아야 될 것 같은데? 나도 한 달 넘게 전력을 다해야 할 정도로 큰 작전이라서.”
“…….”
“이 말을 들을 거라 예상은 했겠지? 투할? 이 정도 작전을 도와줄 수 있는 마왕은 이 행성에 나밖에 없어.”
“뭘 원하나?”
투할의 질문에 그녀가 답했다.
“일단 로한, 그놈을 줘. 다른 것보다 이게 최우선 조건이야.”
“시체를 원하는 건가?”
“난 죽은 것보다 살아 있는 걸 더 좋아한다는 걸 잊었어? 당연히 생포해서 내 앞에 갖고 와야지.”
“…….”
침묵하는 투할을 향해 아스모데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새로운 종족은 언제나 내 호기심을 자극시키지. 로한, 그놈의 모든 걸 털끝 하나까지 알아내고 싶어졌어. 그러니까 반드시 산 채로 잡아와. 이게 내 첫 번째 조건이다.”
“좋다.”
투할은 순순히 승낙했다.
생포라는 조건이 좀 까다롭긴 하지만, 로한을 넘기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스모데가 아직 모르고 있는 존재, 아린을 그가 가져가면 되니까.
“자, 나머지 조건은 지금부터 얘기해볼까, 투할?”
아스모데가 득의의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 * *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테르디아, 특히 아로엘에는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과연 어떤 변화가 있을까?
일단, 영지에 들어서는 경계 지역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아로엘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희망의 땅.]
[발전하는 땅.]
[편리한 땅.]
[아로엘입니다.]
“어머나~환영 문구 좀 봐. 저걸 저렇게 큰 철제 표지판으로 달아놨네?”
막 아로엘 쪽으로 다가오던 마차 안에서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마부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말했다.
“역시, ‘내 동생’ 로한이 운영하는 영지는 입구부터 품격이 다르구만!”
“아우, 그 내 동생이라는 표현 좀 그만하라니까? 내가 들은 것만 벌써 500번이 넘어가요!”
“뭐 어때? 사실이구만!”
창피해하는 여성에게 되레 더 당당해진 태도로 목소리를 높이는 사내.
“실제로 로한은 날 친형처럼 여기면서 자라 왔다니까? 내가 로한과 알고 지낸 지가 벌써….”
“올해로 딱 20년째야! 로한의 아버지가 여신님의 품으로 너무 빨리 떠나는 바람에, 내가 걜 갓난아기 시절부터 업고 마을을 돌아다녔어. 장작 패는 걸 알려준 것도 나고, 첫 사냥 때 활 쏘는 법 알려준 것도 나라니까? …라고 말하려고 했죠?”
“아니, 그걸 다 어떻게 알았어?”
“로한이 유명해진 이후부터 하루에 한 번 이상씩은 꼭 이렇게 자랑했잖아요! 아주 지겹다 못해 귀에 딱지가 생기겠어, 그냥!”
여성의 한탄에 멋쩍은 표정이 되어 머리를 긁는 남성. 그사이 마차는 경계선을 넘어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신트니’라는 팻말이 써진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아로엘의 관리로 보이는 자가 마차를 막은 뒤 그에게 다가왔다.
“타 지역에서 넘어오신 분입니까?”
“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한스. 옆은 내 부인인 루시아요.”
한스를 기억하는가? 헌터가 되겠다는 로한에게 처음 추천서를 작성해줬던, 같은 고향 마을 출신의 틸란 성 경비병 말이다.
그가 부인, 루시아와 함께 이삿짐을 한가득 마차에 싣고 아로엘에 도착한 것이다.
“목적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주하려고 왔소.”
“신분이 어떻게 되십니까? 노예 신분이면 이주 허가증이 있어야 합니다.”
“평민이고, 틸란 성의 2경비대 부대장 출신이외다. 자, 여기 보시오.”
한스는 자신의 경비병 시절 받았던 신분증을 관리에게 내밀었다. 읽어본 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돌려줬다.
“통과를 허락합니다. 아로엘 본성으로 가시려면 반대편 마을 입구로 나가셔서 대로를 따라 쭉 이동하시면 됩니다. 일두마차 속도면 대략 이틀 정도 걸릴 겁니다.”
“고맙소! 친절도 하셔라. 그러니까, 저기로 쭉~가면 ‘내 동생’ 로한의 성이 나온다는 거죠?”
짝!
“악!”
“아유, 이 양반이 진짜!”
또 들려온 ‘내 동생’ 단어에 루시아가 그의 등을 후려쳤다.
관리는 그 단어에 눈이 동그래졌다.
“영주님과 친분이 있으십니까?”
“당연하죠! 그놈 젖먹이 시절 때부터 업고 키운 사람이라니까? 그리고 헌터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내가 직접 추천서를… 악!”
“주책 좀 그만 부리라니까!”
또 한번 루시아한테 등을 후려 맞는 한스의 모습이었다.
“만약 정말 영주님과 친분이 있으시면, 아로엘 성에 가셔서 직접 영주님과 면담을 요청하시면 됩니다.”
“어, 정말이요? 그 바쁜 로한이 요청하면 누구나 다 만나준다는 소리요?”
“다는 아닙니다. 영주님과 진짜 친분이 있었던 사람만 만나 주십니다. 요즘 영주님이 유명해지다 보니, 친하지도 않은데 친분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면담 요청을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요.”
“저런, 저런. 그런 놈들 때문에 정작 진짜 친한 사람들까지 피해를 본다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내성 입구 관리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아, 이제 지나가시죠. 뒤에 분들이 기다리십니다.”
“아! 그렇군. 수고하시오!”
관리의 목례를 받으면서 한스는 마차를 이끌고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둘은 감탄했다.
“와, 이게 그냥 평범한 영지 마을 중 한 곳이야? 무슨 벨타디아 성 내부처럼 깔끔한데?”
“그러게요. 땅도 봐요! 흙이 아니라 전부 고급진 돌로 깔려 있어!”
이 대륙에서 내부의 모든 땅이 평평한 돌로 깔려 있는 곳은 내로라할 정도로 규모가 큰 대형 성밖에 없다.
근데 이 마을은 바닥도 바닥인데 주변 건물들 또한 깔끔한 석재로 지어져 있었다.
건물과 땅 전체가 이렇게 고급 석재로 이루어진 곳은 테르디아 내에서는 수도, 벨타디아밖에 없다.
“아로엘이 지금 이 나라에서 돈이 제일 많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네….”
“어우, 그나저나 좀 쉬었다 가면 안 돼요? 3일 내내 노숙했더니 힘들어 죽겠어요~”
“그러지 뭐. 어차피 말도 바꿔야 하니까.”
“일단 식사부터 해요! 식량 다 떨어져서 하루 종일 못 먹었더니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겠어~!”
“그럼 오랜만에 스테이크나 한번 썰까?”
“어머! 이 양반이 갑자기 미쳤나? 평소에 먹는 데 돈 쓰는 것에 그렇게 인색하던 양반이 웬일이래?”
“뭐 어때? 곧 ‘내 동생’ 밑에서 더 많은 월급 받으면서 살 텐데…악!”
“제발 쪼옴!”
티격태격하면서 근처에 보이는 커다란 여관의 마구간으로 향하는 둘.
그곳에 도착한 순간,
히히히히힝!
“으아악!”
“꺄아악!”
마차의 말까지 포함해 세 명의 생명체가 모두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포, 포, 포, 포탈 몬스터?!”
마구간 정중앙에 드러누워 있는 거대한 존재는 검은 피부에 붉은 동공, 코끼리처럼 긴 코, 멧돼지의 엄니, 그리고 호랑이의 몸통이 뒤섞여 있는 모습이었다.
저렇게 특이한 외형을 가진 몬스터는 무조건 포탈 안에서만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이고, 또 외지 분들이 오셨나 보구만?”
그때 옆에서 마구간지기로 보이는 사내가 태평하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이라 놀라셨죠? 외지에서 오신 분들은 다 얠 처음 보면 그렇게 놀라더라고.”
“아, 안 놀라게 생겼소? 포탈 몬스터가 떡하니 마구간에 누워 있는데!”
“포탈 몬스터’였’죠. 지금은 아니고.”
사내는 말하면서 그 포탈 몬스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물기는커녕, 오히려 머리를 비비면서 애교까지 부리고 있지 않은가?
“바쿠라고 하는데, 원래 근처 C- 등급 포탈 안에 나오던 몬스터였거든요? 근데 최근에 공작님께서 얘네들을 포획해서 마기를 깔끔하게 제거시켰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사람들을 잘 따르는 순한 존재로 변했다니까?”
“엥? 그게 무슨 소리요? 마기를 제거하다니…?”
“거, 소식 참 느리시네. 요즘 로한 님이 개발한 마기 제거 물약이 포탈 몬스터한테 그렇게 효과가 좋다고 난리인데, 못 들었수?”
한스는 동그래진 눈을 끔뻑였다. 정말 처음 듣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거 본성으로 가시는 길인 모양인데, 가다 보면 알게 될 거요. 최근 마기를 제거한 포탈 몬스터들을 타거나 키우고 있는 병사들이나 헌터들이 많거든. 가는 길에 그런 모습 수도 없이 보게 될 거외다.”
“허…!”
“이 기회에 바쿠 한번 타보실라우? 평범한 말보다 얘가 힘도 훨씬 세고, 속도도 빠른데. 처음이니까, 내가 이번만 특별히 말이랑 똑같은 가격에 바꿔드릴게.”
“아, 아, 아니오! 괜찮소이다. 그냥 말로 바꿔주시오.”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면서 거부하는 한스의 모습에 마구간지기는 피식 웃었다.
“다들 처음엔 그렇게 거부하지. 한 번 이용하고 나면 이제 말은 생각도 안 날 텐데 말이오. 아무튼, 알았소. 한 시간 뒤에 다시 오시오.”
“아, 알겠소.”
“혹시 생각이 바뀌면 말해요! 바로 바꿔줄 테니까.”
“그럴 일 없소! 갑시다, 여보!”
크게 대답하며 더는 바쿠 근처에 있는 것도 싫은 듯이 부리나케 마구간을 떠나는 한스와 루시아. 마구간지기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실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질 못했다.
마구간지기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을을 떠나 아로엘 성으로 향하는 이틀 동안, 그들은 충격적인 장면을 끊임없이 목격할 수 있었다.
“저거 봐요 여보! 아까 봤던 그 바쿠라는 몬스터를 등에 타고 다니고 있어요! 어머, 심지어 한 명도 아니네?”
헌터들이 단체로 바쿠의 등에 탄 채로 멀리 있는 포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거의 일상처럼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세상에! 저 오우거보다도 크고 흉측한 몬스터를 애완동물처럼 다루고 있어…!”
아로엘 병사들로 보이는 집단들이 거대한 이립 보행 몬스터를 이끈 채로 대로를 정찰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으며,
“여보, 여보! 하늘 좀 봐요!”
“왜? …헉! 세상에!”
심지어 포탈 몬스터로 보이는 검은 와이번을 타고 공중을 배회하고 있는 아로엘 기사단들도 가끔 볼 수 있었다.
와이번 기사단! 대륙에서 아르베니아를 비롯, 힘 좀 있다는 국가만 소수로 보유하고 있는 부대다. 그만큼 야생의 와이번을 길들이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테르디아에는 와이번 기사단이 없다! 근데 아로엘은 보유하고 있다. 이 정도면 영지와 국가의 전력이 역전됐다고 보는 게 맞지 않나?
“로한 이놈, 도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계속된 충격으로 인해 한스는 점점 로한과 거리감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공작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솔직히 거리감이 느껴졌는데,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다.
그렇게 충격으로 가득한 이틀이 지나갔고, 둘은 드디어 목적지인 아로엘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