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비올라의 침실은 대저택에서 가장 큰 방이었다. 원래라면 집주인인 로한이 사용해야 하는 방인데, 주로 집무실과 내성에서 생활하는 로한에겐 큰 침실이 필요가 없어서 어머니를 위해 양보했던 것이다.
비올라는, 그 침실의 정중앙에 놓인 침대에 앓아누워 있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아들…!”
로한을 본 비올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아들 맞지? 내 아들 맞는 거지?”
“그럼요. 제가 로한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등에 날개가 돋아나는 거니? 내가 남편과 낳은 자식은 날개가 달려 있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중간에 작은 사건이 있었어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 말씀드릴게요.”
“지금 말해주면 안 되겠니? 혹시나 내 아들이 아닐까 봐 걱정이 되어서 잠을 못 이루고 있단다. 제발, 이 어미 좀 안심시켜 다오… 제발….”
“어머니….”
“만약 제 아들이 아니라면, 차라리 빨리 말씀해 주세요. 빨리 포기하는 게 나으니까…. 아니야!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 말을 듣자마자 충격받아 쓰러질까 봐 너무 두려워! 그러니 그냥 말하지 말아줘요…. 흑… 흑흑흑….”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가 느껴지는 모습을 보이다가, 급기야 로한의 눈앞에서 울음까지 터뜨리는 비올라.
딱 봐도 적지 않은 충격으로 패닉에 빠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로한은,
‘안 되겠어. 이 방법을 쓸 수밖에.’
마음을 단단히 먹은 뒤, 비올라의 어깨를 부여잡고 최대한 가까이서 시선을 맞췄다.
“어머니, 제 눈을 보세요.”
비올라는 펑펑 울면서도 자연스레 로한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 순간, 로한의 눈동자가 푸른색으로 변했다.
동시에 로한의 머릿속에 들려오는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
[메모리에 내장되어 있는 ‘최면술’ 시스템을 시작합니다.]
[최면술을 걸 상대방과 5초 이상 시선을 마주쳐 주세요.]
[5, 4, 3, 2, 1….]
[최면술에 성공했습니다. 지금부터 상대방의 머릿속에 주입할 내용을 말씀하세요.]
도우미의 목소리가 끝날 때쯤, 로한은 비올라의 시선이 살짝 몽롱하게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면술 시스템이 성공했다는 증거였다.
그 상태로 로한은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전 로한이에요. 태어나서 100일도 되기 전에 걸음을 걷고, 다섯 살 때 장작을 패면서 어머니의 농사일을 돕고, 열 살이 되기 전 마을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활을 잡고 사냥하러 마을 밖을 나가서, 처음 사냥한 토끼를 어머니한테 보여주면서 세상 기뻐했던 로한이라고요.”
“그…래. 맞아…. 넌 사냥할 때 가장 행복해하던 아이였어….”
“기억나요? 사냥으로 바쁜 와중에도 어머니가 원하던 건 무엇이든 구해 왔잖아요. 절벽 끝에서만 자라는 달빛망울초를 어깨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구해 오고, 일주일은 걸어야 왕복할 수 있는 틸란 성까지 가서 어머니가 원하던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오기도 했잖아요. 왜 그랬겠어요? 제가 어머니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래…. 네 덕분에 내가… 남편을 잃은 슬픔을… 그나마 빨리 벗어날 수 있었어….”
“절 보세요, 어머니.”
로한은 일부러 비올라 앞에서 하이퍼 모드로 변신했다. 레벨 1, 레벨 2 모두 변신해서 보여준 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비올라의 시선은 여전히 몽롱한 상태였다.
“이 세 가지 모습 모두 어머니의 아들 로한이에요. 그리고 또 어떠한 다른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제가 헤민 마을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라난 로한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요. 믿으세요. 전 어머니를 두고 어디로도 떠나지 않아요.”
“그래…. 겉모습이 어떻든 간에… 넌 영원한 내 아들이야….”
비올라의 그 말을 들은 로한은 곧바로 최면술 시스템을 껐다. 그러자 비올라의 몽롱했던 눈빛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혼란 그 자체였던 정신 상태 역시 급속도로 안정된 모습이었다.
“그래, 내 아들. 내가 왜 너를 겉모습만으로 의심했을까? 언제나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효도하는 착한 아들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인데….”
이후 로한을 꼭 껴안으며 속죄의 눈물을 흘리는 비올라. 로한은 역시 그녀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렇게, 로한은 비올라의 근심을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어쨌든, 해결했으면 된 거다. 나르커즈 약물을 투여한 게 아니라서 부작용도 없을 테니까.’
지금 그가 사용한 최면술 시스템은 지구에서 주로 일반인들의 치료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당연히 부작용은 아예 없는 수준이다.
물론 나르커즈 약물을 썼으면 더 빨리 이 문제를 해결했겠지만, 포로 심문용으로 개발된 나르커즈는 상대방의 뇌세포를 파괴하는 부작용이 종종 발생한다. 그런 걸 비올라한테 사용할 수는 없다.
‘앞으로 이제 어떤 모습으로 변해도 어머니는 의심하지 않겠지.’
속으로 생각하며 로한은 시선을 옆의 아린에게 돌렸다. 아린은 그를 향해 윙크 한번 해주는 것으로, 로한이 잘 해결했다고 무언으로 대답해주었다.
* * *
그날 저녁.
아로엘 성의 중심가에 위치한 여관에서는 또 한번 거한 잔치가 열렸다.
“자, 자. 들어봐요. 아, 거기 집중 좀 해보라니까?”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술잔을 든 채로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미남자.
아로엘 성의 특별 경비 관리, 이안 칼슈타인이었다.
“오늘 우리 영주님이 다시 영지로 돌아온 기념비적인 날이잖아요? 이런 날 즐겁게 놀지 아니할 수 없잖아! 안 그래?”
“예에에!”
여관 내 모든 이들이 신난 목소리로 합창했다. 이안이 또 골든벨을 울려서 공짜로 마시는 술이니까 당연히 신날 수밖에.
“다들 잔 들고 외치자고. 대륙 최고의 전사이자, ‘나’와 가장 친한 로한 형님을 위하여!”
“위하여!”
합창과 함께 잔을 들이켠 여관 내 모든 이들은, 이후 즐거운 단체 술자리를 즐겼다.
이안은 모든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떠벌리기에 바빴다. 무슨 경험담이냐고? 당연히 로한과 함께 지냈던 과거 경험담이다.
“난 로한 형님이 처음부터 범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니까? 내가 맨 처음 만난 날 있잖아. 아로엘로 오면서 와이번들이랑 전투를 벌였던 때가 있었어. 그때 ‘나의’ 로한 형님이 공중을 날아다니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검을 휘둘러 대는데…!”
‘또 저 얘기냐.’
옆 테이블에서 혼자 앉아 있던 경비대장 호튼이 질린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번이 정확히 19번째 듣는 이야기다.
‘그래도 요즘은 공작님 뒷담화는 안 까네.’
최근 이안은 로한과 친한(진짜 친한지도 모르겠지만) 관계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깨가 머리 꼭대기까지 솟아오른 상태다.
사방에서 로한의 대해 물어오면, 신이 나서 과거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게 요즘 이안의 유일한 즐거움처럼 보일 정도다.
‘그만큼 공작님이 대단하다는 반증이겠지.’
현재 대륙 내에서 가장 핫한 인물, 로한. 당연히 그의 영지인 이곳에서는 위상이 더더욱 말도 안 되게 드높은 상태다.
특히, 최근 공모 글을 보고 몰려든 타 지역의 사람들이 그렇게 로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궁금해하더라.
“자, 건배!”
“건배!”
그때 또다시 이안의 선창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는 어느새 거의 십년지기 절친처럼 그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떠드는 모습이었다.
참, 친화력 하나는 역대급이긴 하다.
‘그나저나 오늘은 몇 시에 끝나려나….’
여기서 유일하게 즐기지 못하는 이는, 이안의 호위 역할을 맡은 호튼 한 명뿐이다.
몇 시간 후.
늦은 밤이 되어서야 이안은 호튼과 함께 여관을 나섰다. 걸음걸이를 보니 만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살짝 비틀대는 걸 보면 꽤 마신 것은 분명했다.
“아~ 좋다! 역시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니까~ 흐히히힛.”
“그렇게 맨날 놀다가 곧 무일푼이 되십니다.”
“걱정 마~ 이미 무일푼이거든! 히히히. 그래서 말인데, 주급 나오는 내일모레까지 너네 집에서 신세 좀 지면 안 될까~?”
“안 됩니다. 또 저 몰래 창고에서 술 꺼내 마신 뒤에 이불에 토하시려고요?”
“아~ 그땐 저녁에 생선을 상한 걸 먹어서 그랬다니까~ 한 번만 봐주라~”
“안 됩니다.”
“아~ 진짜 왜 그래 우리 사이에에… 응? 왜 그래?”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기세를 뿜어내는 호튼의 모습에 이안은 놀라 물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호튼이 바라보고 있는 정면으로 향했다.
정면에는 금발의 사내가 한 명 서 있었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외모의 그는, 복장이나 내뿜는 기운이 딱 봐도 평범하지 않아 보였다.
“이안 칼슈타인.”
그가 이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맞나?”
“그건 왜 묻지?”
호튼이 되물으면서, 본능적으로 느낀 위기감에 바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맞나 보군. 잠깐 나랑 함께 가줘야겠다.”
“누구 맘대로…!”
사내의 말에 외치던 호튼은, 갑자기 극도로 몰려오는 졸음에 중간에 외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감겨오는 눈꺼풀을 어떻게든 들어 올리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무거웠다.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당했…다…!’
호튼은 속으로 한마디를 끝으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잠깐 쉬고 있거라.”
바닥에 쓰러져 완전히 잠에 빠진 호튼을 향해 한마디 한 사내가, 이안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 걸음 옮긴 순간,
까앙!
급하게 그는 손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하며 자리에 멈춰 서야만 했다.
금발 사내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회색의 로브를 입은 미령의 존재가, 복면의 틈 사이로 드러난 두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흠.”
사내는 복면인과 잠시 시선을 부딪치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호위가 따로 있었군.”
안 그래도 그도 처음엔 의아해했었다. 호튼이라 불리는 저 나약한 사내에게 무려 칼슈타인 가문의 친아들인 이안의 경호를 맡긴다고? 로한이 이안을 그 정도로 허술하게 관리한다고?
하지만 눈앞의 복면인을 보니 이제 이해가 된다. 무려 자신과 시선을 맞교환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라면, 이 대륙 내에서는 이안의 호위를 맡기기엔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나한테는 안 된다.”
곧 사내의 금색 동공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 시각.
로한과 아린은 아직도 행정부에 남아 영주, 성주로서의 업무를 다하고 있었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행정부 신참들을 교육시키랴, 5일간 밀린 서류를 처리하랴, 2차 관리 선별 과정을 직접 손보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둘이었다.
둘이 같은 방 안에서 계속 서류 작업을 하던 그때.
그들의 머릿속에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위험인물이 이안 님에게 접근했습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로한과 아린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 목소리는, 분명…!
‘케이!’
케이는, 이안의 경호를 위해 로한이 비밀리에 제작해서 파견한 생체 휴머노이드다. 현재 사갈 공국에 잠입해 있는 슬론과 똑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절대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생체 휴머노이드, 케이가 지원을 요청했다?
이건 로한과 아린이 직접 나서야 하는 긴급 상황이라는 소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