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당황한 에텔드리다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로한의 다가오는 걸음은 멈출 생각을 하질 않았다.
전혀 벌어지지 않는 둘 사이의 거리에, 그녀의 가슴속 당황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 이러시면 안 돼요… 앗.”
더듬으며 로한을 제지하려던 에텔드리다는 등에서 느껴지는 촉감에 더 당황했다. 벽이 더 이상 그녀가 뒷걸음질 칠 수 없도록 막은 것이다.
퇴로가 막힌 그녀를 향해, 로한은 두 발짝 더 앞으로 다가왔다. 그로 인해 둘 사이의 거리는 코끝이 살짝 닿을 듯 말 듯 할 정도까지 되었다.
조금만 앞으로 가면 입술끼리 닿을 수 있는 이 초근접 거리에서, 로한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
순간 직감한 에텔드리다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새빨개졌다.
이마에서 갑자기 땀이 흘러내렸고,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동그랗게 커져 있었으며, 검은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수축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로한의 얼굴에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점이었다.
‘안 돼! 그 말은 절대 꺼내지 마세요! 난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할 성녀란 말이에요!’
속으로는 절대 이래선 안 된다고 절규하듯 외치지만, 정작 겉으로는 스턴 상태가 된 듯이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는 상태였다.
왜일까? 왜 로한의 입에서 앞으로 나올 말을 예상하면서도 자신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일까?
결국 그녀는 로한이 다시 입을 여는 걸 제지하지 못했다.
“밀리오 님에게 이런 식으로 손수건을 건네셨다죠?”
“…예?”
예상치 못한 대답에 벙쪄버린 에텔드리다. 그녀는 어느새 뒤로 한참 물러난 로한의 모습을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쳐다보았다.
“손수건을 돌려달라는 밀리오 님의 부탁이 있어서요.”
로한의 말에 에텔드리다는 시선을 자신의 주머니 쪽으로 향했다. 며칠 전 테르디아 파티 때 몰래 건넸던 그녀의 손수건이 어느새 그곳에 집어넣어져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바쁘실 테니 굳이 나오지 마세요. 그럼.”
로한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 후 집무실을 나왔다. 문을 닫고 복도를 걸어가면서 로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밀리오, 네 부탁대로 제대로 돌려줬다.’
물론 밀리오가 이런 식으로 똑같이 복수해 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그저 손수건만 다시 돌려달라고 부탁했을 뿐.
방금 전 행동은 그저 로한 개인의 심술궂은 장난일 뿐이었다.
아까 전 극도로 당황한 에텔드리다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로한은 피식 웃었다. 어렸을 적에 저렇게 반응이 순진했던 여자애들을 자주 놀리고 다녔었는데.
‘천하의 성녀에게 마음껏 장난을 쳐도 별일 없는 존재라! 이건 정말 축복받았군.’
새삼 자신의 위상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워프진이 있는 중앙으로 계속 걸어가는 로한이었다.
그 시각, 집무실에 남아 있던 에텔드리다는.
“하아, 하아, 하아….”
아직도 벽에 몸을 기댄 상태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심장 부근을 손으로 부여잡은 채 붉어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흡사 미열이라도 오른 것처럼 보일 법했다.
어떻게든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계속 노력하는 그녀. 하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은 도저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당했어. 설마 로한 님이 저런 식으로 나한테 장난을 칠 줄은…!’
이건 로한한테 따질 수도 없었다. 본인도 똑같은 방법으로 손수건을 건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로한 님이 아닌 밀리오 님한테 했잖아! 이건 너무 억울해! 난 일방적으로 당한 거라고!
‘정말 못됐어…!’
로한의 짓궂은 행동을 속으로 원망하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까 전 들었던 로한의 말이 아직도 계속 맴돌고 있는 중이었다.
“테르디아에 놀러 오고 싶으시면 언제라도 넘어오세요. 심심하시면 제 영지인 아로엘도 놀러 오시고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왜 이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걸까?
‘정말, 아무 때나 놀러가도 되는 걸까…?’
그리고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마음속에 드는 걸까?
에텔드리다 그녀도 본인의 이런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 * *
이곳은 고든 공작의 대저택.
고든의 집무실에는 세 명의 남성이 있었다.
두 명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있고, 한 명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부복하는 자세였다.
“누군가?”
고든이 눈앞의 부복한 사내한테 물었다. 그는 오늘 이자를 처음 보는 듯했다.
사내가 대답했다.
“이번에 주인님의 명으로 공작님을 돕기 위해 합류한 키내쉬라고 합니다.”
“흠… 마법사인가?”
“네.”
키내쉬가 입고 있는 고급 재질로 제작된 검은색 로브와 오른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만 봐도, 누구든지 그의 정체를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든이 키내쉬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이렇게 평했다.
“딱 봐도 나보다 훨씬 강해 보이는데….”
“제대로 보셨습니다.”
대답은 옆에 앉아 있던 르기에의 입에서 나왔다.
“키내쉬는 주인님의 직속 마법사들을 이끌고 있는 단장입니다. 지금 엘도르에 있는 데르툴족 중 가장 강한 마법사라는 소리죠. 그는 최소 중급 귀족 이상의 실력자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유키펠과도 동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허… 유키펠은 최상위 귀족이라 하지 않았나? 그 정도라고?”
“말이 최상위 귀족이지, 원래 유키펠은 상위 귀족급 실력밖에 안 됩니다. 최근 자리 하나가 비어서 운 좋게 진급한 것뿐이죠.”
“흠….”
그래도 최대 상위 귀족의 실력자라니. 이건 아직 말단 데르툴의 마기조차 회복하지 못한 고든 입장에서는 너무 과분하게 강한 부하다.
그래서 그가 물었다.
“이렇게 강한 자가 내 밑에 들어온 이유가 있을 텐데.”
키내쉬가 대답했다.
“원래는 주인님께서 저 말고 부장급 마법사를 보내려 하셨습니다만, 어제 있었던 힌스테딘의 패배 이후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로한과 같은 국가에 계시는 두 분을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 아르베니아로 갈 예정이던 제가 이곳으로 오고, 나머지 지역에는 부장급 마법사를 두 명씩 파견하기로 하셨습니다.”
“두 명이나?”
“네. 주인님께서는 현재 상황을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계십니다.”
르기에가 그의 말을 이어 받았다.
“현재 상황이 천 년 전 신마대전 때와 너무도 흡사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서쪽 대륙 전체에 마족을 심어서 모든 나라의 전권을 가져온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인간들의 생각지도 못한 반격에 모두 실패했었죠. 당시에….”
“나도 안다, 알아! 당시 가장 먼저 실패했던 나라도 아르베니아였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국 서쪽 대륙의 계획이 모두 틀어진 가운데 신마대전을 일으켰고, 결과는 아슬아슬한 패배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고든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독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마기를 체내에 생성하면서 자연적으로 성격이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앞으로 고든의 성격은 더 독하면 독해졌지, 절대 유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주인님께서는 천 년 전 선조들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기존 계획을 완전히 바꾸셨습니다.”
“어떻게?”
“몰래 각 국가의 전권을 잡는 것을 넘어서, 서쪽 대륙의 국가끼리 내전을 일으키려고 하십니다.”
고든의 눈이 커졌다.
“전쟁을? 서쪽 대륙 국가들 전부 다?”
“그것이 더더욱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정신이 전쟁에 집중되어 있으면 저희들은 계획대로 움직이기 더 쉬워지게 되겠죠. 그리고 데르툴의 고위 마법사들이 있으면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그리고 이후에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도 훨씬 수월해집니다. 이것이 주인님이 마법사를 각국에 보낸 주된 이유죠.”
“흠… 근데 지금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가 있긴 하냐?”
“일단 사갈 공국은 가능합니다.”
“사갈…!”
“그곳은 이미 카르스트가 완벽히 전권을 손에 쥔 상태기 때문이죠. 이미 전쟁 준비도 거의 끝난 상태라고 하더군요.”
사갈이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고든은 불길한 예감을 바로 받았다.
“그래서 사갈 공국이 어디를 치려는 것이냐? 설마…?”
“맞습니다.”
르기에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은 영원한 앙숙 국가인 이곳, 테르디아를 칠 것입니다. 그중 로한이 있는 아로엘을 가장 먼저 노리겠죠.”
* * *
테르디아로 돌아온 로한은 당연히 큰 환영을 받았다.
무려 두 명의 마족을 생포한 것도 모자라, 서쪽 대륙의 패자 아르베니아와 동맹까지 체결하고 왔다. 테르디아 역사상 손에 꼽힐 정도의 대업을 달성한 로한을 어찌 왕실에서 그냥 보낼 수 있겠는가?
필리프는 바로 왕성에 로한을 불러 큰 상을 내렸다.
“큰 공을 세운 로한 공작에게 백마 200마리와 비단 2천 필을 수여하고, 로한과 그의 가족에게 어떤 죄를 저지르더라도 면죄받을 수 있는 면죄부 세 장을 수여하노라! 그리고 앞으로 왕궁 안에서도 무기를 차고 다닐 수 있는 권한과 왕성의 입구까지 마차를 타고 올 수 있는 권한도 허락하노라. 또한….”
정말 별의별 상을 다 내리는 필리프. 하지만 딱히 지금 로한에게 필요한 영양가 있는 것들은 없었다.
오죽하면 뒤에서 듣고 있던 아린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저런거 다 빼고 그냥 세금으로 가져간 드래곤 재료들이나 다시 돌려주지.]
[주겠냐?]
이후에도 한참을 더 잡다한 상을 내린 뒤에야 로한의 공로 치하는 끝이 났다.
“다음, 윌리엄 공작은 앞으로 나오시오.”
상은 로한만 받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 마족 처치와 관련해서 공을 세웠던 주요 귀족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크고 작은 상들을 받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로한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든은 아직도 아픈 건가?’
생각해 보니 이럴 때 왕의 옆에서 보조하는 역할을 해야 할 고든이 오늘도 안 보였다. 그 자리를 레이먼드가 대신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계속 이어진 공로 수여식은 이제 마지막 순서만 남게 되었다.
“다음, 아린 양은 앞으로 나오시오.”
왕실 재봉사가 직접 디자인한 공식 행사용 로브를 입고 있던 아린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뭇 남성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공손하게 무릎을 꿇은 그녀에게 필리프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신성조사단 사건 해결과 아르베니아 원정단에 속해 큰 공을 세운 아린에게, 공식적으로 대마법사의 칭호를 수여하노라. 동시에 그녀를 아로엘의 마탑주로 선임하노라.”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은 이는, 대륙 내에서는 어지간한 백작보다 훨씬 더 직급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즉, 이제 아린은 단순히 로한 공작의 친동생이 아니라 ‘테르디아에서 두 명밖에 없는 대마법사 중 한 명’이라는 귀한 위치를 얻게 된 것이다.
수위식을 지켜보던 남성들은 모두 아린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저 여자와 결혼하면, 나도 백작에 버금가는 지위로 격상할 수 있다는 거지?’
‘심지어 오빠가 무려 로한 공작이잖아!’
‘실력과 외모, 지위까지 모두 딱 내 옆에 두면 안성맞춤인 여자인데….’
‘그녀가 뭘 좋아할까? 당장 아로엘에 사는 지인한테 물어봐야겠어.’
생각해 보니 아린이 얻은 게 또 하나 있었다. ‘테르디아의 0순위 신붓감’이라는 칭호 말이다. 본인이 이 칭호를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심지어 수여식을 마친 필리프마저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나 보다.
“아직도 내 아들의 고백에 대한 마음은 변함이 없느냐?”
“송구합니다, 폐하.”
“끄응….”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