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그렇게, 모든 마족과 그 일당에 대한 심판은 끝이 났습니다.”
다음 날 오후.
그레이스 성당의 대복도에서 에텔드리다가 전방을 바라보며 연설을 하고 있었다.
“테르디아의 정의로운 조력자들 덕에 아르베니아는 마족에게 국가가 지배당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교황청에서 일하던 모든 주교급 추기경들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르베니아의 상황은, 버몬드 파의 전멸로 40여 명을 한꺼번에 귀족으로 승격시켜야 했던 테르디아의 과거 상황보다 훨씬 심각했다.
에텔드리다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제가 그동안 눈여겨봤던 모든 신관들을 급하게 모셨습니다. 아르베니아의 신전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켜보았던 당신들은 모두 그 누구보다 신앙심이 깊고, 누구보다 백성들을 위하며, 또한 누구보다 깨끗한 심성을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연설하는 에텔드리다의 시야에는 어젯밤 그녀의 호출을 받고 다급히 모여든 아르베니아 성국 각지의 신관들이 보였다.
이들은 이제 기존의 추기경들을 대신해서 아르베니아 성국의 주요 업무를 맡을 예정이었다.
“당신들의 어깨에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짐이 실려 있습니다. 단순히 한 지역의 백성을 살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성국 전체의 성민들을 살펴야 하는 막중한 업무를 부담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마족의 등장으로 인해 불신이 커져가고 있는 민심을 하루빨리 돌려야 할 것입니다.”
에텔드리다는 엄숙한 표정으로 연설을 이어갔다.
“하지만 아르베니아는 이 정도로 위기에 몰릴 만큼 약한 국가가 아닙니다. 성민들을 믿고, 여신님을 믿고, 그리고 저를 믿어주세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저도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테아이엘 여신님이시여, 부디 아르베니아의 미래에 밝은 빛을 내려주소서….”
곧 테아이엘의 벽화를 바라보며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는 에텔드리다. 뒤의 신관들도 모두 그녀를 따라 하는 모습이었다.
이 모습을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로한이었다.
다른 일행들은 전투가 끝난 후 곧장 테르디아로 돌아갔다. 워낙 급하게 파견을 오기도 했고, 다들 테르디아에서 주요 관직에 앉아 있는 인물들이라 하루 이상 자리를 비우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최소 한 명은 남아야 했다. 이후 아르베니아 국가와의 외교는 마무리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의 끝에 로한이 남은 것이다.
이번 전투의 주역이자 공작인 로한은 아르베니아, 특히 성녀와 가장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협상 테이블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제 에텔드리다가 정치적으로도 전면에 나서는군.’
기존에는 힌스테딘이 담당하던 성국의 교황 역할을 이제는 에텔드리다가 도맡게 되었다. 그래서 당분간 교황은 뽑지 않는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더 이상 다른 신관에게 교황 자리를 선뜻 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이번에 교황이 된 신관이 또 마족이면, 그땐 진짜 아르베니아가 풍비박산 날 수도 있다.
‘앞으로 잘해낼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
아직 20대 초반의 나이로 어리고, 정치 경험이 한 번도 없는 그녀가 이 서쪽에서 가장 큰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을까?
그건 앞으로 지켜보면 될 일이다.
훌륭한 재능만 있으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로한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20대의 나이에 지구 최강의 사이보그 부대를 이끌었던 자가 다름 아닌 로한 아니던가.
‘…아, 연설 끝났군.’
대복도에 모여 있던 신관들이 흩어지기 시작한 모습을 본 로한은, 에텔드리다가 바쁘게 걸어가고 있는 방향을 따라 걸어갔다.
그가 걸어가자, 막 관직을 얻어서 바쁘게 뛰어다니던 신관들이 하나같이 자리에 멈춰서 공손히 합장을 했다.
아르베니아를 구한 영웅!
마족을 손수 때려잡은 정의로운 전사!
여신께서 직접 보낸 대천사의 현신!
지금 아르베니아 내에서 로한의 이름은 그 누구보다 드높았다. 아마 지금 에텔드리다와 호감도 대결 투표를 벌이면 거의 동등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지금 로한의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신관들의 대화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단신으로 마족을 때려잡았다며?”
“대천사라서 그렇대. 근데 진짜 대천사가 맞긴 해?”
“등 뒤에서 날개가 돋아났다잖아! 그걸 본 피에트로 성민들이 한두 명이 아니야.”
“그럼 로베르토가 마족인 걸 밝혀낸 것도 저분이래?”
“그건 성녀님이 하신 거라던데? 강한 신성력으로 교황과 추기경들 정체를 단번에 밝혀내셨대. 테르디아의 대신관인 밀리오 님이 한 말이니 정확할 거야.”
귀 안에 내장된 최첨단 마이크로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로한이 슬쩍 웃었다.
‘계획대로 에텔드리다가 마족 정체를 밝혀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군.’
사실과는 다른 이 소문을 퍼뜨린 자는 다름 아닌 로한 본인이었다. 이렇게 소문을 퍼뜨려야, 향후 또 아르베니아에 잠입하려 할 수도 있는 마족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눈치를 볼 테니까.
앞으로 테르디아의 든든한 우군이 될 아르베니아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선의의 거짓말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곧 로한은 에텔드리다가 들어간 교황 집무실 앞에 섰다. 그러자 양옆에 서 있던 성기사들이 목례와 함께 문을 열어주었다.
“아, 로한 님.”
막 책상 앞에 앉았던 에텔드리다가 반갑게 그를 부르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기 전에 인사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벌써 가시는 건가요?”
살짝 아쉬워하는 목소리의 에텔드리다. 최근 들어 로한과 대화할 때 영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이런 감정적인 모습이 그녀의 본모습이다. 유키펠에게 복수심에 불타 정의의 철퇴를 휘두르고 힌스테딘에게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쌍욕을 날리던 모습 말이다.
단지, 성녀라는 지위 때문에 스스로 엄청나게 절제하고 있을 뿐이다.
로한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저도 돌아가서 밀린 업무 처리해야죠. 테르디아에 갇혀 있는 데르마들도 이곳으로 돌려보내야 하고요. 그리고, 유키펠의 심문도 계속 해야죠.”
“아… 제일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네요.”
“그렇죠.”
오늘 오전, 로한은 에텔드리다와 한 가지 합의를 봤다. 다른 데르마들은 모두 넘기는 대신 유키펠만은 테르디아가 계속 데리고 있으면서 심문하겠다고.
에텔드리다도 힌스테딘을 생포한 상태라 딱히 아쉬울 게 없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로한 없이 이 나라에 마족을 둘이나 가둬두는 게 불안하기도 하고 말이다.
“언젠간 유키펠과 힌스테딘도 자백을 하겠죠?”
“장담은 못 드리겠습니다. 둘 다 마족 중에서도 꽤 정신력이 강한 편인 최상위 귀족이라서요. 제 특제 최면 약물이 끝까지 안 통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구에서도 수많은 데르툴족을 굴복시켰던 나르커즈 약물도 잘 안 통하는 상대가 있다. 데르툴 내에서도 주요 관직을 맡고 있는 상위 귀족 이상의 놈들이다.
만약 이놈들마저 바로 약물 효과가 나타났으면, 지구에서의 전쟁도 최소 2년 이상 단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들의 정신력은 단순히 약물로 조종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다.
에텔드리다가 자책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말파스에 대한 심문을 테르디아 쪽에서 먼저 하라고 할 걸 그랬어요. 그랬으면 벌써 마족들에 대한 정보를 다 얻었을 텐데….”
“어쩔 수 없죠. 설마 추기경들 전체가 데르마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당시 말파스를 생포한 이후 바로 심문을 하려 했으나, 아르베니아에서 자신들이 먼저 심문하기 전에 절대 건들지 말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대지 못했다.
로한도 당시에는 아로엘 영지를 손보는 게 더 급했기 때문에, 나중에 조사관들이 돌아가고 난 후 천천히 심문하려고 했었다.
그 누가 알았을까? 건들지 말라고 경고한 신성조사단 전원이 마족의 하수인이었을 줄을.
“결국 유키펠이나 힌스테딘 둘 중 한 명은 입을 열게 될 겁니다. 물론 오랜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요.”
“전 그들이 자백한 이후가 더 두려워요. 제 생각보다 더 많은 마족들에게 대륙이 넘어간 상태일까 봐… 너무 겁이 나요.”
솔직하게 말하는 에텔드리다는 정말로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겁에 질려 파르르 떠는 소동물을 보는 듯했다.
“만약 또다시 아르베니아에 마족이 나타난다면, 그때도 잘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저 혼자서 그 정도로 큰 시련을 버텨낼 수 있을까요…?”
“왜 혼자입니까? 제가 있는데요.”
“……!”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에텔드리다.
“또한 당신들을 도울 테르디아의 수많은 헌터들이 있지 않습니까? 언제라도 서로를 돕기 위해 이런 걸 공식적으로 작성한 거고요.”
“아… 그렇죠.”
에텔드리다는 왠지 모르게 살짝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지금 로한이 품속에서 꺼낸 서류는, 오늘 오전에 작성했던 테르디아-아르베니아 간의 동맹선언문이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1. 테르디아와 아르베니아, 두 국가는 이 시간부로 서로 동맹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은 마족을 완전히 대륙에서 물리쳤다고 양 국가 모두가 판단할 때까지 유효하다.
2. 두 국가는 앞으로 마족과 관련된 전투 및 분쟁, 전쟁 등이 발생할 시 어떠한 추가 조건 없이 서로를 돕기 위해 병력 및 보급을 지원 요청을 할 수 있다. 요청을 받은 국가는 매우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이를 거부할 수 없다.
3. 두 국가는 앞으로 마족에 관한 모든 정보를 공유하며, 끊임없는 긴밀한 대화를 위해 서로 간의 직통 연락망을 개설할 것을 약속한다.
한마디로, 마족을 다 죽일 때까지 두 나라는 계속 함께한다는 거다.
‘이 동맹서 한 장 얻으려고 어제 그렇게 급하게 주요 병력들을 보내야 한다고 설득했었지.’
어제 오후, 당장 아르베니아에 핵심 멤버들을 지원군으로 보내야 한다고 국왕 필리프와 휘하의 신하들을 계속 설득시켰던 로한 본인의 모습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정이라 다들 난색을 표했지만, 윌리엄이 그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면서 결국에는 설득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무려 마족과 연관된 중대한 사안이기도 했고, 현재 테르디아에서 로한의 발언권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도 설득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근래 테르디아 역사상 이보다 큰 외교적 성과는 없을걸?’
아마 이걸 들고 테르디아로 돌아가면 왕성 전체가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서쪽 대륙의 패자인 아르베니아와 동등한 우방 국가가 되다니! 그것도 엘도르 대륙 최약체 국가가!
몇백 년 동안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엄청난 외교를 지금 로한은 해낸 것이다. 이로서 테르디아 내에서 로한의 입지는 또 한번 급격히 상승하게 되었다. 지금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상황인데 말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마음이 놓이네요.”
에텔드리다가 말하면서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아르베니아에 오고 싶으시면 언제라도 워프진을 이용해서 넘어오세요. 로한 님만큼은 연락 없이 갑작스럽게 넘어와도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저희도 마찬가집니다. 테르디아에 놀러 오고 싶으시면 언제라도 넘어오세요. 심심하시면 제 영지인 아로엘도 놀러 오시고요.”
“……!”
“아, 당분간은 업무에 적응하시느라 바빠서 못 넘어오시겠군요.”
“아… 하하하.”
로한의 말에 왠지 모르게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에텔드리다였다.
“아, 그리고.”
갑자기 로한이, 에텔드리다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점점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에텔드리다의 눈 역시 점점 커져갔다.
“로, 로한 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