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사이보그-89화 (89/200)

제89화

“정말 그들의 자백을 받아냈나요?”

“네. 결국은 다 털어놓더군요.”

사실 쉽지는 않았다. 지구의 최첨단 최면 약물인 나르커즈를 투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죄다 초월자의 경지에 올라 있던 데르마들의 정신력이 생각보다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르커즈가 뭔가? 지구에 있을 때에도 데르툴족들을 죄다 줄줄이 항복시키고 말았던 최강의 약물 아니던가?

결국 니콜라오 등은 하루 이상 꾸준히 투약된 나르커즈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고, 최면에 걸린 상태로 모든 정보를 술술 로한에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어떤 결과가 나왔나요?”

에텔드리다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로한의 답변을 기다렸다.

“이건,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적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성녀님을 포함해 몇몇 사람만 알고 있어야 할 1급 비밀이라서요. 밖에 누구 있나?”

“예, 공작님.”

“서류 작성하게 펜과 종이를 가져와라.”

로한의 명령에 하인은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 요구한 것들을 가져왔다. 로한은 펜에 잉크를 묻힌 후, 막힘없이 술술 서류를 작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텔드리다의 머릿속에 드는 첫 번째 생각은 이거였다.

‘사람이 어떻게 저리 빨리 쓸 수 있지?’

로한의 글 쓰는 속도는 지금껏 그녀가 봐왔던 어떤 사람보다도 최소 두 배 이상은 빨랐다. 그렇게 빠른 속도임에도 틀린 글자가 하나도 없었고, 글씨체 또한 완벽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1초라도 빨리 자백 결과가 알고 싶었던 에텔드리다는 상체를 로한 쪽으로 가까이 숙여서 그가 쓰는 글씨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

에텔드리다의 표정은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이내 로한이 서류 작성을 완료했을 때, 그녀의 두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떠져 있었다.

펜을 내려놓은 로한이 그녀에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기서, 아까 성녀님의 제안에 대한 답변을 드리죠.”

충격으로 지진이 난 듯이 크게 떨리는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로한은 말을 이었다.

“저는 성녀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아니, 반드시 따라가야 합니다.”

* * *

저녁 시간이 되었다.

그레이스 성당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워프진. 그곳에 로베르토 교황을 비롯한 아르베니아의 모든 주요 신관들이 모여 있었다.

곧 워프해서 돌아올 성녀, 에텔드리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건방진 년. 자기 마음대로 귀국 일정을 늦추다니….’

로베르토 교황은 현재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다섯 시간 전에는 도착해 있어야 되는데, 갑자기 일방적으로 늦게 온다고 통보해버린 것이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손을 봐야겠어. 이런 식으로 건방지게 기어오르는 꼴 더는 못 본다.’

안 그래도 어떻게 성녀를 처리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이번 일로 확실히 정해졌다.

그래도 꼭두각시 용도로 살려는 두려고 했는데, 이젠 그냥 폐기해 버리는 걸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일단 귀환하면, 성녀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안 그래도 벌써 이후의 계획을 다 짜놓은 상태였다.

1. 에텔드리다가 돌아오자마자 그녀를 추궁한다. ‘이번 신성조사단 대부분이 데르마라고 밝혀졌는데, 혹시 당신도 데르마 아니냐?’

2. 당연히 그녀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때, 아까 전 죽인 알비노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 마나석을 증거로 내놓는다. 이 마나석에는 ‘성녀님이 평소에 소다노 등과 자주 어울리는 모습을 목격했다’라는 자백이 담겨 있다.

여기서 의문이 들 것이다. 알비노는 심문도 안 하고 바로 죽였는데 언제 자백 진술을 받아냈을까?

당연히 그런 적은 없다. 이 녹음 마나석에 담긴 목소리는 조작된 가짜니까!

3. 결백한 그녀는 또다시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는 곧바로 이 마나석 녹음본을 아르베니아의 모든 성민들에게 퍼뜨릴 계획이었다.

‘깨끗한 이미지인 성녀에게, 마족과 친했다는 루머는 치명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에텔드리다는 그 누구보다 깨끗한, 1급 청정수와도 같은 존재다. 그곳에 검은 독약이 한 방울 떨어지면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다른 어느 연못보다 빠르게 더럽혀지고, 오염되는 걸로 보일 것이다.

그렇게 루머라는 검은 독약을 지속적으로 연못에 떨어뜨려 주면, 성민들에게 그 누구보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에텔드리다의 이미지는 빠른 속도로 추락할 것이다.

그렇게 민심을 많이 잃었을 때 로베르토 교황이 대놓고 전면에 나서서 전권을 휘어잡는 것이다.

교내에 자신의 세력도 없는 데다가 민심까지 잃은 성녀는 아무런 힘도 없을 테니까.

‘이 작전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 혼자의 몸으로는 내 데르마들이 일제히 소문내는 것을 절대로 막아낼 수 없어.’

로베르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키펠 일당이 제거된 이후 이제 그레이스 성당에 남아 있는 주요 신관들은 60% 정도뿐이다.

그들 전부가 이 워프진 앞에 모여 있는데, 이들은 모두 로베르토가 마기로 오염시킨 데르마들이다.

이 힘 있는 신관들 모두가 로베르토의 명령 한마디에 일제히 움직인다. 이들의 단체 움직임을 성녀 혼자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모두들 신성 마법으로 마기를 봉인하였는가?”

로베르토가 아예 대놓고 마기라는 단어를 그레이스 성당 중앙에서 내뱉었다. 하지만 이제 그걸 듣고 놀랄 존재는 이 성당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네, 주인님.”

신관들도 대놓고 이렇게 대답했다.

이들은 현재 마기가 체내에 있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직접 몸에 마기를 봉인하는 신성 마법을 거는 초강수를 뒀다.

이러면 최소한 며칠 동안은 아예 마기를 사용하지도, 흡수하지도 못한다. 단 하나, 생명을 걸고 폭주하는 버서커 모드를 제외하면 말이다.

혹시라도 성녀에게 마기를 들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로베르토의 결단이었다.

“혹시 모르니 데르마로 의심되는 행동 및 단어 사용도 금지다. 만일 이를 어길 시, 그놈은 바로 내 양분으로 흡수될 것이다.”

“……!”

“명심해라.”

로베르토의 경고에 일부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던 그때, 워프진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성당 내부를 환하게 밝히던 빛은 순식간에 꺼졌다. 이후 워프진에 남은 것은, 테르디아에서 귀환한 에텔드리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녀 한 명이 다가 아니었다.

“……!”

로베르토의 눈이 커졌다.

에텔드리다의 뒤편에 서 있는 수많은 인간들은, 분명 테르디아의 헌터들 아닌가!

“저들은 여기에 왜…!”

“이것들 봐라.”

그의 당황한 외침을 중간에 끊는 목소리가 있었다. 에텔드리다 바로 옆에 서 있던 로한의 것이었다.

그가, 신관들 전체를 둘러보며 말했다.

“진짜로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데르마들이네?”

그 말에 신관들 전체가 움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번에 마족의 정체를 밝힌 1등 공신이라 불리는 로한이 저런 말을 하니까 다들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역시 마찬가지의 기분을 느낀 로베르토가 자신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게 무슨 망발이오! 어찌 여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우리들을 데르마로 의심할 수 있소? 이건 신성모독이오!”

“그래?”

로한은 심드렁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한번 버텨봐. 아린.”

“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린이, 곧바로 손에 든 둥근 물체를 앞쪽 바닥에 내던졌다.

펑! 하고 터져버린 구체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시게 환한 초록색 빛이 순식간에 성당 전체를 뒤덮었다.

- 푸르가티오 폭탄

마기와 극상성 물질인 푸르가티오가 고농축 액체로 담겨 있는 폭탄. 이것을 던지면 반경 500미터 이내에 있는 모든 마기가 정화 작용을 일으키며 소멸된다.

범위 내에 마기를 보유한 존재가 있으면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눈앞의 데르마와 로베르토를 상대하기 위해, 아린은 워프존으로 아로엘로 넘어간 후 아공간에서 이 폭탄을 꺼내 다시 벨타디아로 귀환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그래도 수고한 보람이 있었다.

“끄아아악!”

“아아악!”

푸르가티오 폭탄의 빛에 노출된 신관들이 일제히 비명과 함께, 온몸이 쪼그라들면서 그만큼의 마기를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로베르토조차.

“크윽…!”

신음과 함께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몸에서도 아주 약간의 마기가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레이스 성당에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이 경악스러운 광경에.

“아…!”

에텔드리다는 충격을 받다 못해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녀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긴 했다. 넘어오기 전에, 남아 있는 신관들 전부가 데르마이며, 로베르토 역시 마족이라는 심문 결과를 알고 왔으니까.

하지만 눈으로 목격하니 단순히 마음을 굳게 먹은 걸로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충격이 파도처럼 그녀의 마음을 뒤덮어 버린 것이다.

“맙소사…!”

“이건 정말 절망적이군.”

“킁. 천하의 아르베니아가 갈 데까지 갔구먼.”

같이 온 밀리오, 라가스 등의 테르디아 헌터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때, 로한이 로베르토를 향해 말했다.

“이래도 데르마들이 아냐? 대놓고 온몸에서 마기를 뿜어내고 있는데?”

“으윽… 이건, 이건 모함이다! 네놈이 사악한 이단의 술수로 무고한 신관들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마족 주제에 나한테 사악하다는 단어를 쓰고 있네. 야, 힌스테딘.”

“!”

로베르토의 모든 행동이 정지되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니콜라오를 포함한 데르마들이 다 털어놨다. 너랑 유키펠 둘 다 마족이고, 여기 신관들은 모두 너희 둘 중 하나를 섬기고 있다고. 아까 네가 정화했다고 보고한 신관들 명단 보니까, 전부 유키펠의 데르마들이던데? 걔네가 네 데르마가 아니라서 전부 죽여 버린 거 아냐?”

로한의 말이 길어질수록 로베르토의 눈동자 떨림은 더욱 커졌다.

“이미 다 알고 왔다. 이제 연기 그만해라.”

로한의 말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 우두커니 서 있던 로베르토는, 이내 험악한 표정으로 이를 빠드득 갈았다.

‘유키펠, 이 망할 자식이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구나!’

죽을 거면 곱게 혼자서 죽을 것이지, 왜 남아 있는 자신까지 걸고 넘어지냐는 말이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의 분노는, 곧 폭주로 이어졌다.

“크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온몸이 빠른 속도로 변하기 시작하는 로베르토. 유키펠과 똑같이, 데르툴족으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강력한 마기가 성당 전체를 뒤덮었다. 푸르가티오 폭탄의 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 정도였다.

로한은, 그 변신 과정을 유키펠 때처럼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로베르토, 아니 힌스테딘이 이윽고 완전히 변신을 끝낸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확실히 유키펠보다는 강해 보이는군.”

“그런 하찮은 놈과 나를 비교하지 마라!”

괴성을 지르듯 외친 힌스테딘이 공중으로 빠르게 솟구쳤다. 드높은 성당의 천장에 도달한 그는 어깻죽지에서 편 커다란 검은 날개를 계속 펄럭였다.

“이 새끼는 날개도 있네.”

“이렇게 된 거, 너희들을 모조리 내 양분으로 만들어 주겠다!”

힌스테딘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면서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곳에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양의 응축된 마기가 모였다.

곧 마기들은 마치 에너지 파처럼 일직선의 검은 광선이 되어 로한 일행이 모인 곳으로 발사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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