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이거.”
로한이 찢어진 공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데르툴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 이동 기술이지. 말파스도 이거랑 똑같은 기술을 사용했었고.”
“……!”
“혹시나 하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알아서 여기로 공간 이동을 해 올 줄이야. 덕분에 굳이 정체를 밝히려고 고생할 필요가 없어졌어.”
로한의 말에 유키펠은 낭패감을 느꼈다.
‘망할! 하필 이 타이밍에!’
주변에 데르마들이 감시병 역할로 있기도 해서 안심하고 공간 이동을 하고 르기에를 만나고 온 건데, 이렇게 재수 없게 걸리다니!
그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설마, 네가 니콜라오를 붙잡았나?”
“어. 지금 신성조사단 전체를 붙잡고 조사 중에 있지. 거의 90% 이상이 데르마더라고.”
“……!”
이미 데르마들을 모두 잡은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나!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미리 경고의 메시지를 머릿속으로 보내지 못한 거였나!
‘어떻게 우리의 정체를 알아챈 거지?’
대륙의 어느 누가 천하의 아르베니아 신성조사단이 마족의 하수인이라고 의심하겠는가?
그래서 지금껏 수많은 나라를 조사단 역할로 돌아다녔음에도 단 한 번도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로한이 알아서 대답해 주었다.
“네가 좋아하는 성녀님에게 감사해라. 성녀님께서 테르디아로 출발하기 전부터 너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 이 모든 사태의 시작이니까.”
“!”
유키펠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에텔드리다! 그 망할 년이 어떻게 내 정체를?
“넌 너무 에텔드리다를 무시했어. 에텔드리다는 네가 마기를 한 번만 방심하고 흘려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여인이야. 지금 네가 전력으로 싸워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걸?”
“말도 안 되는 소리!”
유키펠이 발작하듯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쳤다.
“감히 하찮은 인간 소녀 따위가 어떻게 나를 상대로 이길 수 있단 말이냐!”
“…이젠 대놓고 마족이라고 떠벌리고 있네. 포기했냐?”
“난 유키펠이다! 데르툴족 중에서도 가장 강한 최상위 귀족 중 한 명이란 말이다! 크아아아아!!”
곧 왕성 내의 모든 이들의 고막을 찢을 듯한 거대한 함성이 유키펠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동시에 폭발적인 마기를 내뿜으면서 점차 신체 모양이 변하기 시작했다.
전신이 검은 피부로 변했고, 두 팔과 두 다리는 기존보다 두 배는 더 길쭉해졌다.
기다란 양손의 손가락 끝에는 예리한 칼날 같은 긴 손톱이 자라났고, 외계인처럼 변한 얼굴에 박혀 있는 두 눈은 핏빛처럼 붉은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유키펠이 완전히 변신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로한의 한마디였다.
오랜만에 봐도 정말 기분 나쁜 모습이었다. 지구에서는 10년 동안 지겹게 봤던, 데르툴족의 본모습 말이다.
“최소 상위 귀족 이상은 맞는 것 같군. 타지에서 이렇게 제대로 본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걸 보니 말이지.”
데르툴족은 마기를 먹고 사는 존재다. 그들이 사는 데르툴 행성이 기본적으로 마기가 아주 충만한 곳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진화한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마기가 현저히 부족한 여기나 지구 같은 평범한 행성에서 그들은 데르툴 행성에 있을 때처럼 100% 본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페널티를 안고 활동하는 셈이다.
말파스 같은 하급 귀족들은 타지인 이곳에서는 원래 모습으로 변신조차 힘들다. 그 정도로 마기를 모을 수 있는 그릇이 안 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상위 귀족 정도로 마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커야 저렇게 변신이 가능하다.
눈앞의 유키펠처럼 말이다.
“크흐흐흐… 멍청한 놈! 이렇게 변신할 때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니!”
유키펠은 로한을 바라보며 웃었다. 정말 전설 속의 악마가 절로 떠오르는 사악한 미소였다.
“본모습으로 변신한 이상, 이제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설사 드래곤족이 모두 몰려온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며칠 전 레드 드래곤을 직접 때려잡았던 로한의 진심 어린 한마디였다.
“내 본신의 힘을 한번 몸소 체험해 보아라!”
곧 유키펠이 엄청난 속도로 로한을 향해 공격해 왔다.
눈부신 속도로 두 손에 달린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르는 유키펠.
저 손톱에 베이면 날고 긴다 하는 사이보그의 튼튼한 신체도 단번에 뚫린다는 것을 로한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피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체 레기스트륨이 얼마나 튼튼한지 이번 기회에 실험해볼까?’
라는 아주 위험천만한 모험심에 사로잡혔다.
과연, 에드먼 박사가 개발한 지구의 최첨단 물질인 레기스트륨이 데르툴족 본신의 공격도 버틸 수 있을까?
그는 전신에 최대한으로 실드 기능을 활성화한 후, 두 팔을 들어 유키펠의 손톱 공격을 그대로 막아내었다.
까앙!
마치 강철끼리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
“……!”
유키펠의 두 눈이 커졌다.
자신의 공격이 막혔다?
심지어, 무기를 들고 막은 것도 아니고 평범한 인간의 팔뚝 따위로?
‘하찮은 인간 따위가 어떻게?’
유키펠이 순간 충격에 휩싸여 있을 그때.
공격을 막아낸 로한도 속으로 꽤 놀라고 있었다.
‘이걸 막았네?’
어느 정도 방어는 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100% 완벽하게 막아낼 줄은 그도 몰랐다. 심지어 손톱이 닿은 부분에 생채기조차 안 났다.
아마 지구에 있던 로한의 기존 신체였으면 1/4 정도는 움푹 파였을 것이다. 그렇게 공격을 몇 번 막아내고 나면 팔 한쪽이 걸레짝이 되었겠지.
이건 정말, 레기스트륨의 위엄이라고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에드먼,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물질을 개발한 거야?’
당시에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과학자라는 타이틀을 에드먼에게 줘야 하냐 말아야 하냐로 갑론을박이 많았는데, 이런 엄청난 물질을 개발했으면 이제 당당히 그 타이틀을 줘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운이 좋구나!”
곧 충격에서 벗어난 유키펠이 또다시 로한을 공격해 왔다. 로한은 그 공격을 아까 전처럼 팔뚝으로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후 상황은 똑같았다.
유키펠이 일방적으로 공격하면, 로한이 계속 방어하는 태세의 연속이었다. 끝없는 창과 방패의 대결 속에 깡! 깡! 하고 강철 부딪치는 소리만 계속해서 방 안에 울렸다.
몇 초 만에 벌써 50번이 넘는 합이 펼쳐졌다. 그동안 단 한 번의 공격도 유키펠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키펠은 합이 이어질수록 점점 초조해져 갔다.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데르툴 행성 최상위 귀족의 전력을 다하는 공격이, 고작 엘도르 대륙의 하찮은 인간의 맨몸에 계속해서 막히고 있다?
만약 행성으로 돌아가서 다른 동족들에게 이 상황을 그대로 얘기하면, 전부 코웃음 치며 재미없는 농담 하지 말라고 대꾸할 것이다.
그때였다.
방어 일변도였던 로한이, 급격히 태세를 바꿔 자신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문제는 그 한 번의 공격이 유키펠에게 통했다는 것이다.
뻐억!
“컥!”
신음과 함께 반대편 벽으로 날아가 부딪쳐버린 유키펠.
곧바로 벌떡 일어나는 그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망할!’
유키펠은 순간 방심한 자신을 자책했다. 아니, 방심했다고 믿고 싶었다.
사실 방금 그 주먹 속도는, 유키펠이 미리 예상했다 하더라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단 한 방에 그의 체내 마기가 다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위력이라니.
이건 태어날 때부터 최강자 중 한 명으로 살아온 유키펠도 처음 겪어보는 충격이었다.
그때 로한이 말해왔다.
“덕분에 대충 방어 데이터를 확보했다.”
그간 이 레기스트륨 사이보그 신체로 데르툴족과 싸울 기회가 없어서 실전 데이터가 필요했는데, 지금 유키펠과의 공방을 통해 그래도 이 신체가 어느 정도로 단단한지 대충 알게 되었다.
이전에 말파스와 아린의 대결은 너무 일방적이라서 딱히 수집할 정보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말이다.
“이제 공격력 데이터를 수집해야지. 간만에 전투 모드로 변신해볼까?”
로한의 말과 동시에, 머릿속에 들려오는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
[신체를 하이퍼 모드로 변환합니다.]
[하이퍼 모드 레벨 : 1]
[모든 전투 능력치가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평소보다 더 빠르게 에너지원을 각종 전투 능력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목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로한의 온몸이 빠른 속도로 변신을 완료했다.
일단 전신의 피부가 변했다. 인간의 모습에서 마치 로봇처럼 전신이 각진 모습으로 변신했고, 그로 인해 생긴 피부 틈 사이는 체내에 있는 푸른 레기스트륨 성분이 대체했다.
신체의 중앙과 두 손바닥, 그리고 손목 쪽에 둥근 모양으로 레기스트륨 원자로가 생성된 것이 눈에 띄었다. 마치 강철 슈트로 유명한 지구의 영화 속 히어로처럼 말이다.
“……!”
유키펠이 커다란 눈으로 로한을 바라보았다.
외형이 변한 걸 떠나서, 로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력이 변신 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진 것을 느낀 것이다.
이렇게 데르툴처럼 변신해서 강해지는 인간이 있다고? 그런 소리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자식, 설마 인간이 아니었던 건가?’
유키펠이 그렇게 의심하던 때, 로한이 입을 열었다.
“고맙다. 이렇게 변신할 때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어줘서.”
아까 전 유키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로한은, 강렬한 푸른빛을 끊임없이 내뿜고 있는 두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 신체 모드의 위력을 너도 한번 느껴봐라.”
동시에 로한이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유키펠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손목 위로 뻗어난 광선검을 말 그대로 빛과 같은 속도로 유키펠에게 휘둘렀다.
‘빠르다!’
이건 최상위 귀족인 그조차도 도저히 피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간신히 손톱을 들어 방어하기에도 벅찬 수준이었다.
손톱과 광선검이 맞부딪쳤고,
“큭!”
유키펠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자신의 왼손을 확인했다.
깔끔하게 절단된 자신의 다섯 손톱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내 손톱들이 한 방에 잘린다고?’
데르툴족의 손톱은 그 어느 금속보다도 튼튼하다. 이 대륙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이라는 오르하리콘도 이 손톱으로 가볍게 절단할 수 있다고 동족들 사이에서는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저 오라 소드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뭘 이 정도 가지고 놀라?”
로한이 더 놀랄 시간도 주지 않고 연속으로 공격해 왔다.
역시 엄청나게 빠른 속도! 어느새 가슴팍까지 다가온 광선검을 본 유키펠은, 이번에는 그의 왼 팔뚝으로 막아내는 선택을 했다.
물론 그의 손톱보다 피부가 튼튼하지는 않다. 하지만 마기를 최대한으로 끌어낸 상태의 피부라면 다르다. 데르툴족의 피부는 마기가 많이 집중될수록 강도가 엄청나게 튼튼해지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상위 귀족인 유키펠 정도의 마기 양이면, 저 광선검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서걱.
“크악!”
깔끔하게 왼팔이 베이는 고통에 유키펠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무려 그의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짠 마기가 깃들어 있는 팔도 저 광선검을 버텨내지 못했던 것이다.
절단된 팔뚝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그에게,
“좀 제대로 방어해 보라고. 공격력 데이터 좀 더 쌓게!”
로한이 이렇게 외치면서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