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철퇴가 들려 있었다. 이 근처에 있는 기사 마네킹이 쥐고 있던 무기였다.
에텔드리다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을 가진 사람이 강철 침이 촘촘히 난 튼튼한 철퇴를 턱에 휘둘렀으니, 제아무리 초월자급으로 강한 니콜라오라 할지라도 한 방에 기절할 수밖에.
문제는 에텔드리다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퍽! 퍽! 뻑! 빠각!
계속해서 기절한 니콜라오의 온몸을 철퇴로 후려 패는 에텔드리다. 점점 피투성이가 되어가던 니콜라오가 거의 고깃덩어리 직전의 상태로 변한 뒤에야 그녀는 철퇴를 내려놓았다.
이후 후련하게 한숨을 내쉬는 그녀.
“후우….”
“스트레스는 다 푸셨습니까?”
뒤에서 지켜보던 로한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덜 풀렸어요.”
“이젠 자제하십시오. 더 때리다간 진짜 죽습니다.”
“알아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니콜라오를 보며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에텔드리다.
피로 물든 철퇴와 그녀의 하얀 드레스에 튄 핏방울 때문일까? 평상시 자애롭던 성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 누구보다 공포스러운 복수의 여신이 이 자리에 있는 듯했다.
“정말 이자가 마족의 하수인은 맞는 거죠?”
“그걸 저렇게 패고 나서 물어보시는군요.”
“…설마, 아닌 건 아니죠?”
움찔해서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어보는 에텔드리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로한은 피식 웃었다.
“하수인은 맞습니다. 잘 보세요.”
로한은 기절한 니콜라오에게 다가가 살집으로 가득한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에너지원 일부를 푸르가티오 속성으로 변환합니다.]
[정화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상대방을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 도우미의 목소리와 동시에 로한은 푸르가티오를 니콜라오한테 주입시켰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니콜라오의 온몸이 쪼그라들면서 대량의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에 에텔드리다는 충격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곧 니콜라오의 몸이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져 버린 뒤에야 마기 방출은 끝이 났다.
그제야 로한은 손을 뗀 후 설명했다.
“이런 자를 데르마라고 합니다. 마족의 하수인이라는 뜻이죠.”
“데르마…. 그러면, 이자는 마족이 아니라는 소리군요.”
“그렇습니다. 뒤에 있는 데쵸 추기경도 역시 데르마입니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역시 기절해 있는 데쵸 추기경을 밀리오가 꽁꽁 결박하고 있었다.
에텔드리다가 로한한테 물어왔다.
“이걸 어떻게 바로 알아차리실 수 있는 거죠? 전 지금 데쵸 추기경을 봐도 잘 모르겠는데요.”
“저 정도 경지로 올라오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로한은 대충 그렇게 둘러댔다.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데르툴족 감지 시스템을 최대한으로 활성화 중입니다.]
[전신의 피부가 평소보다 10,000% 더 마기를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사이보그 내부 메모리에 자체적으로 내장되어 있는 마기 감지 시스템을 이 세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래도 이들은 마기를 잘 감춘 셈입니다. 버몬드에 비하면요.”
당시 파티에서 버몬드의 마기를 눈치챌 때는 굳이 이 기능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당시 윌리엄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안 들킨다는 자신감이 넘쳐서 그랬었는지, 그는 마기 조절을 완벽하게 하지 않은 상태로 로한 등과 조우했었다.
사실 버몬드가 매우 허술한 거고, 눈앞의 니콜라오와 데쵸처럼 쉽게 눈치를 못 채는 게 정상이긴 하다.
“이제 소다노 추기경만 조사하면 되겠군요. 근데, 지금 방 안에 없죠?”
“네. 지금 방 안을 조사해 봤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침대에도 눕지 않은 것이,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밖으로 나간 듯합니다.”
미리 소다노의 방을 찾아갔던 밀리오가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소다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는 지금 아무도 모르는 비밀 은신처에서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르기에. 어떻게 지내고 있나?”
정면의 미남자에게 묻는 소다노 추기경. 누가 봐도 아르베니아 신관으로 보일 법한 중년의 외모로 변한 그에게 르기에가 미소로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겁니까, 유키펠?”
유키펠. 데르툴족인 소다노의 본명이었다.
“당연한 거 아니겠나? 천하의 르기에가 어떤 식으로 작전을 펼치고 있는지 안 궁금해할 데르툴이 어디 있겠어?”
“후후후…. 천천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말파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느리더라도 확실한 길을 택했죠.”
“너무 천천히 하면 위험할 텐데. 주인님이 일어서실 날이 그리 머지않았어.”
“천천히 가도 그때까진 무조건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여기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텐데요?”
르기에의 말에 유키펠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르기에와 더 가까이서 시선을 마주치며 그가 말했다.
“제안을 하나 하러 왔다.”
“어떤 제안이죠?”
“우리 서로 손을 잡는 게 어떤가?”
와인 잔을 집어 들려던 르기에의 행동이 갑자기 정지되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야. 서로가 서로의 국가 정복을 도와주자고. 지금 아르베니아에서의 내 위치면, 너의 계획을 훨씬 빠르게 당겨줄 수 있어. 테르디아 따위의 소국은 금방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난 아직 당신을 도와줄 세력이 없는데요.”
“천하의 르기에가 도와주는 것만큼 든든한 게 세상에 어디 있겠나, 응?”
“후후후….”
웃으면서 레드 와인이 담긴 잔을 입에 가져가는 르기에.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신의 말에 담긴 진짜 의미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즉, 당신 ‘혼자’ 아르베니아를 정복하게끔 저보고 도와달라는 소리 아닙니까?”
“알면 얘기가 쉽겠군. 어때? 내 손을 잡겠나?”
“주인님과 상의가 된 이야기입니까?”
르기에의 물음에 유키펠은 말이 없어졌다. 그 모습에 르기에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당연히 상의했을 리가 없겠지요. 주인님께서 상위 귀족 간의 상잔을 허락하실 리가 없을 테니까요.”
“너만 묵인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거절하겠습니다.”
르기에는 단칼에 거절했다.
“주인님과 상의하고 다시 찾아오십시오. 그러면 기꺼이 당신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곧 이곳은 침묵으로 뒤덮였다.
르기에도, 그리고 유키펠도 알고 있다. 이후 유키펠이 주인님과 상의할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이에 대해 말을 꺼내는 순간, 유키펠은 주인님의 분노를 사 바로 소멸될 것이 뻔하니까.
말없이 르기에를 쳐다보던 유키펠이, 곧 낮은 목소리로 말해왔다.
“그러면 난 지금 너를 죽여야 한다.”
동시에 유키펠의 온몸에서 폭발적으로 마기가 뻗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르기에의 전신이 그의 마기에 갇혀버렸다.
숨 막힐 듯이 강력한 마기의 압박에도 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여전히 평소와 같은 표정과 말투로 유키펠에게 되묻는 걸 보면 말이다.
“왜 날 죽여야 하죠?”
“네가 이 사실을 다른 동족들에게 퍼뜨릴 수도 있으니까.”
“후후후… 그건 또 겁이 나시나 보죠?”
“지금 선택해라. 내 손을 잡겠나, 아니면 지금 소멸되겠나?”
마지막으로 묻는 유키펠. 하지만 르기에의 입에 걸린 미소는 여전했다.
“또 다른 선택지가 있지 않습니까?”
“없을 텐데.”
“제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
눈이 커진 유키펠을 향해 르기에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 르기에의 모든 걸 걸고 당신께 약속하죠. 오늘 당신에게 들은 이야기는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동시에 르기에의 온몸이 까만 무언가로 뒤덮였다가 바로 사라졌다. 데르툴족 중 최상위 귀족만이 할 수 있는 ‘카인의 맹세’를 한 것이다.
이제 르기에는 약속을 깨는 순간 카인의 저주에 의해 바로 소멸되고 말 것이다.
맹세를 들은 유키펠은 바로 뿜어내던 마기를 다시 거두었다.
“굳이 카인의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이렇게 안 하면 바로 나를 죽이려고 했을 게 아닙니까? 난 이런 외지에서까지 동족과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고 싶진 않습니다. 지금은 하나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시점이라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유키펠 님.”
르기에의 마지막 문장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유키펠도 바로 눈치를 채고는 그를 잠시 말없이 쳐다보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 다 했으니 이만 가보지.”
“안녕히 가십시오, 유키펠. 그리고 항상 조심하십시오. 오늘 얘기한 당신의 목표는 될 수 있는 한 자제해 주시고요.”
“하! 천하의 르기에가 오지랖을 다 부리는 건가? 재미있군그래.”
한껏 비웃어준 유키펠은 바로 정면의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공간이 다시 닫힌 후 르기에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멍청한 놈. 주인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주인님께서 괜히 아르베니아에 동족을 두 명이나 보낸 것이 아니다. 그만큼 정복하기 힘든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힘을 합치진 못할망정, 동족을 제거한 후 자신이 모든 권력을 다 먹으려고 들어? 나무만 보고 숲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정말 근시안적인 판단이다.
‘저런 놈은 굳이 내가 곤란하게 만들 필요도 없어. 말파스처럼 알아서 자멸할 게 뻔하다.’
엘도르 대륙은 저렇게 한 나라의 정복이 완료되기 전에 본인의 과욕을 부리는 게 가능할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다.
천 년 전 전력을 다해 쳐들어왔던 동족들이 비참하게 패퇴했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안다.
그리고 천 년 전에도 유키펠처럼 나대는 놈들은 항상 최후가 안 좋았다.
공간 이동을 통해 유키펠이 돌아온 장소는 테르디아 왕성에 마련된 그의 특실이었다.
특실에 발을 디디는 순간,
“……!”
갑자기 온몸의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에 그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
이 방 안에 누가 있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이 방 바깥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아까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뭐가 달라진 걸까? 그는 바로 눈치챘다.
‘데르마들의 기운이 안 느껴진다!’
그랬다. 그가 조종하는 니콜라오, 데쵸 등의 데르마들의 마기가 원래대로라면 양옆 방에서 느껴져야 하는데, 지금은 아니다.
혹시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은 아닐까? 해서, 그는 속으로 그들을 불러보았다.
[니콜라오! 어디 갔느냐?]
[데쵸! 데쵸! 대답해라! 데쵸!]
하지만 아무리 속으로 외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혹시나, 그의 데르마들이 정체를 발각당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바로 공간을 찢어서 일단 이 장소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다시 아공간을 열고 그 안으로 몸을 집어넣으려던 유키펠.
하지만.
퍼억!
복부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빠른 속도로 옆벽으로 날아갔다.
쿵! 하고 벽에 부딪친 유키펠은 바로 벌떡 일어나 정면을 쳐다보았다.
“너는…!”
“알아서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맙다.”
찢어진 공간 앞에 서서 그를 향해 말하는 젊은 남성.
로한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