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놀란 아르베니아 신관들을 향해 에텔드리다가 천천히, 하지만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신관들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을 했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성녀, 딸꾹! 님을 뵙습니다….”
일부는 술에 취해 딸꾹질을 해댔고, 일부는 살짝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에텔드리다는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방탕하게 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어지러운 식탁과, 한 명도 빠짐없이 술기운에 벌게진 얼굴. 그리고 그들의 양옆에서 술병을 들고 접대하고 있는 테르디아의 하녀들.
‘썩어빠진 늙은이들.’
에텔드리다는 경멸의 눈빛으로 그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신관들은 양심은 남아 있었는지, 움찔하며 대부분 눈빛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오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그래서, 뜬금없이 두 남녀 간의 눈싸움이 파티장에 펼쳐졌다.
‘시건방진 꼬맹이 새끼가…!’
‘역겨운 호색한 돼지.’
불꽃이 튈 것 같은 눈싸움에서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에텔드리다였다. 그녀는 저 니콜라오의 시선을 오래 마주 보는 것조차 역겨웠다.
그녀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하는 곳에는,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절제된 몸짓으로 목례를 하는 윌리엄 공작이 있었다.
에텔드리다는 다시 그 특유의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뵙고 싶은 분들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누굴 찾으십니까? 국왕 폐하는 방금 전 파티장을 떠나셨습니다.”
“전 로한 공작과 밀리오 님을 뵈러 왔습니다.”
“일단 로한 공작은 저기 있습니다. 불러 드릴까요?”
“아뇨,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여기로 로한을 불러 오려는 윌리엄을 제지한 후 에텔드리다는 파티장 구석에 있는 로한에게로 다가갔다.
“아,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이 구석에서 뭐 하고 계세요?”
“다른 귀족분들을 전체적으로 통솔하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로한의 주위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많은 귀족들이 몰려 있었다. 그중에도 젊은 여성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 에텔드리다의 눈에 들어왔다.
로한이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음….”
에텔드리다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시선에 고민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오늘 저희를 보호해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당시에 경황이 없어 저를 제외한 다른 신관들이 사과를 못 한 것 같아서요.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또 감사해하실 필요는…. 너무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마음에 걸려서요. 근데 혹시, 밀리오 대신관은 파티장에 없나요? 그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요.”
“지금 잠깐 바람을 쐬러 정원에 나가 있습니다.”
로한이 바로 옆의 발코니를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그럼….”
에텔드리다는 인사와 함께 곧장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로한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단순히 인사하러 여기까지 우리를 찾아왔다고?’
솔직히 감사의 인사는 이미 충분하게 받은 상태다. 아까 파티가 열리기 전, 불참석 의사를 밝힌 뒤 자신한테 또 한 번 감사해하던 이가 바로 에텔드리다 아니었던가.
굳이 불참석 의사를 번복하면서까지 다시 인사하러 오기에는 너무 과한 것 아닌가?
‘흠….’
계속 그녀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로한.
그러자 주변 여성 귀족들의 시선도 점점 바뀌어갔다.
‘왜 저년의 뒤태를 자꾸 쳐다보는 거야?’
‘날 보라고! 날! 로한 오빠, 내가 있잖아요!’
‘저년은 기도나 처할 것이지 왜 갑자기 나타나서 공작님의 시선을 빼앗고 지랄이야?’
여성들의 눈에 타오르는 질투의 불꽃은 로한이 에텔드리다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시간이 오래 지속될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곧 에텔드리다가 완전히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면, 몇몇은 타오르다 못해 아예 대놓고 폭발해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는 또 한 명이 있었다. 니콜라오였다.
그는 바로 옆의 말단 신관에게 조용히 지시했다.
“너는 즉시 성녀님의 뒤를 쫓아가서 그녀를 보호하도록 해라.”
“네.”
해당 신관은 빠른 속도로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매우 은밀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말이다. 최소 각성자 이상의 경지로 보이는 몸놀림이었다.
니콜라오는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여기를 온 건지 알아봐야겠어.’
지금 그가 보낸 신관은 말로만 보호 목적이었지, 사실상 감시 목적이다. 이제 그는 밖에서 에텔드리다가 하는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후 니콜라오한테 보고할 것이다.
‘갑자기 파티장에 들른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누구보다 에텔드리다와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인 그는 지금, 그 누구보다 그녀의 행보를 의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다양한 눈빛들을 받으면서 정원 밖으로 이동한 에텔드리다.
정원에도 꽤 적지 않은 숫자의 귀족들이 있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에텔드리다가 곁을 지나가도 아무도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너무 어두운 밤이라 그녀의 정체를 바로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점. 두 번째, 이성 간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그녀가 지나치는지 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본래 대규모 파티가 열렸을 때 파티장 앞 어두운 정원만큼 귀족들 간에 사랑이 싹트기 좋은 장소는 없다. 지금 여기 있는 이들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에텔드리다는 조용히 그들의 곁을 지나치면서 계속 밀리오를 찾아 헤맸다.
“밀리오 님.”
잠시 후, 정원의 제일 구석에 서 있던 밀리오를 발견한 에텔드리다가 그를 불렀다.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밀리오가 화들짝 놀라며 공손히 합장을 했다.
“엇, 성녀님! 파누엘의 미천한 종이 성녀님을 뵙습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아, 그게….”
밀리오는 민망한 얼굴로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원래 이런 사람들 많은 자리를 많이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장소를 찾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시면….”
“후훗. 알겠어요.”
조용히 웃는 에텔드리다. 이번엔 밀리오가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파티장에는 안 오신다고 아까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밀리오 님을 뵙기 위해 잠시 들렀습니다.”
“네?”
무슨 소리냐는 표정의 밀리오를 향해 에텔드리다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을수록 서로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밀리오는 극도로 당황했다.
“저, 서, 성녀님. 그, 테르디아의 신관들은 남녀 간에 너무 가깝게 마주 보면 안 된다는 규칙이…!”
“아르베니아에는 그런 규칙 없어요.”
“네?! 하, 하지만 여긴 테르디아인데…. 어어… 잠, 잠깐만요!”
어느새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에텔드리다. 진짜, 딱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입술이 부딪칠 수도 있는 거리였다.
밀리오는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최대한 뒤로 몸을 젖히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미 정원의 가장 구석 자리에 있는지라,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공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에텔드리다의 붉은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그 순간, 밀리오는 직감했다. 이 상황… 설마?
그건 안 된다! 나는 인생을 여신님께 바친, 평생 홀로 살아야 하는 여신의 종이란 말이다!
밀리오에게는 인생 최대의 위기 순간이 찾아온 셈이다. 만약 말파스가 자신의 목에 칼을 대고 있더라도 이보다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성녀님! 이러시면 저뿐만 아니라 성녀님마저 큰 곤란에 빠지게 됩니다!”
“마족을 생포해 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하러 왔습니다.”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벙찐 밀리오. 그제야 그는, 어느새 에텔드리다가 뒤로 한참 물러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러선 그녀가 공손하게 합장을 했다.
“아르베니아의 모든 신관들을 대표해서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네? 아, 네… 아, 아니! 신의 종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실수까지 하는 밀리오에게, 에텔드리다는 태연히 작별의 인사를 했다.
“그럼 전 이만.”
이후 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 미련이 없어 보이는, 진짜로 감사의 인사만 하러 온 사람처럼 말이다.
잠시 후, 완전히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밀리오는 그제야 긴장의 끈을 확 놓아버렸다.
“후우! 여신님께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을 뻔했어….”
정원의 벽에 간신히 기댄 채로, 아직도 격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최대한 안정시키려 계속 노력하는 밀리오.
‘걱정했던 일이 안 일어나서 다행이야. 그랬으면 정말 아린 님을 볼 낯이 아예 없어졌을 거야.’
그가 속으로 이렇게 안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머릿속에 아린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아린은 알고 있을까?
그때, 파티장 안에서는.
“…그리고 대화는 끝났습니다.”
니콜라오가 에텔드리다에 관한 신관의 보고를 귀엣말로 받고 있었다.
다 들은 니콜라오가 물었다.
“그냥 단순히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고?”
“네. 이후 바로 파티장을 나가셨습니다.”
“흠… 알았다.”
곧 니콜라오는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밀리오와 입술이 닿기 직전까지 가까이 붙었다라…. 이거, 아주 좋은 트집거리가 생겼어.’
방금 전 에텔드리다와 밀리오, 둘 사이에 아무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젠 상관없었다. 이미 그녀는 니콜라오한테 제대로 된 약점을 잡혀버린 셈이다.
성녀 에텔드리다가, 그 소문의 밀리오 대신관과 사랑에 빠지다!
이것만큼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루머가 있을까?
‘잘하면 이걸로 테르디아 대신전의 금고를 더 털어먹을 수도 있겠군. 흐흐흐!’
내일 이 염문설에 매우 곤란해할 에텔드리다와 밀리오의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니콜라오였다.
“자, 성녀님도 가셨으니 다들 또 한잔해야 하지 않겠나!”
다시 기분이 좋아진 그는 모두에게 외치며 와인 잔을 높게 들어 올렸다.
파티는 새벽까지 계속 이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파티장에 남아 있는 인원들은 점점 줄어들어 갔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새로운 인연과 다른 곳에서 또 만남을 갖기 위해서, 혹은 내일 업무를 위한 컨디션 관리를 위해서 하나둘씩 파티장을 빠져나가는 귀족들의 모습.
로한은 시계를 보며 대략적으로 예상했다.
‘늦어도 한 시간 정도 뒤면 파티를 끝내도 되겠군.’
그의 시선이 신성조사단 쪽 테이블로 향했다. 이미 대부분이 만취한 상태였고, 일부는 완전히 취해서 테이블에 엎드려 뻗어 있는 신관들도 있었다.
슬슬 저 신관들한테 어떻게 파티 마무리를 설득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그때.
“저기.”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남성의 목소리.
밀리오였다.
“잠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시간 되십니까?”
“네.”
아까처럼 바쁜 상황도 아니고 하니, 잠깐 단둘이 얘기할 수 있는 시간 정도는 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밀리오인데.
파티장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이동한 둘.
밀리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아까 성녀님이 오셨을 때 정원에서 잠깐 인사를 나눴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보고 밀리오 님의 위치를 물으시더군요.”
“아, 그래서 제가 있는 곳을 찾아오셨던 거군요. 아무튼 그때, 성녀님이 제 주머니에 몰래 이걸 넣어 주셨습니다.”
밀리오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내서 로한에게 내밀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로한은 받은 손수건을 펼쳐 보았다.
그러자, 안에 어떤 글씨가 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로한은 바로 읽어보았다.
- 새벽 2시에 왕궁 앞, 벨타디아 남쪽 제일 가까이 있는 여관 501호로 로한 공작과 와주세요. 아르베니아에 있는 마족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