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곧 니콜라오의 분노한 외침이 실내를 가득 울렸다.
“분명 완벽하게 마족을 억제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그, 입마개를 제거해서 봉인이 풀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고작 입마개를 제거했다고 자폭을 해? 그 정도로 허술하게 봉인해 뒀다는 소리 아니냐! 지금 자칫하면 성녀님이 크게 다치실 뻔했어! 알아?!”
교황의 변명에 오히려 더 목소리가 커지는 니콜라오. 곧 다른 신성조사관들도 좋은 트집거리를 잡았다는 듯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네! 이건 디바인 마크를 제대로 안 그려서 일어난 현상이야!”
“혹시 일부러 자폭시킨 거 아닌가? 우리를 모두 죽이기 위해서 말이야!”
“충분히 일리 있는 의혹일세! 지금 당장 이곳의 이단 심판관들을 심문해야…!”
계속되는 신성조사관들의 추궁에 교황을 비롯한 테르디아 관리들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던 그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그만하세요.”
에텔드리다가 한마디로 장내를 조용히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아무도 다치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마족이 이런 식으로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모두들 사전에 예상하지 않았나요?”
“그래도 어떻게 진짜 자폭하도록 내버려 둡니까? 이건 우리를 음해하기 위해 미리 손을 썼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그렇다기엔 지금 우리 모두를 보호해준 건 로한 공작님의 실드 마법입니다. 만약 니콜라오 님의 의견이 맞다면, 왜 그가 실드 마법을 우리한테까지 사용했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방금 테르디아 사람들만 보호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논리정연한 그녀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니콜라오. 에텔드리다는 결정타를 날렸다.
“테아이엘 여신님은 이유 없이 타인을 곡해하고 핍박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세요. 오히려 우리는 저들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빚이 있습니다.”
‘크윽…!’
니콜라오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들이 섬기는 여신의 말씀까지 들어가며 저렇게 말하니, 정말 분하게도 더 이상 반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순간 불끈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년이 진짜 사사건건 태클을 걸어 대는구나!’
평소대로라면 어떻게든 억지로 계속 트집을 잡아서 테르디아의 국고를 더 많이 탈탈 털었어야 했는데, 저년이 막아서는 바람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 테르디아 놈들에게 감사의 인사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그 소문의 로한 공작이셨군요. 저희의 신변을 보호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겸손하게 대답하는 로한에게 에텔드리다는 계속 말했다.
“이제야 마족을 어떻게 생포했는지 알겠습니다. 이렇게 크고 튼튼한 실드는 살면서 처음 보았어요. 이 정도로 당신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군요.”
“그렇게 저를 봐주시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둘.
그때, 구석에서 그 모습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이가 있었다.
레이먼드였다.
‘…그렇게 자폭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주인님.’
[흠… 아쉽군. 최소 한두 명 이상은 다쳤어야 테르디아 놈들이 더 크게 곤란해졌을 텐데.]
르기에가 머릿속으로 말을 이어왔다.
[어쩔 수 없지. 알았다. 앞으로는 더 이상 무리하지 말고, 너의 정체를 들키지 않는 데에만 최대한 집중하도록 해라. 조사단의 행적을 계속해서 보고하는 건 잊지 않도록.]
‘네, 주인님.’
그렇게 둘은 대화를 마쳤다.
대화를 마친 르기에는 본인의 비밀 아지트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번에도 로한인가?’
참고로, 방금 일으킨 말파스의 자폭 공격은 기존 데르마의 그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무엇보다 자폭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밀리오 정도의 초월자도 바로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근데 거기에 로한이 반응했다? 심지어 모두를 보호할 정도로 큰 실드 마법을 바로 사용했다고?
이건 반사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미리 자폭을 눈치챘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 바로 마법 스크롤을 찢는 게 아닌 이상, 마법을 아무리 빨리 사용해도 캐스팅하는 기본적인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주인님의 말이 정말이었군. 당시 말파스의 계획이 어그러질 때마다 로한이 항상 있었다고 했는데 말이지.’
사실상 이번이 르기에의 첫 번째 방해 작전이었는데, 그것마저 로한에 의해 완벽히 실패해 버렸다라….
이처럼 완벽한 타이밍의 계략은 실패하기 쉽지 않은데 말이다.
‘일단 앞으로 모든 작전은 로한이 없는 상황에서 진행해야겠어.’
최고의 방법은 역시, 위험인물이 없을 때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테르디아의 모든 인물들을 보호하기에는, 로한이라는 위험인물은 고작 단 한 명뿐이다.
일행들은 바로 다음 심문 대상, 버몬드가 갇힌 장소로 이동했다.
온몸이 앙상하게 말라 거의 반송장 수준으로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버몬드.
이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단 심판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세밀하고 완벽하게 버몬드를 구속하고 있는 기구들을 다시 한번 점검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 말파스의 자폭을 겪은 직후라 어쩔 수가 없었다. 여기서 또 무슨 일이 터진다? 그땐 단순히 트집을 잡히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 다행히도 버몬드와의 심문 과정은 무난했다. 딱히 돌발적인 상황을 걱정할 필요 없이 편하게 대화로 심문이 이어졌던 것이다.
심문 내내 버몬드의 대답은 일관되었다.
“난 모른다! 모두 말파스가 시킨 일이다!”
“생체 재료? 그것도 말파스가 하라 해서 한 것뿐이다! 안 그랬으면 내가 재료가 됐을 거야!”
“난 그저 말파스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무한 말파스 방패를 내세우며 강력하게 억울함을 주장하는 버몬드.
곧 심문은 완료되었다. 생각보다 버몬드의 대답을 유도하는 게 너무 쉬워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결론을 내리면, 버몬드는 마족 말파스의 하수인으로서 그가 지시한 모든 악행을 대신 저질렀다. 그리고 최종 목적은 테르디아의 전권을 손에 넣는 것이었고요.”
“아니다! 난 권력이 목적이 아니라… 으읍, 읍!”
항변하려던 버몬드의 입은 바로 이단 심판관에 의해 다시 봉인되었다.
에텔드리다가 말을 이었다.
“이번 사건은 비단 테르디아에만 국한해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국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어요. 어쩌면, 아르베니아에서도요.”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만큼 모든 국가를 의심해야 한다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그러니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진짜 국무원장님이 마족의 하수인이실 리가 없잖아요?”
“무, 물론입니다. 크흠, 흠.”
순간 목소리가 너무 높아졌다는 것을 의식한 니콜라오가 다급히 헛기침을 했다.
“이제 나가죠. 저 하수인과 같은 공간에 1초라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군요.”
“버몬드의 처분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윌리엄의 물음에 에텔드리다는 냉정한 대답을 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처형하세요. 그 누구보다 죄가 큰 인물이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본보기를 보여주시는 게 옳다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이로써 버몬드의 미래는 결정되었다. 그는 신성조사단이 떠난 직후, 테르디아의 모든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을 당할 것이다.
물론, 죄목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목을 베어내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은 매우 적다.
한때 테르디아의 실권을 장악할 뻔했던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은, 곧 가장 굴욕적이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예정이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그리고, 500주년 파티 이후 다시 한번 테르디아 왕실이 직접 주최하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지난번 파티가 테르디아의 모두가 즐기는 축제의 자리였다면, 이번에는 오로지 아르베니아의 신관들만 즐기는 자리였다. 왁자지껄 떠들면서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는 이들은 오로지 니콜라스 등의 신관들뿐이었다.
“오오, 아주 맛있는 와인이군! 와인은 여신의 핏방울로 만들어졌기에 마음껏 마셔도 되지!”
“여기 여신의 주식인 빵이 떨어졌구나.”
“여신께서는 우리들에게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자신을 섬기라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육류 섭취를 허용하셨네. 그러니 어떤 종류의 고기 요리를 가져와도 되네!”
온갖 변명을 갖다 붙이면서 식탁에 차려진 모든 음식들을 마음껏 먹고 마시는 그들. 그래서 음식을 서빙하는 하녀들은 계속해서 정신없이 만찬장과 주방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그래도 그녀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렇게 바쁜 게 나았다.
“여기 새끼 돼지로 요리한 코치니요입니다.”
“오오, 그래! 너는 잠시 여기에 앉아보거라.”
“네? 네….”
“굉장히 아름답구나.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하여 여신님께서 축복을 내리신 모양이야. 허허허!”
“가, 감사합니다….”
일부 선택(이라 쓰고 재수 옴 붙었다고 읽는다)을 받은 하녀들은 신관들 옆에 앉아서 강제로 술 접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양옆에 여성을 강제로 앉힌 상태로, 파티장이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며 고성방가를 하는 늙은이들의 모습.
지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장님만을 위한 회식 장면’ 그 자체였다. 저 모습을 보고 누가 고귀한 아르베니아의 신관이라 생각할까?
“하하하. 맞습니다, 신관님!”
“정말 너무 웃기네요! 하하하!”
그리고 옆에서 마치 부하 사원처럼 최대한 신관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테르디아의 주요 대신들.
이것이 바로 약소국에서 태어난 비애가 아닐까 싶었다.
“꺼윽! 그나저나, 저기는 무슨 일인가?”
한껏 술기운이 오른 니콜라오가, 파티장 한쪽 구석에 몰려 있는 여성 귀족들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옆에 앉아 있던 신관이 대답했다.
“로한 공작이 있는 자리입니다. 아까부터 저자가 움직이는 장소마다 계속 저렇게 여성 귀족들이 몰려다니더군요.”
“왜?”
“아마도, 잘생겨서 그런 것 아닐까요?”
자세히 보니, 진짜로 저기 있는 여성들 모두가 오로지 로한만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로한은 그들의 대화를 모두 받아주면서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건 어느 나라 파티장에 가더라도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젊은 미남 귀족에게 수많은 귀족 영애들이 몰려가서 추파를 던지는 모습.
가끔 남녀가 바뀐 상황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적긴 하다.
갑자기 니콜라오의 표정이 매우 불쾌해졌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린가? 자신들을 위한 파티 아닌가? 근데 왜 여성들이 우리가 아닌 다른 이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단 말인가?
“지금 로한 공작을 당장 여기로…!”
니콜라오는 바로 큰 목소리로 로한을 자신의 앞에 소환시키려 했다.
하지만 입구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관리의 목소리가 한발 더 빨랐다.
“아르베니아의 성녀, 에텔드리다 님이 입장하십니다!”
“……!”
니콜라오는 화들짝 놀랬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관리들이 놀란 표정으로 입구를 돌아보고 있었다.
입구를 통과해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는 아름다운 미녀. 하얀색의 수수한 드레스가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저 여인은 분명 에텔드리다가 맞았다.
‘아니, 저년이 이 파티장에는 왜?’
평상시 이런 파티 자리를 혐오하는 걸로 유명한 에텔드리다다. 당장 오늘도 파티장에 본인은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근데 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