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잠시 후.
테르디아의 모든 주요 관리들과 왕실 기사단이 워프진 앞에 도열한 상태로 신성조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는 필리프 국왕과 크리스티나 왕비가 긴장된 표정으로 워프진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의 바로 뒤에는 로한 공작과 윌리엄 공작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후….”
누군지 모르는 한 관리의 긴장된 한숨이 작게 귓가에 들려올 그때.
워프진 전체가 갑자기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모두가 차렷 자세로 섰다.
곧 빛이 사라진 뒤, 수많은 사람들이 중앙에 소환되었다. 그들은 모두 하얀색을 바탕으로 한 세련되고 깔끔한 신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도열해 있던 이들은 모두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유일하게 숙이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이는 국왕, 필리프였다.
“아르베니아의 신관들이여, 다들 어서 오시오. 이동하는 데 불편함은 없으셨소?”
“편의를 신경 써주신 덕분에 빠르고 쉽게 워프해 올 수 있었습니다.”
대답은 일행들 중 유일한 여성이 해왔다.
“워프진을 이용하게끔 허락해주신 테르디아의 국왕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의 인사를 하는 그녀를, 로한은 시선을 흘끗 들어 쳐다보았다.
일행 평균 나이가 최소 40 이상은 되어 보이는 중년들뿐이라 그런지, 가운데 유일하게 서 있는 아름다운 여성의 존재가 더더욱 눈에 띄었다.
벽화에서나 보던 미래의 여신, 테아이엘이 그대로 환생한 것같이 똑 닮은 저 여인이 바로 성녀, 에텔드리다였다.
그녀에 대한 로한의 첫인상은 바로,
‘강하군.’
이것이었다.
에텔드리다의 온몸에 퍼지고 있는 은은한 신성력. 그것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저 기분 좋은 따스한 기운으로만 느껴질 법하다.
하지만 로한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느껴지는 저 신성력의 밀도나 강도가, 어지간한 초월자들 이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저 정도면 최소 라가스님과 동등한 수준이다.’
바로 S급 헌터, 라가스가 비교 대상으로 떠오를 정도로 에텔드리다는 강했다. 역시, 대륙의 유일한 성녀는 그저 외모만 예쁘다고 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니콜라오 님 아니십니까?”
그때 들려오는 필리프의 놀란 목소리.
그가 성녀 옆의 늙은 신관을 향해 공손히 합장을 하고 있었다.
“아르베니아의 국무원장님께서 직접 방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모두 여신님의 뜻입니다.”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필리프와는 달리 태연하게 단답으로 대답하는 니콜라오의 모습. 이 장면만 봐도 둘의 갑을 관계가 확실하게 보였다.
실제로 아르베니아의 2인자, 니콜라오 앞에서 갑이 될 수 있는 타 국가의 존재는 대륙 내에서 한 손 안에 꼽힌다. 기껏해야 동쪽 대륙의 패자, 오스크만의 황제 정도밖에 없지 않을까?
“자, 여기 오래 서 있는 것도 좀 그러니 다들 이동합시다.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한 게 정말로 많소이다. 그렇지?”
필리프가 시선을 옆의 레이먼드에게 돌렸다. 이번에 고든을 대신해서 스케줄 관리 총괄을 맡게 된 후임 레이먼드가 바로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폐하. 테르디아의 모든 귀족 및 관리들이 왕성에서 모여 신관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 뵙기 위해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또, 그들이 신관 여러분들을 준비한 선물들도 마련되어 있사옵니다.”
“오….”
신관들이 선물이라는 단어에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명색이 신성조사관이라는 사람들이 대놓고 물욕을 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에도, 여기 있는 테르디아 관리들 누구도 그 모습에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괜히 나섰다가는 그 순간 테르디아 전체가 서쪽 패국, 아르베니아에게 찍혀버릴 테니까 말이다.
필리프가 접대용 미소를 가득 지으면서 입구 쪽으로 신관들을 안내했다.
“모두들 어서 이쪽으로….”
“마족부터 보겠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성녀, 에텔드리다의 한마디.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일단 신성조사단의 임무가 가장 우선입니다. 우리를 마족이 갇혀 있는 장소로 안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성녀님. 오자마자 그리 급하게 만나러 가지 않아도….”
살짝 당황한 니콜라오가 그녀를 만류하려 했지만, 에텔드리다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우리는 신성조사단입니다. 여기에 온 목적을 잊지 마십시오. 조사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마족이라는 걸 잊으셨나요?”
“아니, 잊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먼저 생각하신다면, 당연히 마족을 보러 가는 게 우선 아닌가요?”
“…….”
니콜라오의 말문이 순간 막히자, 에텔드리다는 필리프한테 바로 말했다.
“마족에게 우리를 데려가 주십시오.”
“아, 알겠소이다.”
필리프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 에텔드리다의 목소리는 듣기에는 그저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절대로 반항할 수 없게끔 만드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결국 일정은 변경되었다. 필리프와 테르디아 관리들은 먼저 대신전 지하에 있는 이단 심문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뒤따르는 신성조사단의 표정은 굉장히 좋지 않았다. 선물을 대접받을 생각에 싱글벙글하다가 갑자기 일부터 하기 위해 끌려가고 있으니 당연히 안 좋을 수밖에.
특히 니콜라오의 표정이 볼 만했다.
‘이년이 진짜 미친 건가!’
해외 조사단에 처음 참가하는 신참 주제에 지가 뭔데 천하의 신성조사단들 스케줄을 마음대로 바꾼단 말인가? 하물며 아르베니아의 2인자인 자신조차 가만히 있거늘, 이제 성인식을 막 치른 어린 꼬맹이 새끼가!
‘이번 조사단 일정 내에 반드시 그 건방진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니콜라오는 조용히 속으로 이를 빠드득 갈았다.
대신전으로 이동한 이들을 맞이한 두 명의 남성이 있었다.
교황인 스테파노와 대신관의 대표, 폰티펙스 밀리오였다.
“남쪽에서 오신 여신의 종들을 환영합니다. 저는 밀리오라 합니다.”
“아니, 왜 벌써 여기를 오셨습니까? 마족 심문은 늦은 오후에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차분하게 합장하는 밀리오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스테파노의 모습은 너무 대조되어 보였다.
에텔드리다가 대답했다.
“마족을 직접 보기 위해 먼저 여기부터 들렀습니다. 그런데, 밀리오 님이라고 하셨나요?”
“맞습니다, 성녀님.”
“이번에 마족을 직접 생포한 분이시군요.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여신의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에텔드리다는 교황보다 오히려 밀리오와 더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교황은 한참 동안 어색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만 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마족을 생포한 이후, 테르디아를 대표하는 신관으로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는 본인이 아닌 밀리오기 때문이었다. 현재 대륙인들이 교황인 그의 이름은 기억 못 해도, 밀리오의 이름은 전부 알고 있는 수준이다.
한참을 인사한 뒤에야 에텔드리다는 교황에게도 말을 걸었다.
“마족에게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단순히 안내를 부탁하는 한마디뿐이었지만, 그래도 교황 입장에서는 반가웠다. 상대가 다름 아닌 성녀 아닌가.
“아, 이쪽으로.”
곧 스테파노의 안내를 받아 일행들은 말파스가 갇혀 있는 특별실로 이동했다.
3중 마법 철창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신성조사단들은,
“세상에…!”
“저렇게 아직도 살아 있다고?!”
머리만 남은 채 살아 있는 말파스의 존재에 모두 경악했다.
놀라지 않은 이는 단 두 명. 니콜라오와 에텔드리다뿐이었다.
“정말 마족이 맞군요.”
에텔드리다는 말파스를 보자마자 확신했다. 저 머리통에서 풍기고 있는 마기는, 최근 그녀가 겪었던 마족의 마기와 완전히 똑같은 성질이었다.
그때 유일하게 말파스를 보며 의아해하는 한 명이 있었으니, 바로 로한이었다.
‘기존에 느껴지던 마기랑 다른데?’
로한 입장에서는 말파스를 20일 정도 만에 다시 보는 셈이다. 근데, 그때 순수하고 강렬했던 마기는 확실히 아니었다. 약간 이전보다 탁한 느낌?
일단 지구에서 10년간 지겹게 겪었던 그 데르툴의 마기는 아니다.
‘그리고 눈빛은 왜 저러지?’
무엇보다, 데르툴족의 눈빛이 저렇게 흐리멍덩할 리가 없는데?
지구에서 수많은 데르툴족의 머리를 베었던 로한은 알고 있다. 저놈들은 하나같이 머리만 남아 있어도 눈빛만큼은 여전히 독기로 가득한 것을.
이렇게까지 생각하니, 갑자기 불안감이 들었다.
‘한번 스캔을 해봐야겠어.’
그가 확인을 위해 체내의 스캔 시스템을 가동하려던 그때, 에텔드리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 저 입마개를 제거해주실 수 있나요?”
“제가 하겠습니다.”
밀리오가 대답하며 말파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마개를 제거한 그 순간.
갑자기 말파스의 머리가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
밀리오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현상, 이전에 로한과 같이 수도로 이동할 때 겪었던 적이 있다. 분명, 자폭하려는 현상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실드 마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너무 빨…!’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강력한 폭발이 실내 전체를 뒤덮었다.
얼마나 파괴력이 강했는지, 강력한 보호 마법 룬어가 가득 새겨진 3중 철창이 1/3이나 박살이 날 정도였다.
이 정도 파괴력이라면 모두 크게 다치고, 최소한 밀리오를 포함한 몇 명은 죽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모두 무사한가?”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후우, 살았다!”
먼지가 걷힌 후 모두 사상자가 있나 서로를 확인해 보았지만, 놀랍게도 한 명도 다친 사람이 없어보였다. 심지어 가장 말파스와 가까웠던 밀리오조차 멀쩡한 모습이었다.
‘내가 왜 멀쩡하지?’
그는 이유를 바로 깨달았다.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 신성력 때문이었다. 그 신성력의 주인은 바로,
“아, 성녀님! 정말 감사합니다!”
밀리오는 바로 자신의 뒤에서 강렬한 신성력을 뿜어내고 있는 에텔드리다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런데, 에텔드리다가 고개를 젓는다.
“저한테 감사해야 할 게 아니에요.”
“네? …아!”
그제야 밀리오는, 에텔드리다의 신성 보호막 앞에 또 하나의 푸른 보호막이 씌워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밀리오를 포함, 일행 전체를 뒤덮고 있는 푸른 보호막의 주인은,
“로한 님이셨군요!”
밀리오의 반가운 외침에 로한은 작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보호막을 치우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미리 스캔하길 잘했어. 정말 시뇌충에 지배당하고 있었다니.’
방금 전 스캔을 통해, 로한은 말파스의 뇌핵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시뇌충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확인한 순간 밀리오가 막 말파스의 입마개를 제거했고, 동시에 시뇌충이 반응해 버렸다. 그 순간, 로한은 반사적으로 에너지원을 보호막으로 전환해서 사용했던 것이다.
그가 시뇌충의 존재를 1초라도 늦게 확인했더라면, 그래서 반응이 늦었다면 여기 있는 이들 중 일부가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신성조사단이 다쳤다면, 그 순간 국왕인 필리프의 골치가 매우 아파졌을 것은 분명했다.
‘누가 뇌핵을 시뇌충으로 바꿔 넣은 거지?’
속으로 의아해하는 로한. 하지만 그는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에텔드리다. 그녀가 자신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워프진 앞에서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새삼 달라진 눈빛으로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