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그날 오후.
로한 일행은 전원 무사히 아로엘 성으로 귀환했다.
정말 엄청나게 위험한 원정이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마차가 터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금은보화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드래곤!
그것의 시체는 한낱 금은보화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값어치가 있는 전리품이었다.
드래곤 하트, 드래곤 비늘, 드래곤 본 등이 얼마나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지는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세 살배기 아이도 아는 정보니까.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군. 드래곤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말로만 들었지 그렇게 클 줄은 몰랐어. 그 드넓은 레어 안을 꽉 채울 정도라니!”
“난 죽은 거 알고 있는데도 그렇게 무섭더라. 금화 옮기는 내내 쫄아 있었다니까? 어후, 아직도 그 눈동자 생각하면 손이 떨려.”
“아직도 꿈같네그려. 허허허….”
마차에 금화를 한가득 싣고 귀환하는 일행들의 표정은 아직도 상기되어 있었다. 일행들 입장에서는 방금 사망한 따끈따끈한 드래곤의 시체를 보는, 정말 금화 만 개로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을 얻은 것이었다.
현재 대륙에서 실제로 드래곤을 목격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진짜 많이 쳐줘도 10명 이상도 안 되지 않을까? 목격한 이들 중 십중팔구는 죽었을 테니까.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평생 안줏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다들 수고했다.”
금화를 창고에 모두 옮기기까지 한 뒤에야 로한은 임무 종료를 선언했다.
“오늘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이 장소에 집합하도록 한다. 이만 해산.”
모두 뿔뿔이 흩어진 후, 로한은 단장인 힉스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드래곤 시체를 모두 옮길 만큼의 수레는 있나?”
“충분합니다. 아로엘은 본래 몬스터 사냥이 활발한 영지라, 몬스터 시체를 운반하는 수단이 굉장히 많은 편입니다.”
“좋아. 내일은 나 대신 자네가 병력들을 지휘하도록 해. 운반만 하는 거니까 나까지 필요하지는 않을 거야. 가는 길목에 있는 몬스터들도 모두 처치했으니까 어제보다 훨씬 과정도 안전할 테고.”
“네, 영주님. 맡겨 주십시오.”
“그럼 푹 쉬고, 내일 보자.”
그렇게 힉스까지 내성을 떠났다.
로한은 내성 안으로 들어온 뒤, 아린이 있는 성주 집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린이 말해 왔다.
“드래곤을 처치했더라고요.”
“어.”
아린이 알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같은 인공위성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로한이 드래곤을 때려잡았다는 사실을 인공위성을 통해 몇 시간 전에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힉스 등 일행들의 입을 통해 드래곤을 잡았다는 소식은 아직 널리 퍼지기 전이었다. 적어도 술자리가 시작되는 저녁 시간은 되어야 본격적으로 소문이 퍼지지 않을까?
“결국 드래곤과 거래는 실패했군요.”
“예상은 했어. 드래곤이 탐욕스럽고 포악한 건 전설 속 소설이 아닌 팩트니까.”
조금만 심기가 불편하면 성 하나를 브레스로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 대형 범위 마법으로 주변 생명체들을 무참히 살해했던 역사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떤 미친놈은 ‘감히 한낱 인간의 왕 따위가 나에게 반말을 했다’라는 이유만으로 소규모 국가 하나를 완전히 멸망시킨 적이 있다.
이런 쪼잔한 성격을 보유한 놈들이 순순히 인간들과 마나석 거래를 할 가능성은 사실 지극히 적긴 했다. 어제 출발할 때부터 많이 회의적이었는데, 결국 그렇게 되어버렸다.
“예상대로 그놈은 바로 덤벼들었고, 사살이라는 선택지를 쓸 수밖에 없었어.”
“어땠나요? 오빠 말로는 이 대륙 최강의 생명체라면서요.”
“나도 그래서 좀 걱정을 했는데, 내 생각보다 많이 약했어. 그리고 그것 이상으로 단순하고 멍청했고.”
“멍청했다고요?”
“설마하니, 대놓고 지켜보는 앞에서 폴리모프 마법을 풀 줄은 몰랐지.”
인간형에서 본체로 돌아가는 그 찰나의 빈틈을 로한 정도의 강자가 놓칠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순간 둘의 승부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아마 이후에 전력 공격을 안 펼쳤어도 쉽게 때려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바깥의 부하들이 다치는 변수를 방지하기 위해 굳이 시간을 끌지 않았을 뿐이다.
“결국 드래곤 종족이라는 동맹군 대신 드래곤 시체라는 재료를 얻게 되었군.”
“동시에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칭호도요.”
“아, 그러네.”
드래곤 슬레이어.
예전만큼 압도적인 위상을 가진 느낌을 주는 칭호는 아니다. 헌터라는 직업이 대륙 최고의 직업으로 떠오르면서, 최상위급 포탈 내의 보스를 많이 잡는 사람을 훨씬 더 쳐주는 추세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드래곤 슬레이어다.
역사상 이 칭호를 얻었던 이는 모든 생명체를 포함해서 30명도 되지 않으며, 그것도 거의 다 파티 사냥으로 얻은 칭호다. 로한처럼 혼자서 드래곤을 때려잡은 경우는 그를 포함해 딱 세 명뿐이다.
“드래곤 슬레이어… 이건 소문 퍼지면 사방에서 좀 시끄러워지겠는걸.”
“뭐, 나쁠 건 없잖아요?”
“그건 그래.”
한 영지의 영주가 드래곤을 혼자 때려잡을 만큼 강력하다!
이건 아로엘 영지민들 입장에서는 그 무엇보다 든든한 소식이고, 아로엘을 경계하고 있는 사갈 등 타 국가에는 한층 더 경계를 올려야 할, 꽤 불편하고 성가신 소식일 것이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정말로 빨랐다.
단 하루 만에 테르디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퍼진 것이다.
“흐에엑?”
식사 중이던 이안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드래곤 슬레이어?! 그게 진짜야?”
“네.”
“그것도 혼자서 때려잡았다고?!”
“네.”
“와아! 로한 형님, 내 생각보다 더 굉장한 사람이었잖아!”
“그, 흥분 좀만 가라앉히십쇼.”
앞에서 대답하던 아로엘 성 경비대장, 호튼이 주변 눈치를 보며 이안을 자중시켰다. 그제야 이안은 여관의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소리를 확 낮춘 상태로 이안은 감탄사를 이었다.
“역시 ‘나의’ 로한 형님은 대단해. 처음 만날 때부터 비범하다는 걸 한눈에 딱 깨달았다니까? 성격도 좋아, 얼굴도 잘생겨…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어!”
호튼은 황당해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뒷담화 오지게 까더만?’
“로한, 당신이 뭔데 나와 아린 사이를 가로막는 건데! 이 천하의 나쁜 자식아아!!”라고 외치며 절규하던 게 어젯밤 술자리 일 아니었나?
“크, 이렇게 기쁜 날 한잔 안 할 수가 없지! 드래곤 슬레이어가 탄생한 날에 술을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어?”
“지금 10일째 달리는 중 아니십니까?”
“자, 다들 잔 들어봐요! 오늘도 내가 쏜다!”
이안의 외침에 여관 내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단 한 명,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튼을 빼면 말이다.
‘또 골든벨이야?’
칼슈타인 가문 사람이라 돈이 부족한 적이 없어서 그런가, 이 어린 귀족 자제는 술 마시며 놀 때는 절대로 돈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최근 경비 관리직으로 벌어들이는 돈을 족족 이런 식으로 탕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런 성격이 경비 관리직에는 또 딱이었다.
‘덕분에 성내에서 싫어하는 사람이 없긴 한데….’
이안 특유의 위아래가 없는 친화적인 성격은 영주민과 가장 가까이서 지내는 경비 관련 직종과 정말로 어울렸다.
무려 공작의 친자식임에도 불구하고 평민들과 스스럼없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이안을 영주민들 역시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정말 로한 공작님 말대로인가?’
공작님이 자신을 이안의 전담 경호원 역할로 붙이면서 말씀하신 게 있었다. 이안은 경비 관리직을 그 누구보다 잘 소화할 거라고.
옆에서 지켜본 지 며칠 되진 않았지만, 딱 봐도 이안에게 최적의 직업이라는 게 보였다.
“자, 건배!”
“건배!”
이안의 외침에 사람들이 잔을 들며 합창했다. 이안을 경호해야 하는 호튼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시원하게 술잔을 입에다 들이켜기 시작했다.
소문은 수도, 벨타디아의 왕성에도 빠르게 퍼졌다.
“그게 정말인가?!”
그에게 보고한 고든이 공손히 대답했다.
“예, 폐하. 방금 통신으로 소문이 사실인지를 물어보았고, 모두 사실이라는 대답이 왔사옵니다.”
“허허허… 경사로군, 경사로다! 이 나라에 드디어 드래곤 슬레이어가 탄생하다니!”
참고로 테르디아 500년 역사상 드래곤 슬레이어 칭호를 얻었던 사람은 로한이 유일무이하다.
“20대 초반에 드래곤 슬레이어 칭호를 얻은 이는 역사상 로한이 유일하지 않은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도대체 로한 공작은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20대 젊은 나이에 S급 헌터라는 사실도 놀라운데, 하물며 드래곤 슬레이어라니…!”
놀라워하던 필리프의 표정이 곧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될수록 더 불안해지는구나. 행여 그가 다른 마음을 품으면, 테르디아 전체가 위험해지는 것 아니겠느냐? 이젠 윌리엄 공작이라고 해서 그를 반드시 제압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지 않느냐?”
“그래서 이번에 그의 충성심을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어떤 수로 말이냐?”
“국법에 따라, 로한 공작에게 드래곤 시체의 30%를 왕실에 세금으로 바치라고 명령하소서. 만약 그가 진심으로 테르디아를 생각한다면 기꺼이 폐하의 명령에 따를 것이옵니다.”
그 말에 필리프는 솔깃해했다.
실제로 테르디아의 법에 따르면, 각 영지마다 자치권을 주되 그들이 사냥 및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은 일부를 세금으로 바치게끔 되어 있다.
드래곤도 엄연히 몬스터의 일종이니, 당연히 세금으로 일부를 바쳐야 하는 게 법률상 맞긴 하다.
“옳거니! 그런 법이 있었지! 잠시 잊고 있었군.”
공짜로 드래곤의 신체 재료를 얻게 된다! 즉, 그것은 왕실의 금고가 또 한번 두둑해진다는 걸 얘기한다. 필리프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한 가지 걱정만 빼면 말이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불만을 품지는 않겠지?”
“그렇게 속 좁은 위인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옵니다. 그리고 회유책으로 추가 지원 물자를 제공해 준다고 조건을 달면 거절하기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지금 아로엘에는 기초적인 물품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옵니다.”
“음… 좋소. 곧장 통신을 통해 로한에게 어명을 전달하도록 하게.”
“네, 폐하…. 으음….”
대답하던 고든이 갑자기 힘이 빠진 듯이 절로 신음을 질렀다.
필리프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은가, 고든?”
“괜찮사옵니다.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고든 공작은 힘겹게 허리를 숙인 뒤, 천천히 몸을 돌려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건드리면 툭 하고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문이 닫히자마자 필리프는 딱한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그나저나, 저 고든 공작의 불면증은 어떻게 치료해야 할꼬?”
고든이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왕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게 벌써 보름을 넘어가고 있다.
그간 불면증에 용하다는 모든 방법을 다 써보았다. 최근에는 그의 건강을 염려한 필리프가 직접 왕족만 전담하는 내의원들을 모두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고든의 불면증을 치료하지 못했다.
불면증의 후유증으로 인해 고든은 안 그래도 말랐던 몸이 이제는 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게 야위어 버렸다.
안 그래도 관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터라 제일 건강이 안 좋은 편이었는데, 이제는 당장 내일이 걱정될 지경까지 왔다.
“이번에 로한이 세금을 바치면 성국에 특별히 연락을 해야겠군. 드래곤의 재료라면, 돈 좋아하는 그 탐욕스러운 신관들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치료약을 보내주겠지.”
무려 드래곤 재료라는 귀한 물품을 아낌없이 치료약으로 지원해줄 수 있을 정도로 고든은 왕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 누구보다 왕실과 가까운 궁내부장관이라는 이유가 두 번째요, 그 누구보다 왕실에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인다는 이유가 첫 번째이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